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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하는 유전자
요아힘 바우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사랑을 위해 태어난 사
람’이라는 노랫말이 있다. 작곡가 프리드리히
홀랜더가 만든 노래의 한 구절로, 베를린 출신
의 세계적 배우이자 가수인 마를레네 디트리히
덕분에 전 세계에 널리 알려졌다. 이 노랫말은
언뜻 과장되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핵심을 찌르
고 있다. 인간은 하루 24시간 내내 사랑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일에도 전념해야 하고 휴식
도 필요하다며 누군가 이의를 제기한다면, 틀
린 말은 아니라고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의학적
사실이라고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고 또 사랑할 수 있는 사람만이 제
대로 일하고 제대로 쉴 수 있다. 사랑 없는 삶
을 영속적으로 살게 된다면 일을 잘 해내기 위
해 필요한 동력을 언젠가 잃게 된다.
인간에게 휴식이 꼭 필요하다는 사실은 이
론의 여지가 없다. 차분히 쉴 수도 없고 제대로
잠을 잘 수도 없다면, 많은 경우 사랑과 직접
적 혹은 간접적으로 연관된 문제로 인한 것이
다. 인간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사랑을 위해 태
어난’ 존재라는 주장에 대해 나는(우리가 아직 살
펴보지 않은 근거들을 바탕으로)
과학적인 관점에서 반대하지 않으려고 한다.
물론 홀랜더의 노래 뒷부분에 이어지는,
사랑을 제외하면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는 구절도 마찬가지
다. 왜냐하면 사랑은 인간을 제약하지 않으며,
인간을 이루는 모든 것에 대한 문을 활짝 열기
때문이다. 창의성, 의미 있는 일, 노력하려는 의
지, 선을 향한 책임과 참여, 그리고 무엇보다
생을 즐기는 데 있어서의 문을 열어준다. 마를
레네 디트리히는 이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본보기
였다.
그렇다면 마지막 질문이 하나 남는다. 사랑
이 아닌 공격성은 우리 인간과 어떤 관계일까?
이 부분은 나중에 다시 언급하겠다.
사회적 연대를 위한 기본 토대
우리가 왜 사랑 없이 살 수 없고 건강한 삶을
유지하지 못하는지, 공격성이 어떤 목적을 가
지고 있는지는 현대 신경과학이 새로이 밝힌
지식을 통해 이해해볼 수 있다. 인간에게 삶에
대한 의지는 선천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삶
의 의지는 부유물을 수면 위로 올리는 부력처
럼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우리로 하여금
아침마다 침대에서 일어나도록 도와주고, 일상
의 도전과 난관에 대비하도록 하고, 생의 즐거
움을 느끼도록 만드는 모든 에너지는 신경생물
학적 토대를 가진다.
이런 에너지는 두뇌 중앙에 있는, 이른바 중
뇌에 자리한 신경세포 연결망에서 도파민, 베
타-엔도르핀, 옥시토신이라는 전달물질을 생
성할 때에만 생겨난다. 매체에서는 이런 신경
전달물질을 ‘행복전달물질’ 또는 ‘행복호르몬’
이라 칭하기도 한다. 도파민은 인간에게 정신
적 에너지를 부여하며 베타 -엔도르핀은 고통
을 경감시켜준다. 옥시토신은 친밀감과 신뢰를
느끼게 하며, 공감 능력을 촉진시킨다. 이러한
전달물질이 생성되는 신경망을 ‘동기 체계’ 또
는 ‘보상 체계’라고 한다.
사람 사이에서 경험한 애정과 사랑은 이러한
체계를 활성화시키고 앞서 말한 신경전달물질
들의 생성을 자극해 우리가 좋은 감정을 느끼
도록 하며 생기를 일깨운다. 반드시 늘 사랑일
필요는 없다. 온갖 종류의 사회적 유대를 우리
는 일상생활에서 경험한다. 이는 신경세포 연
결망을 활성화시켜 우리 안에 유쾌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즉 보상인 셈이다(그래서 보상 체
계라 불리는 것이다). 편안하고 즐거운 감정은 우
리가 노력해서 얻을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의 동기를 자극한다(그런 까닭에 동기 체계라
고도 한다).
사회적 유대를 향한 욕구는, 특별히 이에 초
점을 맞춰 진행된 여러 연구에서 보여주듯이 유
쾌한 감정에 대한 욕구보다 더 깊은 곳에 자리
한다. 사랑이 재미나 즐거움을 만들어낸다는 사
실은 실로 경이롭다. 그런데 왜 어려운 시절이나
재미없는 시기를 견뎌내야 하는 경우에도 상당
수의 연인 또는 부부 관계가 유지되는 것일까?
우리 몸의 관점에서 사회적 결속은, 특히 어
려운 시기에는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 관계가
의미 없어졌거나 견딜 수 없어졌단 이유로 관
계를 끝내는 것은 몸의 관점에서 보면 의문의
여지 없이 충분히 그럴 만하다. 때문에 버티는
경우만큼이나 다소 성급히 이별하는 경우도 적
지 않다. 하지만 이는 우리를 그리고 주변의 소
중한 사람들을 일회용품처럼 만들 위험성을 품
고 있다. 긴밀한 유대의 상실은 하나하나 엄청
난 힘이 소모되는 사건으로 질병을 유발한다.
나이 든 사람의 경우는 심지어 치매의 출발점
이 되기도 한다.
인간관계에서 풀리지 않는 문제들, 관계의
단절 또는 부재는 우울증을 일으키는 전형적인
(사회심리학적) 요소 중 하나다. 사회적 고립이
나 고독, 또는 애정 관계에서 발생하는 문제들
은 동기 체계를 더 이상 활성화시키지 않으며,
신경전달물질을 분비하게 만들지도 않는다. 삶
에 대한 기쁨은 시들해지고 생에 대한 권태에
까지 이를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주변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관
계 속에서 충분한 즐거움을 느끼며 자신의 연
인이나 배우자에게 만족한다. 반면 인간관계에
서 매번 지속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은
교우나 연인 관계가 거의 한결같이 편안한 상
태와는 먼 곳에 다다르곤 한다. 이런 경우 대부
분은 어린 시절에 겪은 좋지 않은 경험과 관련
이 있다. 즉 초기 아동기라 불리는 유아기에 부
정적 경험을 자주 했기 때문이다.
생애 첫 3년 동안 당한 방치와 냉대, 관계 부
족, 폭력의 경험 또는 다른 식의 트라우마, 예
컨대 장기간의 병원 입원이나 고통스런 치료
과정 등으로 인한 정신적 외상은 동기 체계를
지속적으로 약화시킬 수 있으며, 이는 좋은 관
계를 맺고 발전시킬 수 있는 능력을 떨어뜨린
다. 이에 속하는 사람은 종종 깊은 무력감을 느
끼며 추진력이 부족하다. 스스로 무가치하다고
느끼며 타인에게 다가가는 것을 어려워한다.
이와는 달리 만 세 살을 넘긴 아이가 애정 결핍
이나 방치를 경험하면 동기 체계가 과잉 활성
화된다. 이런 아이들은(그리고 이들이 자라 성인이
되면) 끊임없이 ‘킥(Kick)’을 필요로 한다. 흥분
이나 자극 같은 킥이 도파민을 분비해주는 탓
으로, 킥이 없으면 이들은 안정을 찾지 못한다.
인간관계를 맺거나 지속하는 데 어려움을 겪
는 사람들은 삶에 대한 만족감이 지극히 낮다.
이들의 동기 체계는 늘 자기 능력치의 하한선
을 계속해서 달린다. 조만간 수명이 다할까 싶
어 매 순간 걱정해야 하는, 털털거리는 자동차
에 올라탄 것처럼 말이다. 이런 경우 자신의 동
기 체계에 다른 대안으로 자극을 가할 위험이
높아진다. 즉 인간관계라는 영역에서 혼란이나
단절이 일어나 제대로 이루지 못한 것을 물질
이나 대체 행동으로 메우려는 것이다. 달콤한
간식거리에 집착한다거나 디지털 장난감에 몰
두하는 아이들이 그렇다. 실제로 설탕은 동기
체계를 자극하며 디지털 단말기도 마찬가지다.
청소년과 성인의 경우 자신들의 가라앉은 동
기 체계를 알코올로 고무시키며, 코카인 같은
약물로 자극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두 가지 모
두 도파민 생성을 강력하게 활성화시키는 물질
이다. 인류 역사에서 비교적 최근에 발명된 돈
도 그 사이 동기 체계의 막강한 자극제로 자리
잡았다. 돈은 약물 같은 위험성을 품고 있다.
왜냐하면 착각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돈
으로 인정, 격려, 애정 같은 부족한 것을 대체
할 수 있다는 착각 말이다. 성적 행위도 마찬가
지다. 성행위는 사랑이 주는 관능적인 보너스
일 때 가장 이상적이다. 그런데 진정으로 사랑
을 할 줄 모르거나 그러한 관계가 결여되면, 섹
스가 중독성 강한 약물을 대체하게 되며 섹스
중독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이는 인터넷 덕분
에 널리 확산된 정신적 질환 중 하나가 되었다.
차별로 인한 고통
인간 사이의 유대나 사랑을 ‘선’이라고 한다
면, ‘악’은 무엇일까? 공동체적 결속 또는 사랑
이 부족하면 그저 삶에 대한 긍정적 감정만 해
를 입는 것이 아니다. 오랫동안 지속된 고독이
나 사회적 고립은 면역체계를 약화시키며 질병
의 위험, 무엇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의 사망 위
험을 높인다.
인간관계 속에서 경험한 소외와 차별은 적어
도 독만큼이나 유해하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의
도적인 무시를 당하며 그 사이에 끼지 못하고,
그들끼리의 끊임없는 대화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은 고통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아마 생생히
기억할 것이다. 어린 시절 운동장 가장자리에
밀려나 있었을 때의 감정을, 같이 놀자는 청이
차갑게 거절당하던 경험을 말이다. 부모나 교사
가 고의로 외면하며 처벌을 가했을 때의 느낌은
또 어떠했던가? 많은 아이가 처벌의 일환으로
몇 시간 혹은 하루 종일 부모와의 대화를 거부
당한 경험이 있다. 체벌처럼 끔찍한 상황은 자
녀 교육에 있어 절대 가서는 안 되는 ‘금지’ 구
역에 속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와 같은 일
들을 종종 저지른다. 어른들에게도 말이다.
가정이나 일터에서, 또는 사교모임에서 우리
는 늘 반복적으로 의도적이게 없는 사람 취급
을 당한다. 환영받지 못하고 ‘단절’되며 소외되
는 상황을 누차 겪는다. 이런 차별과 무시의 경
험은 인간을 깊은 충격과 슬픔에 빠뜨린다. 일
을 벌인 가해자를 좋아하지 않거나, 가해자의
관심과 애정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더라도 말이
다. 왜 그럴까?
사회적 소외는 단지 어떤 휘발성의 부정적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데서 그치지 않으며, 인
간의 몸에 생물학적 흔적을 남긴다. 나오미 아
이젠버거와 매튜 리버먼은 의도적인 무시나 소
외의 경험이 ‘일반적으로’ 인간에게 신체적 고
통이 가해질 때 활성화되는 신경망을 마찬가
지로 활성화시킨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신체적
고통은 통증 신호가 뇌로 전달된 다음(이 신호가
들어가는 입구는 시상이다), 뇌의 두 곳에 기록된
다. 인간이 경험한 신체적 통증은 체성감각 피
질에 새겨지고, 고통의 경험은 전방 대상 피질
을 활성화시킨다. 신체적 고통뿐만 아니라 사
회적 소외나 거부 또는 차별도 ACC를 활성화
시킨다. 따라서 놀이터나 가정에서 혹은 유치
원이나 학교에서 소외된 아이들이 느끼는 것
은, 일터에서 집단 따돌림을 당하거나 모임에
서 무시와 차별을 당하며 타인과 ‘단절된’ 사람
들이 느끼는 것은 모두 고통이다.
고통은 공격성을 낳는다
고통을 겪을 때 우리 몸은 방어 반응으로 대
응한다. 공격성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공
격 욕동’이라는 것은 없다. 이 점에 있어선 욕
동의 개념을 만들어낸 정신분석의 창시자인 지
그문트 프로이트도, 공격성의 관점에서 본능을
관찰한 동물학자 콘라드 로렌츠도 틀렸다고 할
수 있다. 공격성은 불안이나 공포처럼 진화로
생겨난, 필요에 따라 불러낼 수 있는 감정 및
행동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의 기능은 인
간 유기체를 신체적 습격과 혐오스러운 경험으
로부터 보호하는 데 있다.
고통은 공격성을 낳는다. 소외당했거나 굴욕
적인 경험을 한 아동 및 청소년들이 다른 이들
보다 더욱 공격적인 성향을 보이는 것은 이 때
문이다. 즉 고통이 분노로 전환된 것이다. 인간
은 자기 안의 공격성이나 분노를 감지하는 법
을 배워야 한다(가능하다면 일찍이 유년기에 습득
하는 것이 제일 좋다). 이를 하나의 신호로서 진지
하게 받아들이고, 사소하게 넘기지도 말고 미
심쩍은 것으로 치부하지도 말며, 억제하는 법
을 배워야 한다.
공격성이 발휘되는 곳에서 공격이 되풀이된
다. 사람들(대부분 아이들)은 분노의 감정 때문에
처벌을 받게 되면, 그 지점에서 끓어오른 공격
성은 쉽게 ‘자신’을 향하게 되고, 불안이나 우
울로 이어진다. 공격성은 혈액 순환을 촉진시
키며 혈압 상승을 불러온다. 모욕을 받아 높아
진 혈압은 상처 입은 감정이 적절한 방법으로
해소될 경우 다시 정상화된다. 그렇지만 마음
의 상처나 모욕이 해소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
으면 이로 인해 고혈압이 될 수 있다.
‘좋은 삶’의 전제 조건
사회적 수용과 인간 사이의 연대, 애정이 없
으면 생기도 활력도 동기부여도 삶의 기쁨도
없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가 분명해진다.
사회적 공존을 잘 이루는 것이 인간의 운명임
을. 지금껏 우리가 이야기한 내용을 바탕으로
‘좋은 삶’을 정의하자면 에우다이모니아적 삶
의 태도와 부합한다. 그리고 이는 건강에 이로
운 유전자 활동 패턴을 낳는다.
서로를 무시하고 경시하는 일, 사회적 소외
와 차별은 우리 자신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에
게도 해를 입히는 파괴적인 과정이다. 이는 가
족같은 작은 집단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강
자의 법칙이 통용되는 거대 사회단체에서도 나
타난다. 이를테면 미국처럼 사회적 소외와 차
별로 불이익을 당하는 집단이 존재하거나, 러
시아나 중국처럼 억압적인 지배질서가 강하고
소수 민족을 향한 폭력이 자행되는 곳도 있다.
유럽은 대안적인 구상을 그리고 있다. 공정한
사회 참여와 분배로 모두가 ‘좋은 삶’을 실현하
고 삶의 만족을 누릴 수 있는 평화를 이루려고
시도 중이다.
사회적 소외와 차별은 통증 체계에서 다뤄
지며 공격성에 불을 붙인다. 공격성은 불안 및
공포를 느낄 때처럼 불안 중추인 편도체의 활
성화를 불러온다. 따라서 편도체를 ‘공격 중추’
라고 불러도 무리는 아니다. 불안 중추의 활성
화 정도는, 온몸에서 진행되며 은밀하게 ‘레이
더망 바깥을 날아다니는’ 위험하고도 만성적인
염증수준과 상관관계가 있다. 이런 염증은 심
혈관 및 암 질환, 치매의 출발점이 된다. 이 모
두가 ‘좋은 삶’으로 가는 길도, 인간의 정해진
운명도 아니라는 사실은 너무나 분명하다.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내일의 세계로
향하는 우리의 길은 무엇에 달려있을까? 의학
자 및 신경과학자들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
는지’와 같은 철학적 질문보다는 주어진 생물
학적·심리적·사회적 조건을 고려하여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더 초점을 맞춘다. 철
학적 접근과 의학적·심리학적 접근은 상호 배
타적이지 않다. 만일 양측의 관점이 서로 어울
리지 않고 어긋났다면 상당히 불행했을 것이
다. 하지만 다행히 그래 보이지는 않는다. 동기
부여와 사회 참여, 삶의 만족은 우리가 서로 관
심을 기울이고 협력하도록 북돋는다. 우리가
서로에게 귀를 기울이고 감정과 생각을 자유로
이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상호 간에 제공하면,
이는 자연스레 동기 체계의 활성화라는 결과로
이어진다.
우리가 앞서 살펴본, 소외와 무시가 미치는
치명적인 영향은 특히 자원이 부족한(애정과 관
심이라는 자원도 빈약한) 세계에선 절대 피할 수
가 없다. 강렬한 차별의 경험은 이로 인해 공격
성이 높아지면서 통증 중추에 영향을 가하지
만, 자신이 속한 사적 영역에서 친구나 구성원
으로부터 충분히 그리고 확실히 보호받고 있다
고 느끼면 그 위험성이 차차 완화된다. 긴밀한
인간관계는 모든 종류의 고통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준다.
사회적 소외는 심리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경제적 차원에서도 일어난다. 거대한 부의 세
상에서 빈곤은 그저 정치적·사회적 폐해에서
그치지 않는다. 상대적 빈곤에 처한 사람은 불
이익과 차별 대우를 당했을 뿐만 아니라 사회
적 소외를 경험했다는 뜻이다. 인간의 두뇌는
공산주의적이지 않으며 차이에 관대하다. 하지
만 어느 정도까지만 허용한다. 만약 부유한 사
람들이 결핍에 시달리는 다른 이들을 위하여
더 많이 갖는 것을 포기한다면, 이는 한 연구결
과에서도 나와있듯이 (사회적으로 불이익을 당한)
빈곤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소유를 포기한 부유
한 사람들에게도 행복전달물질이 분비된다. 따
라서 에우다이모니아적인 ‘좋은 삶’에는 최소
한의 사회 정의도 포함된다.
요약하면 이렇다. 인간은 개인적 관점에서는
의미 지향적 삶을, 사회적 관점에서는 사회 친
화적 공존의 삶을 살도록 정해진 존재다. 이 둘
이 합쳐진 것이 바로 ‘좋은 삶’이며, 다르게 표
현하면 ‘인간성’이라 할 수 있다.
요아힘 바우어의 『공감하는 유전자』
(장윤경 옮김, 매일경제신문사, 2022)
요아힘 바우어(Joachim Bauer, 1951~)
신경과학자이자 내과 의사 및 정신과 의사. 1951년 독일 튀빙겐 출생으로 분자생물학과 신경생물학을 전공하였다. 내과뿐만
아니라 정신과에서도 전문의 과정을 밟고 교수 자격을 취득(하빌리타치온)하였으며, 프라이부르크 대학병원 심신의학과 과
장으로 재직했다. 저서로 『왜 우리는 행복을 일에서 찾고, 일을 하며 병들어갈까』, 『협력하는 유전자』, 『공감의심리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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