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9.25.수요성령집회 설교
*본문; 요일 2:1~6
*제목; 요한일서(3) 구원받은 이후의 삶
“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2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3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4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5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6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요일 2:1~6)
1. 지난 주 이야기, 빛 가운데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
지난 주 수요일에 “빛 가운데 살아가라”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것의 의미는 힘도 없이 티도 없이 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이 이야기는 항상 성령과 말씀 앞에 서서, 자신을 고백하고 회개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회개가 믿음입니다. “죄짓고 회개하고, 죄짓고 회개하고”를 반복하는 것 같지만, 결국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의로 더 가까이 가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말씀 앞에 정확하게 서지 않고, 말씀이 비추시는 어리석은 죄를 고치지 않고, 이제는 죄짓는 것이 무감각해져버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의롭게 살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날마다 회개할 수는 있습니다. 이 회개를 통해서 하나님의 의로 점점 더 가까이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빛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2. 성도의 견인
그러나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회개해서 우리의 죄가 용서받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우리는 다시 동일한 죄를 짓습니다.
우리가 죄용서함을 받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통해서입니다. 이를 믿는 자마다 의롭다함을 입게 되고, 구원받고 천국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용서는 우리의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의 죄까지 다 사하실 수 있는 강력한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에는 능치 못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를 신학적 용어로 “성도의 견인”이라고 부릅니다. 성도가 바로 살고 의롭게 살아서가 아니라, 이끄시는 성령님을 통해서 의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착각하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리스도의 죄사함의 능력이 있으니, 우리는 죄를 마음대로 지어도 됩니까? 구원파의 이야기입니다.
이런 분들에게 묻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우리가 이렇게 죄지으라고 허락하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제 죄사함을 얻었으니,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허락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봅시다.
“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요일 2:1)
그리스도의 보혈과 모든 성경은 우리의 죄 사함을 선포하지만, 이는 “다시는 죄를 범치 않기 위함”입니다. 또한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5절’입니다.
“4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5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요일 2:4~5)
죄 사함받은 자들은 이제부터 마음대로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그때부터 말씀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사랑받은 자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받은 자, 그래서 성령을 허락받은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필립 켈러의 <목자가 본 시편23편>이라는 책에 보면, 파키스탄을 거서 겪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곳에서 그는 큰 폭풍우와 번개를 만나 더 이상 길을 갈 수가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주변에 있던 아주 허름한 오두막의 주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 곳에서 폭풍우를 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너무 낮고 좁았습니다. 억지로 몸을 굽혀 기듯이 들어갔더니, 그 안에서는 악취가 진동합니다. 추위를 이기기 위해 피운 난로에는 짐승의 똥으로 만든 연료를 태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메케한 연기가 가득하고, 여기 저기 짐승이 똥들이 그대로 있습니다. 그리고 비가 왔기 때문에 빗물이 스며들어 흙바닥은 질척거립니다.
‘이들은 어떻게 여기서 잘 수 있을까? 아 폭풍우만 아니라면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하는 도중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얘야, 내가 있는 너의 마음이 딱 이런 모양이다.’
그 때 필립은 너무나 놀라며, 이윽코 눈물을 흘리며 회개했다고 합니다.
우리 마음은 이렇습니다. 고백으로 성령님이 좌정하고 계신데, 성령님은 여전히 우리 안에 썩은 악취를 풍기는 죄냄새를 견디고 계신 것입니다.
여기에 죄를 더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일입니다. 죄사함받은 자가 더 말씀대로 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3. 왜 우리 안에 들어오셨나?
그러면 주님은 왜 이토록 더러운 내 마음에 오시려 하십니까? ‘3절’입니다.
“3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요일 2:3)
우리고 하나님을 더 분명히 알게 하시려고 그런 것입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야다”입니다. 경험하여 아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서신의 표현대로 하면 “사귐”을 위해서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고백을 통해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 안에 좌정하셔서 우리와 사귐을 가지셔서 피상적으로가 아니라 하나님과 깊은 사귐을 통해서 주님을 알고 경험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3절’을 보면 이 사귐은 오직 “주의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가능하다고 분명히 못박고 있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은 이제부터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그래서 완전한 사람이 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 수도 없습니다.
다만 이를 통해 말씀 가운데, 말씀대로 역사하시는 하나님과 사귐을 가지게 하시고, 그 사귐으로 은혜와 평강을 경험하고 누리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이 말씀을 분명히 기억하고, 말씀을 지키는 일을 선택이 아니라 필수사항이요, 우리 영혼의 행복을 위해 가장 중요한 일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첫댓글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은 이제부터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그래서 완전한 사람이 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 수도 없습니다. 다만 이를 통해 말씀 가운데, 말씀대로 역사하시는 하나님과 사귐을 가지게 하시고, 그 사귐으로 은혜와 평강을 경험하고 누리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이 말씀을 분명히 기억하고, 말씀을 지키는 일을 선택이 아니라 필수사항이요, 우리 영혼의 행복을 위해 가장 중요한 일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