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 읽기] [62] 당신의 모호한 눈동자에 건배
숨길 수 없는 게 사랑이라고들 한다. 사랑의 눈빛과 말씨, 표정과 행동은 특별하다. 연인들이 발산하는 정보는 낯선 이를 대할 때의 경계하는 눈빛이나 경쟁하는 동료에게 업무를 공유하는 말소리와 확연히 구분된다. 그런데 이런 걸 잘 판별해 내려면 경험치가 필요하다. 모르는 사람을 경계해야 하는 환경과 경쟁적인 업무에 대한 스트레스, 연인과의 특별한 교감의 경험이 많은 사람이라면 그 차이에 더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다. 감정도 학습되기 때문이다.
안옥현, 이 뉘앙스에서 저 뉘앙스 사이를 찾아 헤맨다_보영, 2019.
안옥현 작가는 감정을 매개로 인간의 다면성을 드러내는 작업을 해왔다. 그의 초상 사진은 타인의 슬픔이나 친밀감, 열정 등의 정서적인 상태가 얼마나 공감될 수 있는지를 실험한다. ‘사랑에는 이름이 없다’(2018~2019) 연작에서 작가는 사랑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는 타인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게 만든다.
자신의 정서적 경험을 표출하도록 요청받은 주인공들은 카메라 앞에서 자신에게 너무나도 절실하고 소중한 이야기들을 온몸으로 쏟아 놓았다. 문제는 사진이다. 움직이지도 않고 소리를 들려주지도 않는다. 사진 속 주인공에게 질문을 할 수도 없다. 조용히 사각형 프레임 안에서 단서를 탐색해 본다. 무언가 말을 하고 있는 듯한 입, 허공을 바라보는 눈빛.
자신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여주면서 안옥현은 모호하고 고정되지 않은 감정 자체를 직면하게 한다. 작품 속 얼굴은 무수히 많은 단서를 숨김없이 보여주지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정서적인 상태로 읽히기를 거부한다. 어쩌면 이 지점에서 작가의 실험은 완성된 것이다.
생존만을 위해선 표정을 빨리 구분하고 판단하는 게 유리하다. 나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를 즉시 판단하고 가까이할지 멀리 도망갈지를 정해야 하는 수렵 시대의 인류는 그렇게 살아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미묘한 정보를 오랫동안 곱씹는 것도 섬세한 문제 해결 방식이 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사랑이냐 증오냐로 갈라치는 대신 모호함을 견디면서 그 사이를 넘나드는 것이 어른들의 사랑인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