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 패권 아래에서의 부흥
이란 고원에서 일어나 바빌로니아를 정복한 페르시아 제국의 시조 키로스 2세 시절, 페니키아가 어떤 정치적 상황에 놓여있는 지를 알려주는 기록은 아쉽게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공물을 바쳤던 왕들의 명단 중 ‘북쪽 바다(지중해)의 궁전에 사는 왕’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기록이 있어 자발적으로 공물을 바치고 키로스의 패권 아래 들어갔던 것으로 보인다. 페르시아 제국에 정식으로 편입된 시기는 학자들마다 의견들이 다르지만 키로스의 후계자 캄비세스가 기원전 525년 이집트 원정을 시작하기 전에는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헤로도투스의 기록에 따르면 티레가 제공한 함대는 나일 강 삼각주 공격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페르시아로서는 이 덕분에 멤피스 공략의 결정적인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결국 페르시아는 이집트 정복에 성공하고 아시리아에 이어 두 번째로 전 오리엔트를 통일하는 위업을 이루는데, 아시리아와는 달리 두 세기나 유지하는 데 성공한다. 페르시아는 페니키아의 공헌을 잊지 않았다. 새로 정복한 동지중해 일대를 지배하기 위해서는 페니키아의 해군과 해운력이 필수적이었지만, 그들은 바다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경제지향적인 페니키아 인들의 성향은 제국의 패권에 위협이 될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페니키아의 도시들은 이렇게 제국의 행정구역 내에 속하기는 했지만 실질적으로 속국이라기 보다는 동맹국에 가까운 지위를 누렸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공물과 세금을 바쳤는데, 이 양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려주는 자료는 역시 아쉽게도 남아있지 않다. 다만 역사 기록을 보면 그들의 함대를 페르시아가 마음대로 사용했으니 이런 군사적 공헌을 금전적 의무 대신 상쇄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아주 부담이 가는 수준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페니키아는 이렇게 페르시아의 패권 아래 제2의 전성기에 가까운 호황을 누릴 수 있었다. 아시리아 이전에는 여러 나라로 갈라져 있어 기록이 없어 알 수는 없지만 통행세를 많이 냈을 것이고, 군국주의적 패권국가인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 시절에는 무력충돌은 물론 무거운 세금을 강요당했지만 그런 속박에서 벗어났기 때문이었다. 유대인들의 해방이 상징하듯 페르시아의 관용은 ‘고대의 이코노믹 애니멀’ 페니키아인에게 날개를 달아준 셈이 되었다. 어찌 보면 실크로드를 완전히 통일한 몽골제국 아래 경제적 실권을 장악한 위구르 인들을 연상하게 한다.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간 유대인들이 반드시 해야 할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에도 그들의 조상들처럼 도움을 준다. <에즈라서> 3장 7절에는 “시돈과 티레인 들에게 마실 것과 기름을 주어, 페르시아 왕 키루스가 그들에게 허가한 대로 레바논에서 백향목을 베어 바닷길로 야파까지 가져오게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페르시아 시대의 페니키아 도시들 중에서 가장 잘 나갔던 곳은 티레가 아니라 시돈이었다. 일단 티레는 네부카드네자르의 13년 포위로 입은 타격에서 쉽게 회복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페르시아 총독이 머무르는 곳도, 군대의 주둔지도, 페르시아 황제의 행궁도 시돈에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시돈의 우위를 알 수 있는 것은 페르시아 황제의 얼굴이 새겨진 은화였다. 이 은화는 페니키아의 도시들 중 시돈만이 발행할 수 있었고, 그들에게 주어진 특권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물론 이 은화는 지금도 다른 페니키아 도시들의 경화에 비해 훨씬 많이 발견된다.
물론 앞서 이야기했지만 내륙 교통로가 훨씬 발달한 시돈이 대제국 시대에 비교우
위를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도 번영의 충분한 이유가 될 것이다. 시돈에서 1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에쉬문 신전 유적은 그 때의 영화를 증명하고 있다. 또한 당시의 최신 발명품인 3단 노선을 가장 먼저 도입한 도시도 시돈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시돈의 3단 노선은 페르시아 해군 (정확하게 말하면 페니키아 해군) 중 가장 빠르고 전투력이 강했다고 한다.
이 글의 시작에서 프랑스인들이 이집트 식으로 만들어진 에쉬무나자르 2세의 석관을 보고 당혹했다고 썼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고고학적 증거들이 발굴되면서 이 의문은 상당 부분 해소되었다. 페르시아 통치 하에서 페니키아와 이집트 사이의 통상은 다시 활발해졌고, 이집트의 수도 멤피스는 해군기지이자 페니키아의 이집트 통상본부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 날개를 달아준 인물이 페르시아의 황제이자 이집트 제27왕조의 2대 파라오, 캄비세스의 후계자인 다리우스 1세였다. 그는 네코 2세가 포기한 나일강과 홍해를 잇는 운하를 건설해 지중해와 페르시아 간 항해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다리우스의 비문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다리우스 왕이 말하노니, 나는 페르시아다. 페르시아 밖에서 나는 이집트를 정복했다. 나는 페르시아에서 시작해 이집트로 흐르는 강의 운하건설을 명했다. 나의 명대로 운하가 만들어졌고, 내가 원한대로 이 운하를 통해 배가 이집트에서 페르시아까지 가게 되었다.”
역시 기록이 부실해 알 수 없지만 자본과 기술을 모두 가지고 있는 페니키아 인들이 한 세기 전 이루지 못한 조상들이 꿈을 이루는 데 참가했을 것이다. 이 운하의 건설로 페니키아의 무역은 더 활발해졌는데, 아카바 만 입구에서 발굴된 페니키아의 비문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페르시아와 페니키아는 이렇게 궁합이 잘 맞았지만 그렇다고 다 잘 돌아가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이집트를 정복한 캄비세스는 매친 김에 카르타고 정복까지 시도했지만 동족을 공격할 수는 없다는 페니키아인들의 반대로 시도하지 못한 적도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