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주에 취해 벌거벗은 노아와 세 아들
노아는 누구이며, 포도주의 취함과 벌거벗은 몸은 어떤 상관 관계를 가졌는가?
물론 노아는 구약성경 하나만 본다면 믿음의 족보를 이어간 일개 족장일 뿐이며
그가 포도농사를 짓고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었다는 것은 말 그대로
그의 인생일대기의 한 부분이며 그 당시 사실적인 인물 노아에 대한 기록이다.
그러나 구약은 오늘 우리시대에서 증거되어져야 할 실상에 대한 예언이요
예표들이기 때문에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은 노아” 가 던져주는 메시지는
하늘의 깊은 뜻을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마치 구약성전에서 피흘려 제사지내졌던
한낱 동물의 피가 실상에서 어마어마한 인류구원의 예수님의 피를 예표했듯이
노아의 행적이 또한 그러하다는 것이다.
노아, 과연 누구인가?
하나님을 일컬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이라고 할 때
이는 삼대의 삼위 하나님을 뜻했다. 즉 아브라함은 일위 하나님이요(성부 여호와),
이삭은 이위 하나님이요(성자 예수), 야곱은 삼위 하나님(성령, 새이름)을 뜻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노아와 그의 아들들 셈, 함, 야벳 중에 함을 제외하고
차례로 노아는 일위, 셈은 이위, 야벳은 삼위 하나님을 뜻했다.
이같이 노아가 창조주요, 믿음의 조상인 일위 여호와를 예표했기 때문에
노아를 아는 것은 곧 여호와를 아는 것이며, 노아를 통해 여호와를 아는 것은
곧 우리의 근본을 아는 것이며, 근본을 알면 우리의 결말까지 필연적으로
알게 되기 때문에 아주 중요하다.
이 세상에 우연이란 없다. 표면적으론 우연같이 보이지만 조금만 천착해 들어가면
모두 필연적인 창조의 프로그램에 의한 역동적인 창조진행의 나날임을
노아를 통해, 즉 우리의 근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다.
노아, 과연 어떤 상태였는가?
노아는 포도농사를 짓고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게 되었는데
이것이 또한 창조의 프로그램으로 필연적임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노아의 포도농사란 일위 여호와 하나님의 인간농사이다. 그 인간농사가 어떠했는가?
물론 인간농사(포도농사)가 잘 되어서 노아는 포도주를 만들어 마시고 취했다.
노아가 포도주를 만들어 마시고 취했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농사에 심취해 있었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농사에 심취해 있었다면, 즉 포두주에 취해 있었다면
왜 벌거벗은 몸의 수치를 보이게 되는가 이다. 술에 취해 있다 할지라도
얼마든지 자기의 정도를 지키며 품위 있게 절제 된 모습을 유지할 수도 있는데
왜 노아는 수치스런 벌거벗은 몸이었는가?
그 인간농사가 일위 하나님의 농사이므로 아직 말씀이 전혀 들어가지 아니한
흙으로만 지어진 수준 낮은 자연인 인간농사이고, 그 인간농사의 포도주에
의한 취함은 벌거벗은 수치스런 몸으로 나타남이 된다.
즉 일위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이 아직 말씀을 받지 못해 벌거벗은 몸일 때는
일위 하나님(노아) 자신도 벌거벗은 몸으로 나타나게 되는 까닭에서다.
하나님의 창조의 첫 시발은 빛과 흑암이 혼재된 카오스에서 출발하셨는데
이는 창조의 시작점에서 하나님 자신이 카오스였다는 뜻이고
카오스란 벌거벗은 몸이 된다는 뜻이다. 말을 바꿔 다시 말하면
창조의 일위에서(시작점 알파에서) 하나님 자신이 벌거벗은 카오스이므로
인간농사 역시 벌거벗은 카오스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상태와 세상의 창조상태는 언제나 같이 가고 있는 동일한 모습이다.
이와 같이 일위 여호와 하나님(노아) 때는 인류 전체에게 하나님을 알려주는
심령창조는 하지 않으셨다. 다만 일위에서 이위로 진입하는 말미에 인류에 대한
심령창조를 위한 바통을 넘겨주기 위해 초림주에게만 말씀을 주었을 뿐이며
그리하여 하나님을 알려주는 인류의 심령창조는 이위 초림주(아담)에서 시작된다.
따라서 일위 여호와는 오직 인간육신까지만(흙으로만) 지으시는 인간농사이다.
때문에 온전할 수 없고, 온전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인간농사의 심취 중에는, 즉 포도주에 취한 존재상태는 그 자체가
곧 벌거벗은 수치의 몸과 이콜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 좀더 세밀히 들어간다면 초림주에게 들어간 말씀의 생기 역시
비유이므로 초림주를 상징한 아담도 에덴동산에서 그의 아내(복음백성 상징)와
함께 벌거벗은 몸으로 드러났던 것이다. 하물며 그 이전 흙으로만 지어진
일위 때의 창조임에랴, 수치스런 그 벌거벗은 적신을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일위 하나님(노아)의 벌거벗은 몸의 수치는 창조의 진행 노정에서 너무나 자연스런
시대의 필연적 과정일 뿐이다. 창조란 일위에서 끝나는 게 아니지 않는가?
하나님의 창조의 프로그램에서 아직도 이위와 삼위가 만만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누가 그 벌거벗은 몸을 조롱하며 그 형제들에게 고발했는가? 함이다.
함은 좌우편 그 형제들에게 일위 하나님(노아)을 참소한 것이다.
셈은 장자 이위 초림주를 예표하고, 야벳은 차자 삼위 재림주를 예표했으며
그 중간에 있는 함은 참소자 마귀를 상징해서 그 같은 그림이 그려진 것이다.
(마귀는 본디 독립체가 아니고 하나님 자신이 빛과 흑암의 혼재인 카오스로
시작했으므로 마귀도 하나님께로부터 출발하게 되어 노아의 자식 함으로 상징됨)
함이 아버지의 벌거벗은 몸을 벌거벗었다고 고자질 한 것이 왜 나쁜 참소인지
그 예를 어린아이에서 들어볼 수 있다. 아이는 훌륭하게 성장할 꿈나무이므로
왜 배변을 가리지도 못하고, 왜 키도 작은 못난이냐고 비난하지 아니한다.
그런데 함은 엉뚱하게 꿈나무 아이를 비난하고 참소했으므로 악한 마귀이다.
하나님이 인류에게 말씀을 주시기 전 흙으로만 지어진 일위 하나님으로 계실 때
마귀는 애굽에서 샤머님즘 세상을 이루며 샤머니즘의 독무대를 향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초림주가 오시고 재림주가 오실지라도 마귀는 하나님의 큰날의 진리전쟁
아마겟돈에서 결정적으로 머리를 강타당하기 그 이전까지는 계속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을 참소하고 훼방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 속성이므로
여기서 초림주(셈)와 재림주(야벳) 사이의 함으로 상징된 것이다.
마귀 함의 참소를 듣고 셈과 야벳은 아버지 노아의 수치를 감춰드리기 위해
입실해서 가만가만 뒤로 발걸음쳐 옷을 덮어드렸다.
옷을 덮어드렸다는 것은
마귀는 하나님의 수치를 드러내고자 혈안이 되어 발악했을 때, 하나님의
본성으로 오시는 초림주와 재림주는 그 반대의 입장에서 적극적으로 사람들에게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자유케 하는 진리를 반포하심으로써 마귀를 따돌리고
마귀의 비진리를 말리워버리는 사역을 감당하고 있음을 뜻했다.
그런데 왜 노아로부터 함이 저주를 받지 아니하고 함의 아들 가나안이
저주를 받게 되었는가? 가나안 뿐만 아니다. 이스라엘민족이 형성된 이후에
하나님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입성시킬 때 가나안의 7족까지도 멸하라고
명하셨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성경의 키워드인 에덴동산에서 뱀과 뱀의 후손은 모두 하나님의 창조를
가로막는 한 혈통으로서 둘 다 사단인데, 뱀은 사단의 원조요, 뱀의 후손은
사단의 2세인데, 여기서 함은 일위 하나님을 상징한 노아의 수치를
드러낸 옛뱀의 후손 용(적그리스도)을 뜻했다.
하나님의 창조란 일위와 이위와 삼위까지 쉬임없이 업그레이드 되어가는
진행형이다. 일위에서는 인간을 포함한 자연계까지 지으심이요(샤머니즘 세계),
이위에서는 초림주에 의해 자기백성에게 말씀을 비유로 주심이요(물로 한번 낳음).
삼위에서는 재림주에 의해 말씀을 낱낱이 해독해 주심으로 창조를 완성시키신다.
(성령으로 거듭남)
그런데 사단마귀는 하나님의 창조의 발목을 붙잡고 언제나 비방과 참소와
협박과 온갖 간악함으로 도전해 오는 파괴자이므로 미래지향적으로 나아가는
하나님의 창조의 진행을 도무지 인정하지 않고, 그 반대로
과거지향의 반역의 깃발을 흔들어 대항해 온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언제까지나 그러한 사탄의 도발에 당하실 분이 아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초림주(셈)와 재림주(야벳) 사이에서 적그리스도(함) 노릇한
함을 저주하게 될 때에 왜 함을 저주하지 아니하고 그의 아들 가나안을
저주하셨는가?
함을 저주하지 않고 함의 아들 가나안을 저주했다는 것은, 함도 함께 저주한
결과가 된다. 그 이유를 이제 밝히겠다.
적그리스도란 옛뱀의 후손으로서 용인데, 용을 일컬어 자칭 재림주요,
일곱머리 열뿔짐승이요, 666이라고 한다.
666에서 첫자리 6은, 기성교단으로부터 적그리스도왕국에 사로잡혀온 백성이 되고,
둘째자리 60은, 내가 성경을 풀었노라고 주장하는 지상의 자칭재림주가 되고,
(큰환난의 시작 때)
셋째자리 600은, 본격적인 큰 환난날인 아마겟돈에서 내가 온 인류를 먹여
살리겠노라고 주장하는 신세계질서(공중권세잡은 자칭재림주) 가 된다.
여기서 지상의 자칭재림주 60은 함이 되고,
공중권세 잡은 자칭재림주 신세계질서 600은 함의 자식 가나안이 된다.
그런데 이러한 적그리스도 666 왕국을 하나님은 아마겟돈에서 사그리 멸하실
터이므로, 함도 가나안도 모두 저주를 받아 죽게 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다니엘 7:11,12에서 하나님은 만인구원론자 이므로
[그 때에 내가 그 큰 말하는 작은 뿔의 목소리로 인하여 주목하여 보는 사이에
짐승이 죽임을 당하고 그 시체가 상한바 되어 붙는 불에 던진바 되었으며
그 남은 모든 짐승은 그 권세를 빼았겼으나 그 생명은 보존되어 정한 시기가
이르기를 기다리게 되었더라]
라고 기록되었는데 짐승이란 적그리스도 666을 뜻한다. “작은 뿔”은 600이 되고
그 나머지 짐승은 60과 6이 되는데, 여기서 작은 뿔 이라고 하는 짐승만
붙는 불에 던진바 되게 하고, 나머지 60과 6이 되는 짐승은 그 권세만 빼앗기고
그 생명은 보전되어 정한 시기가 이르기를 기다린다고 함으로써, 아마겟돈 때
죽음을 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함에게 돌아갈 죄의 심판을 아직은 멈추고 그 아들
가나안(600)만 저주하신 것이 된다. 60과 6은 그리스도의 천년통치 때
영적 교육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살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하듯이
그들의 반역성향이 천년통치 끝에 다시 드러나게 될 확률이 클 터이므로
그 생명이 보전되어 정한 시기가 이르기를 기다린다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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