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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두리 무장경계로 지샌 밤
증언자 : 강주원(남)
생년월일 : 1960.(당시나이 20세)
직 업 : 대학생(현재 농업)
조사일시 : 1988.11.14
개 요
1980년 당시 전남대학교 2학년에 재학중이던 강주원씨는 5월 19일부터 5월 23일까지 시내 전역을 다니며 시위에 참여한다. 특히 밤에 무장 경계 근무 서는 일을 주로 했다. 부상이나 기타 피해는 없었고, 현재는 무안지역 농민회 활동과 학생운동(목포대학)에 참여하고 있다.
처참한 진압 모습
1980년 당시에 나는 전남대학교 2학년에 재학중이었다. 그때 나는 광주역 근처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는데, 5월 17일은 토요일이라 무안의 시골집(현거주지)에 갔다가 월요일(19일) 광주로 되돌아왔다. 시외버스 공용터미널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 1시쯤 되었을 것이다. 자취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는데, 버스 안의 사람들이 대체적으로 상당히 흥분해 있었다. 계엄령이 선포된 뒤 금남로에 군인이 진을 치고는 데모하는 학생들을 무섭게 때렸다고 했다. 전남대에서도 학생들이 많이 맞았다는 것이었다. 평소와는 뭔가 다른,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다. 한편으로는 궁금하기도 했기에 일단 자취집으로 갔다가 친구와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그 친구(박민기)는 당시 재수생이었지만 집회나 시위에 관심이 많아 그런 쪽에는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이 높아 재수를 하면서도 사회과학 서적들을 자주 읽었다. 나와 만나면 시국에 관한 이야기를 잘 해주었다. 전공도 언론계로 정하고, 장차 양심적인 민주기자에 뜻을 품고 있는 친구였다.
한일은행(금남로) 부근 어느 다방에서 만나기로 하여 4시쯤 시내로 나갔다. 금남로에는 9, 10명 정도의 군인이 한 조가 되어 왔다갔다하는 모습이 보였다. 인도에는 시위하는 사람인지 구경하는 사람인지 많은 시민들이 서 있었다. 우리가 만나기로 한 다방은 이층이었다. 친구를 기다리느라 앉아 있자니 다방 안의 사람들이 수시로 밖을 보며 욕을 해댔다. 그 바람에 궁금해서 나도 밖을 내다보았다.
그 순간 나는 깜작 놀랐다. 학생으로 보이는 남자 5, 6명이 팬티만 입은 채 한 사람당 군인 서너 명씩에게 짓밟히고 곤봉으로 사정없이 두들겨맞고 있었던 것이다. 군인들은 학생들이 맞아 축 늘어지면 팔을 늘여 잡고 질질 끌고 중앙로 쪽으로 갔다. 아직까지 한번도 그렇게 처참한 진압 모습은 보지 못한 터라 나 역시 군인에게 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 친구랑 둘이서 자취집으로 와 술을 마셨다.
조선대 앞 시위에 참여
다음날(20일) 우리들은 10시가 조금 넘어 시내로 나갔다. 뚜렷이 시위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우리가 탄 버스는 금남로로 들어가지 못하고 MBC 방송국 앞에서 내렸다. MBC 방송국 앞 인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들 역시 시위목적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차량이 불통되어 금남로 쪽으로 가려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 있는 것 같았다. 한무리의 사람들이 노동청 쪽으로 몰려갔다. 나도 친구와 함께 그냥 따라갔다. 그런데 노동청에서 조선대 쪽으로 꺾여 들어간 도로, 그러니까 전남공고 담을 주변으로 한 도로에 약 2백여 명의 시위대가 있었다. 뒤에서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들도 많았다. 고교생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
시위대는 '전두환이 물러가라', '김대중씨 석방하라', '계엄령 해제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보도블럭을 깨서 투석을 하였다. 우리도 돌을 깨어 투석을 하면서 시위대열에 참여했다. 전남공고 옥상에서 돌을 던지는 학생들도 있었다. 계엄군은 조대 앞에 진을 치고 있었다. 그들은 최루탄을 쏘지 않고 대신에 돌을 마구 던지면서 10명 남짓 시위대 쪽으로 붸아왔다. 시위대는 흩어졌다가 계엄군이 제자리로 돌아가면 또다시 투석전을 벌이곤 했다. 한참 뒤 시위대 중 일부가 남동 성당 쪽에서 4톤 트럭 1대를 끌어다가 계엄군 바로 앞쪽으로 밀어붙여 불을 질렀다. 특별히 시위를 지휘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형성된 시위대를 몇몇 학생들이 함께 앞에서 지휘했던 것 같다.
시위 도중 이러저리 붸기다가 나는 친구와 헤어지게 되었다. 나는 아침도 거른 상태여서 몹시 배가 고파 전대병원 근처에 사는 이모집으로 식사를 하러 갔다.
오후 늦게서야 데모하지 말라는 이모의 말을 뒤로 하고 자취집으로 갔다. 시위대는 보이지 않았으나 광주역이나 KBS 방송국 등 큰 건물 앞에는 총을 맨 계엄군이 배치되어 있었다.
차량시위 참여 -담양으로
그날 밤 잠결에 요란한 총소리가 들려 일어났다. 집이 광주역과 가까운 곳이라서 그런지 총소리가 몹시 크게 들렸다. 총소리가 그치면 사람들의 달려가는 발자국 소리가 정적을 뚫고 들려왔다. 집 옥상으로 올라가 봤더니 KBS 방송국으로 생각되는 건물이 활활 타고 있었다. 광주역 쪽이 대낮같이 밝았다.
다음날(21일) 오전에 나는 다시 시내로 가려고 집을 나섰다. 그때 길 가는 사람들이 근방 시민들은 효동국민학교 앞에서 집결한다고 했다. 나도 무작정 그쪽으로 향했다. 전남대학교 앞에 가니 군용 지프차 두 대에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나도 그중 한 차에 올라 탔다. 차는 계엄군이 있는 도청 쪽만 제외하고 지산동, 산수동, 풍향동 일대를 누비며 시위를 했다. 50명 가량이 빽빽이 앉아서 '계엄령 해제', '김대중 석방', '전두환 물러가라' 등의 구호와 '훌라송', '투사의 노래', '우리의 소원은 통일' 등의 노래를 불렀다. 앞에서 구호 등을 지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26살 정도의 깡마른 인상에 머리띠(흰색)를 하고 있었다.
곳곳에서 중고생들이 승하차를 하였다. 가는 곳마다 시민들은 박수를 쳐주며 환호했고 음료수, 박카스, 주먹밥 등을 차에 올려주었다. 부녀회 같은 단체의 아줌마들과 상점 아저씨, 약국 주인 등이 다투어 격려를 해주었다. 시위대나 시민들이 모두 기분이 좋아 있었고 전날과 아주 다른 상황이었다. 나는 박카스 외에는 별로 먹지 않았으나 살맛나는 기분에 젖어 있었다.
내가 탄 차는 그렇게 1시간 정도를 돌다가 서방시장 쪽으로 갔는데, 사람들과 차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고속버스가 7, 8대, 시민군 차가 3, 4대 정차해 있었다.
담양으로 무기를 가지러 간다고 했다. 몇몇이 고속버스에 타는 걸 보고 나도 그 쪽 차로 옮겨탔다. 사람들이 대충 정리를 해서 승차하자 출발했다.
교도소가 가까워지자 계엄군이 저지하지 않을까 걱정했으나 별 일 없이 통과할 수 있었다. 교도소 앞에 4명의 계엄군이 있었지만 저지하지는 않았다. 담양으로 향하는 차는 열 대 정도였고 한 대에 50-60명 정도가 타고 있었다.
먼저 도착한 시민들이 준비해 간 쇠파이프로 담양경찰서 유리창을 부수고 무전기와 무기가 될 만한 것들을 차에 싣고 있었다. 순경들은 이미 도망가고 없었다.
내가 탄 차는 나중에 도착했다. 나는 일부 사람들과 주유소로 갔다. 주유소 주인은 어쩔 수가 없었는지 호의적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기름을 내어주었다. 시민들은 통이 있는 대로 기름을 담았다. 그곳에서 나를 포함한 몇몇은 또 다른 주유소로 가보자는 제의에 그곳을 떠났다. 주유소를 물어서 찾아가 기름을 빼내 차들이 있는 곳으로 와보니 차가 이미 떠나고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 지 확실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각자 헤어졌다.
나는 무작정 시외도로로 나왔다. 마침 지나가는 오토바이를 세웠다. 그 지역 사람이었는데 30대 정도의 남자였다. 내가 사정을 이야기하자 처음에는 태워주기를 꺼렸으나 일단 타라고 했다. 그러나 광주로 나오는 담양 큰다리(광주와는 중간쯤 되는 거리) 부근에서 내리게 했다. 더 이상 부탁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마침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4톤짜리 군용 지프차가 있었다. 시민군은 없었고 지역 사람들 몇이서 주위에 서 있었다. 나는 대강 눈짐작으로 알고 있던 서툰 운전 솜씨를 발휘해 교도소 뒷산까지는 왔다. 그러나 혼자라는 생각에 두려워 차에서 내렸다. 논두렁을 통해 걸어오던 중 우연히 일반범으로 교도소에서 막 출감한 사람 둘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그들은 광주 상황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왔다. 그들과 헤어져 나는 혼자서 광주농업고등학교 쪽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용케 지나가는 시민군 차를 만나 시내에 나왔을 때는 오후 2시 반쯤이었다. 내가 탄 차는 전남대 정문으로 갔다. 정문 조금 안쪽으로 군인 4명이 서 있었다. 시위대와 구경하는 시민들이 구분없이 5백여 명 정도 모여 있었다. 전남대 대운동장에는 40여 개의 군인 캠프가 있었다. 시위대는 '전두환을 찢어 죽이자'는 구호와 함께 산발적으로 돌을 던져대고 있었다. 군인들은 최루탄을 쏘기도 하고 시민들이 던진 돌을 집어 시민들 쪽으로 되던지기도 했다.
시위대가 무리지어 흩어졌다. 내가 속한 일부 시위대는 농대 후문 쪽으로 달려갔다. 20백여 명 가량의 시위대가 학교 안으로 들어가자 1백여 명의 군인이 농대 길을 막았다. 우리는 산발적으로 돌을 던지면서 저항을 하다 다시 후퇴하였다.
전남대 앞 로터리 주위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전대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군인 1백여 명이 지키고 있었고, 광주역으로 돌아가는 철로 다리 위에 30여 명의 군인이 서 있었다. 시민들은 조심스럽게 시위를 다시 시작하였다. 사람들이 돌을 던지면서 한꺼번에 몰려가자 갑자기 계엄군 쪽에서 드르륵 총소리가 났다. 순식 간에 시민들은 흩어지고 길바닥에 3명 정도의 어린 학생이 쓰러졌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할 수 없는 상태에서 시민들은 병원으로 옮기라고 여기저기서 외쳤다. 나는 군인을 피해 철도를 돌아서 신안동을 헤메다가 광주역으로 나왔다. 시내로 걸어가는 도중 시민군 차를 만나 타고 나왔다.
무장경계 근무
금남로에는 도청을 경계하여 사람들이 산만하게 운집해 있었다. 그때 예비군복을 입은 한 청년이 나서서 시민들이 총을 맞아 죽어가고 있다면서 무장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무기를 가지러 갈 사람은 차에 타라고 하였다. 5, 6대의 시민군 차에 사람들이 빽빽히 탔다. 나도 그중 한 대에 올라탔다.
차는 일신방직으로 향했다. 중기차로 일신방직 담을 밀어내고, 한쪽에서는 군용 견인차(사고시 차를 끌고 가는)로 담을 부수기도 했다. 담이 부서지자 곧바로 무기고로 갔다. 준비해 간 쇠뭉치 등으로 무기고 자물쇠를 깼다.
무기고에 들어가 얼마 되지 않는 무기들(M1, 카빈총, 총 수리 때 닦는 것, 탄통, 띠 등)을 차에 싣고 도청으로 갔다. 도청에서는 수만의 시민들이 애국가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저녁쯤 집에 가서 쉴 생각으로 중앙로를 빠져나왔다. 효동국민학교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는데 밤에 경계근무를 선다고 했다. 나는 특별한 일도 없고 해서 그곳에 머물렀다. 주먹밥, 음료수 등이 어디에선가 배달되어 왔다. 저녁을 대충 먹고 근무에 설 사람들은 효동국민학교에 남았다.
20대 후반쯤의 청년이 조를 편성했다. 처음에는 15명씩 조를 짰는데, 우리 조의 경우 나중까지 남은 사람이 6명이었다. 우리 조는 조장과 고교생 2명, 공장근로자로 보이는 나보다 한두 살 어린 애들 2명이 전부였다. 나는 어린 공원 2명과 구호남전기 앞에 배치되었다. 길 옆 3층 건물 아래층에서 근무를 섰다. 물론 주인의 허락을 받았다. 3명씩 1시간 간격으로 교대근무를 섰다. 나머지는 사무실에서 잠을 잤다.
우리의 임무는 각자 배치된 곳 주변의 주민통행 금지와 소등을 시키는 일이었다. 주민들은 협조적이었다. 나는 쇠파이프로 무장을 했고, 다른 두사람은 M1 소총을 각각 1대씩 지급받았다. 우리 조의 조장은 운동적 지식이 있어 보이지 않았고 학력수준도 낮은 것 같았다.
그렇게 밤새 근무를 서다가 다음날(22일) 아침 6시 정도에 배도 고프고 뚜렷한 지시도 없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한숨 자고 오후 1-2시쯤 다시 효동국교 앞으로 갔다. 시위차량이 대기해 있다가 시민들이 타면 시내로 향하곤 했다. 나 역시 시민군 차를 타고 시내로 나왔다. 중앙로에는 수십만의 시민이 모여서 집회를 하고 있었다. 나는 아는 사람을 찾아 보려고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한편 도청 앞에서는 주먹밥, 음료수, 김치, 김밥 등을 시민군들이 먹고 있었는데 음식이 남아돌았다. 집회가 끝나갈 무렵 시민군 차(큰 가스차) 한 대에서 카랑카랑한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녁에 계엄군이 시내로 진입할 가능성이 있어 계엄군과 싸울 시민 전투대를 모은다면서 뜻이 있는 시민들은 무진회관으로 모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즉시 무진회관으로 향하는 시민군 차에 탔다. 이미 상당수의 사람들이 모여 조를 나누고 있었다. 앞에서는 지휘하는 사람들 몇이 시민들에게 조를 편성해 주고 있었다. 나는 대충 어느 한 조에 서 있었는데, 조장이 무기를 지급하면서 확실히 싸울 의사가 있느냐고 확인을 하였다. 무기는 다른 사람들과 별차이가 없었다. M1총과 헬멧, 탄띠, 실탄, 수통 등을 주었다. 차 1대에 1개 소대로 구분이 되었다.
내가 속한 소대는 학운동다리로 정해졌다. 거의 해질 무렵에 지정장소에 도착했다. 운전수가 보급담당을 맡고 소대내에서도 역시 조가 나뉘어졌다. 주로 고교생과 학생이 아닌 어린 청소년들이 많았고 대학생으로 보이는 사람은 드물었다.
우리 소대는 모두 30명이었다. 4명씩 나누어져서 경계근무를 섰고, 몇몇 조는 하천을 중심으로 아파트, 주택 등을 수색하는 일을 맡았다. 경계근무를 서는 조들은 4명 중 1명을 책임자로 해서 활동했다. 그들은 나무가 심어진 하천 벼랑으로 증심사 쪽까지 배치가 되었는데 다시 다리 안으로 재배치되었다. 이유는 계엄군이 보일 시 엄호사격을 할 수가 있다고 해서였다. 또한 본부차와 조간의 연락 담당이 두 명 있었고, 소대장은 본부차 안에 있었다. 소대장은 암호(담배-00)를 정해 주었다. 암호는 소대장이 확인을 하러 조별 방문을 하면서 변경된 암호와 지시 등을 하였다. 만약의 경우 움직이는 물체에 대해서는 발포를 하라고 했다.
우리가 조별로 자리 배치되기 전에 학운동 일대 통장, 동장, 아주머니들이 주먹밥과 김치를 가져왔다. 그들은 우리에게 고생한다면서 위로와 격려를 해주었다.
나는 고교생 한 명에 광천공단에 다닌다는 공원 2명과 함께 근무를 섰는데, 조 책임자로 내가 지목되었다. 우리는 서로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서 서로의 신분이나 고향 따위를 알게 되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격전이 있게 될 경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고 본다. 그런 심리가 서로 이야기라도 좀더 친근하게 함으로써 같은 입장임을 확인하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그러면서 형제애 같은 느낌을 가졌다. 밤새 한숨도 자지 않고 일어섰다 앉았다 하였다. 그날 밤은 달빛이 꽤 밝았다고 생각된다. 가끔 향수에 젖어들어 고향의 부모님과 지금껏 이틀 정도 뛰어다녔던 것에 대한 생각들, 친구 민기와의 대화 등이 겹쳐서 떠올랐다. 가끔씩 산 쪽으로 공포를 쏘아 군인들에게 경계하는 의도를 보이면서 우리들 스스로의 두려움을 가라앉히기도 하였다.
다음날(23일) 아침 7시까지 아무 일 없이 근무를 마쳤다. 마지막으로 모든 소대원들을 차에 태워서 증심사 부근 골짜기까지 계엄군이 있는지 수색을 벌였다.
아침밥을 먹으러 다리 옆 한 주민 집으로 갔다. 저녁때 왔던 통장, 동장, 아줌마들이 아침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식사 도중 본부차량이 왔다. 까만 가스차였다. 그들은 대책위원회에서 총을 회수하기로 했다면서 소대장에게 총 회수를 요구했다. 대다수 고교생 소대원들은 크게 반발하지 않았으나 몇몇 사람들이 거부 의사를 보였다. 사람이 많이 죽었고 앞으로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인데 그런 결정이 있을 수 있느냐면서 반발을 하고 나섰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소대장의 "일단은 대책위의 결정에 모든 시민들이 따라야 되지 않겠느냐"는 설득에 끝내는 총을 반환했다. 그러나 나는 앞으로의 전투의 가능성을 생각하면서 실탄 1클립만은 남겨두었다. 그것으로 경계근무는 해체되었다.
거리 청소
오후에 이모님, 사촌누나와 함께 시내로 나왔다. 시내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도청 앞에는 20여 구 정도의 시체가 있었는데, 거의 10대 후반에서 20대의 젊은 사람들로 보였다. 시체들은 입, 눈 등이 흉하게 일그러져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부어 있었다. 대부분이 총상이었다고 생각된다. 복장은 예비군복에 남방 차림 남자들이 두서너 명 있었고, 그 외 트레이닝 차림의 학생인 듯한 사람도 있었다. 시민들은 시체를 보러 다녔다. 상무관에도 70여 구의 시체가 있었는데 관에 태극기가 덮여져 있었다. 도청 앞 분수대를 중심으로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나는 도청 앞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가 이모님과 헤어져 시민군 차를 타고 자취집으로 갔다.
다음날(24일)도 역시 오후쯤 해서 시내집회에 참여하기 위해서 집을 나섰다. 집회를 여는 집행부에서는 시민들에게 거리 청소를 하도록 제안했다. 나는 지산동 앞, 풍향동 쪽을 청소하러 가는 시민들과 합세하였다. 거리를 치우고, 일부에 서는 연막방역을 하기도 했다.
그날 저녁에는 이모집으로 갔다. 이모집에서 하루를 푹 쉬었다. 그 다음날은 이모의 권유도 있고 해서 아침 8시쯤에 시골로 출발했다. 이모와 함께 궁동에서 양동, 화정동, 진흥원 뒷길 등을 거쳐가며 한산한 거리를 빠져나왔다. 광천공단까지 와서는 쌍촌동 쪽으로 걸어나왔다. 공단입구에 있는 검문소에서는 사람을 통과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곳까지 가는 사이 사람은 별로 없었지만 파출소(양동) 등이 불에 그을려 있었다.
쌍촌동에서 영업용 택시를 잡아탔다. 송정리 검문소에서는 쉽게 통과시켜 주었다. 그러나 황룡강 다리 검문소에서는 주민등록증을 제시하도록 하고 학생이냐, 데모를 했느냐를 따졌다. 이모가 옆에 있는 덕에 통과되었다. 현역 군인 5명이 검문소를 지키고 있었고, 황룡강 다리에는 탱크도 있었다. 나주 남평까지 무사히 왔다. 이모님은 다시 되돌아가셨다. 남평으로 들어서기 전에 역시 검문소를 거쳐야 했었다. 남평 거리도 한산했다. 마침 지나가는 트럭 한 대를 잡아탔는데 다행히 무안까지 간다는 것이었다. 도중에 학다리 검문소는 쉽게 통과되고 무안까지도 무사히 도착했다. 무안에서도 망운면 쪽으로 가는 오토바이를 탈 수 있었다.
그러나 현경검문소에서는 지금까지 남평이나 학다리 검문소와는 달리 군인이 검문을 몹시 까다롭게 했다. 그곳에서 망운면 집까지는 걸을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계엄군에 의해 광주 도청이 마지막으로 진압되었다는 뉴스를 듣고 심한 분노를 느꼈다. 나의 신변에 대한 일말의 두려움과 함께 패배감, 좌절감 등이 엄습해 왔다.
광주항쟁 참여자로서 자부심 느껴
그 뒤 학교 공부에 대한 열의보다 정치적 관심과 사상에 대해서 의식화의 필요성을 느껴 사회과학 서적에 심취하였다. 그런 과정에서 심적 갈등이 많아 결국 1980년 12월에 군입대를 결정했다. 그리고 제대 후 이전의 의식들이 체계적이지 못한 상태여서 다시 재수를 생각하고 고향에 머물렀다. 다른 지역보다 정치의식이 높은 무안농민회 활동가들과의 접촉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농민시위 현장에 참여하면서 미국의 본질을 알게 되었고 5·18에 대한 역사적인 인식도 새롭게 하게 되었다. 5·18 참여자로서의 자신에 대해서 긍지를 느끼고 그때 같이 참여했던 노동자들이나 다른 시민들에 대한 애정이 진지해졌다.
나는 1985년 목포대학 물리학과에 입학했다. 1학년 후반기부터 학내조직의 필요성을 느꼈다. 나의 운동관도 좀더 깊어졌고, 농민문제에 관한 학술서클 창립에 가담, 학생운동으로서 그 역량들을 키워나가게 되었다. 현재는 학내활동을 바탕으로 무안지역 농민회에서 활동을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집안에서 경제적 능력이 있다고는 할 수가 없다. 아직까지는 부모님과 같이 살고 있다.
군대에 있을 때 나는 5·18과 관련하여 전라도에 대한 긍지가 컸다. 반면 경상도나 서울 사람들에 대해서는 배신감을 느끼는 단순한 감정적인 사회인식이 지배했었다. 그러나 제대 후 나름대로 책도 보고 농민회와의 접촉으로 역사적인 인식이 넓혀졌다고 본다.
당시 청년, 학생, 시민들, 노동자, 도시빈민들은 단순하면서 적극적으로 투쟁 대열에 참여했다. 반면에 기회주의적인 명망가들로 이루어진 지도부의 혼선은 하나의 역사적 오점을 남겼다고 본다.
5·18은 혁명에 있어서 무장투쟁의 필요성을 일반시민들도 인식하게 된 정당한 역사적인 민중항쟁으로서 그 의의가 높다. 그것은 고립적인 싸움의 한계를 극복하고 성취해 낼 수 있는 대중 무장봉기의 방법을 일구어내 준 계기가 되었다.
현재 5·18에 관계된 단체들의 운동적 역량들을 내 나름대로 평가해 볼 때, 그들은 운동적으로 어느 정도의 힘들을 발휘한다고는 하지만 과학적인 방법을 터득치 못하고 양심의 호소에 머무는 것 같아 안타깝다. 학생운동 역시 당시의 기회주의적 모습들이 현재에도 철저한 당파성을 획득하지 못한 채 대중성을 내세워 스스로의 안전을 도모하는 경향들이 있다. 나는 미국과 그 동맹세력인 군부의 탄압이 민중에게 전가되었던 역사적인 항쟁으로 5·18을 인식하고 있다. 파쇼권력에 대한 혁명적 민주주의 발로로 그 의미와 역사성을 두고, 지금의 운동방향에 있어서도 반미에 모든 운동역량을 결집시키고 더불어 조국통일의 전선에 실천적인 각성이 필요하다고 본다. 막연한 반외세, 민주, 이런 것들은 운동의 결정적 시기에 커다란 혼선으로 장애요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계급적인 각성과 민족적인 각성에 있어서 올바른 위상 정립이 필요하다고 본다. (조사정리 황인자[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