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모니 부처님 입멸 후 부처님이 가르치신 정법이 왜곡되게 된 결정적 요인은 어리석은 범부들이 석가모니를 신격화시키면서 그의 가르침을 행하려 하지는 않고 단지 기도, 발원, 제사등의 행위를 통하여 신앙화 시켜 버린데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가르침을 통해서 타파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신과 신앙이라는 것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석가모니가 신으로 추앙되고 그의 가르침이 신앙화된 것이 어제와 오늘의 불교 실태이다. 그것의 가장 결정적 이유는 인간의 근원의 실체(신, 영혼)에 대해서 바르게 사고하지 못한 결과라 하겠다.
부처님께서는 육근을 온전히 갖춘 인간이라면 자신의 의지로 괴로움을 소멸시키고 자기의 삶을 개척해 나가라고 가르치셨다. 그런데 어리석은 범부들은 각자의 삶을 바꾸고자 하는 의지는 저버리고, 막연한 미래에 대한 맹목적 열망으로 신에 의탁하고 운명에 기대어 허망으로 치달았다. 이것이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왜곡하고고 신앙화로 변질되게 되었다.
불교는 맹목적으로 믿고 매달리는 신앙의 종교가 아니라, 납득되었기 때문에 믿는 신해의 종교이며, 확신하기 때문에 행동에 옮기는 신행의 종교이다. 그래서 석가모니께서는 “와서 믿으라고 말하지 않고, 와서 보라거나 누구라도 이 법을 보라.”라고 하셨다. 여기서 ‘법을 보라.’고 하는 것은 너와 내가 모두 괴로움을 떨쳐버리고 서로 이롭고 바름으로 인도하며 청정한 선행의 결과로 나타남을 스스로 체험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표방하며 제 아무리 그럴듯한 교리을 편다하더라도 그 교리을 토대로 해서 일상생활에서 괴로움이 없어진다면-이것은 단순한 괴로움이 잠시 없어진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법을 토대로 항상 괴로움없음에 머무르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바른 가르침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단지 허망한 언설과 궤변이라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바른 가르침에는 반드시 괴로움의 소멸을 통해서 깨달음을 증득하는 결실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바른 법에 의지하여 괴로움을 소멸시킨 결실-해탈-을 본 자는 “나의 생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섰으며 할 일은 이미 마쳐 후세의 몸을 받지 않는다.”고 천명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지금의 불교는 이러한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저버려 있지도 않은 신, 영혼, 알 수 없는 전생의 업의 논리를 끌어다가 스스로도 괴로움의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또한 타인도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만들고 있다. 중도연기의 바른 법에 대해 온전하게 통찰하지 못하면 신이 없고, 영혼 없고 윤회없다라는 주장을 접했을 때 근심하거나 슬퍼하고 괴로워하며 울고 가슴을 치며 미친 증세를 일으킬 수 밖에 없다.(중아함경 제 50권 대품제 2<아리타경>)
중아함경 제 54권 <다제경>에서 다제 비구가 부처님께 여쭙기를 ‘식’이라는 것은 실체가 있으며, 그 업식에 의해서 과보를 받아 그 과보가 내생에까지 이른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식’은 조건에 의해 발생하는 것일 뿐이지 ‘식’이 스스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다제비구의 어리석음을 꾸짖고 계신다.
다제비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참으로 세존께서‘지금의 이 식은 저 세상에 가서 태어나더라도 달라지지 않는다.’고 이렇게 설법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세존께서 물으셨다.
“어떤 것이 식識인가?”
다제비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른바 이 식이란 말하고 깨달으며, 스스로 짓고 남을 짓게 하며, 일어나고 함께 일어나는 것으로서 여기저기서 선하고 악한 업을 지어, 그 과보를 받는 것입니다.”
세존께서 꾸짖어 말씀하셨다.
“다제비구야, 너는 어떻게 내가 그렇게 설법하였다고 알고 있으며, 너는 누구에게서 내가 그렇게 설법하더라고 들었느냐? 너 어리석은 사람아, 나는 전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는데 너는 한결같이 그렇게 말하는구나. 너 어리석은 사람아, 모든 비구들에게 꾸짖음을 들었으면 너는 그 때 마땅히 법대로 대답했어야 할 것이다. 나는 이제 모든 비구들에게 물어 보리라.”
이에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물으셨다.
“비구들아, 너희들도 또한 내가‘지금의 이 식은 저 세상에 가서 태어나더라도 달라지지 않는다.’고 이렇게 설법했다고 기억하고 있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너희들은 내 설법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느냐?”
모든 비구들이 아뢰었다.
“저희들은 세존께서‘식은 연緣을 따르기 때문에 일어난다.’고 설법하신 것으로 압니다. 세존께서는 한량없는 방편으로‘식은 연을 따르기 때문에 일어난다. 식은 연이 있으면 생기고, 연이 없으면 멸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희들은 세존께서 이렇게 설법하신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중아함경 제 54권〈201.다제경〉
부처님이 설하신 핵심의 가르침인 중도연기법을 토대로 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어리석음과 괴로움을 소멸시킬 수 없다. 중도연기법을 바르게 사고해서 현실에 나타내 보일 수 있다면 중도연기법을 토대로 한 괴로움의 소멸은 요원한 것이 아니고 지금 여기에서 괴로움의 소멸을 볼 수 있다.
기존의 불교의 교리에서는 12연기의 각지 중 처음에 해당되는 무명에 대해 알 수 없는 어리석음의 쌓임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바른 법-사성제- 대해 무지한 것을 무명이라고 하셨다.
12연기법 중 3번째 4번째에 위치한 식과 명색의 관계에서도 기존의 불교 교리에서는 ‘식’을 재생연결식, 혹은 전생의 업식이라 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식’과 명색은 따로 떼래야 뗄 수 없는 상호의존적 관계인 것이다. ‘식’이 없으면 명색은 존재할 수 없고 명색이 없으면 ‘식’은 성립시킬 수가 없다. 이렇게 사고하는 것을 상호의존적 발생의 원리, 즉 연기법이라고 한다,
12연기의 각지 중 11번째에 위치한 생에 대해 기존의 불교 교리에서는 전생의 업에 의해 어머니의 모태에서 몸을 받아 나온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생이라는 것은 허망한 인식을 가지고 ‘자아가 존재한다.’ 또는 ‘자아가 실재한다.’는 인식을 갖게 되는 것을 생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사실을 바르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태어났다.”라고 주장한다고 하셨다.
위에서 언급한 요소들이 불교의 가장 핵심의 토대인데 이러한 가르침을 떠나서 달리 불교의 교리를 주장한다면 절대로 현실의 괴로움은 해결 볼 수가 없게 된다.
또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세상이라는 것은 우주만물의 세상이 아니고, 우리의 한길 몸뚱이 즉 육근을 온전히 갖춘 것을 세상이라고 천명하셨다.
따라서 깨달음이라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토대로 어리석음을 끊어내고 괴로움의 소멸을 지금 여기에서 증득하여 자타의 이로움을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깨달음에는 분명 공식이 있다. 그 공식은 바로 중도연기법을 말하는데 이 가르침만이 어리석음을 끊고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부처님께서는 천명하셨다. 따라서 깨달음이라는 것은 내세의 희망사항이 아니고 지금여기에서 증득하고 머물 수 있는 현실의 실천적인 법인 것이다.
이 책은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열망하는 자라면 누구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인도하는 안내서로써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부처님의 말씀을 근거로 명쾌하게 그 길을 제시하려 하였다
<깨달음에도 공식이 있다> , 김종수감수, 훤일 지음, 민족사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