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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정권과 싸워오던 현직교사의 5월
증 언 자 : 윤광장 (남)
생년월일 : 1942. 6. 15.(당시 나이 38세)
직 업 : 교사(현재 교사)
조사일시 : 1989. 7.
개 요
유신정권 때부터 교육자로서 올바른 교육을 위해 독재정권과 싸워오던 윤광장 씨는 1980년 당시 도청 수습위원회 활동을 하다 5월 29일 보안대로 연행, 구속된다.
반항심에 중학과정 중퇴하기도
강진군 칠량면 동백리 702번지에서 태어난 나는 국민학교 3학년 때 6.25를 만났다. 나의 아버지는 해방 이후 칠량면 내에서 '청년동맹연합' 청년단원으로 활동하시다 인공치하가 되면서 마을 앞 면화창고에 감금되기도 하셨다. 아버지는 특별히 정치적 색깔을 띠신 것은 아닌데 면사무소 직원이신 관계로 우익이라 하여 그렇게 된 것이었다. 다행히도 국군이 곧바로 들어와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국민학교를 별탈없이 마치고 중학교에 진학했으나 가세가 기울어 중학과정을 중단해야 했다. 그러나 내가 학교를 중퇴한 것은 집안 형편보다는 담임 선생님과의 갈등 때문이라고 해야 더 정확할 것이다. 3학년 2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하루는 시험을 보는데 선생님이 들어오시더니 납부금을 내지 않았다고 교실에서 쫓아내버렸다. 3학년 2학기인데도 불구하고 학교를 그만두고 말았다. 그러느라고 광주로 진학하려던 꿈이 깨어져 할수없이 강진농고로 진학했으나 학교가 마음에 들지 않아 공부에 대한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내가 아무리 학교성적이 우수해도 시골 농고를 다니다 보면 서울로 대학을 가기가 어렵게 될 수 밖에 없었다. 서울로 대학을 가려던 꿈도 깨어지고 나자 나는 동생들 생각해서 돈이나 벌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그러나 쉽게 대학을 포기할 수가 없어 망설이고 있는데 이런 나를 본 친구가 하류대학이라도 대학에 일단 들어가 보라고 권유했다. 그래서 1961년에 전남대 농대에 들어가게 되었다.
교직에 첫발을 디디며
내가 대학에 들어갈 무렵에는 아버지가 운영하시던 작은 공장이 잘되었기 때문에 경제적 어려움은 별로 없었다. 나는 학교 공부에 충실하면서 동시에 2학년 때부터는 6개 단과대(법대, 농대, 상대, 의대, 문리대,공대)에서 대표 2명씩을 뽑아 친목과 리더심, 그리고 민주적 역량을 스스로 키우자는 서클 XII-G에 가입했다. 또한 ROTC 3기로 들어가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1963년에 한일협정 반대 시위에도 직접 관여하고 뛰어다녔다.
학교를 마친 나는 군에 입대하여 공병 소위 제대를 했다. 제대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선배의 소개로 숭의실고(현 숭신공고) 교사로 가게 되었다. 나는 애초에 그다지 교직에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닌데 다른 곳으로 가기 전에 잠시 있을 요량으로 그렇게 했다. 그런 것이 계기가 되어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직업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물론 중간에 잠시 쉬기도 했지만 말이다.
내가 교직에 몸담은 뒤 처음으로 회의를 느낀 것은 1968년 3선개헌 때이다. 위에서 명령이 내려오기를 선생들보고 가정방문을 다니면서 학부형들에게 3선개헌에 대한 의견을 0,X로 받아오라고 했다. 이에 많은 선생님들이 못마땅하게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고 다녔다. 그러던중 교무회의 석상에서 이 문제가 거론되어 이를 거부하기로 결정했다. 교사들에게까지도 정치적 선전원이 되라고 강요하는 현실을 보면서 교직 또한 결코 신성한 직업이 못 됨을 느꼈다.
그 일이 마무리되고 얼마 되지 않아 학내에 큰 소동이 일어난 적이 있다. 한 선생님이 자기반 학생을 매로 때렸는데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학부형이 그 선생님을 법정에 고발해 버린 것이다. 일이 그렇게 되자 '전남일보'에서 이 일을 신문에 내버려 일이 크게 벌어진 것이다. 학교측에서는 대외적인 망신을 생각해서 문제의 선생님을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처벌하려 들었다.
이에 부당하다고 느낀 나는 학생대표들을 불러 무분별한 신문사측과 학교당국의 처사가 부당함을 크게 알리도록 유도했다. 내 말에 전적으로 수긍한 학생들이 플래카드를 들고 가두로 나가려 하자, 학교측에서는 일을 순조롭게 해결할 것을 약속하고 학생들을 무마했다.
이런저런 일을 겪으면서 교육계에 그다지 보람을 느끼지 못한 나는 1969년 자진 사표를 쓰고 서울로 올라갔다. 당시 공화당 국회의원이던 윤재명씨를 찾아가 취직을 부탁해 보았으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3선개헌 이후 아버지와 형님이 공화당에서 탈당해 버려 이에 대한 일종의 보복으로 내 취직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것을 안 나는 더 이상 추근대기가 싫은 데다가 나름대로 밑바닥 인생이 어떤 것인가 알기위해 6개월 계획을 잡고 남대문 도깨비시장으로 들어갔다. 짐꾼도 하고 허드레일이란 일은 다 맡아서 했다. 그런데 아무리 내색을 안 해도 배운 티가 났었던지 간첩이 아닌가 의심을 받기도 했다. 3개월 정도를 내가 아는 사람들에게는 아무한테도 알리지 않고 일하던 어느 날 험한 몰골로 일하고 있는 모습을 고향 선배에게 들키고 말았다. 그 선배는 나를 보고 기겁을 하더니 나의 간곡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집에 연락해 버렸고 더 이상 그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6개월 예정으로 들어갔다가 결국 3개월 만에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
그 뒤로는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화원을 경영하기도 했지만 잘되지 않아 1972년 겨울,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광주로 내려왔다.
삼봉조합
광주로 내려와서 일자리를 알아보고 다니는데 대학 때 은사님들이 당시에 재단 설립과 함께 개교를 하는 대동고등학교로 가서 아이들을 가르쳐보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본의 아니게 또다시 교직으로 가게 되었다.
대동고는 1, 2회만 하더라도 평준화 혜택을 못 받은 학생들이 들어왔다. 그런만큼 학생들의 수준이 상당히 낮은 편이었다. 그래서 학생들을 건전한 서클활동을 통해 올바른 인생관과 국가관을 기르도록 하기 위해 '비둘기'라는 서클을 학내에 창설시켰다. 그 서클은 YWCA 산하 고등부를 말하는 것으로 비둘기는 대동고 고유의 이름이었다.
학생들의 호응도는 상당히 좋았다. 새로운 의욕을 갖고 교육에 전력을 다했다.
이듬해에 현 평민당 의원인 박석무 씨가 대동고로 들어오셨다. 곧이어 1975년에 박행삼 선생님이 들어오셔서 우리는 유신에 반대하고 올바른 교육의 위상을 정립하기 위해 광주시내에 있는 각급학교 선생들과 만나면서 논의를 거듭했다. 중앙정보부의 감시가 심해 우리는 조직 이름을 삼봉조합이라고 명명했다. 모임을 가지려면 우리는 전화로 삼봉을 치자고 했다. 그러면 모두 알아듣고 모였다. 박행삼 선생님이 장을 맡았다.
우리는 어느 장소에서 만나든지 될수록 일을 빨리 끝내고 반드시 '삼봉'을 쳤다. 그래야 중앙정보부의 감시를 피할 수 있었다. 우리들의 그러한 노력이 현재의 교사운동의 주춧돌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현재 교협활동을 하고 있는 주멤버들을 보면 대개가 다 그때 우리 삼봉조합 선생님들이다. 우리는 동시에 엠네스티에도 관여를 했으며, 재야세력들과도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1974년 4월 8일 '민청학련' 사건이 터지면서 내 동생 한봉이가 구속되고 말았다. 나는 그 전까지는 우리 한봉이가 전남대내에서 여러 활동을 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런 엄청난 조직에 속해 있는지는 몰랐다. 4월 8일 새벽에 잡혀간 한봉이의 옥바라지를 하면서 나는 더욱 깊이 재야인사들과 접촉을 가졌다.
그때 나는 결혼한 지 불과 몇 달 되지 않은 몸이었다. 그렇지만 동생을 옥바라 지하다 보니 자기 가족이 수감자를 적극적으로 보호하면 주위에서도 더욱 많은 도움을 준다는 것을 알고 동생에게 시간을 뺏기는 일이 더 많았다.
민청학련 관련자는 이듬해 1975년 2월 15일에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그런데 바로 며칠 전인 2월 7일에 한봉이 일에 충격을 받으신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말았다. 이에 따른 충격과 죄책감이 많았을텐데도 동생은 내색하지 않고 여전히 바쁘게 활동하고 다녔다.
좋은 책 읽히기 운동, 양서조합
1978년 6월 27일 '교육지표' 사건이 터진 이후 삼봉조합 선생님들과 대학교수들이 주축이 되어 고등학생, 대학생들에게 좋은 책을 읽히자는 목적으로 YWCA에 '양서협동조합'을 만들었다. 일종의 문화운동 차원에서 시작한 일이었는데 우리는 양서조합을 자칭 광주의 사랑방이라고 불렀다. 우리 삼봉조합 선생님들은 주로 고등학생들이 양서조합을 자주 찾아올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였다. 대학생들은 민청학련 관련 세력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현대사회문제연구소'에서 관리를 맡았다.
내가 나가던 대동고에서는 양서조합에 출입하던 학생들이 학내에다 '독서회'라는 서클을 만들기도 했다. 사레지오, 중앙여고 등도 시도했으나 방학 동안만 잠깐 공부를 할 수 있었지 대동고처럼 활성화되지 못했다.
그 외에도 고등학교를 중심으로 양서조합을 소개해 각 학교마다 약간의 움직임이 있었으나 1980년을 맞으면서 시국이 급변하는 바람에 더 이상 활개를 펴지 못 했다. 우리 학교(대동고)에서도 1980년 새 학기가 시작되면서 학교측에서는 독서회를 좋지 않게 보고 관련 학생들을 징계하려 들었다. 여러 선생님들은 학교측에서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독서회 같은 조직을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학생들이 스스로 좋은 책을 읽겠다는데 징계가 웬말이냐고 선생님들이 그 문제를 반대하고 나섰다.
그런데 3학년 학년주임 선생님이 몇 분 선생님들을 회유해서 독서회를 학내 데모나 주모한다고 해서 불량서클로 단정하고 주모자급 학생들을 징계하고자 했다.
그런 속에서 4월 초에 독서회 멤버 중에 3학년 학생인 김모 군이 자퇴 아닌 자퇴를 하는 일이 발생했다. 그 학생은 가정형편이 곤란해 중학교 때까지 고아원 생활을 하던 아이로 납부금 내는 일이 좀 늦어졌던가보았다. 그런데 담임선생이란 사람이 대신 납부금을 융통해 주기는커녕 제자한테 "돈 없으면 학교에 다니지 말라"고 폭언을 해 이에 충격을 받은 학생이, 그 선생님에 대한 반항까지 곁들여 정말로 자퇴서를 쓰고 학교를 그만둔 것이다. 입시공부만 해도 힘겨울 고 3학년에게 자퇴란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여서 이 사실을 안 나는 황급히 교장선생님에게 쫓아갔다.
"세상에 이런 일이 있어야 되겠냐"면서 그 학생의 형편을 얘기했더니 교장선생님은 깜짝 놀라면서 즉시 담임선생을 불러 자초지종을 듣고 조처를 취하도록 했으나, 담임이 이에 감정적으로 대처해 학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때 3학년 학생들 사이에는 입시 예상문제지를 반강제적, 의무적으로 전학생이 보도록 강요한 학교측의 처사에 못마땅해 하는 여론이 일고 있었다. 게다가 10개월분 시험지대를 매달 받아가는 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납부하도록 해 학생들의 부담을 가중시키고 오히려 매달 돈을 내는 것보다 더 비싸게 받아냈다. 한 학생이 나한테 와서 그런 얘기를 하면서 그 문제가 시정이 될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이에 나는 학교의 명예와 교사라는 입장을 고려해서 희망자에 한해서만 시험지를 받아보게 하고 이미 거두어들인 돈은 돌려주라고 건의했다. 그 말이 있은 뒤 이틀 만에 시험지대가 즉시 학생들에게 나누어 졌다. 그런데 이런 처사에 불만을 품은 3학년 담임 선생님들 12명과 다른 교사 5명이 동시에 출근을 하지 않고 이사장 집으로 몰려갔다. 그들은 나와 박석무, 박행삼 선생님을 내보내지 않으면 집단사표를 제출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들은 우리가 3학년 담임을 맡고 있지도 않으면서 사사건건 3학년 학습지도에 간섭을 해 자기들이 근무하기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우리 3명은 즉시 이사장에게 호출되어 갔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를 밝히면서 학생들과 대질해 보면 우리가 뒤에서 조종했는지 안 했는지 알 것이라고 떳떳하게 말했다. 우리의 설명을 들은 이사장은 우리에게 잘못이 없음을 알고 이 일을 없었던 것으로 하자며 우리 모두를 학교로 돌려보냈다.
그런데 정작 일은 그 다음날부터 터지고 말았다. 3학년 학생들이 선생님들의 집단결근이 무슨 일 때문에 일어난 일인지를 그날 오후부터 알고는 다음날 아침 조회시간에 담임선생님들을 교실에 못 들어오게 하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학생들은 선생님들이 독서회를 탄압하기 위해 그런 일을 벌였다고 보고 한 학생이 선생님의 과오로 자퇴한 일과 무능교사 퇴진까지를 들고 나와 수업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3학년 학생들은 오후에 대강당에 모여 전날의 사태를 해명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래서 학년주임이 나와 해명을 한다고는 했는데 상황판단을 잘못한 이 선생님이 해명을 한답시고 이 모든 사태가 나를 비롯한 세 선생들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말했다. 그래 놓으니 학생들 사이에서는 그 선생님에게 사기꾼이라는 말까지 튀어나왔다.
교실로 돌아간 학생들은 17명 교사를 사표처리하라고 하면서 교실문을 잠궈버렸다. 5일이 지난 뒤부터 3학년 학생 전원이 자퇴할 것을 결의하고 손도장을 찍었다. 교장, 교감 선생님은 물론 여러 선생님들이 나서서 학생들을 설득했으나 여전히 사태가 수습되지 않았다.
그때 나는 1학년을 맡고 있었는데, 전국체전 준비를 하느라 그 일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한 열흘이 지난 어느날 나의 고등학교 은사님이기도 한 교장 선생님이 나를 교장실로 불렀다. 교장실에는 교감 선생님과 장학사가 나와 있었다. 그들은 나에게 무조건 다음 월요일까지 사태를 수습하라고 했다. 그 날이 금요일이었으니 시간이 별로 없는 상태였다. 장학사는 대동고에 반체제 교사가 3명이나 있다는 말을 서슴없이 했다가 나에게 혼이 나고 말았다. 사태를 조속히 해결하라는 의미에서 협박한답시고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내게는 위협적인 것이 아니라 그런 얄팍한 수법이 가소롭게만 들렸다.
그러나 눈물을 글썽이며 내 손을 잡고 꼭 사태를 수습해 달라는 교장 선생님의 청에 못 이겨 3학년 교실로 올라갔다. 3학년 교실에 가보니 전체 학생의 1/3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문을 지키고 있으면서 선생님들의 출입을 막는 학생들에게 대화할 것을 요청했다. 학생들의 감정을 상하지 않도록 잘 말하여 겨우 교실에 들어갈 수 있게 된 나는 우선 각 반에 흩어져 있는 학생들을 한곳에 모이게 했다. 얼마 안 되어 학생들이 모이자 나는 우선 학생들을 고생한다며 격려해 주었다.
"해방 이후 고등학생들이 다 죽은 줄 알았는데 여러분을 보니 이 나라의 앞날이 참으로 밝아 보입니다. 여러분같이 불의를 보고 그냥 넘기지 않는 학생들이 있으니 이 나라가 그래도 희망이 있는 것 같군요."
그러면서 나는 교단에 서서 처음으로 학생들 앞에서 우리 집안 얘기를 꺼냈다. 아버지가 6.25 때 돌아가실 뻔한 이야기에서부터 동생 한봉이가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된 뒤 수업이 끝나면 각 관청에 불려다니면서 끝없이 조사받던 이야기 등을 구구절절이 했다. 내가 이야기하는 동안 학생들은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들었다. 그 밖에도 당시 일반인들은 잘 모르고 있던 전두환씨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힘의 논리'에 의해 어느 특정인에게 힘이 집중될지도 모른다는 정세도 이야기해 주었다. 그런 말 끝에 입시를 앞둔 고3학년생으로 이 일을 오래 끌 것이 아니라 어려움을 타개하는 방향으로 일을 처리하도록 하자고 설득했다. 그 방안으로 각 반에서 자치회를 열어 12개반의 의견을 큰 사안으로만 결집해 보라고 했다.
70-80분에 걸쳐서 얘기를 끝내고 밖으로 나가니 교장, 교감 선생님들은 분위기를 보니 잘 풀릴 것 같다며 좋아했다. 학생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회의를 해 6개 조항을 학교측에 제시했다.
1) 이사장 아들 박창열 상무 퇴진, 2) 진학실 폐쇄(진학실은 3학년 담임들만 모여 입시에 관한 모든 일을 처리하는 곳으로 별도의 교무실이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3) 교과선생 교체(3학년 2반 담임으로 무능교사), 4) 학생 처벌을 없도록 하라, 5) 세 분 선생님(박석무, 박행삼, 윤광장)들의 신분상 불이익 없도록 하라 , 6) 학생자치회 인정하라.
교장은 1)번 조항만은 권한 밖이니까 손댈 수 없지만 나머지는 즉시 수락한다는 조건으로 일이 일단락되었다. 1980년 5.18 이전까지는 그 일로 징계한다는 말은 전혀 거론을 하지 않았다.
지금 나가면 개 죽음이다
1980년 5월 18일! 힘의 논리를 예견했던 대로 광주에서는 엄청난 살륙이 자행되고 말았다. 나는 이전에 도청 앞 분수대에서 열린 평화시위에 빠짐없이 참여해 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격앙된 분위기 속에서 나는 낙관적인 한반면에 불안한 생각이 없지 않았다. 아니나다를까 5월 17일 저녁쯤 되니 계엄이 전국적으로 확대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음날(18일) 정확히 0시 12분이 되니 우리 집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불길한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잠옷바람으로 나가니 경찰 2명과 군인 4명이 들이닥쳐 동생 한봉이의 소재를 물었다. 나는 동생이 어디에 있는지 전혀 모른다고 하면서 얼굴 본 지도 오래되었다고 잡아뗐다. 그들은 10분 정도 나를 추궁하더니 한봉이가 집에 없다는 것이 확실해지자 순순히 물러갔다.
그들이 간 다음부터는 불안해서 잠이 오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동생이 문병란 선생님 댁에 있을 것 같아서 전화로 확인해 보았다. 동생은 마침 그곳에 있으면서 걱정 말라고 하였다.
그날 같은 시각에 많은 운동권 젊은이들이 예비 검속되어 갔다. 날이 밝자 몇 사람에게 연락해 보니 잡혀가고 없었다. 나는 얼른 양서조합으로 뛰어갔다. 다른 선생님들도 하나둘씩 모여들어 앞으로 벌어질 상황에 대해 대책없는 말들만 주고 받았다. 그런데 그때 금남로에서 함성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다 같이 뛰어나갔다. 광주은행본점 사거리에서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나도 그곳에서 학생들과 함께 함성을 지르며 있다가 심하게 쏟아지는 사과탄을 맞고 몇 번 곤욕을 치렀다 .
다시 양서조합으로 들어간 우리는 차후에 전개될 상황에 대해서 뚜렷한 대안없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우리 삼봉조합 소속 25-26명의 선생님들은 공수부대원들에게 대항할 막강한 조직이 없음을 못내 아쉬워했다. 갑작스런 사태를 맞아 이를 수습할 만한 조직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기껏해야 개별적인 움직임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을 안타까워하면서도 갑자기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었다.
5월 19일 학교에 나가 오전에 수업을 들어갔는데 학생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러나 선생님들끼리는 미리 학생들을 자극시킬 만한 말을 삼가기로 했었기 때문에 모른 척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점심시간이 되자 난타종이 울리면서 2, 3학년 학생들이 수업을 거부하고 운동장으로 몰려나갔다. 학생들은 어깨동무를 하고 운동장을 돌더니 교단을 중심으로 몰려들었다. 한 학생이 교단에 올라가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학우 여러분, 지금 금남로에서는 우리의 부모형제가 공수부대원들에게 다 죽어나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이대로 앉아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우리도 시내로 나가 공수부대원들과 싸웁시다."
운동장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 때 서무과에서는 곧바로 학생들의 동태를 경찰에 알렸다. 내가 교무실에서 내려다보니 군용 트럭 5대가 교문을 향해 총구를 들이대고 대기하고 있었다. 학교가 높은 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그러한 밖의 동정을 보게 된 나는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판단하고 박행삼 선생님과 함께 운동장으로 뛰어나가 밖으로 나가려는 학생들을 막아섰다. 그러나 학생들은 우리의 말을 들을 태세가 아니었다. 나와 박선생님은 절대로 학생들을 죽음으로 내몰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교문 앞에 드러누웠다.
"지금 나가면 개죽음이다. 지금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저들과 싸울 수 있는데, 여기서 이러면 너희들 희생만 커진다. 그래도 가려면 우리를 밟고 지나가거라." 차마 우리를 밟고 지나갈 수는 없었던지 학생들은 눈물을 흘리며 돌아섰다.
아슬아슬하게 학생들을 교문 밖으로 나가려는 것을 막았다. 학생들은 운동장만 돌다가 즉석토론회를 가졌다.
이때 선생님들은 각 학부모에게 전화를 해 학생들을 데리러 오게했다. 부모님들이 도착하는 대로 시차를 두어가며 학생들을 분산,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날 다른 학교도 그와 같은 일이 있었다고 했다.
동생 한봉이를 피신시키고
다음날(20일)부터 중.고등학교에 휴교령이 내렸다. 이날 나는 동생 한봉이가 시외로 피신하려다 기차에서 검문을 심하게 하는 바람에 광주를 빠져나가지 못하고 여동생집에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동생은 이왕에 피신이 어려우니 그대로 남아서 사태를 두고 보겠다고 했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달랐다.
"지금 상황에서 잡히면 죽는다. 상황 보아가며 돌아와도 늦지 않으니 일단은 피신해라."
간신히 동생을 설득한 나는 21일 여동생과 한봉이를 부부처럼 꾸며 아이까지 한 명 데리고 광주를 빠져나가게 했다. 여동생은 한봉이를 어느만큼 바래다주고 광주로 돌아와 한봉이가 무사히 빠져나갔음을 알려주었다.
한시름을 놓은 나는 매일 거리로 나가 담배 등을 사서 시위대에게 나눠주었다.
23일이 되니 수습대책위원회에 참여해 달라는 연락이 왔다. 일단 양서조합으로 나간 나는 YWCA 총무실에서 사람들과 만났다. 그때 들으니 도청내에서는 온건파가 사태수습에 참여해 싸우기를 포기하고 무기를 회수하려 한다고 했다. YWCA에 모인 사람들은 이에 반대하고 기왕에 회수된 총은 계엄사에 반납하고 연행된 사람들과 교환하자고 했다. 그후 나는 도청을 들락거리기는 했지만 특별히 수습위원회활동을 한 것은 없다.
23일에는 대동고 학생인 전영진군이 계엄군의 총에 맞아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학교에 가서 확인했다.
26일 오후부터는 계엄군이 시내에서 쫓겨난 후 평온했던 며칠간과는 상당히 다르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군인들이 재진입해 온다는 소문이 보다 현실감 있게 퍼졌기 飁문이었다. 도청 안에서도 술렁거리기는 마찬가지였다. 도청을 지키던 젊은 사람들이 나이 드신 분들과 여자들은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면서 끝까지 싸울 사람만 남으라고 했다. 나는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미 내 신분이 노출된 상태이니 몸을 피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도청을 나와 집이 아닌 아는 사람의 집으로 갔다.
27일 새벽 피의 진압이 있자 광주는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나는 28일까지 꼼짝 않고 있다가 그날 저녁에 집에 잠깐 들렀다. 그리고 이왕 집에 들른 김에 앞으로 사태가 어떻게 될 것인지 경찰서 정보계통에 있는 친구에게 연락을 해 보았다. 친구는 그러잖아도 구속자 명단에 내 이름이 있어서 몰래 지워놓았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안심한 나는 멋모르고 집에 눌러앉았다. 그런데 29일 새벽이 되자 광주경찰서에서 집으로 들이닥쳤다. 이미 수배자 명단이 각 경찰서에 배포된 상태라 한 경찰서에서 이름을 지웠다고 해도 소용이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이 악물고 매맞느라 치아 다 상해
나는 보안대 지하실로 끌려갔다. 내가 조사받은 내용은 수습위원회 참여 사실과, 5월 19에 있었던 대동고 시위사건, 그리고 동생 한봉이의 소재파악에 관한 것이었다. 17일 동안이나 갖은 고문과 구타를 당하면서도 나는 내가 한 일이 정당한 것이었음을 강조했다. 수습위원회 참여에 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치안 담당자들이 모두 피신해 버린 상황에서 이 사람 저 사람이 총을 들고 돌아다니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느냐. 그것이 죄가 된다면 할 말이 없겠지만 질서를 지키려고 모인 수습위원들을 죄인으로 몰지 말고 민생치안을 포기한 경찰 담당자들을 징계하는 것이 더 현명한 일일 것이다."
또한 그들은 나에게 19일에 있었던 대동고 학생시위를 뒤에서 조종하지 않았느냐고 캐물었다. 박행삼, 박석무 선생님들은 어디론가 피신해 버린 상태라서 나 혼자 몽땅 뒤집어쓸 판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2천 명 대동고 학생들에게 내가 뒤에서 조정해서 시위를 했느냐고 물어보라고 하면서 만일에 그렇다는 대답이 나오면 그 사실을 인정하겠다고 했다.
그 문제들은 그래도 간단하게 조사가 끝났다. 그러나 동생 한봉이 문제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동생이 어디 있는지 대라고 난리였지만 나는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이전에 동생 한봉이한테 듣기를 그런 곳에서 두들겨맞을 때는 요령을 피우지 말고 바른 자세로 맞으라고 했다. 잘못 맞으면 몸이 크게 다친다는 것이었다. 나는 맞을 때마다 몇 대가 됐든지 이를 악물고 끝까지 맞았다. 이때 어찌나 이를 세게 악물었던지 그 후 치아가 다 상해 못쓰게 되어버렸다. 지금 치아는 의치들이다.
6월 15일경이었다. 아침에 취조받는 책상에 앉아 엎드려 자는둥 마는둥 하고 있는데, 한 수사관이 오더니만 내게 다짜고짜 몽둥이 찜질을 한참하고 나더니 다른 사람의 자술서를 가지고 와서 보여주며 말했다.
"다른 사람은 다 자술서를 작성했는데 당신만 안했다. 이대로 똑같이 베껴라."
글씨를 자세히 보니 홍남순 변호사의 필체였다. 내가 갇혀 있던 옆방에 홍변호사님이 있었다. 내가 어떻게 된 일이냐고 옆방으로 갔더니 홍변호사님이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우리가 무슨 힘이 있는가."
이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나는 울면서 홍변호사님이 써놓은 조서를 그대로 베껴썼다. 그런데 수사관은 나더러 똑같이 써놓았다고 매질을 했다. 한 3번 정도를 똑같이 썼다고 두들겨맞으면서도 끝까지 그렇게 했더니 나중에는 그대로 넘어 갔다.
그뒤로 다른 방으로 옮겨졌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기홍 변호사님이 내 옆방에 있었다. 나는 옆방으로 통하는 작은 유리창을 통해 쪽지를 써보냈다. 더 이상 버티지 말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자술서를 적성해 버리라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해서 18일 만에 보안대 지하실에서 나와 보안대 내에 있는 작은 체육관으로 갔다.
그 더운 여름에 18일 만에야 목욕도 하고 옷도 빨아 입었다. 그런 다음 개인 사물을 가지고 나오라고 해서 이제 집에 보내주나보다 했는데 내가 실려간 곳은 상무대였다. 어느 수사실로 가서 앉아 있자니 한 수사관이 와서 내일부터 만나자며 그냥 나갔다. 그런데 다른 한 사람이 오더니 나를 아는 체했다. "윤선생님, 그동안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저는 한봉이와 잘 아는 사이입니다. 수사관들이 물으면 너무 버티지 말고 요령껏 대답하십시오." 그 사람이 누군지는 몰랐지만 그래도 걱정해주니 고마웠다.
다음날부터는 헌병대로 가서 윤영규, 문병란 선생님과 한 팀이 되어 조사를 받기 시작했다. 조사받는 동안 나는 내내 박석무, 박행삼 두 선생님만 안 잡히기를 바랬다. 나중에 잡혀 들어와 나하고 말이 틀리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나는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받고 1980년 10월 25일 석방되었다. 검찰 조사과정에서는 학교문제와 동생 한봉이 문제는 제외되었다. 수습위원회와 관련하여 계엄법 위반이 나의 죄목이었다.
교육민주화에 힘쓰며
내가 석방되기 하루 전 날이 내 아내의 분만예정일이었다. 나는 깜박 그 사실을 잊고 있었는데 그날밤 꿈을 꾸니 돌아가신 아버지가 나타나셔서 '옛다. 네 둘째놈이다' 하면서 아들을 내 품에 안겨주었다. 그래서 아들을 낳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니나 다 를까 아들을 낳았다. 나는 보안대 지하실에 있으면서부터 아내의 배려로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아내가 형사에게 사정사정해서 신.구약성서를 넣어주어 읽다보니 신자가 되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대동고에서 사직당하고 말았다. 상무대에 있을 때 사표를 강요받았으나 거부했는데, 나뿐만 아니라 두 선생님들도 부인들을 못살게 굴어 6개월분 봉급을 주어 사표를 받아갔다.
박행삼 선생님은 9월경 시국이 어느 정도 풀린 다음에야 자진출두 형식으로 잠깐 조사를 받고 풀려났다. 나는 조사받는 동안 삼봉조합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피해를 당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대동고에서 사직당한 나는 서석동에 있는 신용협동조합에 월 10만 원을 받는 상무로 들어갔다. 신협에 다니는 동안 정보과에서는 현상금 5백만 원과 2계급 특진을 걸어놓고 우리 한봉이를 잡으려고 감시의 눈을 번뜩였다. 나는 상무대에 있으면서 비공식적으로 아내와 면회를 했었는데 그때 이미 한봉이가 서울로 무사히 빠져나가 안전하게 숨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있었다. 석방된 뒤에도 한봉이와 중간에서 연락을 해주는 여자 분이 있어 소식은 전해지고 있었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고 그들을 따돌렸다.
그러던중 한번은 신협에서 2주간 코스로 교육을 받을 기회가 있었다. 나는 한봉이를 한번 만나볼 요량으로 어렵게 만나기로 약속해 놓았다. 그때 마침 어머니도 이모님 회갑이 있어서 함께 서울로 올라갔다. 누구보다 어머니가 한봉이를 보고 싶어했지만 나는 신변보호를 위해서 어머니에게까지 철저히 그 사실을 비밀로 했다.
미행을 따돌리기 위해 몇 번씩 차를 바꿔탄 후 한봉이를 만나 저녁식사를 하면서 망명하라고 권유했다. 정찬용(민청학련 관련자, 현 거창 YMCA 총무)씨의 동생이 외항선원이었는데 마침 귀국했다가 출항을 며칠 앞두고 있었다. 비밀리에 일을 추진하던 끝에 배가 출발하기 직전에 갑자기 결정이 나 뭘 준비하지도 못하고 라면 6개와 빵 몇 개만 싸주며 마산으로 내려보냈다. 정찬용씨의 동생 용화에게 선원복을 빌려입고 술취한 척하면서 어깨동무를 하고 배에 들어갔다.
그렇게 해서 무사히 미국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한봉이는 미국에 가서도 '재미한국청년연합회' 등을 조직하면서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미국정부는 처음에 동생을 밀항자라고 하여 망명을 인정해 주지 않다가 법원에 망명허가 신청서를 제출해 법정투쟁을 벌인 결과 한국내에서 민주화 운동경력이 인정되어 미국법에서 인정한 제1호 망명자가 되었다. 그러나 한봉이는 지금까지 미국 시민권은 거부하고 영주권만 얻어 생활하고 있다.
교육민주화는 꼭 해야할 일
한봉이 일이 잘 마무리되고 나서 나는 신협 일을 하면서도 박석무, 박행삼, 김준태,정해직, 정규철, 이상호, 윤영규 선생님들은 물론 대학교수들과도 연대해서 꾸준히 복직투쟁을 벌였다. 그 결과 1983년 9월 16일자로 전원 복직되었다.
그러나 우리들을 광주에 둘 수 없다고 하여 공립학교로 공채한 다음 나는 담양 한대중학교로 발령을 받았다. 우리의 동태는 정보과에 일일보고가 되었다. 우리는 그럴수록 남보다 모든 면에서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결심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 수 있도록 모든 생활에 최선을 다했다. 그러면서 중등교사 단위로 '교사협의회'를 결성해 계속해서 모임을 갖고 교육민주화에 힘을 썼다.
1980년 이전에는 많은 선생님들이 그런 유의 일에 참여했으나 5.18 이후 정국이 경색되면서는 많이 떨어져나가고 내가 복직될 무렵에는 10여 명 정도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드디어 1986년에 교육민주화 선언을 했다. 거기서부터 많은 교육자들의 자각이 있어서 1987년 1주년 행사를 준비하느라 초등교사 정해직 선생님을 중심으로 서명활동을 해나갔다. 당초의 목표는 5백명으로부터 서명을 받을 예정이었으나 잘 되지 않았다. 그래도 제2차 교육민주화 실천대회를 가지려고 추진중인데 노태우 씨가 6.29선언을 해 일이 무산되고 말았다. YWCA를 중심으로 모인 협의회 회원들이 주축이 되어 교사들의 조직운동에 관심을 확산시키는 데 주력했다.
1987년 여름방학을 계기로 해서 교육민주화의 제문제에 관한 토론회를 여러 차례 가졌다. 이를 계기로 공감대가 넓혀져 '전국민주교사협의회'가 창립될 시기가 왔다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전국의 어느 곳보다도 광주, 전남이 가장 활발히 문제가 논의되었으며, 젊은 교사들을 중심으로 민주교육추진 광주, 전남 창립준비위가 발족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공간은 넓어졌지만 정국이 불투명했기 때문에 책임을 맡을 사람이 선뜻 나서지 않았다. 여러 사람의 생각이 나한테 쏠리고 있다는 것을 안 나는 아내에게 이야기했더니 아내는 내가 책임을 안 맡았으면 했다. 그래서 내가 다시 성당의 신부님을 찾아가 상의했더니 신부님은 어려운 시대일수록 누군가가 십자가를 져야한다면서 가족은 염려하지 말고 책임을 맡으라고 했다.
1987년 9월 5일 YMCA 체육관에서 창립총회를 갖고 내가 초대회장으로 선출되었 다. 우리회의 최초 이름은 '전남교사협의회'였다. 창립 후 9월 26일에 광주, 전남이 분리되어 활동해 나갔다. 여러 번 논의를 한 다음에 창립을 하기는 했지만 아직은 많은 선생님들이 자신감을 갖지 못했다. 그런 어려운 시기에 회장을 맡아 내가 우선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두려워하는 교사들이 용기를 갖도록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민족, 민주 재야세력과 인간관계를 갖고 동시에 천주교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와 결의해 국가에서 교사협의회을 탄압하지 못 하도록 해놓았다. 안으로는 내실을 다지면서 대외적으로 연계를 가지고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다해 온 정성을 기울였다. 그렇게 토요일,일요일도 없이 밖으로 나돌아다니다 보니 자연히 아내가 여러 가지로 고생이 많았다.
1987년-88년 양대선거를 치르면서 광주항쟁에 대한 문제가 많이 거론이 되어 광주 근교에 있던 복직교사들이 광주시내로 발령이 났다. 나도 광주농고 임학 담당으로 발령이 났는데 그러느라고 '전남교사협의회' 회장직을 사퇴해야 했다.
1988년 연말이 되자 8개 중학교와 9개 고등학교 교사들로 구성된 회원이 5백여 명으로 늘어났다.
광주에서는 평교사로 활동을 하고 싶어 이런저런 직책을 모두 사양했다. 광주 시내에 있는 국, 공립학교 선생님들로 구성된 교사협의회가 일단은 평교사협의회를 구성했으나 활성화되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교육민주화는 단시일 내에 이루어지지 않고 많은 어려움이 뒤따르지만 꼭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5월항쟁의 올바른 시각 갖고 교육해야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그동안 정신적으로 고충이 없진 않았지만, 또한 기관에서의 탄압도 그칠 새가 없었지만 나는 내가 한 일이 나 자신만을 위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언제나 자신있게 일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앞에 서기보다는 늘 모퉁이돌이 되고자 하면서 일했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주춧돌이 되곤 했다.
언제나 양심에 비추어 바른 것을 행하고 말하다 보니 관에서도 인간적으로 비난을 하지 못했다. 광주시 교육위원회에서도 내가 워낙 완벽하게 학교생활을 해내고, 일을 처리하는 데에 있어 과격한 방법보다는 뭐든지 대화로 처리한다는 것을 알고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오히려 나에게 상의하러 왔다.
내가 '전남교사협의회' 회장으로 일할 때 나름대로 시도했던 일은 우선 일반회원들과의 거리감을 없애기 위해 특별히 회장 자리를 따로 두지 않고 회의를 하더라도 일반 회원과 똑같은 자리에 앉아서 했다. 또한 영남 교사들과의 교류도 시도하여 지역감정을 해소하는 데 기여하고자 했다. 올해(1989) 1월에는 대구지역 교사들이 광주에 와서 연수를 했는데, 그들은 전남대 5.18광장과 광주시내, 그리고 망월동을 돌아보면서 왜곡, 전달되어 잘못 알고 있었던 광주항쟁의 실상을 깨닫고 돌아갔다.
나는 영남지역 교사들뿐만 아니라 전국의 교사들이 광주항쟁에 대한 진상을 올바로 파악해 학생들에게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요즘 들어 문제를 정부측에서는 금전적으로 입막음하려는 기세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선은 바른 진상을 규명하고 관련자를 반드시 처단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배상 또는 보상 문제를 거론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조사.정리 임금옥) [5.18연구소]
첫댓글 자료 감사합니다.
사랑과 행복이 함께하는 휴일시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