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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경전을 읽다보면 도대체 그 방대한 스케일에 질린다. 세계가 너무 크고 넓어서 이 조그마한 원숭이 두뇌로는 상상을 할 수 없다. SF영화의 대작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스케일이다. 세상에서 중국인들의 뻥이 제일 쎄다고 하는데 그들을 넘어서는 것이 인도인들이다. 중국인들은 아주 먼거리를 10만8천리라고 표현한다. 붕새가 하늘을 나는데 한 번에 10만8천리를 간다나? 인도인들은 아주 먼 거리를 8만4천 요자나라고 하는데 얼핏보면 중국뻥이 더 쎈 것 같지만 1요자나는 12킬로이므로 중국인 거리단위로 계산하면 40만3천2백리이다. 인도뻥이 중국뻥을 훤씬 상회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인도인은 무수히 많다는 뜻으로 갠지스강 모래알 보다 많다는 표현을 한다. 갠지스강의 모래알을 어떻게 세어보지? 이걸 보면 중국뻥은 인도뻥에 게임이 안 된다. 대승경전의 문장과 문구 내용상에는 이런 인도인들의 SF적 사고가 들어있다.
대승경전과 소승경전의 형식상의 차이
대승경전 소승경전
판타지로 시작한다. 시작이 지극히 현실적이다.
등장인물의 수가 많고 등장인물의 수가 적고
가공의 인물들이 많다. 그 당시에 실재로 생존했던 인물들이다.
주인공이 대체로 재가자이다. 출재가자가 다양하게 나오며
수행에 대한 가르침은 주로 출가자가 주인공이다.
경을 설한 장소가 천상이거나 붓다의 발자취마다 경이 설해졌으며
지상이라도 정해진 장소 몇 군데이다. 그 장소가 무수히 많다.
경이 길이가 너무 길어 몇 권의 책 분량이다. 대체로 경의 길이가 짧고 길어도 몇 장을 넘지 않는다.
가르침이 철학적이고 사변적이다. 지극히 현실적인 가르침이다.
너무 어려워서 전문가의 설명이 필요하다. 누구나 읽어보면 알 수 있다.
판타지 요소
대승경전은 대체로 판타지로 시작한다. 초기 대승경전인 금강경은 그래도 소승경전의 형태를 띄고 있으므로 환타지 요소가 없지만 대부분의 대승경전은 판타지적인 요소가 많다.
"붓다께서 보드가야의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으셨을 때, 대지가 청정해지고 보배꽃이 피워나고 향기가 진동하고 수많은 보배가 뿌려졌다. 이때 붓다께서는 무수한 보살과 함께 계셨다."(80화엄경)
"이때 붓다께서 무량의삼매에 드셨다. 그러자 하늘에서 수많은 꽃비가 내리고 대지가 진동하였다. 이때 붓다의 미간에서 백화광명이 뻗어나와 아래로는 아비지옥에서 위로는 유정천의 하늘까지 비추어 그 사이의 모든 중생들이 똑똑히 보였다. 그 빛은 또한 1만8천의 국토를 비추고, 그 국토에는 또 다른 붓다들이 대중들에게 법을 설하는 것이 보였다."(법화경)
"그때에 붓다께서 위신력으로 여러 일산을 합치어 한 일산을 만들어 삼천대천세계를 두루 덮었다. 그러자 그 깊게 넓은 세계가 일산 가운데 나타났다. 그 세계는 수미산 설산 목진린다상 마하목진린다산 향상 흑산 철위산 대철위산과 큰 바다와 강과 개천과 냇물과 샘물, 해와 달, 별, 천궁, 용궁 등의 신의 궁정이었다. 보배 일산 가운데 시방세계의 여러 붓다와 그 붓다께서 법문하시는 모습이 일산 가운데 나타났다. 대중들은 붓다의 신통력을 보고 찬탄하고 경배하고 합장공경하였다."(유마경)
붓다의 위대함은 설명할 수도없고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하고 거룩하기 때문에 이를 한껏 표현하려다보니 이런 문학적 표현기법을 사용했다고 할 수 있겠다. 일단 법회의 모습을 거룩하고 고귀하고 성스럽게 장식할 필요가 있어서 이를 문학적으로 표현했다고 하자. 그런데 굳이 거짓말을 해가며 그렇게 판타지로 꾸며야만 하는가? 사실대로 기록하면 사람들이 별거 아닌 거로 취급할까 두려웠을까? 붓다에 대한 존경심을 꼭 그렇게 표현해야 했을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원래 가짜를 진짜로 보이게 하려면 더 많은 수식어가 필요한 법이다. 사람들에게 환상을 심어줄 필요가 있다. 이건 진짜 대단한 것이라고 아주 강조해야 한다. 그러면 믿음이 강한 사람은 속아 넘어간다. 뻥이 심하고 신비할수록 더 잘 넘어가는 사람들도 있다. 평범한 것은 처다보지도 않는다. 그래서 판타지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판타지 영화는 뻥이라는 것을 알고 보니까 그래도 낫다. 그런데 아주 사실적이어야 하고 진실해야 할 경전에 왠 판타지 문구란 말인가? 법화경에서 나오는 장면인데, 땅 속에서 500요자나(6000키로) 높이의 다보탑이 갑자기 솟아났다는 것을 믿겠는가? 여기에 대해 어떤 고상하고 심오한 의미를 부여한다한들 판타지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소승경전은 이에 비해서 아주 사실적이다. 붓다께서 제자들과 함께 어느 성읍이나 마을을 지나간다. 그러면 마을사람들이은 깨달은 도인이 지나간다는 소문을 듣는다. 그들은 붓다에게 좋은 말씀을 듣기 위해 찾아온다. 찾아와 서로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는다. 앉아서 평소 의심스러운 것을 질문한다. 붓다는 그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해준다. 맛지마니까야의 살라의 바라문 경을 예을 들어보자.
"나는 이와같이 들었다. 붓다께서 많은 비구 대중들과 함께 꼬살라에서 유행하시다가 살라의 바라문 마을에 도착했다. 살라에 사는 바라문 장자들은 붓다께서 유행하시다가 살라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살라의 바라문들은 붓다를 뵈러 가서 붓다에게 절을 하고 붓다와 유쾌하고 기억할만한 이야기로 인사를 나누고 앞에 앉았다. 이때 살라의 바라문들은 붓다에게 이렇게 여쭈었다. '부처님이시여, 어떤 인과 때문에 사람들이 죽어서 악처에 떨어집니까? 어떤 인과 때문에 사람들은 선처에 태어납니까?'"(M41)
이때 붓다는 십악을 저지르면 죽어서 악처에 떨어지고 십선을 행하면 죽어서 선처에 태어난다고 설명한다. 이렇게 어느 지방을 유행하시다가 그 지역 사람들에게 법을 설한다. 이렇게 수많은 장자들, 바라문들, 즉 재가불자들이 붓다를 찾아와 묻고 답하는 경전이 아주 많다. 다른 종류의 경전으로는 붓다께서 출가 비구들에게 가르침을 내리는 경우이다. 이때는 바로 그 자리에서 비구들을 불러 주의를 환기시키고 법을 설한다,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한때 붓다께서 꾸루의 깜맛사담마라는 꾸루의 성읍에 머무셨다. 거기서 붓다께서는 "비구들이여."라고 비구들을 부르셨다. "부처님이시여,"라고 비구들은 붓다에게 응답했다. 붓다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이 길은 중생들을 청정하게 하고, 근심과 탄식을 다 건너게 하고,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사라지게 하고, 옳은 방법을 얻게 하고, 열반을 실현하게 하는 유일한 길이니, 이것은 곧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이다.""(M10)
소승경전은 이렇게 아주 사실적으로 시작한다. 법회 장소를 장엄하게 묘사하는 어떤 수식어도 없다. 그때 청중들의 이름이 나열되지도 않는다. 소승경전은 아주 사실적이다. 사실이니까 사실대로 기술한 것이다. 정직한 것은 오히려 단순하다. 순수한 것에는 가식이 없다. 진실한 것에는 '이것은 진짜야!'라고 주장하는 어떤 문장도 없다. 반대로 위경은 '이것은 진짜다.'라는 것을 매우 강조한다. 오직 이 경을 통해서 붓다가 나왔다고 주장한다. 진실하다면 그런 것을 강조할 이유가 있을까?
등장인물
대승경전은 등장인물의 수가 너무 많다. 그 숫자가 하두 많아서 그 많은 사람이 앉으려면 아주 넓은 장소가 필요할 것이다. 뿐만아니라 등장인물이 대부분 가공의 인물이다.
능엄경
1250인 아라한, 갠지스강 모래알 만큼 많은 보살들, 꼬살국의 빠세나디 왕, 사위성의 장자들.
원각경
대보살마하살 10만 명 문수보살 보현보살 보안보살 금강장보살 미륵보살 청정혜보살 위덕자재보살 변음보살 정제업장보살 보각보살 원각보살 현선수보살
유마경
비구 8천 + 보살 3만2천 +1만의 범천왕 +1만2천의 재석천왕 = 6만2천, 그외 용 야차 건달바 아수라 가루라 마후라가 등.
등관보살.부등관보살.등부등관보살.정자재왕보살.법자재왕보살.법상보살. 광상보살.광엄보살.대엄보살.보적보살.변적보살.보수보살.보인수보살.상거수보살. 상하수보살.상참보살.희근보살.희왕보살.변음보살.허공장보살.집보거보살.보용보살. 보견보살.제망보살.명망보살.무연관보살.혜적보살.보승보살.천왕보살.괴마보살. 전덕보살.자재왕보살.공덕장엄보살.사자후보살.뇌음보살.산상격음보살.향상보살. 백향상보살.상정진보살.불휴식보살.묘생보살.화엄보살.관세음보살 득대세보살. 범망보살.보장보살.무승보살.엄토보살.금계보살.주계보살.미륵보살.문수사리법왕자보살 사리불 장자의 아들 보적, 유마힐 장자
승만경
빠세나디왕 말리부인 승만부인
화엄경
보현보살 보광지덕보살 낙업광명보살 시기대범왕 일광천자 비사문야차왕 각수보살 문수보살 재수보살 보수보살 덕수보살 복수보살 진수보살 덕수보살 지수보살 현수보살 일체혜보살 공덕혜보살 선혜보살 진혜보살 정진혜보살
공덕림보살, 혜림보살, 승림보살, 무외림보살, 참괴림보살, 정진림보살, 역림보살, 행림보살, 각림보살, 견고당보살, 일장보살 월장보살 보장보살 연화장보살 덕장보살 여래장보살 해탈월보살 심왕보살 청련화보살 해운비구, 선주비구 미가장자 해탈장자 해당비구 휴사청신녀 자행동녀 선견비구 무염족왕 대광왕 사자빈신비구니 바수밀다여인 적정음해주야신 구파여인 천주광왕녀 최적정바라문 미륵보살
법화경
1천2백 명의 아라한 + 2천 명의 비구 + 6천 명의 비구니 + 8만 명의 보살 * 2만 명의 천신 + 3만 명의 천신들의 권속 + 1만2천 명의 범천 = 15만2백 명, 그외에도 수많은 용들, 긴나라들, 가루다들, 꿈반다들, 아수라들
법화경에 나오는 15만 명의 청중이 들어서려면 최소한 월트컵 경기장만한 넓이가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법화경을 설한 독수리봉을 가보셨는가? 그 많은 사람들이 들어앉을 자리가 있던가? 독수리봉에 가면 한 2평 정도되는 부처님 방이 있고, 입구에 한 평도 채 안 되는 시자 스님 방이 있고, 그 사이에 많아야 10평 정도의 공간이 있다. 그 공간을 신통으로 넓히지 않는 한 15만 명이 다 앉을 수 없다. 혹자는 독수리봉 아래에 아주 넓은 장소가 있는데 거기서 법을 설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말이 안 되면 번명이 필요한 법이다. 판타지 소설은 상상력만 풍부하면 누구나 쓸 수 있는 것이다. 법화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래도 앞에 비구들이 언급되지만 화엄경에는 비구들은 거의 없고 대부분이 신적인 존재인 보살들이다. 그리고 등등장인물 중에 역사적 실존 인물은 붓다 빼고 아무도 없다. 그 당시 인도에 살았던 인물이 하나도 없다. 대부분이 천상에서 설했기 때문에 신적인 존재들인 보살들의 이름만 잔뜩 등장한다. 유마경도 역시 비구들이 언급되지만 대다수는 가공의 인물들인 보살들이다. 원각경은 아예 비구들은 나오지 않는다.
이예 반해 소승경전은 대부분 인도의 실존 인물들이다. 재가자에서 출가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가공의 인물은 없다. 우리가 알 수 없는 인물이 있다면 도리천왕(재석천왕), 천신들, 범천의 신들 이름 몇 명이 나올 뿐이다. 그 신들이 실재로 붓다에게 와서 질문을 하고 법문을 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승경전에 등장하는 보살들에 비하면 몇 명 되지도 않는다. 소승경전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은 당시 인도에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들이다. 붓다는 항상 비구들과 함께 움직였다. 붓다가 계신 곳에는 항상 비구들이 따라다녔다. 그러므로 대승경전에 나오는 것처럼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그런 거창한 법회가 열렸는데 비구들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면 말이 안 되는 것이다. 보살들은 일일이 열거하면서 붓다 곁에서 항상 시봉하고 따라다니며 법문을 듣고 붓다의 말씀에 따라 수행정진했던 대중들의 이름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대승경전에 등장하는 보살들은 거룩한 존재들이며 거기에 비하면 붓다의 직전제자들이며 아라한들은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숫자만 나열하거나 아예 숫자나 이름을 모두 빼 버렸을까? 이에 반해 소승경전에서는 붓다께서 많은 대중들과 함께 있더라도 항상 붓다와 한 두 명의 대담자의 이름밖에 나오지 않는다. 붓다와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는 사람의 이름외에 대중의 숫자가 몇 명이었는지, 그 모인 대중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언급하지 않는다. 그때 모인 사람들이 누구누구 있었는지 어찌 모두 기술한단 말인가? 붓다와 실제로 대화를 했던 당사자의 이름만 있으면 되는 것을 그 많은 대중들 이름을 일일히 기록해야 할 필요가 있겠는가? 경전의 핵심은 대화의 내용이다. 내용을 기술할 때, 누가 질문하고 누가 대답했다. 이것 외에 거기에 누가 같이 들었다. 그들의 이름은 누구였다라는 기술은 별 의미가 없는 것이다. 회의록에 보면 말을 한 당자자의 이름만 기록되지 않는가? 그때 방청석에 누가 있었다라는 기록이 왜 필요할까?
주인공
대승경전은 주인공들이 대체로 재가불자이다. 유마경의 유마거사, 승만경의 승만부인, 화엄경의 선재동자 등이 그것이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대승불교는 재가불자들이 만든 재가불자 중심의 신불교운동이라는 것이다. 새로운 불교운동이라고들 하지만 사실은 힌두교 신들을 불교에서 아이템을 도용해서 보살들을 창조한 것이다. 재가불자들은 출가자들이 세상의 일에 관심이 없고 오직 정신세계만을 추구하는 것이 못마땅한 것이다. 그래서 세속에 살면서 얼마든지 수행하며 깨달음을 추구할 수 있다고 상황을 재설정한 것이다. 무조건 머리깎고 출가해야만이 수행의 문턱을 넘어서는 것이라는 출가중심주의에 대한 반감이다. 그래서 대승경전은 주인공들이 재가자들이다. 대승의 룰모델인 보살들도 머리를 길고 몸에 온갖 보석으로 치장하고 온갖 화려하게 꾸민 모습에서 재가자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붓다는 검소하게 살아갈 것을 강조했는데, 온갖 보석을 치장하다니 이건 붓다의 계율정신에 위배된다. 대승의 재가자들은 왜 이런 룰모델을 창조했을까? 소승에서 출가자들은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재가자들은 존경을 받치는 입장이었는데 대승에 와서 출가자와 재가자가 평등하다는 주의로 바뀌고, 나아가서 재가자 우월주의를 주장한 것이다. 출가자들은 금생에 혼자 깨달아서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이 목표이지만, 대승의 보살은 붓다가 되기 위해 수 억겁을 윤회하면서 보살행을 닦아야 하므로 지금 출가해서 당장 깨달음을 얻을 필요가 없다. 오히려 함께 세속에 더불어 살아가면서 더불어 함께 공부하고 서로 이끌어주어서 함께 성불한다는 논리를 내세운다. 목표도 상향조정해서 아라한이 목표가 아니고 모든 중생을 다 제도하겠다는 서원을 세운 거룩한 붓다가 목표이다. 그렇게 해서 대승의 보살(재가자)들은 출가자들 보다 우위에 선 것이다. 이런 교리가 아주 훌륭하고 어찌 보면 훨씬 논리적으로 보이지만 거기에는 심각한 오류가 있다. 계속 보살행을 닦으려면 최소한 인간으로 계속 태어나야 하는 조건이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윤회라는 것이 악처에 태어나 엄청난 고통을 겪으며 살아갈 수 있으며, 인간으로 태어나더라도 붓다의 가르침을 만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데에 있다. 그래서 붓다는 금생에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다음 세상은 기약할 수 없다고 자주 강조하신 것이다. 논리는 논리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논리가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는다.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하냐가 무엇보다도 우선해야 하는 것이다.
설법장소
대승경전의 꽃이라고 불리는 화엄경이 설해진 장소가 또한 판타지이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장소가 아니다. 왜 이런 상황설정이 필요했을까? 또한 나머지 대승경전들은 인도의 어느 지방을 설정하기는 했지만 장소가 4~5군데에 지나지 않는다.
법화경 : 라자가하 독수리봉
유마경 : 바이샬리 암바빨리 망고승원
승만경 : 사위성 기원정사
금강경 : 사위성 기원정사
60 화엄경(7처8회) : 제1회 법회 : 보드가야 보리수, 설주는 보현보살 제2회 법회: 보광법당, 설주는 문수보살. 제3회 법회 : 도리천, 설주는 법혜보살. 제4회 법회 : 야마천, 설주는 공덕림보살. 제5회 법회 : 도솔천, 설주는 금강당. 제6회 법회 : 타화자재천, 설주는 금강장보살과 보현보살. 제7회 법회 : 보광법당, 설주는 보현보살. 제8회 법회 : 기원정사.
40권 내지 80권이라는 방대한 분량의 화엄경이 대부분 천상에서 설해졌다. 천상이라는 상황설정이 벌써 위작의 냄새가 난다. 워낙 방대하고 대단한 경전이기 때문에 지상의 인간들에게 씨알도 안 먹힐 것 같아서 천상에서 법회를 열고, 천상의 신들을 대상으로 법을 설한 것일까? 그 때문에 등장인물들도 전부 천신들이다. 그 당시 인도에 생존해 있었던 인물은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 나머지 대승경전은 전부가 왕사성의 독수리봉, 바이샬리, 사위성의 기원정사, 카필라성 등 주로 붓다께서 오래 머무셨고 그 당시 한 나라의 수도였던 곳이다. 그 외에 시골 어디에서 설했다는 경전이 없다.
그에 반해 소승 경전은 붓다의 발자취가 닿는 곳마다 설해진 경전이 있다. 사실을 사실대로 기록했으니 붓다께서 가신 곳에는 그곳에서 붓다께서 하신 말씀이 있었을 것이다. 내가 인도불교성지순례 가이드북을 쓰면서 이곳에서 붓다께서 설한 경전이 무엇인지 알아보다가 이 사실을 발견했다. 소승경전은 붓다께서 머문 곳마다 있지만, 대승경전은 가장 중요한 몇 군데 뿐이라는 것을.
소승경전 중에서 맛지마니까야에 나오는 설법장소를 열거해보면,
웃깟타의 수바 숲에 있는 살라나무 아래, 제따와나, 꾸루의 깜맛사담마, 웨살리 서쪽 교외의 숲, 까삘라성의 니그로다 사원, 숨수마라기리의 베사깔라 숲에 있는 녹야원, 왕사성의 기원정사에 있는 다람쥐보호구역, 왕사성의 독수리봉, 나디까의 벽돌집, 고싱가살라 숲의 동산, 바이샬리의 중각강당, 사위성의 동원정사, 앙가의 앗사뿌라 성읍, 살라의 바라문 마을, 꼬삼비의 고시따 승원, 박가의 악어산 근처에있는 베사깔라 숲의 녹야원, 짬빠의 각가라 호숫가, 바이샬리의 벨루와 마을, 앙굿따라빠에서 아빠나 성읍, 왕사성의 지와까 망고승원, 날라다의 빠와리까 망고승원, 꼴리야에서 할릿다와사나 성읍, 살라 바라문 마을, 짜뚜마의 아말리까 숲, 꼬살라의 날라까빠나의 빨라사 숲, 까시의 끼따기리, 왕서성의 독수리봉에 있는 수까라카따 동굴, 웨발링가 상업도시 부근, 꾸루의 툴라꼿티따, 미틸라에 있는 마타데와 망고승원, 마두라의 군다 숲, 삭까의 메달룸빠 성읍, 우준냐에서 깐나깟탈라의 녹야원, 위데하, 바라나시 케미야 망고 숲, 오빠사다 바라문 마을, 잇타낭깔라의 잇차낭칼라 숲, 데와다하 성읍, 꾸루의 발리하나라 숲, 삭까의 사마 마을, 왕사성의 이시길리 산, 왕사성의 도공 박가와의 작업장, 이시빠따나에 있는 녹야원, 나가라윈다의 바라문 성읍, 까장갈라의 무켈루 숲.
맛지마니까야의 152개 경들을 설해진 장소를 이렇게 일일이 나열한 이유는 붓다께서 인도의 어느 한 지방에만 주석하고 계신 것이 아니고 항상 유행하시면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진리를 설하셨기 때문에, 붓다의 발자취가 있으면 그곳에는 반드시 설한 경전이 있다는 것을 보려주기 위해서다. 그곳에 승원이 있으면 응당 승원에 머무렀겠지만 승원이 없어서 나무 아래면, 나무 아래하고 기술하고, 도자기공의 작업장에서 머무셨다면 도자기공의 작업장, 숲에서 머무셨다면 숲의 이름을 기록했다. 이 얼마나 사실적인가. 대승경전에서는 왕사성의 독수리봉만이 설법장소로 등장하지만, 소승경전에서는 왕사성에서도 붓다께서 머물렀던 장소가 독수리봉만이 아니다. 왕사성의 이시길리 산, 검은 바위(깔라실라), 인다살라 동굴, 죽림정사 등에서도 머무셨다. 이 모든 장소에 설해진 경전이 있다. 그런데 대승경전은 붓다께서 가장 자주 머물렀던 특별한 장소인 독수리봉만을 언급한다. 이게 조작이라는 확실한 근거가 아니고 무엇인가? 소승경전의 상윳다니까야나 디가니까야에 나오는 수많은 경들의 장소를 다 열거하려면 책 한 권 분량은 될 것이다.
경의 길이
유마경 A4용지 58쪽
60화엄경 : A4용지 약500쪽
80화엄경 : A4용지 1500쪽~2000쪽
법화경 : A4용지 약240쪽
대승경전의 특징 중의 하나가 경이 매우 길다는 것이다. 가장 긴 화엄경의 경우에는 A4용지에 10포인트로 기록하면 1500쪽이 넘는다. 이를 신국판으로 하면 4500쪽, 권당 600페이지로 하면 8권 분량이다. 방대한 분량이다. 설법을 한 번에 한 것이 이니고 8번 또는 9번에 걸쳐 이루어 진것으로 설정하고 있지만 그래도 방대한 분량이다. 이렇게 법을 설하려면 대화엄법회를 열어야 할 것이다. 이를 모방해서 절에서는 100명의 스님을 초청해서 백고좌화엄대법회를 열곤 한다. 법화경은 신국판으로 책 한 권 분량이고, 다른 대승경전들은 책 반권 분량이지만 그래도 소승경전에 비하면 훨씬 길다.
소승경전은 아주 길이가 짧다. 상응부에는 책 한 페이지도 안 되는 경들이 수두룩하다. 붓다께서 생각날 때마다 바로 법을 설하셨기 때문에 아주 짧은 경들이 대부분이다. 가장 긴 것으로 추정되는 디가니까야의 대반열반경이 신국판으로 150페이지 분량이지만, 이는 아주 긴 여정의 기록을 모은 것이다. 안거 전에 왕사성의 독수리봉에서 출발해서 한 두달 여행 끝에 바이샬리에 이르고, 그곳에서 6월부터 9월까지 여름 안거를 보내시고, 다시 출발해서 이듬해 4월 꾸시나가르에서 대열반에 드실 때까지의 기록이다. 대열반을 향해 걸어가신 마지막 1년이라는 기나긴 여정에 설하신 법문을 모은 것이다. 이 외의 소승경전은 아주 길이가 짧다. 붓다께서는 요즘처럼 법회를 연다고 공고를 내고 대중들을 모으고 법상에 올라 장광설을 설하지 않으셨던 모양이다.
사실 붓다처럼 자아가 소멸한 성인들은 대체로 수동적인 삶을 살아간다. 내면은 텅 비어있고 고요와 평온을 즐기기 때문에 일부로 생각을 내어 법을 설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찾아와 질문을 하지 않으면 일부러 말을 하지 않는다. 옆에서 입력이 들어오지 않는 한 컴터가 작동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것이 나의 가르침이다. 나의 위대한 가르침이다. 나의 가르침만이 훌륭하다. 다른 이들의 가르침은 저열하다."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자기 견해를 강하게 강조하거나, 강제로 남에게 주입시키는 폭력적인 행위를 하지 않는다. 요즘의 성직자들처럼 카리스마를 무기로 대중들을 선동하지 않는다. 한 번에 그 많은 분량의 법을 설하지 않는다.
"이로움을 주지 않는 천 마디 말보다 들으면 바로 고요해지고 이로움을 가져다주는 한 마디 말이 더 가치가 있다.(법구경 게송 100번)
진짜 스승은 아주 짧게 이야기 한다. 짧은 가르침 속에 핵심이 들어있는 것이다.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남을 설득하느라 말이 길어지는 것이다. 중국의 조사스님들 말씀이 장광설이던가? 중국의 깨달은 선사들은 한 단어를 가지고 납자들을 제접했던 것이다.
철학적 아니면 현실적
붓다는 철학적 사변을 좋아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오직 있는 그대로 말했다. 어려운 말은 하지 않았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말만 했다. 본인의 능력으로 알 수 있는 문제라도 듣는 청중의 입장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오직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삼사빠 숲 경, S56.31)
이에 비해 대승경전은 매우 철학적이고 사변적이다. 이 때문에 관념적 철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훞륭한 먹이감이 된다. 그들은 그것을 먹고 즐긴다. 하지만 실제의 삶에 아무 도움이 안 된다.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길로 나아가는데 하등의 도움이 안 된다. 오히려 사람들은 그 교리를 믿고 보살도를 행한다고 하면서 수행을 등한시한다. 게으르고 나태한 행위를 하면서도 보살도를 행한다고 변명한다, 심지어 그들은 수행하는 사람들을 비난하기 까지 한다. "저들은 혼자 깨달으려고 하는 소승들이야."라고 하면서. 이것은 지금 이 순간 마음챙기며 정신세계의 향상을 위해 나아가라는 붓다의 말씀에 위배된다. 교리가 뒤바뀐 것이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 아닌가?
맺는 말
이렇게 경의 형식적인 차이를 가지고 경전의 진위여부를 살펴보았다. 어떤 이들은 내용이 중요하지 겉만 가지고 따진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내용을 가지고는 위작인지 가려내기가 어렵다. 말이 고상하고 추상적일수록 판별을 할 수 없는 것이다. 누구나 얼마든지 덕담을 할 수 있고, 좋고 훌륭한 말씀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진실한 것인지는 지혜가 있어야 판별이 가능하다. 그래서 차라리 형식적인 부분을 따지는 것이 증거가 확실하다. 학자들은 역사언어학적인 문제를 가지고 진위를 가린다. 소승경전에 나오는 단어가 대승경전에서 나오지 않는다던지 하는 시대적인 언어의 차이를 따져서 이것은 역사적으로 어느 시대에 생긴 것이다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서양의 언어학자들은 그런식으로 대승경전이 후대에 생긴 것임을 증명했지만, 나는 그런 능력이 없어 단지 형식적인 차이점으로 이것이 위작이라는 증거로 삼은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붓다만 위대한 존재냐? 붓다 이후에도 얼마든지 위대한 존재들이 나타날 수 있다. 그런 존재들이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붓다의 이름을 빌려 중생들을 깨우치기 위해 자신의 깨달음을 기술했을 수도 있다. 그들이 대승의 위대한 선지자들이며, 그 경전들이 대승경전이다. 그들은 붓다의 가르침을 계승하고 더욱 발전시킨 것이다." 이런 주장도 어찌 보면 일리가 있다.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볼 수 없다. 지금도 인도에서는 대단한 존재들이 나타나 새로운 교리를 설파하고 새로운 가르침을 설하고 있으니까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의 깨달음이 진짜인지, 완벽한 것인지, 중간 단계인지, 아니면 진짜 아니올시다인지 알 수는 없다. 설사 그들이 진짜 깨달은 사람들이고 붓다만큼 위대한 존재들이라고해도 붓다의 이름을 사칭하면 안 되는 것이다. 떳떳하게 자신의 이름을 밝혀야지 왜 가짜를 진짜처럼 위조하는가?. 소승처럼 붓다의 말씀이 아니면 논장에 집어넣으면 되는 것이다. 굳이 위작을 해가면서 붓다의 가르침을 왜곡할 필요가 있었을까? 후대 사람들이 헷갈려하게 되고, 논란과 논쟁의 불씨가 되고, 교단이 찢어지고 타락하게 만든 원인을 제공하면서 말이다. 경전에는 자이나교 교주가 제자들에게 한쪽은 영원히 존재한다고 하고, 다른 한쪽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르쳤다고 한다. 그로 인해 교주가 죽자마자 교단은 두쪽을 갈라졌다. 이와 같이 대승과 소승은 교리가 다르므로 교단이 갈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좋은 논리라고 해도 붓다의 말씀을 왜곡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는 원인이다. 논쟁과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므로 대승경전을 찬술한 사람은 선업을 지은 것이 아니고 악업을 지은 것이다.
첫댓글 _()()()_
지당한 말씀입니다 좋은말씀 잘 읽고 사유하는 시간입니다 좋은하루 하루 되소서-( )-
그런데 왜 초기불교를 소승이라고 하시는지..
사두 ~사두 ~사두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건강하십시요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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