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편지
고린도후서 3:1~3,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추천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은 너희에게 받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싸움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오늘 본문 말씀의 배경은 이러합니다. 사도 바울이 이차 전도 여행을 통하여 고린도 시에 도착하여 그곳에 큰 규모의 교회를 세워놓고 다시 돌아갔다가 3차 전도 여행을 시작하여 소아시아 지역의 에베소 교회에 머물 때였습니다. 그 때 거짓 교사가 유명 유대 지도자의 추천장을 가지고 고린도교회에 들어와서 자기를 대단한 기독교 지도자로 내세워서 사람들을 미혹하였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그 추천장을 보고 그 가짜 교사에게 속아서 사도 바울이 가르쳐준 복음과 좀 다른 강조점을 가진 것들을 배우기도 하고 무엇보다 사도 바울의 사도적 권위를 의심하는 말들을 듣고 흔들리기도 하였습니다. 그 가짜 교사들은 사도 바울에 대한 악소문을 퍼뜨려서 이런 저런 모양으로 성도들의 순수한 신앙을 흔들어놓았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자기들은 대단한 사람의 추천서를 이렇게 받아 가지고 왔는데, 사도 바울은 추천서가 없었지 않느냐고 말했습니다. 아마도 이 사람들은 예루살렘의 유명한 지도자들인 야고보나 베드로의 추천서를 만들어서 그것을 자기들의 종교적 권위를 세우는 데 교묘하게 이용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추천서 없이 그곳에 와서 복음을 전도하여 교회를 세운 사도 바울을 깎아내리고 자기들을 드높이고자 하는 악한 짓을 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사도 바울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진정한 영적 지도자는 누구인가에 대하여 이 고린도후서 3장 부분에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가르쳐주고자 한 것입니다.
3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추천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은 너희에게 받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사도 바울과 그와 동행하였던 디모데나 실라와 디도 같은 전도자들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영적 권위를 인정받기 위하여 자기는 이러한 대단한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추천해서 인정받을 필요가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혹은 그렇게 인정받기 위하여 고린도교회에게 추천서를 부치거나 그들로부터 받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추천서를 동봉하여 보낼 필요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마치 부모가 자식을 낳았는데, 그 자식들에게 내가 너희들 부모인 것을 증명해주는 증명서를 보내달라고 하는 것처럼 이상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자녀를 낳은 부모는 그들을 낳고 젖을 먹이고 사랑으로 함께 아기 때부터 소년기까지 사랑으로 볼봄으로써 그들의 아버지, 어머니인 것을 스스로 입증해보였는데, 갑자기 소년이 그 부모에게 나를 낳은 부모인 것을 증명해달라고 하면 이것처럼 황당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그 고린도교회를 세운 개척 선교사로서 자기의 사도 됨을 입증하기 위하여 추천서를 고린도교회에 보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사도 바울이 쓴 편지라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신앙과 삶은 사도 바울의 목회의 열매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가르침을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받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믿었고 사도 바울이 기도하고 안수하고 축복함을 따라서 그들이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 성도님들의 신앙과 삶은 사도 바울의 사역의 결과물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과 그 선교단은 그들의 영적 부모가 되어서 그들의 언어를 신앙의 언어로 바꾸었고 그들의 삶을 이교도적인 방탕한 삶을 거룩한 삶의 방식으로 바꾸었고 그들의 삶의 이유와 목적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섬기고 전하는 삶으로 바꾸게 하였습니다. 이전에는 술집과 우상의 집과 방탕한 축제에 참여하는 일로 세월을 낭비했다면 이제는 교회 중심으로 경건하고 거룩한 예배의 삶을 살며 기도하며 전도하는 삶을 살며 성도들끼리 복된 교제를 나누는 삶으로 달라졌습니다. 이 모든 것이 사도 바울 일행이 와서 일으킨 혁명적인 변화입니다. 그들의 집에는 술과 싸움으로 남아나는 것이 없었는데 이제 술병이 집안에서 사라지고 부서진 장롱과 부서진 밥상이 치워지고 소박하지만 장롱과 밥상과 단정한 옷들이 채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늘 소리 지르고 싸우고 그릇 깨지는 소리가 울타리를 넘던 집에서 식구들의 웃음 소리와 아이들의 찬송 소리가 집밖에까지 들리는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사도 바울과 그 전도단의 사역의 결실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사도 바울이 쓴 편지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수고한 사역의 열매가 바로 그렇게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신앙과 삶에서 그대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것은 부모의 모든 애씀과 교육의 열매가 그 자식에게 나타남과 같습니다. 자식은 자기가 자유롭게 행하며 생각하며 결정하며 말하지만, 그것들은 다 그의 부모의 모습을 이어받곤 합니다. 그래서 자식은 어느틈엔가 부모가 하는 말과 생각과 행동을 그대로 따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유전인자 DNA의 신비로운 영향력인지, 아니면 후천적인 과정에서 보고 들은 것 때문인지, 아니면 환경 때문인지, 그 부모의 모습을 그대로 합니다. 그래서 자식을 보면 그 부모가 보이는 것입니다. 자식은 부모의 영광을 드러내기도 하고 부끄러움을 가져오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식들은 모름지기 부모님의 위신 때문이라도 항상 품행을 조심하고 언행을 삼가야 하는 것입니다. 자식들은 모름지기 자기 때문에 부모님에게 영광이 돌아가도록 자신을 삼가야 합니다.
영적인 점에서 제가 천안에 내려와서 행한 목회 사역의 열매가 바로 여러분입니다. 여러분의 신앙, 여러분의 삶이 제 사역의 열매인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의 삶의 문제가 있다면 그것도 제 사역의 열매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의 행복과 성공과 건강도 제 사역의 결실이기에 제 기쁨이요 면류관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도 여러분의 삶의 아픔이나 실패나 슬픔이나 근심도 여러분만의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섬기는 목회자로서 제 중요한 기도 제목이며 제 영적 책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주님께서 자기에게 맡겨주신 양들을 섬기는 것에서 이것이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무한한 영광이기도 하고 무한한 책임이기도 합니다. 할렐루야.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 2:19,20 말씀에서 한 고백이 모든 목회자의 고백이며 보람입니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그렇습니다. 장차 천국에 가서 제게 가장 큰 행복과 기쁨이 여러분이 천국에 들어와서 주님으로부터 아름다운 상급을 받고 천국의 영광에 동참하는 것을 보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제 사역의 가장 큰 영광이요 보람이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선언합니다.
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사도 바울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선언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를 나타내는 편지라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편지들은 한 개인에게 쓰는 편지도 있었지만 공동체에 보내는 일반 편지로서 여러 교회에 순회하면서 돌려 읽곤 하는 편지도 많았습니다. 우리가 읽고 있는 신약 성경의 대부분의 글들이 이러한 순회 편지들입니다. 갈라디아서는 갈라디아의 여러 교회들에 돌려 읽어야 했습니다. 골로새 교회 성도들 역시 라오디게아 교회에 읽은 편지를 보내야 했고 라오디게아에서 오는 편지도 읽으라고 사도 바울의 권면을 받았습니다(골로새서 4:16). 그 편지를 통하여 사도 바울의 간절한 심령을 읽을 수 있어서 편지를 보고 때로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눈물로 회개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편지는 그 당시에 매우 유용한 메시지 전달 방법이었습니다. 지금도 손으로 쓴 편지를 우리가 읽으면 그 편지를 소중히 간직하며 여러번 읽지 않습니까? 그 편지 속에 그 쓴 사람의 마음과 생각과 애정을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오늘날 이메일로 보내는 편지들 중에 보면 쓸모 없는 광고성 메일도 있고 유해한 메일, 혹은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메일도 옵니다. 그래서 그러한 메일들은 읽지도 않고 쓰레기 통에 다 집어 넣고 삭제해버리곤 하는 편지도 있습니다.
편지는 이렇듯 그 받는 사람에게 이렇듯 메시지를 담아 전달되는 귀중한 의사표시 수단인데,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 자신을 향하여 너희가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선언합니다. 세상에 그리스도로부터 세상 사람들에게 보내지는 편지 곧 모든 사람들에게 읽어보라고 전해지는 편지가 바로 너희들이라고 사도는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사도가 그들에게 성령으로 쓴 모든 사람에게 읽으라고 보낸 그리스도의 편지인 것입니다. 그 성도들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누구인가, 어떠한 분인지 세상 사람들이 읽고 볼 수 있는 주님이 보낸 사랑과 초대의 편지라는 것입니다. 그 성도를 보면 세상의 구주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자연스럽게 알게 되고 믿게 되어지는 편지라는 것입니다.
조선 말, 일제 초에 저 미국 서부에 우리나라 이민자들이 많이 건너가 살았는데, 대부분 사람들이 가난하고 술 취하고 서로 조선인들끼리 싸우곤 했답니다. 그런데 어느날부터인가 그 사람들이 변했습니다. 술도 안 취하고 싸우는 일이 없고 사람들의 눈빛이 달라지고 무엇인가 적극적으로 변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곳에 안창호 선생님이 미국 유학차 와서 그들 한인 동포들을 보면서 깊이 생각한 나머지 유학을 포기하고 흥사단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을 모아놓고 삶을 새롭게 살도록 가르치며 된장 냄새도 풍기지 않도록 하고 여인들이 함부로 팬티나 옷들을 밖에 걸어 말리는 일까지도 삼가며 예절바르고 조국을 위하여 살고 동포들이 서로 돕는 기풍을 일으키는 운동을 힘차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느날 한 동포가 살던 미국인 집 주인이 세 들어 살던 한인 세입자를 부르더니, 이렇게 묻더랍니다.
“당신들 한인들에게 누군가 위대한 지도자가 찾아왔소?”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내가 보니 당신들이 달라졌소. 분명히 위대한 지도자가 찾아온 것 같소.”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바로 그렇게 달라진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세상에 알리는 주님의 위대한 편지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를 보면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함께 믿게 싶어하는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 중에서 먼저 성경을 직접 읽고서 연구한 후에 예수님을 믿기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우리가 보여주는 성경으로서, 성경의 대주제이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말로서, 행함으로써, 보여줄 때 그들이 어느틈엔가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믿고 싶은 마음이 생겨 주님께로 나오는 것입니다.
저 아브라함의 종 늙은 종 다메섹 엘리에셀이 동방에서 가서 그 주인의 아들 이삭의 아내를 얻으려 갔을 때 리브가가 어떻게 그 다음날 바로 그 종을 따라 이삭의 아내가 되겠다고 천리 만리가 되는 길을 바로 따라나설 수 있었겠습니까? 그 종의 모습에서 품격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 추천장 없어도 시아버지 아브라함의 편지 한 장 없어도 남편 될 사람 사진 한 장 없어도 아브라함의 편지인 그 늙은 종의 인격과 말 속에서 진실함과 충성됨을 보았기에 그 종의 주인 되는 자기 남편 될 사람을 믿을 수 있어서 바로 따라 나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런 충성스러운 종이 됩시다. 그리스도의 편지가 됩시다. 그리하여 우리를 보고 나도 당신이 믿는 그리스도를 믿겠노라고 따라 나설 수 있는 진실한 그리스도의 증인, 작은 예수가 됩시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