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없음 어제, 4월 28일은 충무공 이순신의 탄신일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나의 꿈은 '연제형 이순신장군'이었다. 지금도 충무공 탄신일과 충무공 노래는 잊지 않고 있다.
태평양전쟁시 전쟁이 3개월 이상 지속되면 일본은 미국에 반드시 질것이다고 예언하면서도 나라의 명을 받아 진주만을 습격했던 일본의 해군제독 '야마모토 이이소로꾸'가 무적함대를 괴멸시켰던 드레이크나 나폴레옹의 프랑스 연합함대를 물리쳤던 넬슨 보다도 존경했던 성웅 이순신!
장군을 기리면서 아래에 경희대학교 교양강좌 한국역사와 문화 (고성애 교수님) 레포트 자료를 교육적인 목적으로 인터넷에 올린 글을 게재했다. 글이 너무 길어 읽기에 숨이 차리라 여겨지지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심정이다.아쉬운 것은 함께 실린 사진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지만 실력이 부족한 탓이니 이해 바란다.
<현충사 답사를 나서며>
답사일 : 2000. 4. 13
날씨 : 맑음
어렸을 때부터 임진왜란의 명장 이순신 장군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어느 언론사에서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뽑으라는
설문조사를 했는데 세종대왕 다음으로 이순신 장군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뽑혔다.
막연히 임진왜란의 명장이라고만 알고 있는 이순신 장군....
그의 삶과 그가 일궈낸 국가적 역사를 알아보기 위해 답사의 장소로
충남 아산에 있는 현충사를 선택했다.
아침에 선거를 하고 현충사로 향했다. 먼저 현충사로 가는 길을
파악하였다.
오산까지 가서 1번국도를 타고 아산에서 다시 45번국도를 타고...........
길을 가는 곳곳에 활짝 핀 진다래 꽃이 많이 보였다. 현충사로 가는
길목에 양쪽으로 들어 서있는
아름드리 나무들을 보니 실로 가을경에는 경치가 영화속에서는 나오는
그런 기가막힌 경치이지 않을까싶은 생각이 들었다.
임시휴일이라 현충사에서는 많은 관람객들이 오고 있었다.
고풍스럽게 지어진 현충사로 발걸음을 향했다.
소년시절
이순신 장군의 어머니 변씨는 어느날 밤, 이상한 꿈을 꾸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꿈속에 나타나, "우리 가문에 또 손이 날텐데, 이 손자는
앞으로 나라를 구할 큰 인물이니라, 손자가 태어나거든 이름을 순신이라
짓도록 하여라" 라고 하였다.
아버지 정(貞)이 그 말을 듣고 이상히 여겨 점을 쳐보니 "길하다, 나이
50이되면 응당 칼을 짚고 명장이 되리라"하는 것이었더니,
과연 어려서부터 범상치 않았고 또한 큰 뜻을 품었다.
이순신은 1545년 조선 제 12대 왕인 인종(仁宗)원년 3월 8일 새벽에
한성부 건천동에서 태어났다.
충무공의 자(字)는 여해이고, 덕수이씨 집안의 네형제 가운데서
셋째아들이었다.
이 네형제는 중국의 옛이야기에 나오는 어진 임금 중에 복희씨, 요임금,
순임금, 우임금의 이름자를 따서 맏아들은 희신, 둘째아들은 요신,
그리고 할아버지가 꿈속에서 일러준대로 셋째아들은 순신이라 이름
지었고, 넷째아들은 우신이라고 불렀다.
충무공이 태어날 무렵에는 나라를 다스리는 벼슬아치들 사이에 당파싸
움이 한창이었다.
서로의 흠을 들퉈내어 상대편을 몰아내고 세력을 잡으려고들 하였다.
그래서 나라를 위해 일해야 할 인물들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거나
조정에서 쫓겨 나는 일이 계속되었다.
그것을 사화라고 하는데 기묘년에 일어나 기묘사화는 권세를 잡으려는
사람들이 조광조와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드에게 역적모의를 했다고 죄를
뒤집어 씌운 것이었다.
이순신의 할아버지인 이백록도 이 사건에 관련되었다는 누명을 쓰고
벼슬을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혹독한 고초를 당하다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 나라가 어지럽고 집안까지도 당파싸움으로 피해를 입자,
이순신의 아버지 이정은 책만 읽고 벼술에는 뜻을 두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순신이 태어날 무렵, 공의 집안은 아주 가난하였고 어머지
변씨 부인은 삯바느질 같은 것을 부지런히 하여 어려운 살림을 꾸려
나갔다.
이처럼 가난한 사림을 서울에서 더 이상 꾸려나가기가 힘에 겨워지자,
이순신 가족은 어머니 변씨의 친정집이 있는 지금의 충청남도 아산군
염치면 백암리롤 이사를 하게 되었다.
야산으로 떠나게 되자 이순신은 절친한 벗인 유성룡과의 이별을 아쉬워
했다. 성룡은 고향이 안동이었으나 당시 아버지가 서울에서 벼슬을
하게되자 가족이 나뉘어 살고 있었다.
이 다정한 두 벗, 소년대장 이순신과 글방도령 유성룡은 뒷날 임진왜란
때에 우리나라의 방패와 기둥이 되어 나라를 지켰다.
청년시절
공이 나이 스무살이 될 즈음, 북쪽 변경에는 오랑케들이 넘나들며
우리의 백성들을 괴롭히고, 남쪽바닷가 마을에는 왜구의 노략질이
심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충무공은 겨레의 방패가 되어 나라를
구하리라 결심을 하였다. 당시 무인의 길이 비록 문인들로부터 업신
여김을 받고 있었지만 그것이 나라에 충성하는 길이라 여겼던 것이다.
이러한 뜻에서 공은 28세 되던 해 8월, 훈련원에서 실시하는 별과시험을
치렀다.
그런데 공은 시험장에서 무술시험중에 말을 타고 달리다가 불행히도
말에서 떨어져 왼쪽 다리가 절골되었다.
이를 바라보던 모든 사람들이 "저 사람은 죽었구나"고 놀라고 있을 때,
충무공이 한발로 일어나 곁에 있는 버드나무 껍질을 벗겨 다리르 매고
걸어나와 보던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공이 얼마나 지조, 자립 정신이
강했던가를 보여준 일화의 하나이기도하다.
이렇듯, 공의 일대기를 보면 남의 힘에 의존하지 않고 오로지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는 자조, 자립의 정신을 자주 볼 수 있다.
공은 그러한 성품과 신념 때문에 32세가 되어서야 과거에 급제하였고,
45세에 정읍현감, 47세에 전라좌수사의 벼슬에 올랐다. 사대부 세도가의
자손들이 30세 안팎에 큰 벼슬에 올랐던 사실과 비교하여 볼 때 출세가
상당히 늦었음을 알 수 있다.
함경도에서 벼슬하던 시절 (녹둔도 싸움)
북쪽 변방에서 백성들을 괴롭히던 오랑캐들도, 충무공이 조산보 만호로 전출되어가, 국경을 지키자 함부로 쳐들어오지 못하였다. 조산보 만호로 부임한 이듭해 (1587년, 선조 20년) 8월, 공은 녹둔도의 둔전관을 겸하게 되었다. 그이 나이 40세 때의 일이었다. 녹둔도란 함경도 경흥 고을에서 60리 떨어진 곳에 있는 섬으로 우리말로는 사슴섬이라 부르던 곳이다. 이 섬은 두만강이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어귀에 있으며, 조산보에서는 20리나 떨어져 있었다. 녹둔도 둔전관이란 이 섬의 농장을 괄리하고 개척민을 보호하는 일을 하는 벼슬이었다. 녹둔도 둔전관을 겸하게 된 공은 지형을 조사하고 북병사 이일에게 공문을 보냈다. " 이 곳 녹둔도는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오랑캐들이 호시탐탐 쳐들어올 기회를 엿보고 있는 곳인데, 지키는 군사의 수가 너무 적으니 군병을 더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내용의 공문을 여러 번 보냈지만 이일은 공의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충무공은 하는 수 없이 튼튼한 나무로 진을 세우고 그 곳에 10여명의 군사를 두어 지키게 하는 한편 백성들의 농사일을 도와주었다. 그 해 가을에는 풍년이 들어, 백성들이 기뻐하기도 하였지만 한편 불안하기도 하였다. 풍년이 든 것을 알고 곡식을 탐낸 오랑캐들이 쳐들어 올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어느날 섬 사람들이 논밭에 모두 나와 마을은 텅 비어있을 때, 오랑캐들이 몰래 쳐들어왔다. 그 때 마을을 지키던 진지에는 10여명의 군사밖에 없었는데 오랑캐들이 엄청난 군사를 몰고 짙은 안개를 이용하여 쳐들어왔던 것이다. 10여명의 군사들은 용감히 싸웠으나 엄청난 수의 오랑캐들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들에서 추수를 돕고 있다가 뜻밖의 보고를 받은 공은 군사들을 이끌고 오랑캐가 짓밟은 마을을 향해 달려왔다, 날쌘 장수들과 함께 오랑캐들을 쫗아가 사로잡혀 가던 우리 백성 60여명을 구했다. 공은 적과 싸우는 동안 왼편 다리에 화살을 맞았지만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질까 봐 화살을 뽑고 용감하게 싸웠던 것이다. 이 녹둔도 싸움에서 충무공의 군사는 크게 승리 했지만 10여명의 전사자와 수십 명의 부상자를 었고, 농민과 부녀자 수십명이 오랑캐에게 끌려가는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녹둔도 싸움 소식은 곧 북병사 이일에게도 알려졌다. 이일은 수비 군사를 더 보내달라는 공의 청을 거절하였던 것을 은폐하기 위해, 강제로 공을 옥에 가두고 거짓으로 이야기를 꾸며 조정에 올렸다. 조정에서는 이일의 보고를 받고, 충무공에게 그 책임을 물어 백의종군(白衣從軍)케 하였다, 즉 벼슬에서 쫓겨나 병졸의 자격으로 나가 공을 세우면 자유의 몸이 될 수 있는 죄명이었다. 충무공은 함경도 순변사(巡邊使)밑에서 종군을 하여, 그해 겨울 전공을 세우고 죄명을 벗었다, 공의 마음은 오로지 나라사랑에 바쳤지만, 벼슬도 없이 고향인 아산의 본가로 돌아왔던 것이다.
세계최조의 철갑선 거북선의 건조 (전라 좌수사 시절)
아무런 국방준비가 없었던 당시에 충무공은 갖가지 준비를 갖추기에 여념이
었었으며, 조선사상(造船史上) 세계 최최의 철갑 거북선을 창건하여 숫적으로
우세한 왜적함대를 격파하고 큰 공을 세웠다. (어느 기록에는 철갑 거북선이
중국에서 먼저 발명되었다고도 한다. 하지만 그 쓰임새를 가장 잘 활용한 것이
충무공이었다고 한다) 거북선을 건조하게 된 동기는 "신(臣)이 일찍이 왜적은
난리가 있을 것을 걱정하여 특별히 거북선을 만들었사온데, 앞에는 용의 머리를
붙여 입으로 대포를 쏘고, 등에는 쇠못을 꽂았으며, 안에서는 밖을 내다볼수
있고, 비록 적선 수백척 속에라도 뚫고 들어가 대포를 쏘게 하였습니다." 라고
올린 장계(狀啓)에 나타나 있다.
이 기록만 보더라도 얼마나 용의주도하게 창의력을 발휘했는가를 알 수 있다.
한편으로는 조총을 연구하여 정철총통을 만들었으며, 사조고, 장병검등을 만들
어 해전에 사용하였다. 우리는 역사를 통하여, 국민의 창의력과 개척정신이
희박했을 때 국운이 기울어지고 급기야는 몰락의 과정을 밟았음을 알 수 있다.
나라가 위태로운 혼돈에 빠졌을 때, 충무공이 이를 극복하고 민족을 수호할 수
있었던 것은 탁월한 창의, 창조적 힘을 발휘한데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여기에는 많은 고초와 외로움이 따랐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바탕이 되어 국가를 위기에서 구출할 수 있었던 위대한 힘을 낳게
되었고, 정사에 빛나는 불후의 공적을 쌓았던 것이다. 당시 일본은, 이른바
전국시대라는 혼란기를 수습하고 점차 통일의 기운이 무르익어 갈 무렵,
도요토미(風臣秀吉)가 통일의 대업을 성취하고, 그 여세를 몰아 우리나라와
중국대륙에 까지 손을 뻗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같은 왜적이 호시탐탐
침략의 기회를 노리고 있는 위급한 상황에도 조정에서는 이를 대비한 아무런
대책도 없이, 오히려 당쟁만을 일삼는 한심스러운 상태였다. 더구나 일본의
실정을 알아보기 위해 일본을 다녀온 통신사들이 정반대의 보고를 하자,
조정에서는 안일무사를 바라는 낙관론에 기울고 말았다. 그러나 공은 왜적이
침략해오리라고 예견하고, 이에 대비하는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일기에서도 볼 수 있듯이 충무공은 영내에 앉아있기만
하지않고 관하 각 포구를 직접 돌아보면서 무기를 점검하며 방비에 전념하였다.
거북선을 완성한 것은 4월 12일이며, 임진왜란이 발발한 것은 4월 13일이었다.
공의 전란에 대처하는 피나는 노력으로 바로 경상. 전라의 연해안을 철저히 방
비하여 수백척의 왜선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공의 유비무환의 정신을 또한 깊이 새길수 있을 것이다.
해전의 대승첩 (부산해전)
임진년(1592년) 4월 15일, 공은 경상수군절도사 원균(元均)으로부터 왜선 내습의
급보를 받았다. 이에 부산포가 4월 14일에 점령을 당했으며, 왜적은 계속하여
동래, 양산등 내륙지방으로 전진해 오고 있다는 통보가 연이어 들어왔다.
원균은 수영을 스스로 불사르고 무기를 바다에 던져 버린 후, 자기 수군을 해산
시켜버렸다. 그리고 몇 명의 부하와 함께 한척의 전선을 몰고 고성까지 단숨에
200리 길을 도망쳐 버렸다. 이때, 충무공은 불과 24척의 전선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고성으로 도망친 원균으로부터 왜선 500여척의 대함대가 부산포를
거점으로하여 서서히 전라도 앞바다로 침범해 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실,
왜적들은 내륙지방으로 성큼성큼 진격해 들어가며 노략질을 일삼는 육군을 돕기
위해서 왜수군의 대함대는 전라도 남해를 돌아 서해로 나와서 평양에서 왜육군과
합류하려는 작전을 짜고 있었다. 5월 4일 새벽 2시, 공은 칠흑같은 한밤중에 함
대를 이끌고, 경상도에 침입한 왜수군과 싸우기 위해 여수를 향해 출발하였다.
충무공은 겁 많고 실전에 경험이 없는 장졸들을 격려하고 조심스럽게 수색하면서
전진하였다. 5월 7일 옥포만에서 적선과 처음 맞추친 공은 적을 급습하여 26척의
왜선을 격침, 첫 싸움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옥포해전은 임진왜란 중에 우리
군사가 처음으로 승리한 싸움이었다.) 우리 수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아
졌고 왜군과의 전투에 비로소 자신을 갖게 되었다. 이에 힘 입어 공의 함대는
계속하여 함포에서 왜선 5척을 무찌로고, 적진포에서 적의 전선 11척을, 사천에
서 13척 등 당항포에서 율포에서 연이어 왜적을 수장해 버렸다.
연이은 패전으로 왜적들은 겁을 먹고 종적을 감추어 버렸으므로, 공은 함대를
이끌고 여수로 회군하였다. 여수로 회군한 공은 거듭 훈련을 강화하여 전력을
기로고 있었다. 7월 상순에 들어서면서 왜군이 견내량에 집결하기 시작한다는
정보를 얻은 충무공은 56척의 연합함대를 이끌고 다시 출전하였다.
견내량은 대 함대가 싸우기에는 불리한 곳임을 판단하고, 적의 함대를 외양으로
유도하여 한산도 앞 바다에 이르렀을 때 돌연히 뱃 머리를 180도 돌려 학익진을
폈다. 마침내 전선 73척중 7척은 싸우기도 전에 미리 도망쳤고 66척은 바다 속에
가라앉거나 불탔다. 이 싸움에서 적의 장수들은 대부분 전사하였으며,
육지로 도망쳤다가 할복자살한 장수도 있었다. 이 해전을 일컬어 한산대첩 또는
견내량대첩이라고 한다.
이 해전은 육지에서 크게 이긴 행주산성 싸움, 진주 싸움과 더불어 임진왜란의
3대첩이라 한다. 공이 이끄는 우리 함대의 위력에 눌린 왜병은 바다로 나와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뿐만 아니라 북쪽으로 진군하던 왜적의 육군도 그 기세가
움츠러들 수 밖에 없었다. 왜적이 견내량 서쪽 바다를 엿보지 않게되자 충무공은
한산도로 진영을 옮겨 길목을 단단히 지키고 있었다.
한산도 생활
개전 초에 왜적 수군을 거의 섬멸한 공은 계속 적을 소탕하여 오다가 여수로부터
진영을 한산도로 이동하였다. 한산도는 산령에 둘러싸여 있어 왜군의 남해
침입을 막을 수 있는 요지였다. 이곳에서 왜군의 길목을 막으면서 둔전을 경작
하여 군량을 마련하고, 나무를 찍어 전선을 만들며, 쇠를 녹여 무기를 만들면서
쉬지 않고 다음 전투에 대비했다. 어려운 처지에서 공은 있는 힘과 지혜를
다하여 적의 재침에 대비하였고 적의 대함대를 앞에 두고, 내일의 전투를 위하여
허리띠를 풀지않고 칼을 갈며 만반의 전투태세를 갖추었던 공의 임전태세야말로
유비무환의 자위정신을 행동으로 보여준 좋은 실례라 하겠다.
공은 남해새상 연해지역의 소탕작전을 꾸준히 계속하다가 1593년 7월, 좌수영을
여수에서 거제 한산도로 옮겨 왜적침략의 수로를 가로막고 삼도 수군 통제사가
되었다. 공이 전라좌수사로 있을 때, 곤궁에 빠져 있는 피난민을 정성껏
돌봐왔었고 통제사직을 겸임한 후로는 더욱 민생문제와 군량을 염려하여 돌산도
와 도양장에 군.민 합작의 둔전을 설치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새로운 무기를
만들고 전선을 계속 건조하여 군비를 확충하였다. 즉, 일본 조총을 세밀히
검토하여 정철총통을 제조하였고, 염초를 끓여 만들고 각종 총포를 만들어
전선에 비치하여 주무기롤 활용하게 하였다.
초대 통제사로 임명된 후로, 수군의 지휘권을 확립하고 군비를 재정비하면서
장기전에 대비하였다. 또한 한사도에 운주당을 설치하여 누구에게나 중요한
작전성이 의견이나 정보를 제공케하였다. 공이 통제사로서 이룩한 큰 업적의
하나는 명령 계통의 일원화였다. 이제까지 연합함대를 편성하여 많은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고 하나, 원균등의 시기와 불복종으로 인해서 지위계통이 통일
되지 못했었다.
1592년 2월 부터는 지난날 공의 위력에 눌려 외해로 나오지 못했던 왜선들이
점차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므로 공은 함대를 출동시켜 왜선을 격파하면서
적의 집결지인 당항포를 습격, 21척의 왜선을 불태워 그들의 야욕을 한풀 꺽어
버렸다. 당항포해전이 있은 후, 4개월이 지난 7,8월부터는 왜군들의 움직임이
전보다 조직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여 장문포일대를 중심으로 연안과 각 포구
마다 진지를 구축하고 장기간 머무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를 알게된 공은 수륙협동작전을 계획하고, 곽재우등과 협동으로 장문포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적을 완전히 소탕하지 못하고 함대를 한산도로 회군하고
말았다. 공이 통제사로 집무하는 동안, 원균의 시기와 음모는 나날이 깊어가고
있었다. 원균은 항상 자기가 선배라는 입장을 앞세워 공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으며, 심지어 위급한 전투구역에서도 의견을 달랐다. 그러나 공은 주위와
잡음을 일소하고 이해와 설득으로 다스리려고 노력하였으며 원균에 대하여
일체 비방하지 않았다. 공이 진중생활에 피로가 겹치고 기후가 나빠져 무서운
열병에 걸린 적이 있었다. 병이 위중하여 한 군관이 눕기를 권하자,
"장수된 자가 죽지 않았으니 눕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라고 하며, 끝끝내
앉아서 12일 동안이나 견디어냈다. 이는 공의 굽힐줄 모르는 의지를 뜻하는
것이지만 그 의지의 밑바닥에는 자주,자조,자립정신이 흐르고 있었다. 이러한
정신은 아무 지원도 없는 어려운 진중생활에서도 군량을 비축하고 쇠를 모아
총포를 만들며 군비를 강화하여 연전 연승의 빛나는 공적을 쌓게 한 원동력이라
할 수 있다. 다음의 시는 공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한산도에 3년 8개월동안
진을 치고 있을 때 나라의 장래를 염려하는 마음이 담겨져 있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로에 홀로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억울한 누명을 쓴 죄인의 몸
선조 29년(1596년)에 4년간을 끌어오던 화의협상이 깨어지자, 왜군은 다음해
1월 카토오 및 코니시등이 임진년 경험을 되살려 선봉군 1만 4천명을 거느리고
재칩임의 태세를 취하였다. 그들은 먼저 우리 수군을 격멸하겠다는 전략을 세웠
으나, 충무공과의 정면대결은 오히려 저들에게 불리하고 참패를 면하지 못할
것을 미리 알고 새로운 간사한 계책을 마련하였다. 그들은 조정의 당쟁과 원균이
충무공을 시기하고 모함하는 미묘한 관계를 교묘히 이용하여 공을 제거하려
하였다. 크니시는 그의 부하 요시라를 경상좌병사 김응서의 진중으로 보내어
밀서를 전달하고, "가또오의 부대가 모일(某日) 바다롤 건너 올것이니 해상에서
맞아 싸워달라." 는 정보를 제공케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공은 밀서의 내용을
분석하고, 왜적의 간계임을 간파한 나머지, 척후선을 보내어 정탐케하고 직접
출전하지 않았다. 고니시는 다시 요시라를 시켜 김응서에게 보내어
"가또오가 도착하였다는 사실과 기회를 놓였으니 원망스럽다." 는 내용을 전달
하였다. 이에 앞서, 공을 제거하려는 원균의 활동이 급진전하여 김응남 일당들을
시켜 조정회의에서 공을 비방하게 했다. 또한 요시라의 간계는 김응남 등의
서인들에게 비방하기에 좋은 자료가 되어, 그해 2월 26일 공은 공직을 박탈당
하고 서울로 압송되는 이변을 맞게 되었다. 서울로 압송된 고은 사형처분을 받을
뻔 하였으나, 판충추 부사 정탁의 청원으로 4월 1일 간신히 출옥하여 백의종군
하게 되었다. 이것이 두 번째 백의종군이었다. 옥에서 풀려나온 공은 뒤늦게야
홀어머니의 부음을 듣고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한 채, 6월에 도원수 권율장
군의 막하로 들어갔다
공은 또다시 인고의 세월을 지낸지 한 달이 지난 7월 15일 공의 뒷자리를 이어
받았던 원균이 칠천량에서 왜수군의 기습을 받아, 전 함대를 잃고 목숨마저
빼앗기고 말았다. 원균의 연합함대가 전멸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조정에서는
크게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결국에 권율장군이 충무공에게 명하여 우리
수군의 뒷수습을 하도록 하였다. 공은 백의종군의 몸으로써 수군재건의 중대
임무를 맡아 남해 등지를 돌아다니며 패전의 원인과 왜 수군의 정보를 수집하는
한편, 칠천량해전에서 탈출한 12척의 전선을 찾았다. 또한 조정에서는 공의 진
가를 뒤늦게 깨닫고 공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시켰다.
공이 감옥에서 풀려나와 백의종군을 하였을 때에도 불평, 불만을 말하지 않았
으며, 이름없는 중이 정성껏 삼아 준 짚신 한 켤레조차 받지않았다. 공은 겸손
하면서도 강직한 분이었다. 부하가 실수를 하였을 때, 스스로 그 책임을 지고
장계를 올려 대죄하였으며, 반드시 옳고 그름에 근거하여 행실을 가름하였을 뿐,
불의에 굴복하지 않았고, 의로운 일에 대하여 비굴하지 않았으며, 권세에 아부
하지 않았다.
명량해전의 대승리
공이 다시 통제사로 임명되어, 겨우 12척의 전선만으로 전체를 수습해야 했을
때, 조정에서는 이를 민망히 여겨 공에게 해전으 버리고 육지로 올라와 싸우라고
하였으나 공은 해전을 버릴수 없음을 말하고,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전선이 있습니다 죽을 힘을 다하여 싸우면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라고 장계를 올렸던 것이다.
당시 왜적은 전선 500여척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500여척을 상대로 12척의
대전은 동서고금의 전사에서 찾아볼수 없는 일이었다. 공의 굳은 결의는 바로
해상을 스스로 지키려는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12척의 전선과 120여명의 군사를 거느린 공은, 왜 수군의 공격을 방어하기에
알맞은 유리한 지역인 벽파진으로 함대를 이동하였다. 벼파진은 진도의 동쪽
끝머리에 위치하여 해남을 바라볼수 있는 곳이며, 남해상에서 서해로 빠져나가
는 유일한 길목인 율도목 즉, 명랑해협이 있는 곳이다. 공은 이 길목을 지킴으
로서 왜 수군의 서해 진출을 막을 수 있으며 적은 수로써 많은 적선을 막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더구나 명랑해협은 길목이 좁은 데다가 조수의 흐름이 빨라
대함대가 자유로이 활동할 수 없는 곳이었다.
벽파진에 포진한 공은 뒤쫓아 오는 왜 수군의 동태를 엄중히 살피게 하는 한편,
사기가 쇠진해진 병사들을 격려하고 훈련하여 결사적인 방어태세를 취하고
있어싿. 또한 최종 방어선인 명랑해협을 사수하기 위하여 명랑의 물길을 조사
하기도 하고, 왜군의 공격력을 분산시키기 위하여 바윗돌에 거적을 씌워 군량
으로 알도록 하였고, 또 왜선을 걸어 넘어뜨리기 위하여 물속쇠줄을 준비하기도
하였다. 9월 14일, 위급을 전하는 봉화와 함께 왜 수군의 대함대 200여척이
벽파진을 향하여 침공해 온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왜선 133척이 조류를 타고
명랑해협에 돌입해 오고 있었다. 공은 모든 전선을 출동시켜 이를 맞아 앞으로
전진하였다. 울돌목을 빠져나온 왜선드은 왜양에 들어서면서 순식간에 12척의
우리 전선을 겹겹으로 포위하면서 포를 쏘아댔다. 아군과 적군의 전선들은 서로
엉키어 총포를 쏘고, 불 화살을 날려 우수영 앞바다는 연기와 총성으로 뒤덮여
수라장이 되었다. 공을 비롯한 군사들이 일제히 북을 울리면서 총통과 각종 화
살을 쏘며 맹공격을 가하자, 공의 함대는 조수의 힘을 이용할 수 있는 유리한
입장에 서게 되었고, 왜적은 반대로 조수를 안고 싸워야 하는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공은 더욱 병사들을 격려하고 독전하여 퇴각하는 왜선을 공격
하였다. 한편, 많은 전선을 잃고 맥없이 쫓겨 가던 왜선들은 공이 미리 준비해
두었던 울돌목의 물속쇄줄에 걸려 거의 물결과 함께 전복되고 수장되어 버렸다.
이리하여 12척의 배로써 133척의 왜선을 물리 친 명랑해전을 대승리로 육상을
마음대로 짓밟던 왜군의 기세를 꺽어, 수륙병진의 야욕을 송두리째 부수어 버
리는 큰 전환점을 마련했다. 더구나, 이 해전의 승리는 7년 전쟁을 끝맺는데 큰
전략적의의를 던져주었으며, 이는 굳건한 애국충정과 세계 해전사살 유례없는
공의 전략. 전술에 의한 것이며, 공을 도운 군사들이 용감한 전투력을 발휘함
으로써 이루어진 전과였다. 12척의 전선과 120여명의 군사들이 "우리들이 다
같이 나라의 부름을 받았으니, 의리상 같이 죽고 사는 것이 마땅하다. 사태가
이에 이른바에야 한번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하는 것이 무엇이 그리 아까울
것이냐?"는 굳은 결의로 대적하여 큰 승리를 거둠으로써 왜적의 서해침입을
저지하고 전국을 전환시키는데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던 것이다.
충무공의 최후 (노량해전)
1598년(무술년) 8월 17일, 왜군의 괴수 도요토미가 사망하고, 그의 유언에 따라
무사철귀를 위하여 대부분의 병력을 울산, 부산, 사천 및 순천등지를 집결하면
서 일부에서는 그들의 철귀를 위장하려고 일부러 성을 쌓는 등 매우 분주하였다.
이러한 새로운 정보를 입수한 공은 명나라 장수 진린과 함께 연합함대를 거느
리고 왜교에 머무르고 있는 토니시의 군대를 공격하였다. 이때 명나라의 육군장
유정도 가세하여 수륙양면 작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왜군들이 견고한 진지
속에 숨어서 대항함으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다만 왜구로부터 철귀
하는 바다를 봉쇄하고 말았다. 즉 왜구 포구 외양에 위차한 장도와 유도에 결
진하였다. 왜군들은 육지와 바닷길이 막히자 크게 당황하여 유정과 진린에게
많은 뇌물을 바치고 뱃길을 열어 왜군의 철수를 허용하도록 종용하였으나, 공은
단호히 이를 거절하고, 더욱 더 해상방비를 강화하였다. 그러자 왜군은 남해등
지에 산재해 있는 그들의 전선을 총 동원하여 유도 등지를 가로막고 있는 공의
연합함대를 견제또는 격파하면서 마지막 탈출의 기회를 노리게 되었다. 그리
하여 11월 18일경 저녁, 무수한 왜선들이 노량에 집결하여 공격의 햇불을 올
리고 있었다. 이들은 공이 예상한 바와 같이 노량과 왜교의 중간지점에 결진하고
있는 우리 연합함대를 협공하려는 것이었고, 그 수는 무려 500여척에 달하였다.
이에 공은 그날 밤, 왜교의 해상봉쇄를 해제하고 유도를 출발하여 노량근해에
집결한 왜함대를 섬멸하기 위해서 작전을 개시하였다.
다음날 새벽 2시경, 공이 이끄는 연함함대는 노량에 도착하여, 여기서 전함대를
좌우로 나누어 전투내세를 갖추고 주위의 성에는 복병을 배치한 후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포성과 북소리는 고요한 바다를 가르고 기습공격을 당한
왜선은 당황하여 일시 흩어졌다고 다시 대열을 갖추어 결사적인 반격을 가해
왔다. 밤새도록 치열한 격전이 계속 되었다. 우리 병사들은 총포를 일제히 발
사하여 맹렬히 공격하였다. 칼과창을 들고 적선에 뛰어들어 적병을 무찌르고
불을 놓았으며, 불 붙은 나무조각을 왜선에 던져 불태우고, 또 깨드려 버렸으니
해상은 불타는 왜선과 죽은 왜병의 시체로 뒤덮혀 있었다.
이와같은 공의 맹렬한 공격을 막아낼 수 없었던 왜적은 사기가 저하되어 관
음포 쪽으로 물러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도망칠 물길이 이미 우리
함대에 의해 막혀 있음을 알았다. 궁지에 몰린 왜선들은 최후의 발악을 하며
반격을 전개함에 따라 또다시 격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공과 진린은 서로 도우며
혈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때에 함상에서 지휘하던 공은 적탄에 쓰러지고
말았다.
"방패롤 나를 가려라."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 (戰方急 勿言我死)
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셨다. 때는 1598년(무술년) 11월 19일(음력) 새벽,
공의 나이 54세였다. 공의 유언대로 공의 큰 아들 회와 조카 완은 공을 배안으로
옮기고 대신에 독전기를 흔들면서 전투를 계속하여 낮 12시경에 200여척의
왜선을 격파하였다. 바다에는 왜군들의 피와 부서진 뱃조각과 왜병의 시체가
낭자하였다. 왜장 코니시는 격전중에 간신히 달아나고 그때까지 도주하지 못한
50여척의 왜선들은 뿔뿔히 흩어져 도망하였다. 이리하여 7년간의 임진왜란은
공의 안타까운 전사와 함께 대승리로 막을 내렸다. 이토녹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싸움의 승패에 대하여 유념하고 나라사랑의 뜨거운 정열로 가득차 있었던 공
이었기에 400여년이 지나 오늘날 까지도 충무공은 온 국민으로부터 한결같은
추앙을 받아왔던 것이다. 공의 그 애국정신은 우리 민족과 더불어 영원히 기
억될 것이다
현충사 소개
그럼 현충사(顯忠祠)가 어떻게 세워졌는지에 대해 알아보자
조선조 권신들의 세력 다툼과 연이은 외세의 침입으로 나라 안팎이 위태로운
시절에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일생을 마친 충무공 이순신(1545-1598)
장군을 기리기 위한 이곳 현충사, 백암리 방화산 기슭은 충무공이 무과급제전
까지 살던 곳이다. 이순신 장군이 순국한지108년이 지난 숙종 32년(1706) 이곳에
사당을 세웠으며 1707년 숙종께서 친히 '현충사(顯忠祠)' 라 액서를 하사하시
었다. 그 뒤 200여년간 공을 추모하는 향불이 끊이지 않았으나, 일본 제국주의의
강점(强占)으로 한동안 묘소와위토는 일본인의 손에 넘어가게 될 지경이었다.
이때 동아일보사와 이충무공 유적보존회의 주관하에 온 국민이 뜨거운 정성으로
1932년 사당을 중건하였다. 1945년 해방후부터는 다시 매년 4월 28일에 탄신
제전을 올려 고의 넋을 추모하고 있다. 1966년에는 공의 높은 덕과 충성을 기리며
그 업적을 길이 전하고자 하는 뜻에서 현충사를 성역화 하고 재 중건하였다.
이 성역화 사업을 1974년까지 계속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현충사의 내부는 그림에 보는 거와 같이 본전, 옛집, 활터, 이면공묘소, 충무정,
유물관, 구본전, 정려, 관리소, 충무문으로 이루어져있다. 현충사의 외부광장에는
관람객들의 편의시설 (화장실, 매점, 경찰관 파출소, 휴게실)도 설치되어있다.
매표소에서 표를 끊는데 안으로 음식물반입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경고문이 붙어
있었는데 앞서 들어가는 젊은 부부가 비닐봉지에 음식물을 담아가다가 매표소
직원과 한바탕 실랑이를 벌였다.
"아니 애기들 먹을 과자부스러긴데 왜 못가지게 해?"
"안돼요. 음식물 반입은 안됩니다."
"그럼 가지고 들어가서 안먹으면 될거아뇨?"
"안돼요. 여기 보관함에 맡기고 가세요. 가지고 들어가시면 안돼요."
"아...나 원 참!!!"
매표소 직원이 손으로 가리킨 보관함에는 여러 가지 음식물 봉지로 보이는
것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현충사를 깨끗이 하기 위해 음식물 반입을 시키지 않는
것은 참 다행으로 생각되었다. 음식물 반입을 막으랴 표를 끊어주랴 수고하시는
직원을 보니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매표소에서 표를 끊고 들어서는 길은 정리가 깔끔하게 되어있었다.
양쪽화단에는 하얀꽃이 활짝 핀 목련나무와 개나리가 오는 관람객들을 반겨주는
것 같았다.
본전
먼저, 충무공의 본전으로 향했다.
본전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었다. 현충사를 부를땐
이본전을 가리키는 것이다. 협의의 현충사로 말이다.
본전에는 관리직원 2명이 충무공의 영정에 참배를 드리는 법을 관람객들에게
가르쳐주고 있었다. 영정에 그려진 충무공은 그윽하고 순한 느낌이 들었다.
그 영정은 1973년 충무공 영정 심의위원회에서 표준 영정으로 지정한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그려진 충무공의 그림이 없어 그 옛날 얼굴 생김새에 대해 표현되어
있는 글
(순신의 사람됨이 말과 웃음이 적고 얼굴은 아담하여 마치 수양하여 근신하는 선
비와 같았다. 가슴속엔 대담한 기운이 있어 일신을 잊고 나라를 위해 갔으니
본래부터 수양해온 까닭이라 하겠다 - 영의정 문충공 유성룡의 징비록)
로써 그 영정을 그린 것이라고 한다.
경건한 마음으로 향을 태우고 잠시 눈을 감고 그 옛날 충무공 때문에 지금의 이
땅에 내가 서있다는 것을 감사하였다. 향을 피우는 냄새가 그윽했다
옛집
본전을 내려와 이번에는 옛집으로 향했다.
옛집으로 향하는 길의 정면에는 충무공이 활쏘기를 하던 장소였고 그 왼쪽편에
옛집이 있었다. 옛집은 충무공이 무과급제 전까지 살던 집이다. 지금은 그 장소의
보존을 위해 공개하지 못한점을 양해해달라는 표시문이 붙어 있었다. 인터넷에서
옛날 현충사의 옛집사진을 보았는데 아마 1960년으로 기억이 되는데 그 당시에
는 집 주위에 그냥 흙으로 덮힌 땅이었는데 지금은 정리가 잘 되어있었다.
충무정
옛집옆에는 충무정(忠武井)이라는 우물이 있었다.
충무공이 자라면서 마시던 물로써, 후세 사람들이 "충무정"이라고 불렀다. 현재는
화강암을 이용하여 현대식 우물로 정돈 되어 있으며 지금까지도 식수로 사용될만
큼 맑은 물이 나온다. 참배객들의 갈증을 시원하게 풀어주기도 한다
활쏘기 연습터
옛집에서 나와 활쏘기 연습을 하던 곳으로 갔다.
7~8개의 계단을 올라가야만 했는데 그곳에는 커다란 은행나무 두 그루가 나란히
서 있었다.그 주위로 의자와 자판기를 설치해 관람객이 쉬어가는 장소로 활용
하는 것 같았다.
남쪽방향으로 과녁판이 있었는데 그 거리가 약 145m가 된다고 한다. 그냥 눈으로
보아서는굉장히 먼거리인 것 같았는데..... 이순신 장군이 활을 쏘는 장면을 머리
속에 그려봤다.
과녁판이 있는 곳의 반대쪽 방향에는 여러개의 묘가 있었다. 충무공의 후손들의
묘였다.
아들 이면공의 묘와 그 외 3대, 10대 후손들의 묘라고 한다
연못
다시 향한 곳은 연못이었다.
이 연못은 1972년 현충사 경내에 새로이 조축된 연못으로 현충사 조경을 돋보이
게 하려고 축조되었다고 한다. 정말로 이 연못으로 인해 현충사의 경내 풍취를 한
결 더 그윽하게 해주는 것 같았다. 연못속에는 비단잉어들이 헤엄을 치고 있었는
데, 그 수가 무척 많았다.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까지 각기 다른 색을 지닌 비단잉어들이 유유히 연못속을
헤엄치며 놀고 있었다.
그 주위에는 향나무를 비롯해서 소나무, 개나리, 산수화 나무들로 조경을
해놓았으며 정취를 느낄수 있도록 의자가 설치되어 있었다
정려
연못이 있는 곳에서 정문쪽으로 가다보면 정려(旌閭)가 세워져 있다.
정려는 지난날 충신이나 효자, 열녀가 나면 임금이 편액(篇額)을 하사하여 그들
이 살던 마을입구에 걸어둠으로써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그 저신을 고취하고 본
받도록 세우던 것이 바로 정려이다. 여기에 있는 정려에는 정조대왕이 하사하신
이충무공과 공의 조카 강민공 이완, 4대손 충숙공 이홍무, 5대손 충민공 이봉상,
8대손 이제빈의 네분의 충신과 한분의 효자 편액이 걸려있었다. 이 정려 역시
오랜 세월 때문에 다시 동남향에서 서향으로 방향을 바꾸어 해체복원되었다고
한다.
정려에 있는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충신 충무공 이순신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1545년(인종 1년) 4월 28일 서울 건천동(지금의 인현동)본
가에서 부친 이정의 4형제중 셋째아들로 탄생하였다. 공은 어려서부터 지용이 뛰
어났으며 21세 되던해 10월에 처음으로 무예를 배우고, 32세(1576년) 2월 무과에
급제한 후 삼도수군통제사에 이르기까지 오로지 대의에 살았으며 임진왜란 7년
동안 공이 가는 곳마다 승리의 개가를 올리는가 하면 하늘에서 부여한 성품탓인
지 인,의,지,용을 다같이 겸하였으며 권력에 굴하지 않고 의리에 깊으며 또한 효
성이 지극하신 맹장이었으나 임진왜란의 마지막 해인 1598년(무술년) 11월 19일
노량싸움에서 명나라 도독 진린이 왜적에게 포위되자 심히 위급하여 공은 선두에
나가 싸워 진도독을 구한 뒤 적탄에 맞아 돌아가시니 향년 54세였다.
후에 조정에서는 우의정으로 증직하고 다시 갑진년에는 일등공신으로 정하여 효
충장의 적의 협력선무공신의 호를 내리고 좌의정으로 올리며 덕풍부원군을 봉하
고 시호를 충무공이라 하였다. 그후 정쪼때에 영의정으로 추증받았다.
2. 충신 강민공 이완
완은 공의 맏형 희신의 넷째 아들로 1579년 4월 11일 태어났다.
임진왜란때는 나이 겨우 14세 였으며, 두 번째의 난리인 정유년에는 19세의 나이
로 숙부인 충무공의 막하에서 싸웠으며 그 공은 실로 컸다. 임진왜란이 끝난 다음
해에 무과에 급제하고, 그후 1624년(인조 2년) 나이 46세때 충청병사로부터 의주
부윤으로 옮겨갔으나 3년후인 서기 1627년(인조 5년) 정묘호란때 청나라 군사에
게 패하게 되자 마침내 몸을 불속에 던져 스스로 자결하니 향년 49세로 생애를 마
쳤던 것이다. 그후 조정에서는 병조판서의 벼슬과 함께 강민공이란 시호를 내렸다.
3. 충신 충숙공 이홍무
충무공의 4대손으로 1665년(현종 6년) 9월 24일 태어났다.
조카 봉상이 청주병사로 있을 때 같이 있다가 1728년(영조 4년) 3월 15일 소론파
의 불만으로 역신 이인좌의 난에 병마절도사인 봉상은 싸우다 전사하고, 홍무는
묶어가 고초를 당하면서도 굴하지 아니하고 죽으니 뒤에 조정에서는 저헌대부 이
조판서로 추증하였다.
벼슬과 같이 충숙공이란 시호를 내리시니 그 뜻은 난리를 만나 나라를 잊지 않았
으니 "忠"이요, 굳셈과 덕으로 극복해 나갔으니 "肅"이라 한 것이다.
4. 충신 충민공 이봉상
충민공은 충무공의 5대손으로 1676년(숙종 2년) 4월 22일 태어났다. 27세때 무
과에 급제한 후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재직시 경종(景宗)이 즉위하시자 포대대장,
훈련원도정에 오르니 그때 나이 46세였다. 그 이듬해 삼도수군통제사 겸 경상우
도 수군절도사가 되었다가 그후 한성우윤이 되었다. 50세때 영조 1년에 형조참판
으로 훈련 금위대장을 겸하고 조정에서는 노론파와 소론파의 세력싸움에 밀려나
다시 충청도 병사로 내려와 있을 때 이인좌 등은 청주를 먼저 손에 넣어야 일이
제대로 풀릴 것을 계획하고 병기를 상여에 실어서 청주 고을 북쪽 숲속에 두고 한
편으로는 청주병영 양덕박에게 돈을 많이 주고 그를 매수하여 밤중에 성문을 열
어주어 역신의 무리들이 입성하여 자리에 들은 이병사를 급습하니 병사는 놀라
치열하게 싸우다 돌아가셨다. 영조대왕은 특히 우찬성을 추증하고 시호를 충민공
이라 하니 그 뜻은 제몸을 던져 임금을 받들었으니 "忠"이요, 제나라에서 난리를
치루었으니 "愍"이라 한다.
5. 효자 이제빈
충무공의 8대손으로 (영조 46년)에 아산에서 태어났다. 불과 나이 5세의
어린이가 토를 달아 글을 척척 읽는 수재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점점 집
이 줄어들기 시작하여 어머님을 흡족하게 모시지 못한 것을 항상 고심하던 차 어
머니가 돌아가시려하니 스스로 손가락을 끊어 피를 드리어 반나절이나 더 살아계
시게 하였으며 비가오나 눈이오나 매일같이 무덤을 살피며 곡을 하니 그 효성이
지극하여 이를 세간의 사표로 정려를 세웠다.
벼슬로는 1801년(순조 1년) 무과에 급제하고, 경상좌도 병사에 이르렀고, 1832
년(현종 3년) 돌아가시니 향년 66세였다.
유물관
다음으로 유물관으로 향했다.
유물관은 이충무공의 유물과 당신의 무기들을 전시해 둔 곳으로 1962년에 스라
브 건물로 건립되었다가, 1967년 12월 31일의 난중일기 도난 사건 이후 참배도로
입구 신축된 것이다.
그후 1974년 제 2차 종합 조경 사업당시 한식 청기와 지붕 건물로 신축하여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
충무공 유물 : 교지, 도배, 옥로, 장검, 난중일기, 임진장초, 서간첩, 명조팔사품
임진란 당시 각종 무기 : 거북선(모형), 해전무기
기타 : 유적사진, 해전도 등
유물관내에는 사진촬영 금지라는 안내문과 유물관내에 있는 것중 궁금한 것이
있으면 안내원에게 문의를 구하라는 안내문이 붙어있었다.
맨 먼저 특수 유리관안에 전시되어 있는 것은 각종 해전무기였다.
천자포, 현자포, 황자포, 등이었는데 이 포들은 원래 육전에서 쓰던 것이었는데
충무공이 대량 생산하여 해전에 사용하였다. 천,현,황이란 말은 포의 크기와 중량
에 따라 붙여진 것이라 하며 그 사정거리는 약 4km라고 한다.
다음에 전시되어 있는 것도 해전 무기들인데, 장병겸, 조총, 승자총통, 불화살이
있었다.
장병겸이라는 것은 그 생김새가 정말 소름끼치게 생겼는데 쓰임은 전함으로 기어
오르는 적의 목을 베는 무기라고 한다. 큰 낫처럼 생겼는데 눈짐작으로 볼 때 그
길이가 4m정도는 되어 보였고 칼날의 길이만 해도 1m는 더 되어 보였다.
조총은 모든 사람이 알다시피 화승총이라고도 불리우며 임진왜란 당시 왜군들이
썼던 신무기였다. 포르투칼에서 수입을 했다고 하며 조선이 육전에서 패한 가장
큰 이유가 이 조총이라는 신무기때문이었던 것 같다.
승자총통은 이순신 장군이 직접 고안하여 사용한 소총의 일종이었다.
불화살은 화공용으로 일반 화살의 촉위에다가 화약 넣은 것을 붙여서 불을 붙여
시위를 당겨 적선을 불태우는데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 다음 전시관에는 큼직막하고 시원스레 "顯忠祠"라고 쓰여져 있는 숙종임금의
친필 액서가 걸려있었다 . 옆으로 가니 탁본첩이 있었다. 탁본이란 금석에 새긴
글씨나 그림을 먹에 의해 원형 그대로 종이에 뜨는 것으로 옛날부터 명비(名碑)는
탁본을 떠서 첩(帖)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노량묘비 탁본첩과(경남 남해군 노
량,1663,송시열), 충렬사묘비명 탁본첩(경남남해군 노량,1681,이항복), 전라좌수
영대첩비 탁본첩(전남 여수,1615,이항복)이 있다.
다음 전시관에는 충무공에 관한 제서적들과 무과급제교지, 증시교지(충무공이라
는 시호를 내린교지), 사부유서(선조임금께서 삼도수군 통제사인 충무공에게 임
무수행시 확인토록 내린 병부와 함께 내린 명령서), 요대(공이 친히 사용하시던
허리띠로서 명의 장수 유격 왕원주가 충무공에게 선물한 것), 도배(복숭아 모양의
술잔으로 명나라 장수 진국경이 충무공에게 본내 선물), 옥로(높은 벼슬을 사는
사람이나 명을 받고 외국으로 가는 사람의 갓위에 꽂던 장식품), 장검(충무공이
항상 벽에 걸어두고 보면서 정신을 가다듬던 두자루의 칼-장검에는 충무공이 친
필한 검명이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석자되는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물이
떨고 한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인다)이 전시되어 있다.
다시 그 옆으로는 난중일기와 임진장초, 서간첩(모두 국보 76호)이 전시되어 있
는데,난중일기는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해인 1592년 1월부터 전사하기 바로
이틀전인 1598년 11월 17일까지 7년동안 충무공이 싸움터에서 손수 쓰신 진중일
기의 이름이다.
이 이름은 본시 적혀있지 않던 것을 정조 대왕때에 이충무공 전서를 편찬하면서
편찬자들이 편의상 난중일기라고 한데서 지어진 것이다. 이충무공 전시 권 5부터
권 8에 걸쳐 수록되어 있다. 이 일기로 인하여 공의 성품은 물론 전쟁후의 비망록
과 군사에 대한 비밀계책, 가족, 친지, 부하장졸, 내외요인들이 내왕한 사실, 부하
들에 대한 상벌, 정치군사에 관한 서신교환등의 광대한 범위와 임진란 전체의 역
사연구에 가장 정확한 자료가 되고 있다.
쉴새없이 빗발치는 충탄과 화살속에서, 파도처럼 밀려오는 왜적선과 싸우면서도
꾸준히 집필한 난중일기는 한때 일본황족이 탐하는 등의 어려움에서도 불구하고
공의 후손들이 대대로 귀하여 보존하여 400년간 전해내려와KT다. 그러던중 1967
년 12월 31일 새벽 난중일기 8권, 일기 1권, 서한집 1권을 도난당한 불미스런
사건이 있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난중일기를 찾기위한 특별담화문까지 발표하여 9일상오,
일당 6명의 범인을 무난히 체포, 도난당했던 난중일기등은 열흘만에 고스란히 되
찾을 수 있었다.
그후 난중일기의 영인본 50질을 제작하여 주요기관에 배부하여 보존하고 있다.
임진장초는 충무공이 임진란 중에 출전과 왜군의 정황, 군사상의 건의사항, 진중
의 경비 및 준비상황들을 정확하고 상세하게 글로 써서 조정의 임금님께 올라 보
고서 장계의 초본이다.
서간첩이란 말 그대로 공이 친필로 가족과 친자에게 보낸 편지를 모아놓은 철이
다.
그 옆으로는 명조팔사품이라고 임진왜란 당시 한 진영에서 같이 지내던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이 충무공의 탁월한 지위 능력과 빛나는 전공을 명나라 황제에게
보고하자, 명황제인 신종이 충무공에게 선물로 보낸 8가지 군사 장비이다.
도독인 1정 (당시 수군 도독이 사용하던 구리로 만든 관방인), 영패(나무로 만든
것으로 옛날 장군이 명령을 내릴 때 어깨에 메거나 죄인은 잡아 올 때 쓰이는 것),
귀도(호신용 칼),참도(죄인의 목을 치는데 쓰이는 칼), 곡나팔(전장에서 갖가지
신호용으로 사용하던 굽은 나팔), 독전기,홍소령기,남소령기(지휘관 및 문관,
무관이 사용하는 신호기) 가 전시되어있다.
전시관을 다돌아 보면 옆에 또다른 전시관에 있는데 그곳에는 기타 유물에 대한
전시와 함께 충무공에 대한 책이 나온 것을 판매하는 곳이 있다.
이 것으로 현충사 경내에 있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흔적을 살펴보았다.
오전중에 들어왔던 현충사였는데 벌써 시간이 오후 5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관람객들이 서서히 발길을 다시 매표소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관람시간이 6시까
지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오는 길이 정문에서 다시 뒤를 돌아 충무공 영정이 있던 현충사를 바라보았다.
그 동안 막연히 알고 있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에 대해서 다시 되새겨보니 새삼 이
곳을 답사의 장소로 잘 선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람시간이 끝나갈 무렵 관리하는 직원들의 모습이 몇몇보이기 시작했다. 각 나
무에 물을 주고 쓰레기통을 비우고 잔디를 고르는 등 이분들의 매일같은 노고가
있기에 이토록 현충사가 깨끗하고 아름답게 보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충무공의 묘
그 분들의 노고를 뒤로 한채 나는 다시 현충사에서 차로 약 10분거리에
떨어져 있는 충무공의 묘소로 향했다. 이 곳은 현충사보다는 참배객들
이 많지 않았다. 규모도 그리 크지는 않은 것 같았다. 올라가는 길에 나
무에 물을 주고 있는 관리원을 볼수가 있었다
나무가 대나무 같았는데 거의 다 시들시들해져 있어서 그 것이 궁금하
여 질문을 했다.
"수고하십니다. 아저씨!. 그런데 왜 나무들이 이렇게 다 죽어가나요?"
"아! 얼마전에 새로 이식해서 심은거라 그래요. 물 흠뻑 주면 괜찮을 겁
니다."
"아!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친절히 대답해주시는 관리원의 대답을 듣고는 안심이 되었다. '현충사
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잘 정리가 되어 있지도 않은 것 같았는데
길목의 나무마저 죽어버리면 어떻하지?' 하는 불안한 맘이 나도 모르게
생기는 것이었다.
오르막길을 끝자락에 가니 햇볕을 받고 있는 충무공의 묘지가 눈앞에
들어왔다.
그 묘지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소나무와 햇볕을 받고 있는 충무공의
묘지 앞에는 가족들로 보이는 참배객들이 평화스럽게 앉아있었다.
묘지로 올라가는 길목에는 충무공 묘에 대한 설명이 새겨져 있는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충무공은 54세의 일기로 남해해상 관음포에서 전사한 공의 유해는 일
단 고금도에 모셔졌다가 이듬해인 1599년 2월 11일 아산군 금성산에
안치되었다. 그후 16년만인 광해 6년(1614년)에 이곳 아산군 응봉면
어라산 덕수이씨의 선산에 이장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비석에서 대각선으로 10m 위쪽에는 정조대왕 어제신도비(御製神道碑
)가 세워져 있다.
정조 18년(1794) 10월 4일에 세워진 이 비에는
'지극히 어진 어른' 이란 표현과 함께 비 머리에는 '충성스런 뜻에 티 한
점 없다'라고 씌여져 있으며 '우리 장하신 선조께서 나라를 다시 일으킨
공로를 세우심에 기초가 된 것은 오직 충무공 한분의 힘 바로 그것에
의함이라 이에 의정부 영의정을 증직하고 그 시호에 따라 비머리에
충성을 높이고 무용을 표창이라는 노래를 지어 역사가들에게 알리노
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어제신도비를 뒤로 하고 충무공의 묘비로 올라갔다.
묘는 정돈되게 다듬어져 있었으며 묘비에서 바라본 경치는 그야말로 풍
수지리를 모르는 내가 봐도 명당이라는 생각이 들만큼 저 멀리 까지 확
트인 풍경이 보였다. 다시 한번 충무공의 비에서 잠깐 묵념을 하고 내려
오려는데 왼쪽과 오른쪽에 각각 또 다른 무덤이 보였다.
나중에 관리원에게 알아본 결과 왼쪽에 있는 것은 충무공의 13대손의
묘지이며 오른쪽에 있는 것은 충무공의 7대손 묘지라고 한다. 다시 한번
그곳에서 열심히 관리하시는 분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드리고는 현충사와 충무공의 묘지에 대한 답사를 마치
고 서울을 향해 왔다.
답사를 마치며
충무공 이순신, 현충사 사실 어렸을 적부터 무척 귀에 익든 낱말이다.
임진왜란의 선봉장, 세계 최초의 철갑선, 거북선, 백의 종군으로
나라를 위해 목숨 바쳐 싸웠던 충정.................................................
이렇듯 충무공 이순신은 정말 국민들로 존경하는 사람중에 마땅히 뽑힐
만한 인물이다.
그런 충무공 이순신을 기념하기 위해 지어진 현충사는 무척이나
깔끔하고 고풍스럽게 지어져 있었다.
넓은 시설이라든가 가족단위 중심적의 배려라든가......기타 관람객들의
편의 시설까지 내가 볼 때는 거의 완벽에 가까웠다.
물론 관람객들의 질서유지 정신과 공공정신이 우선해야겠지만 그보다더
그 곳을 관리하는 사람들의 책임있는 관리라고 생각이 든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 지방에 거주하는 사람들이다.
현충사가 있는 그 지역은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설정되어 있으며,
그 곳 주민들 모두가 현충사의 관리인이고 가장 가까운 주인인셈이다.
이런 주인정신이 바로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잘 보존하고 지키는
밑거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