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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파마다 차이가 약간 있겠지만 청교도적인 영성을 전수받은 초기의 한국 교회 성도들은 매우 엄격하게 주일을 지켰다. 새벽 기도를 포함해 주일에 보통 2-3번씩 기본적으로 공 예배를 드렸고, 일을 한다든지 무엇인가 사 먹는다든지 공부하는 걸 상당히 불경스럽게 생각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원래 계획된 3.1운동의 날짜가 주일이어서 3월 1일로 변경됐으며, 해방 이후 공산화된 이북에서 한국 교회는 주일에 실시되는 선거에 강력하게 저항했다. 시간이 흘러 오늘날 주일 성수 개념은 매우 흐려졌다. 1980년대 부산에서 중고생 시절을 보낸 필자는 서울에 왔을 때 상당수의 신자가 주일에 대수롭지 않게 식당을 이용하는 걸 보고 충격받은 기억이 있다. 미국 유학 시절에는 목사조차 아무렇지 않게 장을 보기도 했다. 20년 가까이 지난 오늘날 주일 성수는 주일 출석 정도의 의미로 격하되고 말았다. 강단에서 주일 성수에 대한 강조도 거의 사라지고 말았다.
율법주의?
필자의 경험으로 주일 성수를 강조할 때 황당하게도 율법주의라는 딱지가 따라붙는 것을 보게 된다. 율법주의를 어떻게 규정하는가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십계명의 네 번째 계명이 명하는 것이다. 안식교와 달리 주일을 안식일로 본다면 주일 성수는 제4계명 그 자체다. 따라서 제4계명을 잘 지켜야 한다는 말이 율법주의일 수는 없을 것이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제5계명)와 같이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도 십계명의 한 부분이다. 주일 성수를 십계명의 한 부분으로 이해한다면 주일 성수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주일 성수를 할까를 논의해야 할 것이다.
주일 성수를 안식년이나 희년 같은 구약의 절기처럼 생각하는 이가 적지 않다. 구약의 모든 절기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됐고 따라서 더 이상 신약의 성도들은 그 절기를 지킬 필요가 없다. 하지만 주일 성수는 구약에 속한 계명이기는 하지만 십계명의 한 부분으로 도덕법적인 성격도 지니고 있다. 이 점에서 안식일은 다른 절기와 구분된다. 물론 안식일의 구약적 요소는 제거돼야 하지만 [그래서 구약의 안식일이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 주일(일요일)로 바뀌었음] 안식일의 도덕법적인 요소는 그대로 유지돼야 하며 오히려 강화돼야 한다. 이 둘은 조심스럽게 구분될 필요가 있으며 이를 놓치면 제4계명을 유대인과 같이 생각하든지, 아예 주일의 거룩함을 무시하는 세속주의자가 된다.
주일을 잘 지키자는 주장이 율법주의가 될 수 없다. 이를 통해서 자신의 의를 드러낸다든지 구원에 뭔가 보탬이 된다고 생각하는 게 율법주의다. 예전과 달리 제4계명에 대한 무관심이 보편화된 오늘날 오히려 주일 성수를 강조할 필요가 있고, 이를 위해서는 제4계명을 성도들에게 보다 정확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다. 이전에는 지나치게 주일 성수를 강조해 성도들이 율법주의에 빠졌다면, 요즘에는 주일 성수 자체를 언급하지 않다 보니 많은 성도가, 특별히 젊은 청년들이 방종주의에 빠져 있다. 율법주의도 배격해야 하지만 자유라는 이름의 방종주의도 교회를 세속화시키는 무서운 독임을 놓쳐서는 안 된다.
주의 날: 시간의 주인이신 하나님
십계명은 크게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구분된다. 그 첫째 부분을 차지하는 제1계명부터 제4계명은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다룬다. 제1계명은 예배의 대상, 제2계명은 예배의 방식, 제3계명은 예배의 태도, 제4계명은 예배의 시간을 다룬다. 제4계명에서 가장 중요한 교훈은 예배의 시간을 하나님께서 정하셨다는 것이다. 이는 시간의 주인이 하나님임을 알려 준다. 세상에서 일요일이라 불리는 주일의 정확한 표현은 주님의 날(the Lord’s Day)인데, 일요일만 주님의 날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모든 날이 주님의 날이지만 주일이 특별히 주님의 날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주일 성수를 거부하는 것은 결국 시간의 영역에서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독립 선언일 뿐이다.
우리는 창세기 1장에서 일주일이 인간이 고안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제정하셨음을 목격하게 된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6일 동안 창조하셨다. 특히 넷째 날에는 해와 달과 별을 창조하심으로 날과 절기를 주관하게 하셨다. 지구 공전을 통해 일 년이, 달의 공전을 통해 한 달이, 지구의 자전을 통해 하루가 정해진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마음만 먹으면 한순간에 모든 걸 창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과 같은 날, 달, 년은 존재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요일제(7일제) 역시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그 기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일하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지 않았더라면 요일 구분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요일의 단위도 나라마다 달랐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이성이 최고의 자리를 차지했던 프랑스 혁명 기간에는 7일제 대신 10일제를 시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성주의자들의 과감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10일제는 오랫동안 유지될 수 없었다. 7일 제도는 일종의 자연법에 속한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시간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주일을 거룩하게 하셨다. 이 역시 주일 성수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인간이 주일을 거룩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주일을 거룩하게 하셨음을 기억해야 한다. 신자는 주일 성수를 통해 더럽혀진 안식일을 더 거룩하게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거룩하게 하신 날을 거룩하게 유지하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현이다. 이를 기억한다면 주일 성수는 짐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선물이라 할 수 있다.
기억과 구별 & 거룩
제4계명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라”다. 의외로 강조되지 않는데 주일 성수의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의무는 ‘기억’이다. 아무리 주일을 열심히 지켰다고 자부하더라도 기억이 빠진다면 그것은 제대로 된 주일 성수라고 할 수 없다. 주일을 기억한다는 것은 단지 날짜 자체를 기억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주일을 통해 기억해야 할 것은 바로 그 날에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기억하는 것이다.
우리는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에 기록된 십계명 내용 중 유일하게 제4계명에 관한 진술만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다. 출애굽기 20장은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이유를 하나님의 창조로 설명하지만 신명기 5장은 그 이유를 하나님의 구원으로 설명하고 있다. 왜 이 둘이 서로 다른지에 대해서 우리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자가 되시고 우리의 구원자이심을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서 안식일이 제정됐다는 것은 확실하다.
기억은 단지 기억에서 끝나지 않고 우리의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게 제4계명의 가르침이다. 여기서 우리는 구원 역사(교리)와 윤리(삶)가 얼마나 밀접하게 연결되는지를 보게 된다. 어떤 신자가 하나님께서 자신의 창조주임을 정말로 믿는다고 가정하자.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만든 것도 믿는다는 것도 의미한다. 이 구체적인 “어떻게”를 모른다면 그 믿음은 막연할 뿐이다. 참된 신자는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창조 사역을 하시고 7일째 쉬셨다는 걸 믿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신자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됐다는 걸 믿는다면 우리 역시 하나님을 본받아 6일 동안 일하고 하루는 안식해야 한다. 만약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데 주일 성수를 거부한다면 그 믿음은 제대로인 믿음이라 할 수 없다. 이는 구속주 하나님께 대한 믿음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주일 성수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개념은 ‘구별’이다. 소득의 십분의 일이 주님 것이듯, 시간의 칠분의 일도 주님 것으로 구별해야 한다. 세상 사람 눈에 보기에 오늘과 내일은 별 차이가 없다. 신자들도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벧후 3:4). 물리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시대와 상황, 심지어 산천도 변하지만 날 그 자체는 항상 동일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 세상의 마지막 날이 있다는 생각을 하기 어렵다. 하지만 주일이라는 개념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날이 같지 않으며 세상의 마지막이 있음을 가르쳐 준다.
신자와 비신자는 같은 공간 속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신자들은 세상에 속하지 않고 살아가는 존재다. 이 구별은 신자들의 주일 성수를 통해서 가시적으로 드러난다. 만약 주일 성수가 없다면 삶에서 신자와 비신자의 실제적인 구별은 거의 불가능하다. 단지 선한 일을 많이 한다고 해서 신자와 비신자가 구별되는 게 아니다. 만약 주일인데 입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신자가 불신자와 함께 등산을 간다면 그때 어떻게 그 신자를 신자로 구별할 수 있겠는가? 주일 성수는 신자들이 자신의 거룩함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분주로 변한 안식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죄와 사망에서 우리를 구원해 안식을 주셨지만 예수를 믿고 난 이후에도 인간은 여전히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기를 원한다. 이를 제4계명의 관점에서 표현하면, 하나님은 주일에 안식하기를 원하지만 인간은 여전히 여러 가지 일로 분주하다. 옛날과 달리 여러 약속이 주일에 집중되고 있다. 유흥이 토-일요일에 집중되다 보니 월요일에 쉬는 상가가 점차 증가하고 있기도 하다. 신자들도 점점 주일 성수를 하기가 불가능한 상황이 되고 있다. 주일이 하나님 일을 기억하는 날이라기보다 자신의 약속을 기억하는 날로 변모하고 있다.
주일날 교회에서도 신자들이 참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교회를 오래 다닌 성도에게 주일은 안식하는 날이 아니라 교회 일을 하는 날로 바뀐 지 오래다. 교회는 주일날 여러 행사, 모임, 교육 등으로 분주하다. 성도들은 교회에 와서 안식하기보다는 일에 치이는 경우가 많다. 문제는 그런 일이 교회를 유지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주일학교 교사들은 아침 일찍부터 교회에 나와서 여러 가지 봉사를 해야 한다. 주일학교 교육이나 찬양대 봉사는 좀 나은 편이다. 식사 준비와 설거지 및 청소는 맡은 이들에게 큰 짐이 아닐 수 없다.
봉사가 과도하게 되면 이는 봉사가 아니라 노동이 된다. 봉사는 기쁨과 안식이지만 노동은 무거운 짐일 뿐이다. 아무리 교회에서 하는 일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과도하면 이는 제4계명을 심각하게 어기는 죄가 될 수 있음을 교회 지도자들은 명심할 필요가 있다.
봉사의 일을 맡기기 전에 한 주 동안 세상에서 싸우느라 지치고 피곤한 성도들이 어떻게 하면 교회에서 안식을 누리게 할지를 진지하게 먼저 고민해야 한다. 특별히 다음 세대를 이끌고 갈 젊은이에게 중요한 문제다.
특별히 부모에게 주어진 명령
제4계명으로서 주일 성수는 모든 신자에게 주어진 명령이다. 하지만 제4계명은 특별히 가장이나 윗사람에게 주어진 명령이다. 제4계명을 다시 한 번 찬찬히 읽어 보면 이 사실을 분명히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사실 이 구절이 없어도 제4계명을 이해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다. 하지만 제4계명은 “네(너의)”라는 말의 반복을 통해 가장이나 윗사람의 의무를 강조한다.
웨스트민스터 대교리 제118문답은 앞에서 언급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 설명한다.
118문: 왜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이 특별히 가장과 윗사람에게 주어졌습니까?
답: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이 특별히 가장과 윗사람을 향해 주어진 이유는 그들 자신에게 안식일을 지킬 의무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 통솔 하에 있는 모든 사람 또한 안식일을 지키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며, 그들은 종종 자신의 일로 인해 아랫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못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교리문답이 성경을 올바로 이해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만약 이 문답을 모른다면, 이 계명이 특별히 가장이나 윗사람에게 주어졌다는 것과 그 이유를 어떻게 쉽게 알 수 있겠는가? 윗사람들은 제4계명을 스스로 지켜야 하는 건 물론 자신의 아랫사람도 지키게 해야 할 의무가 있다. 더 많은 권세를 가진 윗사람들은 더 많은 책임을 가지기 때문이다.
대교리문답에 따르면 제4계명은 특별히 부모들이 주의해야 한다. 자신이 주일 성수를 지키는 것은 그냥 하면 되지만 자녀들이 주일 성수를 지키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 부모들은 스스로 주일 성수의 모범을 보여야 한다. 영적인 안식의 핵심은 예배를 통한 하나님과의 교제이기에 예배에 있어서 모범이어야 한다. 자신은 주일 성수를 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자식들에게 주일 성수를 하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한국 사회에서 부모들이 저지르는 최악의 죄는 주일날 자녀들을 학원에 보내는 것이다. 예배 후에 학원에 보내는 것은 그나마 낫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고3 학생들은 수능시험 몇 달 전에는 아예 예배에 출석도 안 하는 경우도 많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보다 대학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뜻이다. 실제로 한국에서 대학‘교’는 최고의 종교가 됐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원하는 대학에 가면 신앙생활을 잘할까? 대학을 졸업하더라도 좋은 직장에 갈 수 있을까? 좋은 직장에 가면 신앙생활을 잘할까? 제4계명에 대한 무시가 결국 우리 자녀들의 영혼을 망치고 있다.
이 글을 읽는 학부모를 위해 한마디만 첨가한다. 필자는 고3 때 주일날 전혀 공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문대에 진학했다. 이는 주일 성수를 잘하면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공부를 좀 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주일에 공부를 더 한다고 성적이 더 오르고, 주일에 안 한다고 성적이 떨어지지 않는다. 공부에서 중요한 것은 시간보다는 집중력이다. 집중은 항상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집중하기 위해서는 쉼도 필요하다. 이를 제4계명 자체가 너무나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쉴 때 쉬고 공부할 때 공부하는 것이 가장 좋은 공부 방법이다.
제4계명의 올바른 적용
제4계명은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이해된 적이 많았다. 주로 주일날 “-하지 마라”는 식으로 이해됐다. 대표적인 예가 “주일날 돈 쓰지 마라”다. 단순히 돈을 쓰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주일 성수를 했다고 할 수 있을까? “돈 쓰지 않음”을 통해서 이뤄지는 율법의 정신, 즉 사랑이 성취되지 않는다면 “돈 쓰지 않음”은 신자들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한다. 실제로 율법의 정신을 가르치지 않기에 신자들은 주일에 돈 쓰는 일에 별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제4계명은 네 남종이나 여종도 주일에 안식하게 하는 걸 요구한다. 이를 문자 그대로 이해한다면 이 계명은 오늘날 적용될 수 없을 것이다. 적어도 우리나라에는 남종이나 여종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계명은 구약 시대나 노예가 있는 국가에만 한정된 계명인가?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 관점에서 해석해 보자. 대교리문답은 이 계명이 “윗사람”에게 특히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대부분의 신자는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할까? 고위직에 있는 사람 외에는 스스로를 윗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복잡한 현대 사회 속에는 위-아래 개념이 명확하게 나눠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내가 돈을 가지고 매장에 들어가면 그때는 직원은 내 아래에 위치하게 된다. 만약 주일날 어떤 식당에 들어가서 식사한다면 그 직원은 그 손님을 위해서 일할 수밖에 없다. 이 같은 관점에서 보면 그리스도인은 불가피한 일이 아니면 주일날 돈을 사용해서 타인을 자신의 직원처럼 일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그 날에 모든 인간이 쉬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주일에 쉬고 싶은가? 당신이 쉬고 싶다면, 남도 쉬게 하는 게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율법의 정신이다.
제4계명은 바쁘고 분주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을 향한 복음이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쉬는 것이 하나님 뜻이고 신자들은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가 이 계명에 순종하도록 해야 할 의무가 있다. 학생들도 공부에서 쉬어야 하고, 돈이 있어도 사용하지 말아야 하고, 상점 문도 닫아야 하고, 집안 일도 쉬어야 한다. 일에서 해방되고 쉬게 되면 인간은 비로소 여유를 가지고 기억과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특별히 하나님 일과 영적인 것을 사모하게 된다. 하나님은 특별히 주일에 예배 시간에 이와 같은 일이 이뤄지기를 원하신다.
불순종하는 자를 향한 경고
“주일에 쉬어라”라는 하나님 명령에 대항하여 인간은 “주일에 더 열심히 일해라”고 반항한다. 특히 믿음의 부모들이 이 반항의 최전선에 서 있다. 이 같은 불순종으로 우리의 자녀들이 믿음에서 급속도로 멀어지고 있다. 주일 성수의 복음이 회복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마지막 자녀가 믿음을 떠날 때까지 교회를 향한 엄중한 심판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복잡하게 얽힌 인간 관례로 인해 주일에 완벽하게 안식하는 게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 됐다. 제4계명에 대한 강조는 신자들에게 불편함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기에 아예 제4계명에 대해서 침묵으로 죄책감을 덜어 주려 한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교회를 살리는 길일까? 오히려 자신의 죄와 비참함을 인식하면서, 부족하지만 주님께서 주신 능력 안에서 주일을 성수함으로 영원한 안식을 소망하는 것이 신자가 나그네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방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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