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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주네 가족♡┐ 원문보기 글쓴이: 백두대간
-공공기관대상 청렴교육-
이순신장군의 청렴리더십
2016.07.13.~07.26.
<1차시> 선배공직자 이순신을 말하다
1-3. 충무공 이순신 : 13척vs133척 명량해전(1597년 선조30년)
○ 1592년 임진왜란 발발
1-4. 이순신장군의 업적 : 23전 23승 (전승)
○ 이순신장군이 이룬 전적은 세계 어느 해전사 에서도 볼 수 없는 기적 같은 승리.
1-5. 해외에서의 평가
○ 미국 해군역사가 ‘조지해거만’
- 이순신 때문에 일본의 중국침략이 약 300년 동안 막혔다.
○ 미국 리더십전문가 ‘짐프리트만’
- 1588년 영국이 스페인 무적함대에 승리한 것과 같은 역사적 비중
○ 420여년전 동아시아의 역사를 바꾼 위대한 지도자「제2의 징기스칸을 꿈꾸던 히데요시의 야망」을 물거품으로 만든 바로 『충무공 이순신장군』
1-6. 이순신장군의 좌우명
○ 시대를 뛰어넘어 훌륭한 리더로 찬사를 받아온 이순신장군
○ 이순신장군이 평생 진리로삼았던 ‘믿음’은 무엇일까요?
- 장부생세(丈夫生世) 용즉효사(用則效死) : 장부가 세상에 태어나 쓰이게 되면
죽기로 일 할 것이요.
- 불용즉경(不用則耕) 어야족의(於野足矣) : 쓰이지 못하면 들판에서 농사짓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다.
- 취미권귀(取美權貴) 오심치지(吾甚恥之) : 권세있는 곳에 아첨하여 한때의
영화를 훔치는 것 같은 것은 내가 제일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다.
-{충민사기}중에서-
1-7. 역사속 청백리 이순신
○ 장군으로서의 업적에 가려져 공직자 이순신의 청렴함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음.
1-8. 청렴에 대한 오해
<2차시> 옳은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
2-3. 이순신의 고민
○ 왕명에 따라 출전하자니 패전이 명확함은 물론이거니와 나라와 백성, 군사들의 목숨이 걱정되고... 왕명을 거역하자니 대역 죄인이 되어 죽음에 처할게 뻔하다.
○ 조선수군을 살릴 것인가! 대역죄인으로 사형을 당할 것인가!
임금의 명을 거역하면 내가 죽을 것이요. 임금의 명을 받아들인다면, 아끼는 부하들은 물론이고 지금까지 준비했던 모든 것들이 물거품이 델 터이니... 그렇다면 차라리 내가 죽는 것이 장차 이나라 조선을 두고볼 때 더 나을 것이다.
2-4. 백의종군/칠천량 해전
○ 선조의 출전명령 거절./원균은 아무런 전략 없이 마지못해 출전하여 대패하고 자신도 죽임을 당함.
2-5. 청렴과 부패의 차이
2-6. 원칙을 중시 : 타협에 굴하지 않고 원칙을 중시하는 태도
2-7. 서익의 인사청탁 거절
○ 1579년 서른다섯살의 봄. 훈련원 봉사(종8품)로 근무시절,
병조정랑(정3품) 서익의 인사청탁 거절
2-8. 청탁의 유혹
○ 고위간부가 말단 직원에게 아는 후배 먼저 승진시켜 달라는 청탁은
협박이다. “불가합니다.”라고 씩씩하게, 단호하게 말 할 수 있을까?
2-9. 청탁에 대한 이순신장군의 생각
○ 웬만하면 들어주지 그랬어요. 그양반 성질도 고약한데...
○ 저라고 쉬웠겠습니까. 햐~~무진장 피곤합니다.
- 이순신은 누가 보든 보지 않든 자신의 원칙을 성실히 지킨 공무원이었다.
2-10.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실천하다.
○ 휴가비로 받았던 양식이 남은 경우에도 반드시 반납하였다.
2-11. 지독한 청렴의지 : 미투리(짚신)이야기, 승려 덕수 이야기.
2-12. 나라의 것은 내 것이 아니다.
○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공직자 이순신의 청렴함.
○ 1580년 종4품 발포만호=1579년 종8품 훈련원봉사 직에서 8단계를 건너뛴 파격적인 승진.
※ ‘신념’ : 상부의 부당하거나 잘못된 지시에 “아니오”라고 당당한 거절
2-13. 청렴이 어려운 이유
○ ‘부패’ : 왜, 옳은 생각을 하다가도 주저하게 될까? 혼자 깨끗하면 뭘해?
○ 청렴을 실천하고자 할 때 무엇이 가장 두려운가? 실패한 공직자가 될까봐?
○ 32살 종9품 ‘동부비보권관’에서 49세 종2품 ‘삼도수군통제사’
54세 노량해전 전사 후 그해 ‘영의정’에 추대됨.
2-14. 학습정리 및 학습평가
2-15. 근중일기
○ 공직자의 근중 일기
- 고민은 함께 나누면 반이 됩니다. 혼자서 끙끙대지 마세요.
① 간부의 부탁과 원칙 사이, ② 의리. 그놈의 의리...!
③ 어느 신입의 지혜로운 선택, ④ 어느 신입의 사소한 고민.
2-16. 다음차시 예고
○ 원칙을 지키기에만 급급하지 않고 필요한 순간에 언제나 당당하게 나셨던 ‘용기’가 있었기 때문
<3차시> 용기는 두려움을 이긴다.
3-3. 필사즉생(必死則生) 필생즉사(必生則死)
○ 13척vs133척
- 필사즉생(必死則生) : 병법에 이르기를,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살고
- 필생즉사(必生則死) : 살려고 꾀를내고 싸우면 죽는다고 했고
- 일부당경(一夫當逕) : 한사내가 길목을 지키면
- 족구천부(足懼千夫) : 천 사내라도 두렵게 할 수 있다 했는데
모두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3-4. 명량해전
○ 맨 앞에서 진두지휘
○ 진퇴양란 : 절박함에 바탕한 솔선수범은 두려움을 무너트린다.
3-5. 이순신장군의 담력
○ 서애 류성룡의 서애집
- 이순신은 담력과 지략이 뛰어난 자로 장수중의 최고이니 적극 협력하라.
- 당파로 어지럽고 조정에 피바람이 불던 1589년의 이야기
3-6. 정애립 반란사건 : 윗분의 부탁이나 명령 또는 좋은 제안에 한번쯤 하는 유혹
3-7. 김귀영 서녀 거절 일화
○ 1579년(35세) 훈련원봉사시절 병조판서 김귀영의 서녀를 첩으로 준다는 전갈에 답 : 벼슬길에 갓 나온 내가 어찌 권세 있는 집안에 발을 드려 놓을 수 있느냐. 하며 거절
3-8. 정승 유전과의 화살통 일화
○ 1583년 39살 되던해, 서익 때문에 발포만호에서 파직되었다가 훈련원 봉사로 어렵게 복직된 후의 이야기
○ 유전이 화살통을 탑내자 “직접 가져가시든 제가 바치든 하찮은 물건 하나 때문에 이름을 더럽히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라며 정중히 거절
- 유전 : 그대 말이 옳다. 하면서 물러섬.
※ 마음에 들어서 제안 했는데 원칙을 따르겠다며 거절한 것.
3-9. 금토패문(禁討牌文)에 대한 반박
○ 옳지 않은 명령이라면 그것이 상사나 왕의 지시라 해도 용기있게 거절했다.
○ 1594년 3월 6일 당항포 해전을 마친 이순신장군이 몹시 힘들어하고 있을 때, 남해 현령(기효근)으로부터 명나라 도사부 담종인이 보낸 ‘금토패문’을 받는다.
○ 금토패문 내용 : 명나라와 일본이 강화조약을 체결하려고 하는 중이니 속히 본고장으로 돌아가고 행여나 일본진영에 가까이 가서 논란을 일으 키지 말라.
○ 이순신장군의 답 : 담담도사종인금토패문(菼譚都司宗仁禁討牌文)
- 척로불반(隻櫓不返) : 단 한척의 왜적배도 돌려보낼 수 없다.
영남 연해안이 우리땅 아닌 곳이 없고 도적들과는 한 하늘아래 갔이 살수 없다.
3-10. 성즉명(誠卽明) : 정성스러우면 밝아진다.
3-11. 학습정리 및 학습평가
3-12. 근중일기
○ 고민은 함께 나누면 반이됩니다. 혼자서 끙끙대지 마세요.
- 접대, 이대로 좋은가, 어느 인사담당자의 고민, 동기야 우리 동기야, 동료와 동료의 친구, 물품구매에 대한 이중장부.
<4차시> 정성은 고난을 이긴다.
○ 정유재란 : 임진왜란 중 명나라와 일본간의 교섭이 결연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재 침략을 명하고 1597년 3월 1일 ‘가토기요마사’가 재침.
4-3. 오적의 음모 : 이순신장군을 제거하는 일
○ 일본은 선조와 조정 대신들에게 거짓정보를 의도적으로 흘림.
- 고니시 ⟶ 이중첩자 가나메 ⟶ 김경서
4-4. 파직과 백의종군
○ 이순신장군이 선조의 출전명령을 거절한 이유
① 적의 첩자가 제공한 정보는 믿을 수 없다.
② 수군 패망이라는 엄청난 결과를 피할 길 없다.
※ 순자(荀子)가 말한 삼지(三止) : 군주에게 명령받지 않아도 되는 세가지
一. 可殺而不 可使處不完(가살이불 가사처불완)
(모두 죽여도 된다 하더라도 불안한 곳에 거처하게 하지 않으며)
二. 可殺而不 可使擊不勝(가살이불 가사격불승)
(모두 죽여도 된다 하더라도 이기지 못할 곳은 공격하게 하지 않으며)
三. 可殺而不 使欺百姓(가살이불 사기백성)
(모두 죽여도 된다 하더라도 백성을 속이게 하지 않는다)
夫是之謂三止(부시지위삼지)
(무릇 이것을 일러 ‘세가지 지극한 것’이라 한다.)
○ 이순신장군을 파직한 사유
一. 조정을 기만한 것은 임금을 무시한 죄
二. 적을 놓아주어 치지 않은 것은 나라를 저버린 죄
三. 남의 공을 빼앗아 남을 무함하며 매사 방자함은 기탄함이 없는 죄
4-5. 칠천량해전 패전
○ 정한위략 : 원균이 이끈 조선수군의 대 참패에 대한 왜군의 기록
○ 왜의 수군 진격, 왜의 육군 행군
4-6. 권율장군의 요청
○ 원균이 패전한 이틀 뒤인 7월 18일 백의종군이시던 이순신장군은 권율 장군으로부터 칠천량해전의 비보를 듣는다.
- 이순신장군의 심정은 과연 어떠했을까요?
- 권율 : 일이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어찌하면 좋겠소?
- 이순신 : 내가 직접 해안지방으로 가서 보고 들은 뒤에 방책을 정하면 어떻겠소?
4-7. 수군 재건을 위한 1차 대장정
○ 7월18일~7월28일 280㎞
- 초계⟶단성⟶정개산성⟶곤양⟶노량⟶남해⟶곤양⟶정개산성⟶진주
4-8. 삼도수군통제사 재임명 교지 : 난중일기 1597년 8월 5일 중에수록
4-9. 수군 재건을 위한 2차 대장정
○ 15일간 330㎞(820여리)를 하루 50~60리씩 이동하며 군량미, 무기,
흩어진 장졸들을 규합하면서 전략을 수립해 나감.
- 장졸 120명으로 늘어남.
○ 8월 19일 ‘배설’로부터 전선을 인계받고 본격적으로 수군 재건을 시작
4-10. 대장정의 결과
○ 한달동안 2차에 걸처 무려610㎞ 대장정이 끝난 후 이순신장군이 얻은 수군의 기반은 12척의 전함과 말 4필 분량의 무기 120명의 수군군사가 전부였다.
4-11. 고통을 이기는 시작
○ 적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동향을 파악하며 수군을 재건하는 대담한 이순신장군 이었지만 「1597년 8월 21일 난중일기 “사경에 곽란이 일어났다....인사불성이 되어 거의 깨어나지 못했다.
구토를 10여 차례하고 밤새 고통스러웠다.” 8월 22일 ”곽란으로 인사 불성이 되었다. 용변도 보지 못했다.“ 8월 23일 ”사경에 병세가 매우 위중해져 배안에 머무르기가 불편하였다. 실제로 전쟁터도 아니기에 배에서 내려 포구에서 잤다.“」 이 글을 보면 당시 이순신장군이 겪었을 고통과 심적 부담이 얼마큼 컷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4-12. 두려움을 희망으로, 죽음을 삶으로
○ 7월 18일부터 8월 19일 2차에 걸친 대장정
○ 옳은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
용기는 두려움을 이긴다.
정성은 고난을 이긴다.
<5차시> 헌신은 기적을 이룬다.
5-3. 수군폐지 반대
○ 백의종군 중에 삼도수군통제사직을 재임명 받고 조선수군을 재건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순신장군
○ 추석날 저녁 뜻밖의 어명 : 군사를 합쳐 육군에 참가하라.
○ 언제나 선택의 기준에 자기자신을 1순위에 놓지 않은 이순신
○ 지금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전선이 남아 있습니다.
- 12척 밖에가 아니라. 12척 이나 남아있습니다.⟶긍정의 힘
- 이순신장군은 우리가 알고 있는 고정관념을 뛰어넘습니다.
5-4. 동고동락(同苦同樂)
○ 1593년 윤달 11월 17일에 올린 장계(둔전)
- 피난민이 농사를 짓게 하여 나라에서 절반 경작인이 절반을 갖게 함.
- 원칙을 지키되 그 밑바탕엔 사람에 대한 배려가 있었다.
5-5. 해로통행첩 탄생 배경
○ 군사들을 굶길 수도 없고 그렇다고 백성들에게 식량을 강탈할 수도 없는 노릇
5-6. 기적의 비책, 해로통행첩
○ 바닷길을 다니는 배에 발급해주는 통행증(약관의‘이의온’이 아이디어)
○ 이의온 : 군량미를 관리하던 하위직 군관
○ 아랫사람의 목소리를 귀히 여겨 들을 줄 알았던 이순신장군은 곧바로 해로통행첩이라는 제도를 만들어냄.
- 통행료를 곡식으로 받아 군량미로 쓰고 대신 통행과 어업행위 보장
5-7. 해로통행첩의 효과
○ 군사는 물론 백성들까지 2만여명을 배불리 먹이고 수군은 간첩과 백성 구분 백성들은 안전보장 일거양득의 효과. - 군량미 1만석이상 확보
5-8. 고금도의 기적
○ 고금도로 수군본영 옳긴 건 보다 적극적으로 남해안 제해권 장악을 시도 하겠다는 이순신장군의 의지.
○ 군대의 위세가 이미 강성해져 남도백성들이 공을 의지해 사는 자들이 수만호에 이르렀고, 군대의 장엄함이 한산진의 10배에 달했다.
{이충무공 행록} 중에서
○ 이순신장군으로부터 우리가 배워야할 또 하나의 중요한 리더십
※ 정성스러운 사람은 미리 방향을 예정해 놓음으로서 일을 당하여 넘어 지지 않고, 미리 계획해 둠으로써 곤란을 당하지 않으며, 행동하기 전에 미리 방침을 정해 놓음으로써 일을 당하여 낭패를 보지 않는다.
{중용} 중에서
○ 신은 이미 모든 준비를 마치었나이다. 바로 이런 자세 덕분이 어떠한 위기 앞에서도 동요하지 않고 성공의 길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
<6차시> 공감은 열정을 키운다.
6-3. 논란의 중심에 선 이순신
○ 1591년(임진왜란 발발 1년 전)종6품 현감⟶정3품 전라좌도수군절도사
- 서애 유성룡에 의해 파격적 승진
- 유성룡의 군사적 재능과 사람을 알아보는 능력 크게 발휘
권율장군 5품⟶3품으로, 정운 말단⟶종4품 만호로 발탁
- 녹둔도(함경도 최북단) 조산보만호 이순신
6-4. 생에 첫 백의종군
○ 함경도북방을 지키는 장교이자 군량미 확보를 위한 둔전을 경영하는 행정관 역할까지 겸임하는 조산보만호 이순신
○ 함경도 병마절도사 ‘이일’에게 병력 증강을 요청하지만 거절당함.
- 그해 가을 풍년이 들자 녹둔도 전투발생
- 이일은 전투에서의 패전을 이순신장군에게 두집어 쒸움
- 이순신장군의 항변
내가 힘써 싸워 적군을 물리치고 우리백성 60여명을 구출해 돌아왔는데 어찌 이를 패전이라 할 것이며, 또한 진작부터 군사들을 더 배치해 달라고 몇 번이나 청했으나 이를 불허한 공문서 목록이 내 수중에 있으니 조정에서도 죄가 결코 나한테 있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오.
- 이일은 이순신장군을 하옥시키고 조정에 거짓 장부를 올리나 조정에 서는 이순신장군이 죄가 없음을 알으나 ‘죄인 이순신은 백의종군해 다시 공로를 세우라’고 명을 내립니다.(두 번째 파직/첫 번째 백의종군)
6-5.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상징 거북선
○ 1592년 4월 11일 비로소 베돛(거북선)을 만들었다. 4월 12일(전쟁나기 하루 전) 거북선의 자주포, 현자포를 쏘았다.
○ 이순신장군은 오직 능력과 실력에 따라 인재를 기용하였으며, 파면당한 사람은 물론 포로도 머슴도 가리지 않은 실용주의적 인재관을 가진 분이시다.
6-6. 민주적 리더십
○ 출전 전까지 이순신장군의 행적
- 왜적 상륙 후 이틀째인 4월 15일 : 원균의 공문 받고 전쟁 알게 됨.
그날 밤 임금에게 1차 장계를 올리고 출전명령을 기다리며 사변에 대비 하고 있음을 알림. 경상순찰사 이광, 병사, 전라우수사에게 공문을 보냄.
- 4월 16일 경상도로부터 공문을 받는 데로 제2,3차 대변 장계를 올림.
동시에 관하 관, 포에 탐망하고 정비할 것을 긴급 시달.
○ 축전연기 이유
- 첫째 : 경상 우수영 산하 장수들의 도망으로 남해도 1관 4포가 모두 비어 예상하던 작전계획에 차질이 생김.
- 둘째 : 함께 출전하기로 약속한 전라 우수영 이억기의 함대가 미쳐 도착 하지 못했기 때문
○ 일본전함 500대 vs 조선전함 20여대
○ 장수들이 모여 회의 담론을박 토론 중 군관 송희립의 의견정리
- 적군을 치는데 전라도 경상도가 어디 있소. 한편으로는 영남을 돕고 또 한편으로는 호남을 보호해야 하오.
6-7. 민주적 리더십 2
○ 한산정 활터 : 밀물과 썰물의 교차를 이용해 해전에 필요한 실전거리의 적응 훈련과 바닷가에서 시도 때도 없이 바뀌는 바다의 해풍에 맞서 활쏘기를 더 잘 할수 있도록 마련한 장소
- 1596년 4월 21일 : 종일 활을쏘고 잔뜩 취해서 돌아왔다.
- 1596년 6월 4일 : 가리포 첨사, 이치 첨사, 목포 만호, 남도포 만호 등과 활쏘기
6-8. 목표에 대한 공감과 동반자적 자세
○ 사람들의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가장 쉬운 방법은? : 그 사람의 욕망을 자극하는 것.
- 일당백을 넘어 일당만의 위력을 발휘할수 있었던 이순신장군과 조선 수군의 힘.
○ 한산도 시절 이순신장군의 숙소이면서 동시에 장수 및 부하들과의 토론장으로 활용된 장소 운주당. 공감은 열정을 키운다.
○ 1598년(54세) 노량해전에서 전사, 11월 26일 임진왜란 7년 전쟁 종전
○ 우리들 가슴속에 신선처럼 오래 살아계신 비결
<7차시> 올바른 신념은 세월을 뛰어넘는다.
7-3. 죽음에서 삶으로
○ 조지S,패튼장군 : 2차 세계대전 중 미군 장군으로 36년간 근무
- 군인의 가장 영예로운 죽음은 마지막 전투에서 총알 맞고 죽는 것이다.
○ 이순신장군 돌아가신 후 살아계실 때 보다 더 승승장구
- 1598년(54세) 명량해전에서 전사
- 1604년(60세) 선무1등공신 덕풍부원군에추봉 좌의정에 추증됨.
- 1643년(99세) ‘충무’시호 받음.
- 1706년(162) ‘현충사’ 건립.
- 1793년(249) 영의정에 추증됨.
- 1795년(251) 이충무공전서 완성
7-4. 조선왕조와 후학들의 평가
○ 류성룡(1542~1607) : 이순신은 백번싸운 장군으로서 한손으로 친히 무너지는 하늘을 붙든 사람이었다.
○ 이식(1584~1647) : 몸을 세우는 절개와 국란에 죽는 충성과 또 행군하고 용병하는 묘리며 복잡한 사무 등을 처리하는 지혜는 이미 다 보고 아는 일이라. 비록 옛날의 명장이나, 어진 장수들로서 백년에 한 둘 밖에 나지 못하는 그런 인물로도 이분을 넘어설 이는 없을 것이다.
○ 정조(1752~1800) : 정조19년(1795) 이충무공전서 완성.
- 이순신장군 묘소에 유일하게 어제(임금)신도비를 직접 짓고 세우셨으며, 내 선조께서 나라를 다시 일으킨 공로에 기초가 된 것은 오직 충무공 한분의 힘, 바로 그것에 의함이라. 내 이제 충무공에게 특별한 비명을 짓지 않고 누구의 비명을 쓴다하랴.
- 당나라 사직을 안정시킨 이성과 한나라 왕실을 회복시킨 제갈량을 합한 분이 충무공이다.(장군을 사모하기로 유명한 정조)
○ 최유해(1588~1641) : 의약과 복서, 천문에도 밝았으며, 재직 중 선정을 베풀어 곳곳에 송덕비가 세워졌다.
- 공은 엄하고 진중하여 위풍이 있는 한편 남을 사랑하고 선비에게 겸손 하며 은혜와 신의가 분명하고 식견과 도량이 깊어 기쁨과 노여움을 잘 나타내지 않았다.
○ 명나라 수병대장 진린(1543~1607)
- 이순신장군은 천지를 주무르는 경천위지(經天緯地)의 재주와 나라를 바로잡은 보천욕일(補天浴日)의 공로가 있는 사람이다.
- 명나라 제13대황제 신종(1573~1620년까지 제위)에게 극찬하여 명나라 수군 도독의 벼슬과 함께 영패, 도독인, 함도, 공나팔 등 8가지 상품을 하사
○ 이렇듯 돌아가신 후에도 조선 왕조와 후학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으시고. 명나라 수군제독의 마음까지도 움직인 이순신장군
7-5. 해외에서의 평가
○ 시바료타로 : 이순신은 청렴한 인물로 그 통솔력과 전술 능력으로 보나 충성심과 용기로 보나 이러한 인물이 실존했다는 자체가 기적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이상적인 군인이었다.
○ 도고헤이하치로 : 러일전쟁(1904~1905)을 승리로 이끈 일본해군제독
- 나를 넬슨에 비하는 것은 가능하나 그에게 비하는 것은 감당 할 수 없는 일이다. 그가 만약 나의 함대를 가지고 있었다면, 세계 해상을 지배했을 것이다.
○ 가와다 고오(포탄 잠재우기) 중에서
- 이순신에게 넬슨과 같은 거국적인 지원과 그만큼의 풍부한 무기와 함선을 주었다면, 우리 일본은 하루아침에 점령을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트라팔가르해전(1805) : 넬슨제독이 이끈, 나폴레옹의 세계 제패를 막아낸 영국군의 승리로 상징된다.)
○ 조지알렉산더발라드(영국해군 준장)
- 영국인들에게 그 공적이 있어 넬슨과 필적 할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인정 하기는 항상 힘들다. 하지만 만약 그런 영예에 어울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한번도 패한 적이 없고 적군 속에서 싸우다 죽은 이 동방의 해군사령관일 것이다.
7-6. 이순신, 세계를 바꾸다.
○ 이순신 때문에 일본의 중국 침략이 약 300년동안 막혔다.
- 미 해군역사가. 조지해거만
○ 1588년 영국이 스페인 무적함대에 승리한 것과 같은 역사적 비중.
미국 리더십전문가. 짐프리드만
○ 이순신장군은 동아시아역사는 물론 세계사까지 바꾼 인물로 평가
7-7. 영원히 사는 성웅 이순신
○ 공직자로서 인생을 살다 갔지만 영원히 사는 성웅으로 일컬어지는
이순신장군, 오늘날 우리 민족이 어려울 때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리더십의 주인공이 되었으며.
○ 시대를 뛰어넘어 위대한 소통능력과 리더십의 주인공으로 각광받는
21세기 문화의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8차시> 진심을 다하면 기회가 온다.
8-3. 청년 이순신과 가족사
○ 李 舜(순임금순)臣(신하신) : 세상을 널리 평화롭게 지키라.
○ 6대 이공진⟶5대 이변⟶3대 이거⟶2대 이백록⟶1대 이정
- 6대 이공진 : 고려시대 판사재시사(정3품)
- 5대 이변 : 영중추부사(조선시대 중추부의 으뜸. 정1품)
- 3대 이거 : 사헌부아문(관리들의 비행과 불법행위를 적발하는 감찰. 종2품)
- 2대 이백록 : 평시서봉사(종8품)
- 1대 이정 : 평민(무직) ⟹ 화신, 요신, 순신, 우신
○ 어지러운 세상 아버지의 바램대로 문관이 될 것인가. 무관이 될 것인가. 22세때 무관 결심. 28세때 무관시험(말에서 떨어짐) 낙방.
4년 뒤 1576년 무과합격(32살)
- 병과에서 4등으로 합격, 청년 이순신의 좌충우돌 공직생활 시작
※ 3번 파직 2번 백의종군
8-4. 32세~38세
○ 1576년 동구비보권관(종9품), 1579년 훈련원봉사(종8품), 8개월 후 종9품 군관으로 좌천, 1580년 종4품 발포만호로 파격승진, 1582년 파직,
- 파직 직후 이조판서 율곡이이(栗谷 李珥 1536~1584)가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의사를 유성룡을 통해 전함. ⟹ 단번에 거절.
- 같은 성씨이니 만나볼 수도 있겠지만, 그분이 이조판서로 있는 동안에 만나는 것은 옳지 못한 듯합니다.
※ 이조판서 : 조선시대 6판서 중의 하나, 이조(吏曹)의 으뜸 벼슬로 정이품관직.
8-5. 38세~42세
○ 1583년 종8품 훈련원봉사(다시 이용의 군관으로 감.),
○ 1583년 11월 정7품 훈련원참군(아버지 사망으로 낙향하여 부친3년상)
○ 1586년 종6품 사복시주부로 복직.
복직 16일만에 종4품 조산보만호로 파격 승진
8-6. 43세~49세
○ 1587년 직속상관 병마절도사 이일에 의해 누명을 쓰고 파직, 백의종군
- 여진족의 보급전에서 큰 전공을 세우며 백의종군에서 벗어남.
○ 1588년 6월 돌연 아산으로 낙향(가족을 돌보기 위함)
- 1580년 둘째형 요신 사망, 1583년 부친 이정 사망, 1587년 맏형 희신 사망.
○ 1589년 복직
- 1589년(45세) 이순신장군 인생에서 굉장히 중요한 지점.
- 전라도순찰사 이광이 자신의 군관으로 복직시킴.
○ 1590년 종5품 정읍현감
○ 1591년 종4품 전라도 군수.⟶정3품 전라좌수사
○ 1592년 가선대부(종2품 아래)⟶자헌대부(정2품)⟶정현대부(정2품 위)
○ 1593년 삼도수군통제사
8-7. 49세~현재
○ 1593년~1597년 삼도수군통제사. 45세부터 이순신장금 황금기
○ 1597년 3차 파직/2차백의종군(원균과 서인의 모함)
- 칠천량해전 선조의 출전명령을 거절한 이유
- 칠천량해전에서 원균이 대패한 후 삼도수군통제사 재임명 교지
(난중일기 1597년 8월 5일 중에 수록)
- 명량해전에서 대승
○ 1598년 노량해전 전쟁 중 전사 / 대승
8-8. 지지불욕(知足不辱) 지지불태(知止不殆)
※ 1576년 시험관이 이순신에게 물었다.
- 장량이 신선 적송자를 따라 놀았다고 했으니 장량은 과연 죽지않았을까?
※ 이순신이 거침없이 대답했다.
- 사람이 태어나면 반드시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장량이 죽지 않았겠습니까?
또 “통감강목[通鑑綱目”에 ‘임자6년 유호장량이 죽었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신선을 따라가 죽지 않았다고 할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다만 지어낸 말일 뿐입니다.
※ 시험관들이 서로 돌아보며 탄복하며 말했다.
- 이것은 무사는 알수 없는 것이다. - [이충무공 행록] 중에서
○ 지지불욕(知足不辱) : 만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고
지지불태(知止不殆) : 멈춤을 알면 위태롭지 않아 더 오래갈 수 있다.
○ 사생필유명(死生必遺命) 유생필사유(酉生必思惟)
(성공한 장수는 권력에서 물러나 조용히 은거해야 한다.
※ 위기(CRISIS) : 위기가 닥칠 때 리더마다 대응방법이 다르다.
어떤 리더는 위기에 맞서서 당당히 싸우지만 어떤 리더는 피하기 바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