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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413-417
이러한 유기적인 정치 사상은, 평양이 영어로 표기한대로, 김일성이 끝없이 강조하는 “chuch‘e 사상”에 녹아있다. chuch‘e란 말은 언뜻 보기에 쉽게 이해되는 말로 보인다. 그것은 정치, 경제, 방어, 사상에 있어 자주와 독립을 뜻한다; 그말은 평양이 모스코바에서 독립한 1955년에 처음 나왔고, 김이 모스코바와 베이징으로부터 독립적인 입장을 추구하던 60년대 중반에 만개했다. 1955년 이전에는 남북한에서 chuch‘e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후에 두드러지지 않았다면,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 김의 수사는 유사어들을 사용했다; “자주”와 “독립”으로 번역된 많은 단어들이 1940년대에 김의 사상을 구체화했다: 자주성(self-reliance), 민족독립(national and ethnic independence), 자립경제(independent economy). 이러한 용어들은 사대주의의 반의어로서, 사대주의란 외세에 복무하고 의존하며, 태생적으로 한국적인 것에 끌리는 민족에게는 재앙이었다. 덧붙이자면, 이러한 사상은 모든 식민지 민족들이 세기 중반에 추구하던 공통분모였다: 그들의 기본적 존엄성은 인간이었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보면, chuch‘e의 의미는 접근이 더 어렵다. 북한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 마음과 정신에 chuch'e를 확고하게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오직 chuch‘e가 마음속에 확고할 때 우리는 행복할 수 있다”; “주체는 마음속에 확실히 자리잡아야할 뿐 아니라 실생활에서도 완벽하게 실제화되어야한다” 등등. 두 번째 글자인 ch'e는 한글 발음으로는 19세기 후반 리홍장의 자강 운동에 대한 용어인 t'i of t'i-yung에서 볼 수 있는데, 근간을 배운다는 중국어 t'i와 사용하기 위해 배운다는 서양 학문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the tai of kokutai이기도 한데, 이는 1930년대에 일본에서 주창된 개념으로, 일본은 진정으로 일본 것이 아닌 그어떤 것에든 반대한다는 개념이다. Kokutai는 전쟁전 황권 체제와 국수주의로 깊이 특징지워진다. 일본의 졸필가들은 계속해서 “kokutai를 마음속에 확고히”라고 쓰곤했다; 일단 그것을 마음속에 확고히 두고 나면, 다른 모든 것은 따라온다. 전후기간동안, shutaisei(한국어로는 주체성)는 일본인 지식인들사이에서 일본이 어떻게 현대화를 이루면서도 동시에 일본적일 수 있을까라는 중심주제하에 공공연히 사용되었다. 한국인들도 똑같은 방식으로 chuch‘e를 사용했다 -그들의 경우 주관적이고 독립적인 마음의 상태를 만들어낼 목적으로, 올바른 생각이 우선되어야 하며, 올바른 행동을 결행해야한다- 뿐만 아니라 현대적이며 동시에 한국적인 것을 가려내야 한다. 그 용어는 번역하기 매우 어렵다; 그 의미에 가까워질수록, 그 뜻은 점점 어려워진다. 외국인들에게 있어 그 의미는 한국인들을 한국적으로 만드는 모든 것을 뜻하며, 그러므로 결국 한국적이지 않은 것은 접근할 수도 없다. chuch‘e는 북한의 국가 유아독존론의 불투명한 핵심이다.
김일성은 항상 한국식 자주의 주요 해석가였다. 1980년 7월에 그는 오래된 사상을 내보였다. 한국은 “강대국들의 놀이감”이 돼서는 안된다고 선언하며, 그는 “나는 나의 관료들에게 말한다.”고 덧붙였다: 만약 사람이 사대주의를 취한다면, 그는 바보가 될것이다; 만약 한 나라가 사대주의에 빠진다면, 이 나라는 망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한 당파가 사대주의를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대중혁명을 초래할 것이다.“ 그는 계속하여 ” 예전에 푸쉬킨을 숭배하는 시인들과 차이코프스키를 존경하는 음악가들이 있었다. 심지어 오페라를 만들때에도, 사람들은 그것을 이탈리아식으로 만들었다. 사대주의는 너무나 방자한 것이어서, 어떤 화가들은 우리의 아름다운 산과 강 대신에 외국의 풍경을 그렸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유럽의 예술작품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한국인들은 항상 자주성을 꼭 잡고 있어야한다“고 말했다. 그것은 매우 우아한 표현은 아니지만, 식민화되었다가 독립된 한국의 오랜 경험이 왜 북한이 그런 훈계가 그렇게나 필요한지를 설명해준다.
국가 독존주의가 표현한 것은 북한 자료에서 항상 볼 수 있다: 한국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가정(한국인이 아닌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강리도라는 지도를 다시 보자). 한국이 중심에 있고, chuch‘e의 물결이 밖으로, 특히 주체가 준비되었다고 생각되는 제3국가들로 퍼져나간다. (김일성 정권은 수십년간 전세계의 주체 사상 학습을 금전적으로 지원했고, 그들의 수뇌가 평양을 방문하면 국빈처럼 대우했다.) 세계가 한국을 향하고, 모든 눈이 김일성과 김정일에게 있다. 이것이 아마도 북한인민민주주의 공화국의 가장 기묘한 양상이며, 또한 가장 뚜렷한 양상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그것과 유사한 것은 중국의 중화사상으로, 이번에는 조금만 언급되었다.
아침에 일어나 주체를 “완벽하게 인지하기”위한 충분한 지침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것의 진정한 의미는 항상 한국적인 것을 우선시하는 것으로 가장 잘 번역될 수 있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일종의 국가주의를 표방한다. 그것은 막시즘보다는 신유교주의에 더 가깝다. 잠깐 여기서 멈추어 철학적으로 생각해 보자: 나는 그 지도자가 나와 함께 있어주길 바라는데, 이는 우리의 목적이 단지 북한의 행동을 묘사하는게 아니라, 왜 그들이 그렇게 행동하는지를 이해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도 우리와 똑같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2천백만의 동료 인류이다. 만약 한 국회의원이, 북한과의 핵위기동안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것처럼, “그 사람들은 우리와 다르게 생각한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왜 그런지에 대한 지적인 관점을 가져야만 한다.
여기 “사회주의의 폐해”에 대해 상술한 김정일이 있다. 사회주의의 역사와 “몇몇나라”에서의 붕괴(그의 관점에서는, 주로 젊은이들을 세뇌시키지 못해 일어난 일로) 원인을 통찰한 후에, 김정일은 “의식이 인간의 행동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기본 요인은 항상 이념의식에 기대어야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앞에서 보았듯이, 한국적 사상에서 “정신”은 동시에 “마음”이다. 일상적인 한국인의 몸짓은 가슴의 사고 체계에 위치해 있다. 두 번째로, 인간 행동의 원리는 “만약 그렇다면”이라는 인간의 우선순위 전제가 아니며, 그의 외적 환경이 그로 하여금 어떤 식으로 행동하게 한다 (이성적으로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행동을 유도하는 보상과도 같은): 대신, 그 원리는 인간의 내적 조건에 있으며, 마음의 상태를 전제한다. “오직 주체 사상이 당신의 마음속에 확고할 때만, 당신은 아침에 일어나 우리 나라의 훌륭한 시민이 되는 방법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내적 조건이란 무엇인가?
좋은 질문이다: 그것은 신유교주의 철학자들이 항상 논쟁하던 질문이다. 그들의 논쟁속으로 들어가지 말고, 14세기 조선의 개혁가였던 정도전의 작품 한 부분을 보자. “불교와 도교”에 대한 그의 반박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그리고 심지어 자기 이익을 앞세우는 행동에 대해, 꿈틀거리는 벌레에 비유하여 언급한다):
원리(li)란 마음(hsin)에 부여된 덕(te)이며 물질의 힘(ch'i)이 나오는 대의이다.
아! 심오한 원리여
하늘과 땅보다 더 먼저 존재했던
물질의 힘은 자신으로부터 나오며
마음도 역시 그러하다....
정신은 몸의 주인이 되는 원리와 물질의 힘으로 구성된다.... [원리]도 또한 마음에서 나와 덕이 된다.
만약 오직 마음만 있고 자신이 없다면,
거기에는 오직 세속적으로 얻어진 삶만 있을 것이다.
만약 오직 물질의 힘만 있고 자신이 없다면,
거기에는 오직 살과 피로 된 육신만 있을 것이다.
꿈틀거리는 벌레처럼 움직이며
새와 짐승에게로 돌아간다
이것이 우리에게 인간은 정의를 가지고 있으므로 금수와 다르다는 것을 말해준다. 만약 인간에게 정의가 없다면, 그의 의식은 감정, 희망, 세속에서 얻은 이기심에 지나지 않으며 그의 행동은 꿈틀거리는 벌레떼와도 같다.... 원리는 진정 우리의 마음속에 담겨있다.
같은 담화에서, 권균은 이렇게 말한다:
오직 사람이 인간성을 가진 후에야, 그의 마음에 덕을 완성하며, 그가 가지고 태어난 원리를 계속 유지할 수 있으며, 당황하지 않고 인간으로 불릴 수 있다.
“내적 조건”이란 바로 덕이며, 마음에 구현되어 있다(유기적으로는 뇌, 마음, 몸이 합쳐진 것으로 여겨진다); 마음속의 덕은 우리를 동물과 다르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물질의 힘이 존재하게 하는 명분”이다! 이제 그것은 매우 복잡한 사안이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이 외부 환경, 즉 세상을 불러냄을 뜻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우리 모두가 주관적 존재(객관적 이성주의 행위자가 아니라)라는 “포스트모던” 규정을 만든다면, 그리고 그리하여 우리가 우리 자신의 현실을 만들고 그것을 역사책과 같은 것으로 부른다면, 그리하면 정도전은 인간이 그들의 우주를 창조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어떤 인간이 아니라, 오직 그러한 인간들만이, 오랜 공부를 통해, 덕을 일구어왔으며, 그 덕은 판단하고, 결정하고, 이끌고, 가르치고, 그리하여 창조해내는 능력을 갖는데 필수 조건이다.
어떤 학자도 “철학자로 하여금 왕이 되게 하고, 왕으로 하여금 철학자가 되게 하라”는 플라톤의 권고보다 더 나은 변명을 제공하지 못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것이 Hongian 정당화이다. 어떤 정치가 이 논리에서 나올까? 플라톤식의 질문을 하라. 17세기 성리학자인 Fan Tsu-yu는 “세계의 질서와 무질서는 모두 지배자의 마음과 정신에 의존한다. 만약 그의 마음과 정신이 바르다면, 조정의 무수한 일들도 옳을 것이다.” 공식은 덕있는 마음이 몸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다. 이제 몸이 몸의 정치가 되게 하고, 덕있는 왕이 주인이 된다. 어떻게 그가 그렇게 할까? 정확하게는 수십년간의 고전읽기와 철학자들의 가르침에 의해서이다. 우리가 영조 대왕에게서 볼 수 있듯이. 그러면 왕은 완벽한 존재, “국가의 최고 정신”이 되고, 그의 권위에 도전하거나 그가 물위를 걸을 수 있음을 부정하는 사람에게 화를 낸다. 그러나 그의 권력은 절대적이지 않다: 그는 여전히 학자들, 검열관들, 반대자들에 의해 무력화된다; 결국, 그들은 과거에도 현재도 그의 스승이다.
협동의 북한식 버전의 중심에 이 사상이 있고, 그것이 김일성과 그의 아들의 위치를 이해하는 한 방법이며,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둘러싸고 “개인 숭배”라 부르는 것이다. 나의 입장은 북한이 스탈린의 러시아보다는 신유교주의 왕국에 더 가깝다는 것이다. 무분별하게 부풀려진 영웅 숭배와 넌더리나는 반복으로 인해, 북한의 정치 웅변술은 한계를 모르는 것 같다; 자유주의 정치 체제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그것은 본능적으로 불쾌하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부터 거기에 있어왔다.
김일성은 1946년 2월 그가 북한 임시 인민 위원회 의장이 되었을때 최고 지도자가 되었고, 죽을 때까지 최고 권력을 가졌다. 집권 몇 달만에, 신격화와 과장의 징후가 거의 오늘날만큼 분명해졌다. 1946년 북한에 잠입한 요원들은 전신주등에 김의 사진과 포스터가 “그가 얼마나 현명하고, 명민하며, 용맹하며, 대단한지”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꽃줄로 장식되어 있다고 보고했다. 동시에, 그를 “국가의 태양” 그리고 만물을 그의 “명민함과 과학적인 방법”으로 안내하는 “아름다운 붉은 신성”, 으로 묘사하는 기사들이 나왔다. 1946년 김의 첫 번째 전기작가와의 중요한 인터뷰에서, 그의 유격대의 무명 대원이 김일성 라인을 오늘날의 공식적인 역사라고 주창했다. 김은 아래의 예를 준비했다:
이런 종류의 사람은 자연적으로 다른사람을 이끄는 매우 강력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그런 사람이 가운데에 있는 유격 조직을 말하지 않아도 비교할 수 없이 강하다. 우리 유격대대의 최고의 행운은 중심에 위대한 태양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총사령관, 위대한 지도자, 명민한 스승, 그리고 긴밀한 친구는 김일성 장군만한 사람이 없다. 우리 대대는 흔들림없이 김일성 장군을 따랐고, 그를 중심에 놓았다. 장군의 포옹과 사랑은 태양과도 같으며, 우리의 전사들이 장군을 우러러보며 받아들일 때, 그들의 믿음과 자기 희생 그리고 헌신은 장군을 위해 기꺼이 죽을 수 있는 그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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