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수 없는 인생항로(人生航路)
학교홈페이지 / 학급홈페이지(사진:내 서재) / 계간지 황해문고(1995년 겨울호) / 교가(가현초)
나는 인천교육대학을 졸업하고 평생을 교직에 있다가 2009년 연수구 청량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했다.
1969년 2월, 대학을 졸업하고 초임발령이 가평이었는데 가평에서 6년간 근무하다가 75년 인천으로 들어왔고 84년에 인천교대 야간대학에서 2년간 음악교육을 전공, 또 연이어 청주 교원대학에 가서 음악전문과정(6개월)을 이수했으니 어찌보면 전공이 음악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내가 내 전공과는 전혀 관계없는 컴퓨터에 입문하게 된 계기를 소개하면,
컴퓨터가 보편화되기 훨씬 전인 1990년, 새로 개교하는 인천 서구의 건지(乾地)국민학교 연구부장으로 초빙을 받아 가게 되었다.
그곳은 인천시 서구 가좌동으로 학교가 세워진 곳은 예전 ‘가재울’이라 불리던 곳인데 지금은 아파트와 주택들로 가득 들어차 있지만 옛날에는 자그마한 골짜기로 졸졸 흐르는 작은 개울이 있었고 가재가 무척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가재골이라 하다가 가재울로.... 그런데 개울물이 거의 말라 마른 연못, 하늘 연못이라는 의미의 건지(乾池)로 불렸는데 학교 이름은 거리가 멀다고 해야되나, 건지(乾地-하늘 땅)로 바뀌었으니 신기한 학교 명칭의 내력이다.
1992년 어느 날, 교장이 느닷없이 나를 교장실로 부르더니 교육청 지시라고 하며 우리학교를 인천시 컴퓨터시범학교로 지정을 한다고 하니 나더러 연구학교 운영계획을 세우라고 한다.
당시는 컴퓨터가 처음 나오기 시작하던 시기로 컴퓨터에는 전혀 문외한이던 나는
‘저는 컴퓨터를 전혀 모릅니다. 저는 연구부장을 못하겠습니다. 다른 사람으로 바꾸십시요.’
교장선생님(김0환)은 나를 보고 애원을 하는 표정으로 교육청 지시를 거절할 수 없는 형편이니 제발 좀 맡아달라고 사정조로 부탁을 한다.
마음이 약한 나는 곧바로 인천교육연구원을 찾아가서 당시 대학동기로 인하대 야간대학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연구사(하0철)를 찾아가서 내 사정을 토로했더니 자기가 적극 도와줄테니 맡아보라고 한다.
당시 인터넷(Internet-국제통신망)이 활성화되기 전이라 ‘PC국내통신망’이라 불리던 국내통신만 가능한 통신사로 하이텔(HiTEL), 천리안(Chollian), 나우누리(Naunuri), 유니텔(Unitel)이 있었는데 하이텔 속에 인천지역 통신망인 인디텔(Inditel)이 별도로 개설되어 있으니 그곳 사무실에 찾아가서 학교통신망(현 학교홈페이지)을 개설하게 해 달라고 부탁해 보라고 한다.
나는 연구원에서 나오자마자 곧바로 인디텔(인천지역 통신망) 인천본부로 찾아가서 허락을 받고 곧바로 컴퓨터가게에 가서 컴퓨터를 한 대 사서 집으로 왔다. 그리고 밤새워 책을 들여다보며 컴퓨터를 익히고 인디텔과 협력하여 개설한 것이 우리나라 ‘전국 최초의 학교홈페이지’라고 할 수 있는 학교통신망 『건지골 소식』(1993년 개설) 이었다.
당시 가정에는 컴퓨터가 거의 없던 시절로, 하이텔에서 단말기(端末機)라고 쬐끄만, 오로지 통신만 되는 하이텔단말기를 무상(無償)으로 빌려주었는데 내가 직접 트럭을 빌려 전화국에 가서 한 차 실어와 운동장에서 학부형들을 불러 나누어주고 가입하는 방법, 운영하는 방법 등을 유인물로 만들어 나누어주고....
하이텔 단말기는 크기도 작고, 마우스(Mouse)도 없는, 조그만 자판만 있고 오직 통신만 가능했다.
1994년 컴퓨터시범학교 보고회를 했는데 교육부, 한국교육개발원(KEDI), 서울, 부산, 대구, 심지어 포항 포철국민학교에서까지 몰려와서 질문을 해대고, 보고서는 물론이려니와 개설방법, 운영방법까지 유인물을 만들어 들려 보내느라 고역을 치르던 기억이 생생하다.
1995년에 부평에 있는 부평남국민학교로 전근해서 5학년 7반 담임을 맡고 학급통신망 『별똥마을』을 개설했는데 이것 또한 전국 최초의 학급통신망(학급홈페이지)이었다.
당시 부평남은 교생실습학교였는데 나는 가던 해 체육부장, 다음 해부터 실습부장(교무부장)을 맡았다.
내가 만들어 준 우리 반 아이들의 아이디(ID)는 출석번호에 따라....(별똥마을이니 별 이름으로)
남자아이들은 북극성1, 북극성2, 북극성3... 여자아이들은 아기별1, 아기별2, 아기별3....
컴퓨터를, 정보통신을 전혀 모르던 시절, 나는 아이들과 학부모들을 모아 열심히 교육했다.
학급통신망의 메뉴는 「1. 별똥게시판」, 「2. 학습안내」, 「3. 우리 반 이야기」, 「4. 글짓기 교실」, 「5. 질문이요!」, 「6. 가정통신」, 「7. 별똥우체국」, 「8. 별들의 대화」의 8개 방으로 꾸며 운영하였다.
요즘의 화려한 학교, 학급 인터넷 홈페이지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겠지만 당시로는 한껏 멋을 낸, 알차게 꾸며진 홈페이지였다고 생각된다. 이 학급통신망도 굉장히 활성화되어 일반인들도 들어와 놀라곤 했는데....
또, 당시 내 나이 40대라 연령이 40대인 사람들을 모아 ‘40사모(40대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라는 모임방도 인디텔 속에 개설했는데 회원이 40여 명으로 굉장히 활성화되었던 기억이 난다. 수없이 많은 번개팅도 하고 기금을 모아 인천농맹아학교를 방문하여 선물(점자용지 5.000 매)도 기증하고...
당연히 내가 운영자였는데 당시는 운영자를 시삽(Sysop:System Operator)이라고 불렀었다.
이러한 우리나라 정보통신교육에 앞장섰던 공로를 인정받았던 때문이었는지 나는 1998년에 국무총리가 주는 공무원의 자랑인 ‘모범공무원’으로까지 선정되었으니 영광이며 인생의 보람이라고 하겠다.
이런저런 우여곡절도 좀 있었지만 비교적 순탄한 교직생활 40년을 마무리 할 수 있었고 퇴직 후 어렸을 적부터의 꿈이었던 세계배낭여행도 맘껏 돌아다닐 수 있었던 것도 행운이었다.
혼자 배낭 메고 중남미 두 번, 스리랑카 인도 한 달 반, 중국은 수차례 갔지만 실크로드를 포함하여 한 달, 기타 동남아시아, 유럽, 그리스와 터키.... 최근은 유럽과 아프리카 모로코 2주를 합하여 50일간 여행.... 후회 없는 인생이다.
내가 스스로 붙인 내 별명(別名)이 여랑(旅浪-여행의 낭만), Backpacker, Backpack Traveler.....
덧붙인다면 혼자 배낭여행을 하기 위해 열심히 영어를 공부한 덕에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에 영어통역사로 봉사도 했다.
하나 더....나는 음악을 전공한 덕으로 새로 개교하는 3개교의 교가(校歌)도 작곡했는데 현재 손자들이 다니고 있는 인천 청라지구 경명초등학교 교가도 내가 작곡했으니 이것도 우연인가, 인연인가??
첫댓글 백선생님의 자랑스럽고 열심히 하신 순간을 생각하면서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