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교구 첫 복자 박상근과 동료 순교자 모진 옥살이에도 끝까지 신앙 증거한 곳
조선 시대 감옥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 실제 모습은 우리가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본 모습보다 훨씬 처절했다고 한다. 죄인들은 문초와 형벌을 받고도 온갖 노역에 동원돼 이중으로 옥살이의 고통을 느껴야 했다.
또 죄인은 물 한 모금도 자유롭게 마실 수 없었고, 식사는 하루에 한 번 조밥 한 덩어리가 고작이었다. 배고픔을 못 이긴 이들은 바닥에 깔린 볏짚을 뜯어 먹거나 기어 다니는 이를 잡아먹었다고 하니 그 고통이 얼마나 심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박해 시기도 많은 신앙 선조들이 천주교를 믿는다는 죄목으로 고된 옥살이를 겪었다. 옥에 갇힌 교우들이 너무 많아 다리를 뻗지 못할 정도였고, 상처에서 흐른 피와 고름으로 악취가 나고 염병이 돌아 그 자리에서 죽어 나가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교우들은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 상처가 곪아 고통 속에 세상을 떠나거나, 굶어 죽고 추위 속에 얼어 죽었다. 그중 신앙을 굽히지 않는 교우에게는 관장이 직접 교수형(목을 졸라 죽이는 형벌)을 내려 포졸들이 옥중에서 그들의 숨통을 끊어버렸다.
복자 박상근(마티아, 1837~1867)도 어떤 위협과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증거하다 결국 교수형을 받고 경북 상주 옥에서 순교했다. 충직한 신앙으로 고통과 유혹을 이겨낸 복자를 본받고자 그의 마지막 숨이 머물렀던 상주 옥터를 찾기로 했다.
상주에는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상주 읍성’ 남문 밖에 감옥이 있었는데, 바로 이곳에서 수많은 신앙 선조들이 순교했다.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 상주 옥의 순교자는 박상근을 비롯해 그의 숙모 홍 마리아ㆍ친척 박 막달레나 등 20명. 전문가들은 더 많은 교우가 이곳에 갇혀 고통 속에 신앙을 지켜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상주 성은 물론 상주 옥도 남아 있지 않다. 일제 강점기 도시화 정책에 따라 일본인들은 상업 활동하기 편한 환경을 마련하기 위해 상주 성을 헐었고 상주 옥이 있던 자리에는 우시장을 만들었다.
100여 년이 흐른 지금, 우시장이었던 상주 옥터는 과일과 채소를 파는 곳이 됐다. 상주역에서 근처 남문시장에 있는 ‘상주 남문 청과’ 자리가 바로 상주 옥터 자리다. 그리고 청과 건물과 골목을 하나 두고 떨어진 곳에 상주 옥터 성지가 있다.
성지는 초록색 살로 된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다. 울타리 밖에서 성지를 바라보니 건물과 마당이 한눈에 들어왔다. 마당에는 계절 따라 색이 노랗게 바뀐 잔디가 겨울 볕을 머금어 성지를 더욱 환하게 만들고 있었다.
작은 마당 곳곳 느껴지는 순교자 영성 성지 입구 왼편에는 투박한 돌들이 제집에 온 것을 환영하는 듯 줄지어 서 있다. 이 돌들은 상주 성의 성곽과 상주 옥을 이루던 돌이다. 상주 성이 헐리던 때와 옥터 발굴 때 신자들에 의해 어렵사리 보존된 것이다.
입구 오른편부터 마당 한 바퀴를 돌면서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쳤다. ‘제8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부인들을 위로하심을 묵상합시다.’ 부인들을 위로하셨던 예수님처럼 이웃을 위로하는 데 앞장섰던 복자의 모습을 묵상했다.
본래 경북 문경에서 아전(하급관리)으로 일했던 박상근은 관청에서 지내며 어려운 일을 당한 신자들에게 많은 도움을 줬다. 그뿐만 아니라 비신자 어린이들이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접하면 그곳으로 달려가 대세를 줄 정도였다고 한다.
십자가의 길 기도가 끝나는 곳에 높이 2m 정도 되는 십자가 모양 비석이 서 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라고 새겨진 비문을 읽으니 순교하기 직전 십자성호를 긋고 ‘예수, 마리아!’라고 외친 박상근의 모습이 떠올랐다.
신자들 정성 깃든 성지 성수를 찍어 십자성호를 긋고 상주 옥터 성지 경당 안으로 들어갔다. 경당은 순례객 30명 남짓 들어갈 만한 크기였다. 하얗게 페인트칠 된 벽에는 오래돼 보이는 십자가가 걸려 있었다. 예물 봉헌함도 의자도 모두 새것이 아닌 듯했다.
“모두 이 지역 공소 신자들이 봉헌한 귀한 물건입니다. 신자들 정성으로 성지를 꾸린 것이나 마찬가지죠.” 동행한 신동철(안동교구 상주 남성동본당 주임) 신부가 설명했다.
신 신부는 “마당을 둘러싼 울타리와 성모 동산, 십자가 비석 등 모두 신자들이 봉헌하고 직접 설치한 것”이라며 “신자들이 한마음이 돼 성지를 조성하는데 힘썼다”고 덧붙였다.
지난해 상주 옥터가 전대사 순례지로 지정되자 상주 지역 본당 신자 12명은 자발적으로 ‘상주 옥터 성지 해설사’ 모임을 만들기도 했다.
전문가에게 순교 역사 교육을 받고, 옥터와 교우촌을 탐방하며 해설사로 거듭난 이들은 순례 기간인 5~10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순례객을 맞이하고 신앙 문화유산을 해설했다. 이들은 지금도 남성동본당으로 문의하는 순례객에 한해 해설을 해오고 있다.
온화하고 강직했던 순교자 경당 벽에는 십자가와 함께 박상근의 복자화가 걸려 있다. 교구의 첫 복자를 아끼는 신자들의 마음이 느껴졌다.
복자화 속 그는 웃고 있지 않았지만 온화해 보였고, 까만 눈은 날카롭지 않았지만 강직해 보였다. 이웃 사랑을 실천했던 그의 온화한 성품과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내던지겠다’는 당찬 의지가 느껴졌다.
복자화를 보고 있자니 그와 칼레(N.Calais) 강 신부의 깊은 우정 이야기가 떠올랐다. 병인박해가 일어났던 해(1866년) 봄, 강 신부의 은신처를 찾기 위해 함께 길을 나섰던 박상근은 집으로 돌아가라는 신부의 명을 듣고 울며 말했다.
“신부님 곁을 떠날 수 없습니다. 함께 가겠습니다. 신부님께서 이 험한 곳에서 돌아가신다면 저도 기꺼이 따라서 죽겠습니다.”
개인주의가 만연한 현대를 살아가는 신앙인 중 이렇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죽어가는 이웃에게 대세를 주기 위해 달려갈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십자가를 품에 꼭 쥔 그림 속 복자의 모습이 나 자신부터 돌아보게 했다.
글ㆍ사진=백슬기 기자 (평화신문) |
출처: 평화와 착함 원문보기 글쓴이: 착한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