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MI 세계선교의 날;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계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태 28:19-20)”
오늘은 CMI의 세계선교의 날입니다. CMI(구 UBF)는 1969년 7월 17일(목) 대전 학사회의 회원인 이화자, 서인경, 설동란 자매들(68년 현 혜천대 졸업생)이 서독에 간호사로 취업하여 갈 때 이들을 평신도 선교사로 파송하였습니다. 이들은 서독에 파송되기 전 UBF 서울 본부에서 약 2주간 일용할 양식 공부와 성경 몇 강좌를 공부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종로 본부에서 사도행전 1:8절을 요절 말씀으로 파송예배를 보고 선교사로 파송하였습니다. 다음해 40여명의 파독 간호사들을 중심으로 부퍼탈(Wupertal)에서 열린 4월 첫 주말 수양회에서 회개하고 복음을 영접하는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한국백성을 제사장 나라로 부르셨다는 작은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후 서독 캠퍼스 개척을 위해 전국적으로 선교사들을 파송하였고 1972년에는 김숙철 1대 지부장과 남부, 북부, 중부, 베를린 지역장들을 세워 적극적으로 선교활동을 하였습니다.
당시 한국 CMI(구 UBF)는 거의 8년 동안 동남아 선교를 위해 아주 열정적으로 기도하였습니다. 당시 한국의 정치 상황은 4.19 학생혁명과 5.16 군사 쿠데타로 혼란하였고, 한국 교회는 자립도 어려운 상황이라 동남아 선교는 하나의 이상에 불과했습니다. 당시 우리는 선교사라면 선진국의 유럽이나 미국 사람을 생각하였고, 신학교를 졸업하고 본국의 물질 지원을 받아 자가용을 타고 다니는 외국인으로만 생각했습니다. 이런 시대 상황에서 1969년 졸업생 중의 한분을 싱가폴에 동남아 선교사로 파송하고 큰 자부심 가운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본부의 방향을 따르지 않고 몇 개월 후 영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어 우리는 동남아 선교를 위한 광고도 못하고 난처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서독에 간호사로 취업하여 가는 졸업생들을 선교사로 파송하였지만 우리는 큰 기대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성령의 역사는 동남아에서 일어나지 않고 기독교 국가인 서독서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동남아도 바라보기 어려운 상황에서 하나님은 우리 한국백성을 세계 제자장 나라로 보신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우리 선교단체의 기도제목은 “성서한국과 동남아선교”에서 “성서한국과 세계선교”로 변경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969년 7월 17일 선교사를 파송할 때 우리 한국의 국제공항은 김포공항 한 곳 뿐이었습니다. 그 때도 폭우로 출국 날자가 몇 일 연기된 후에 7월 17일로 결정되어 우리는 김포공항에서 또 기도하고 파송하였습니다. 당시 김포공항은 먼 타향에 딸들을 보내는 부모님들과 가족들의 눈물바다였습니다. 가족들은 공항 출구에서 울고 또 환송대로 가서 비행기에 오르는 딸들을 향해 손수건을 흔들며 또 울었습니다. 이렇게 이별의 눈물바다였던 김포공항은 얼마 후 선교사 파송예배로 찬송바다가 되었고 10여년 후에는 공항 당국의 제재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한국 백성을 제사장 나라로 부르시고 40여년이 지난 지금은 세계선교 2위국가로 축복하셨습니다. 우리는 당연히 이 못난 백성을 부르시고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거국적으로 찬양하고 감사의 단을 쌓아야 합니다.
우리 CMI는 특별히 세계선교의 축복을 많이 받았습니다. 세계 선교비전을 통해 많은 대학생들을 전도하였고, 한국인으로서 하나님의 부르심과 자존심을 찾았습니다. 서독 선교사들의 아낌없는 헌금과 회원들의 헌금으로 선교단체로는 상상할 수 없는 각지구 센타 건축을 하였고 본부 재정은 알 수 없을 만큼 거부가 되었습니다. 우리 선교단체는 요한 웨슬리가 선언한 “세계는 나의 교구다” 대영제국이 자랑했던 “태양이지지 않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감히 “세계는 나의 목장이다”라는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대학생들의 세계선교신앙은 알게 모르게 졸업생들을 통해 한국교회에 영향을 주었고 이제 한국교회는 세계선교 2위국가가 되었습니다. 1990년대 시작된 공산권의 개혁개방과 더불어 우리의 선교지는 더욱 넓어졌습니다. 지금은 한국경제 발전과 더불어 우리의 선교영역은 더욱 확장되었고 또한 선교적 책임은 더욱 확대되었습니다. 최근에는 하나님께서 한류를 통해 세계선교를 더욱 효과적으로 할 수 있게 도우시고 있습니다. 이제 동서양 세계 어느 곳에서도 한국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한국의 팝송과 연속극에 세계 젊은이들이 몰입하고 있습니다. 세계 젊은이들은 한국의 문화와 언어에 관심을 가지고 한국으로 몰려오고 있습니다. 이제 세계선교는 원양어업과 연안어업으로 풍어를 노래할 날이 왔습니다. 세계선교는 우리가 외국으로 나가서 하는 선교와 국내에 유학 온 외국인을 선교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런 현상은 10년 전만해도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인류구원을 정점으로 진행된다고 볼 때 외국 유학생, 그것도 선교의 자유가 없는 공산권에서 한국에 유학생을 보내시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선교단체,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축복을 너무 많이 받았습니다. 오천년 한국역사는 지금 황금시대를 맞이하였습니다. 60년 전만해도 한국전쟁으로 전국이 폐허가 되어 원조를 받는 나라, 경제순위 100위 밖의 꼴지 나라였습니다. 60년대 한국인은 “어글리 코리언”, “엽전”이라 놀림을 받았고 어떤 모임에 지각하면 그것을 “코리언 타임”이라고 비웃었습니다. 지금도 세계사의 최후의 분단국가로 자기 민족과 국가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4대강국에 의지하는 부끄러운 나라입니다. 이런 역사적 현실에서 이 나라가 경제 10대국을 넘나들며 원조하는 국가가 되었다는 것은 기적입니다. 한류를 통해 한국 노래와 문화가 수출되고 있습니다. 60년대 한국교회가 자립도 못하고 선진국에 의존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세계 제사장 나라로 인정하시고 서독에 선교사를 파송하시고 그 후 미국과 캐나다, 이제 동서양 오대양 육대주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인류구원의 역사에 참여하고 있으니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크신 세계구속역사의 경륜 가운데 CMI는 1969년 7월 17일 첫 평신도 선교사를 파송하는데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UBF를 1961년 설립하시고, 1976년 개혁을 통해 ESF를, 1990년 미국의 개혁과 2000년 한국의 개혁의 열매로 2003년 CMI가 탄생되었습니다. CMI에는 초기 세계선교의 주역이었던 서독 첫 선교사인 이화자 선교사, 제1대 지부장인 김숙철, 2대 지부장인 허유강 선교사들이 UBF 첫 선교사들을 파송한 대전 CMI 학사회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CMI는 2003년 대학선교협회와 교회선교협회, 그리고 해외선교협회, 곧 3대협의회로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10여년이 지난 오늘 삼대협회의 뿌리요 모체요 구심점인 대학선교협회가 조직에는 있는데 실체가 약화되어 재창립의 시기에 있습니다. 지난 6월 18일 낙성대(서울대 CMI) 지부 개관예배에 이어 대전 CMI가 6월 28일 목요회를 통해 개관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CMI 대학선교협회가 약화된 지난 10년 CMI는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역사성과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며 구심점을 상실한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나 삼대협의 뿌리인 CMI 대학선교협회가 다시 활성화될 경우 다시 CMI 교회선교협회와 해외선교협회의 역사성과 정체성이 확립되고 CMI의 미래가 준비될 것을 믿고 있습니다.
오늘 CMI 첫 선교사를 파송한 대전 CMI 대학선교협회 설립 준비 위원회(김용대, 이경복, 서덕근)는 7월 17일을 대전 CMI 세계선교의 날로 정하고 이번 목요회에서 감사의 단을 쌓으려고 합니다. CMI 대전지부를 후원하는 CMI 교회선교협의회와 해외선교협의회의 회원들께서는 우리의 사역에 동의하시면 앞으로 같은 날 함께 세계선교의 감사의 단을 쌓기를 기도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중인이 되리라(행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