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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
□ 눅18:1-8 □
이신영 (전주대학교・교회사)
I. 전제
이 주석은 목회자를 돕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목회자를 돕는다고 하는 말의 의미는 일차적으로는 목회자가 이 본문에 친숙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고 이차적인 의미는 이 본문이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또는 이 본문 속에 내재하고 있는 신학적인 문제로 목회자를 인도하여 그들로 하여금 그 문제를 직시하도록 하는데 있다. 따라서 필자의 돕는다고 하는 말의 의미는 목회자가 필자의 주석을 통해서 그가 설교에 필요한 말씀에 대한 어떤 안내를 받게 된다고 하는 것과 동시에 목회자는 근본적으로 자신의 사고에 대한 - 목회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포함해서 - 어떤 제동이 걸리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앞으로 설명이 되겠지만 필자는 목회자와 우리들이 걸리게 되는 제동 속에 이 본문이 갖고 있는 근본 메시지가 있다고 본다.) 즉 필자의 주석을 통해서 목회자는 그의 설교에 필요한 그 어떤 통찰력을 제공받게 됨과 동시에 - 보편적으로는 여기에 성서의 주석적 과제가 있다고 보여지지만 - 그는 주어진 본문의 전제를 이탈하라고 하는 요구를 받게 된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많은 성서의 구절들이 - 특히 본문과 같은 비유의 성격을 띠고 있는 - 성서 기자에 의해서 설정된 구조와 함께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기 때문에 성서 기자에 의해서 주어진 구조는 우리로 하여금 그 본문이 내포하고 있는 근본 의미를 파악하는데 방해 요소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성서 기자가 설정해 놓은 구조 뿐만 아니라 그 비유의 뜻에 대한 설명조차도 우리로 하여금 그 비유가 내포하고 있는 보다 깊은 의미로 인도하는 것을 방해한다. [이것에 대해서 요아킴 예례미야스의 예수의 비유, 허혁 역 (서울: 분도출판사, 1974) 를 참고하기 바람] 물론 비유의 이해에 있어서 성서 기자의 안내, 또는 그의 설명이 무가치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목회자의 설교적 욕구에 비춰 보았을 때 미리 본문에서 주어진 해답은 목회자가 본문에서 찾아 내야 할 메시지의 내용과 그 깊이에 대한 인식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지 못한다고 하는 점이다. 만약 우리가 미리 설정된 구조와 해답에 따른 메시지에 의거한 설교를 한다면 그 설교가 과연 창조적이면서도 우리의 전 존재를 규정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인가? 언제나 대답이 동일하게 주어져 있고, 또 동일한 대답으로부터 설교의 내용을 끌어내어 온다면 그 설교는 우리를 진부하게 만드는 그 어떤 것이 되지 않겠는가? 만약 그렇다면, 우리의 설교는 - 우리의 예배의 속성상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만남이 경험된다고 보여지는데 - 과연 우리에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필자가 성서의 주어진 본문의 전제를 이탈하라고 할 때, 또는 그 본문의 의미에 대한 성서에서 주어진 해석을 이탈하라고 말할 때 (특히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에 대해서) 아무런 전제 없이 본문에 접근하라고 하는 의미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필자가 의도하는 것은 첫째로는 불트만이 말한 것처럼 주석자가 주어진 본문에 접근을 시도할 때 자신의 삶을 본문에 대한 전제로 사용하라는 것이다. [Rudolf Bultmann, Is exegesis without possible? New Testament & Mytho-logy and Other basic writings , ed. by Schubert M. Ogden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9), pp.145-153. 참조.] 왜냐하면 주석자의 선행적 삶은 본문의 주제를 이해하는 전제로서 작용하며, 이러할 때에만 본문은 주석자의 질문에 대답해 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제 속에서 앞으로 우리가 해 나갈 주석의 과제 속에서 목회자가 견지해야 할 태도는 본문의 주제와 관련된 자신의 선행적 삶의 조건이 무엇인가를 물어 봐야 할 것이다. 즉 나의 어떠한 삶의 조건이 이 본문을 이해하는 열쇠가 되는가? 또는 이 본문은 어떠한 면에서 나의 삶과 연결이 되는가? 하는 태도가 이 본문에 담겨진 메시지를 - 만약 필자°¡ 성공적이라면 그 메시지는 우리 모두에게 거치는 걸림돌이 되겠지만 - 이끌어 내는 요소로서 작용하게 된다.
둘째로 필자가 목회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본문에 대한 신학적 전제를 갖고 대하라는 것이다. 이때 필자가 요구하는 신학적 전제는 전통적인 하나님의 속성들, 전능성 Omnipotence과 전지성 Omniscience 을 이 본문을 해석하는 전제로서 인식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과 전능성과 전지성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주어진 본문을 벗겨 내는 데에로 우리를 인도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으로 되어질 우리의 과제는 어떻게 위의 두 가지 전제들이 상호작용을 하면서 우리를 거침돌이 되는 메시지에게로 인도할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일일 것이다. 여기서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주석자의 선행적 삶은 메시지에게만 관련되고 있다는 것이며, 그리고 하나님의 전능성과 전지성에 대한 인식은 메시지에게로 가는 과정에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한편 필자는 한글 개혁판 성경과 루터판 독어 성서 Lutherbibel erklaert를 주된 Text 로 사용할 것이다.
II.과제
<1절 >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 여기에서 우리는 왜 이 비유가 주어졌는가 하는 이유를 듣게 된다. 그 이유는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권면의 말은 바울의 어떤 말을 연상시키지 않는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마치 바울이 어떤 상황하에서도 주어진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그리스도인인이 갖추어야 할 삶의 태도라고 말하는 것처럼 이 비유도 우리가 기도하고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긍정적으로 기다리는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이 비유를 전하는 기자는 우리에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만약 우리가 기도의 아버지라고 하는 조지 뮬러가 그의 친구의 구원을 위해서 50년을 간구 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가 아들의 구원을 위해서 16년간을 기도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그리고 이 비유에 나오는 과부가 어떻게 자기의 간구를 이루었는가 하는 것을 기억한다면 이 비유가 주어진 이유를 설명하는 기자의 설명은 정말로 타당하지 않겠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 이유는 이 비유의 내용을 이해하는 열쇠로 작용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겠는가? 즉 이 비유의 내용은 기도자가 기도 할 때에 갖추어야 할 예로써 주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성서 기자의 전제를 벗어나야 할 우리의 과제가 도출된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이 비유는 기도 생활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대한 가르침에 대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 비유의 내용은 그러한 자세에 대한 예로써 주어진 것도 아니다. 물론 우리는 이 비유에서 기도자는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것에 대한 교훈을 찾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것은 이 비유의 내용이 담고 있는 본질적인 것은 아닌 것이다.
<2절 >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 이 재판관의 태도는 얼마나 오만한가? 그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안중에 두지 않는다. 그의 오만한 태도는 단순히 거만한 성격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의 하나님조차 그의 안중에 없는 태도는 그가 불의한 사람이며, 자기에게 주어진 권력을 멋대로 행사하며, 타인에게 괴로움을 주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는 근본적으로 악한 인간인 것이다. 그런 악한 인간이 선과 악을 판단하는 직책을 맡고 있다. 만약 우리가 그의 심판에서 정의를 이끌어 내려고 한다면 우리가 수고와 노력을 얼마만큼 해야 하는가? 우리가 그가 유대인이라고 생각한다면 예수께서 이러한 사람을 예로 삼은 것은 극단적인 경우를 상정했다고 생각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 설정하는 이러한 인간은 우리들의 삶에서 만나게 되지 않는가? 우리는 때때로 우리 자신이 그러한 악한 권력자와 함께 있음을 느끼지 않는가? 따라서 예수의 그러한 재판관의 선택은 자연스러울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재판관에 관한 서술을 다른 방식으로 이해할 수는 없을까? 만약 우리가 그의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태도를 오만하고 불의한 모습이 아닌 다른 각도에서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가? 루터의 번역은 우리에게 다른 모습의 재판관을 보여준다. "Es war ein Richter in einer Stadt, der fuerchtete sich nicht vor Gott und scheute sich vor keinem Menschen." 즉 그는 하나님도 그리고 사람들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루터가 번역한 것처럼 사람을 무시한다고 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로 번역을 한다면 그 재판관의 태도는 오만한 태도이며, 또 그는 자기 멋대로 하는 불의한 사람으로 보여지게 되는가? 아니면 그는 모든 것은 자기의 확신에 근거하는 사람으로 보여지는가? 만약 후자로 우리가 해석을 할 수 있다면, 예수가 선택한 재판관은 불의한 재판관이 아니라 자신이 한번 옳다고 판단한다면 결코 자기의 판단을 그 어떤 외부의 압력에 의해서도 - 설사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의 또는 다수의 군중들로부터의 압력이라고 할지 라도 - 포기하지 않는 그러한 확고 부동한 재판관의 모습을 우리는 바라 볼 수 있으며, 만약 그렇다면 이 재판관은 정의로운 재판관임에 틀림이 없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가 무죄하다고 생각하면서 군중이 두려워서 그들의 요구에 순응하는 빌라도와 이 재판관을 비교해 볼 수 있다.) 따라서 만약 이 재판관이 자신이 내린 먼저번의 어떤 결정을 번복한다면 그 번복은 그 자신의 결정에서 오는 것이지 외부의 어떤 것에 의해서 오는 것이 아닌 것이다. 물론 외부적인 상황은 그에게 어떠한 고려점을 줄 수가 있다. 그러나 그 외면적인 것이 재판관 자신의 결정을 이끌어 낸 결정적인 요인이 될 수는 없다.
<3절 >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 정의로운, 또는 자신의 원칙에 확고 부동한 이 재판관에게 같은 도시에 사는 과부가 그에게 어떤 문제를 갖고 찾아온다. 성서는 과부가 하나님의 특별한 돌보심의 대상이라는 것을 분명히 선언하고 있다. (출 22:22-24; 신10:18; 24:17) 뿐만 아니라 가난한 과부를 돌보는 것을 경건한 것으로 보고 있다. (약1:27). 이런 과부를 슬프게 만드는 것이 둘이 있다. 하나는 이 과부의 원수이며 또 하나는 이 과부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않는 재판관인 것이다. 과부의 원수는 이 과부의 슬픔의 주된 원인이라면 이 재판관은 과부의 슬픔에 대한 보조적인 원인이다. 그러나 우리는 재판관의 태도가 과부의 슬픔의 보조적인 원인이라고 해서 가볍게 생각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에 비춰 본다면 우리에게 해를 가한 직접적인 원인자보다는 그 원인자를 방조하는 그 무엇이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부를 슬프게 만드는 이러한 재판관의 태도는 이 과부에게 얼마나 불의한가? 과부에게 더한 슬픔을 주는 재판관에게 과부가 찾아온다. 이 재판관은 자신의 태도를 결코 타인에 의해서 바꾸지 않는다. 그런데도 과부는 찾아온다. 그것도 지속적으로. 무엇을 기대하고 찾아오는 것일까? 과부는 자신이 재판관의 태도를 바꿀 수 있다고 믿고 찾아오는 것일까? 아니면 과부가 찾아오는 것은 그것을 통해서 나타날 재판관의 태도 여하와는 관계가 없는 그 무엇 때문일까?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이 있다. 그것은 본문은 이 과부의 원수가 누구인가 하는 점에 침묵한 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원수 때문에 갖게 된 이 과부의 원한이 무엇인가? 하는 점에도 침묵한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과부의 원수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그 과부의 원한이 무엇인지도 모른다고 한다면 단지 과부라는 이유만으로 그 과부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 재판관을 불의하다고 할 수 있는가? 루터가 번역한 성서는 우리말의 원한을 풀어 달라고 하는 말 대신에 Recht 즉 정의라고 하는 단어를 사용해서 과부가 요구하는 것은 자기 원수에 대한 정의라고 표현하고 있다. 즉 과부가 요구하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지 정의를 재판관에게 요구하고 있다. 우리는 이 재판관이 불의한 재판관이기보다는 정의로우며 그리고 자신의 원칙에 충실한 재판관이라고 설정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재판관이 이 과부의 경우 잘못 재판했다는 것을 미리 가정할 수 없다. 즉 재판관이 잘못된 재판을 했기 때문에 과부가 그것에 항의한다고 생각할 수 없으며, 동시에 이 재판관이 그 과부의 원수로부터 어떤 형태로든 그 과부에게 불리한 재판을 하도록 조종당했다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재판관이 무슨 결정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 결정은 오직 재판관 자신에 규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재판관에게 과부는 계속적으로 정의를 요구한다. 그러한 요구를 재판관은 거절한다. 왜 무엇 때문에 거절하는 것일까? 그 정의가 부당한 것이기 때문에 거부하는 것일까? 만약 부당하다면 누구에게 부당하기 때문에 거부하는 것일까? 아니면 과부가 요구하는 정의라는 것이 들어줄 만큼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거부하는 것일까?
<4-5절 >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 과부의 지속적인 간구는 그 어떤 결과를 낳게 된다. 그 결과는 재판관의 태도 변화와 함께 오게 된다. 과부가 원하는 정의가 그 과부의 원수에 대해서 실현되는 것이다. 이때 과부에게는 그것이 정의로서 나타나지만 그 과부의 원수에게는 불의로서 나타나게 된다. 무엇이 재판관으로 하여금 그의 행위가 어떤 대상에게는 정의가 되고 또 다른 대상에게는 불의가 되게 하였는가? 과부의 끈질김이 기존의 정의와 불의의 개념을 전도하게 하였는가? 아니면 재판관 자신의 태도 변화가 정의와 불의의 기존 질서를 뒤바꾸어 놓았는가? 누가 그것을 바꾸었는가? 과부인가 아니면 재판관인가? 우리는 본문에서 재판관 자신이 자신의 원칙을 바꾸는 것을 보게 된다. 만약 우리가 재판관이 과부에게 부당한 재판을 했었다고 가정한다면 재판관은 이제 자신의 잘못을 시정하는 것을 보게 되며, 만약 우리가 재판관이 판단해 볼 때에 과부가 요구하는 정의라는 것이 별로 받아들일 만한 것이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과부의 요구를 받아들여서 그 과부의 원수에 대한 어떤 정의를 세운다는 것이라고 생각 해 볼 때에 그것은 또다른 불의를 낳게 되는 결과가 된다. 정의와 불의를 세우는 기준은 무엇이며, 이미 세워진 그것을 바꾸는 기준은 또 무엇인가?
<6절 >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 여기에서 우리에게 들으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재판관이 스스로 그의 기준을 바꾸겠다는 그의 자의식의 소리를 들으라는 것인가? 아니면 그를 괴롭히는 한 과부의 끈질김이 - 그것도 과부 자신을 위한 정의를 요구하는 - 그가 자신의 어떤 결정 사항을 번복하게 된 원인이라는 것을 들으라는 것인가? 즉 그 재판관이 자신의 결정을 바꾸겠다고 하는 그것을 들으라는 것인가 아니면 그 결과를 이끌어 낸 원인을 들으라는 것인가? 결심을 바꾸겠다고 하는 재판관 그 자신에게 예수가 관심하는가? 재판관의 태도에 동요하지 않고 끈질기게 그 무엇을 요구해서 결국에는 그 재판관을 바꾸어 놓는 그래서 자신의 소원을 성취하는 과부의 모습에 예수가 관심하는가? 만약 주께서 들으라고 하는 말의 의미를 우리가 전자의 측면에서 듣는 다면 과부의 끈질긴 요청, 그리고 그것으로인 한 재판관의 괴로움은 비록 재판관이 자신이 과부에 유리한 쪽으로 결정을 하게 한 하나의 원인은 되지만 직접적인 원인은 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재판관은 오직 자신의 판단에 의해서만 어떤 결정을 내리기 때문이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가 후자의 측면에서 예수의 말을 해석하면 과부의 끈질긴 요청이 재판관이 과부의 요청대로 과부에게는 정의를 그의 원수에게는 불의를 베풀겠다고 결정한 결정적인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후자의 측면에서 예수의 말을 이해한다면, 그러면 그 말의 의미는 기도의 내용이 아니라 기도의 태도 즉 성서 기자가 해석한 대로 이 비유가 주어진 것은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예수께서 가르쳐 준 것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항은 우리는 주께서 이 시점에서 이 재판관을 불의하다고 선언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니 단순히 그가 불의하다는 것만이 아니라 그는 불의한 재판관이라고 선포하고 있다. 왜 그가 불의한 재판관이 되었을까? 그가 정의와 불의를 재조정하는 근거를 그 자신에 두고 있기 때문에 불의하다고 할까? 아니면 그가 과부에 의해서 어떤 영향을 받기 때문에 불의하다고 할까? 여기서 그가 과부에 의해서 어떤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에 불의하다고 볼 수가 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점은 예수께서 이 재판관을 소개할 때 하나님과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태도에 대해서 그가 불의하다고 부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그가 불의하다고 불리는 까닭은 먼저 주어진 정의와 불의를 뒤집어 놓기 때문이다. (기존의 정의와 불의라는 것은 과부의 관점에 보아서 정의와 불의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재판관의 관점에 비춰 보아서는 주어진 그 자체가 이미 정의라고 보여지기 때문에 정의와 불의라고 부를 수 없음) 따라서 여기서 우리가 들어야 할 불의한 재판관의 말은 과부 때문에, 아니 과부를 위해서 내가 과부에게는 정의를 그 과부의 원수에게는 불의를 - 비록 그것이 정당하지 않더라도 - 세우겠다는 재판관의 의지인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들어야 할 예수의 말의 핵심은 이 재판관이 불의한 재판관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며, 그가 불의한 자가 된 까닭은 과부 때문에 - 그 과부에 대한 사랑 때문이 아니라 과부가 그를 괴롭히는 괴롭힘 때문에 - 정의를 파괴하는 그의 결정이 불의한 결정이라는 것이다.
<7절 >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 루터의 번역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그 선택한 자들이 밤낮으로 찾아와서 울부짖는다면 그들에게 정의를 베풀어주시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들에게 더더욱 끌리지 않으시겠느냐?" 여기서 예수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적극적으로 자신에게 정의를 베풀어 달라고 요구했던 과부처럼 적극적인 행동을 해서 우리들에게만 해당하는 그 어떤 의미에서의 정의를 베풀어 달라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예수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동 여하에 따라 영향받을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요구와 상관 없이도 하나님께서 정의는 나타날 것임과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의 정의를 요청하는 것을 우리들이 해야 할 청원이라는 것과 그렇게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며, 그런 자에게 하나님께서 관심을 갖는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는 말인가? 만약 우리가 이런 각도에서 예수의 말을 이해한다면 예수는 우리들의 행동 여하에 따라서 하나님이 영향받을 수 있다는 것을 근본적으로 거부한다고 보아야 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과부에게는 원수가 설정되어져 있다는 것과 우리들에게는 원수가 설정되어져 있지 않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과부에게 정의로운 것은 그 원수에 대해서는 불의가 되지만, 우리에게 정의로운 것은 다른 이에게 불의가 된다는 것을 결과로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가 우리에게 요청하는 것은 하나님께 정의를 요청하라는 것이며, 이때 그는 우리의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의 어떤 결정이 뒤바뀌어 질 수 있다는 것을 근본적으로 배제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불의한 재판관은 불의했지만, 하나님은 불의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불의한 재판관은 과부만을 위한 정의를 실현 하지만 또 그렇게 실현된 정의 때문에 그 누구가 불의한 상태에 놓이게 되지만, 우리의 요청은 하나님을 불의한 분으로 만드는 요청이 아니며, 그러한 요청을 우리가 하기를 하나님께서 기대하기 때문에 그 요청은 하나님 자신이 행하기로 결정한 결정과 일치되는 요청이 되기 때문이다.
<8절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 만약 정의에 대한 우리의 요청이 하나님이 미리 결정한 그 어떤 결정과 일치가 된다면, 그래서 그 결정이 빨리 실현되기를 우리가 요청한다면 미리 결정된 그 결정의 성취 행위를 통해서 나타나게 될 결과는 불의한 하나님이 아니라 정의로우신 하나님 곧 하나님의 참모습이 나타나게 될 것이며, 결과적으로 그 행위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확정짓게 된다. 만약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우리가 요청해야 할 요청이 된다면 그 요청의 결과는 우리에게는 종말론적으로 나타나게 되고, 그것에 대한 우리의 청원은 종말에 대한 우리의 청원이 된다. 따라서 이 본문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행위를 요청하라는 예수의 명령 또는 요구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항은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이러한 명령을 듣고 지키는가 하는 것이다.
III.메시지
만약 우리가 통상적으로 이해하는 대로 이 본문을 읽어 간다면 우리는 성서 기자가 불의한 재판관의 어떤 모습과 하나님의 어떤 모습이 일치하며, 또한 과부의 어떤 태도와 우리 믿는 사람의 어떤 태도가 일치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듣게 된다. 즉 성서 기자는 이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불의한 재판관과 하나님과의 존재 유비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 제시한다. 그래서 과부의 끈질긴 청원이 재판관의 마음을 바꾼 것처럼, 우리가 낙망치 않고 과부처럼 그렇게 지속적으로 간구한다면 하나님께서 결국 우리 간구를 들으시며 우리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 주실 것이라는 것을 들으라고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필자는 성서 기자가 말하는 것처럼 우리 믿는 자들의 어떠한 행위가 하나님의 결정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바꿀 수 있다면 그러한 하나님은 과연 전능한 하나님이겠는가? - 그러한 전제는 잘못된 전제로서 필연적으로 배격되어야만 한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필자의 입장이 필자로 하여금 성서 기자의 전제를 이탈케 한 요소로 작용했다. 한편 필자를 성서 기자가 설정해 놓은 해석의 틀을 벗어나게 한 그 전제는 동시에 또다른 해석의 틀 안에서 이 본문을 해석해야 한다는 전제로 안내하였다. 그 전제는 해석자의 선행적 삶과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고백들 - 전능성, 전지성 - 이었다. 이 두 가지의 해석의 틀 안에서 필자가 본문을 주석할 때 견지한 태도는 전자는 메시지의 내용에 관계된다는 것이고 후자는 그 메시지를 이끌어 내는 과정에 관련된다는 것이었다. 실질적으로 하나님의 전능성에 대한 속성의 인식은 필자로 하여금 하나님과 재판관 사이의 존재론적인 유비를 근본적으로 배격할 수 있게 했으며, 따라서 이 비유에 본질적으로 내재한 메시지로 우리를 이끌어 주는 역할을 했다. 즉 이 본문이 담고 있는, 아니 예수가 이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하는 근본 메시지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종말론적인 행위를 요청하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우리의 요청은 하나님의 어떤 결정을 바꾸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미리 결정된 하나님의 그 결정의 결과를 촉구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우리의 요청을 통해서 하나님은 불의한 하나님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이 세상에 대해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확증되며 동시에 믿는 자에게 대해서 정의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비유는 예수 자신의 기도문과 근본적으로 일치한다. 마태복음의 산상설교에서 예수는 기도문을 주시며 - 제자들의 요청이 아니라 (눅11:1-4) 예수 자신이 주신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 그 기도문의 내용중 하나님 자신에 관계된 처음의 세 가지 청원: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여기서 하늘에서는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며, 나라가 임하였으며, 뜻이 이루어 졌다는 점을 주목하라. 반면에 땅에서는 아직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치 않으며, 나라가 아직 임하지 않았으며,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주목하라.) 누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하는가? 누가 그의 나라가 임하게 하는가? 누가 그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하는가? 인간이 그렇게 하는가? 아니면 하나님 자신이 그렇게 하는가?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아니 예수께서 그렇게 하라고 부탁한 기도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행위를 요청하는 기도문이다. 이 기도문하고 이 비유는 근본적으로 일치하지 않는가! 반면에,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한다는 것이 예수께서 이 비유를 하신 것이라고 말하는 성서 기자와 이 비유의 내용과는 또한 얼마나 불일치 하는가! 동시에 이 비유에 감추어진 진실과 동떨어진 채로 이 비유를 이해했던 우리 자신과 이 비유는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
여기서부터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도출된다.
1. 첫번째 메시지는 이 주석의 제목이 말하는 대로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라! Let God be God!는 것이다. 이 말을 보다 직선적으로 표현하면 하나님을 내가 원하는 형태의 하나님으로 만들려는 시도를 포기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우리가 원하는 하나님을 만드는가! 겟세마네로 가려는 예수에게 누가 사탄이었는가! 예수를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베드로 그가 아니었는가! 베드로에게는 예수는 메시아로서 그가 기대하는 기대치가 있었다. 따라서 예수의 말은 그를 실망시키는 말이었다. 베드로에 의하면 예수는 그렇게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성서는 그가 예수를 꾸짖었다고 기록한다. 그는 예수에게 사탄으로 나타난 존재였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은 이래야 한다고 미리 설정하지 않는가! 하나님의 정의는 이래야 한다고, 하나님의 사랑은 이래야 한다고, 하나님의 은혜는 이래야 한다고 그렇게 결정하지 않는가!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해야 한다.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헌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에게 향하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근본적으로 버려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마치 베드로가 예수에게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대적하고 바꾸려고 하는 사탄으로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조정하려는 생각도, 하나님을 통해서 그 무엇인가를 성취하려는 생각도 또는 하나님을 통해서 무엇인가 축복을 받으려는 우리의 행위도 - 그것이 경건한 기도요 경건한 삶이라 하더라도 -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막는 사탄의 행위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2. 둘째로 우리가 들어야 할 메시지는 우리는 과연 종말에 대한 기대가 기독교 신앙을 형성하는 근간이요 우리의 삶의 과정은 주님의 종말을 기대하는 삶의 과정이며, 모습이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는 종말에 대해서 지식으로 알고 있으며, 입으로는 종말을 기다린다고 하지만 실제의 우리의 삶의 모습은 그와는 다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 않는가? 종말을 기다리는 우리의 삶은 과연 종말을 모르는 사람들이 볼 때에 근본적으로 무엇인가 다른 점이 존재하고 있다고 승인할 그 무엇이 있는가? 아니 우리는 종말에 대한 기대가 우리의 삶과 교회, 우리의 경건을 완전히 규정하고 있는가? 오늘의 우리의 교회는 종말을 기다리는 종말론적인 공동체의 본질적인 모습을 보유하고 있는가? 오늘날 우리의 사회가 교회가 없기 때문에, 기독교인이 없기 때문에, 복음을 전파하겠다는 열정이 없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선교 단체가 있는가 생각해 보라 - 기도하는 교인이 없기 때문에 - 얼마나 많은 기도원이 있으며, 또 얼마나 많은 기도회가 우리의 주변에 있는가 생각해 보라 - 기적과 은사가 없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기적이 일어나고 있으며, 얼마나 많은 은사의 집회와 은사가 넘쳐 나는가 생각해 보라 - 어두운 것이 아니라 그러한 요소들이 너무나도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 무엇인가 우리 교회와 기독교인이 잃어버린 신앙의 본질이 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의 사회가 교회가 그리고 신앙인의 삶이 어두운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우리 신앙의 본질적인 것을 회복해야 한다. 그리고 그 본질적인 것은 종말론적 신앙, 즉 종말을 고대하면서 주어진 현실을 초월하는 종말론적인 신앙을 삶에서 구현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종말론적인 행위를 요청하라고 부탁하는 예수의 비유와 그리고 그러한 삶을 살라고 우리한테 요구하는 예수의 요청이 우리에게 거치는 돌이 됨은 너무나도 자명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한 거치는 돌을 피해 가지 않고 그것에 응답하는 우리의 응답에 주어진 현실을 초월하는 기독교인의 초월이 내재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러한 초월의 삶을 구현하는 모습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통해서 보시고자 하는 믿음의 모습이 아닐까?
3. 세째로 우리가 이 본문에서 들어야 할 메시지는 예수가 보고자 하는 믿음의 모습 속에서 파생적으로 나타나는 그 어떤 부분이다. 이때 파생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예수 자신은 누가 그 마지막 날 때까지 예수의 가르침에 충실하게 남아 있는지를 분명히 안다고 우리는 봐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우리가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속성인 전지성 - 우리가 그를 성자 하나님으로 고백하기 때문에 - 에 어긋나는 결과를 낳게 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예수 자신이 누가 마지막까지 그의 가르침을 준수하고 있는가를 아는가 모르는가 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나 자신이 나의 생애가 끝날 때까지 과연 그의 가르침을 준수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의 전 과정을 과연 종말론적 관점으로 유지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마지막 순간에 - 그 순간이 예수의 재림의 순간이든지 아니든지 관계없이 - 예수의 종말에 대한 기대를 놓치지 않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는 종말론적인 삶을 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을는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의 마지막 그 시점에서 우리는 종말론적인 삶을 사는 그래서 주어진 현실을 초월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을까? 정말로 우리는 예수의 본질적인 가르침인 종말에 대한 신앙을 끝까지 견지할 수 있을까? 교회의 본질인 종말론적인 공동체의 모습을, 또 그러한 성도의 교제를 과연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을까? 아니 잃어 버렸다면 그것을 회복해서 공동체의 본모습을 찾을 수 있을까? 라는 내면의 질문을 듣는 것이 우리가 들어야 할 세번째의 메시지인 것이다.
필자의 이 짧은 주석이 교회가 "승리하십시오" 라고 외치는 외침에서부터 벗어나서 "마라나타: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라는 본질적인 것을 외치는 외침으로 나아가는 데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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