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와 함께
우연의 일치이지만 지갑에 써야 할 돈과 같은 액수인 15,000원이 있다. 꺼내서 트레이닝 주머니에 넣고 빈 지갑은 책상 위에 놔두고 자전거포를 향했다. 사장이, 접이식 자전거 한 대를 보도에 놓고 안장을 갈더니 접어서 옆에 세워 둔 승용차 트렁크에 실어 보내고 내 자전거를 수리하기 시작했다.
“장갑도 안 끼고 하시네. 다치지 않아요.”
대답이 없어서 괜한 말 했나 싶었는데 능숙한 솜씨로 부속을 갈면서
“30년 했는데… 다치겠어요.”
잠시 웃음을 머금은 눈으로 날 보면서 손을 놀리더니 어느새 일을 끝내곤 앞뒤 브레이크 관련 나사를 몇 번 돌려 미세 조정을 하고 에프킬러 통처럼 생겼는데 가는 대롱이 달린 깡통을 들고서 여기저기 기름을 쳤다. 어제 자전거 타고 장에 갔다 오다가 잠깐 들러 외상으로 안 되냐고 물었을 때는 한마디로 안 된다고 냉정하게 말하던 사장이 오늘은 세심하게 봐 주었다. 자전거에 올라 덕풍 시장 옆 골목으로 들어가는데 기술자의 손이 가서인지 훨씬 가볍게 굴러가는 것이 페달 밟을 때도 낭비되는 힘이 없음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자전거는 내 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문명의 이기가 되었다. 자전거 바구니가 없어도 슈퍼에 갈 때 빈 배낭을 짊어지고 간단한 물건은 얼마든지 사올 수 있고 은행 일을 볼 때 참 편리하다. 체육관에 갈 때는 죽 내리막길이어서 꼭 스키를 타고 미끄러지는 것 같아 페달을 별로 밟지도 않는다. 몇 번 과속하다가 아찔한 적이 있었고 겨울 골목길에서 보도 불럭과 연결된 돌 경계석을 타고 오르다가 미끄러져 넘어진 후로는 조심해서 타노라고 하는데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생긴다. 자전거 타기에도 교통이나 도로 상황에 대한, 신속한 예방적 판단이 아주 중요함을 절실히 느낀다. 아파트 입구 차단기 앞에 잠깐 멈춘 차에서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 벌어진다. 갑자기 조수석 문이 열리며 사람이 내려 겨우 피해 간 적도 있고, 새벽에 언덕길을 달려 내려가는데 슈퍼마트 쪽에서 사람이 나오는 걸 늦게 발견하고 급브레이크를 잡았는데 다행히 그 행인이 멈춰 서서 무사히 지나간 적도 있었다. 한번은 자동차 길을 건너는데 왼쪽에서는 오는 차가 없고 오른쪽에는 버스 한 대가 정류장에 서 있어서 안심하고 횡단하는데 갑자기 버스 뒤쪽에서 오던 차가 버스 옆 차선으로 바꾸며 튀어 나오는 걸 보지 못해 부딪칠 뻔했다. 골목길에서는 행인뿐만 아니라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조심해야 한다. 자전거는 항상 균형감각과 절제의 필요성을 큰 소리로 가르치고 나는 소홀히 하지 말고 귀에 담아 들어야 한다. 자전거를 잘 타는 사람은 운전 기술이 아니라 그러한 자세를 견지하는 사람이다. 핸들과 브레이크를 잘 조작하여 사고 없이 목적지까지 가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아파트 거치대에 두었던 자전거가 없어졌다. 대부분의 자전거에는 흙먼지가 뿌옇게 앉아 있고 내 것만 늘 안장이 깨끗했었는데 체인을 거치대에 매지 않고 뒷바퀴와 시트튜브를 채워 두었더니 답삭 들어간 모양이다. 좋은 자전거는 아니었다. 뒷바퀴는 약간 짱구여서 완벽한 원운동이 안 되는 바람에 평탄한 길을 가도 규칙적인 상하운동이 느껴졌지만 큰 지장은 없어서 요긴하게 썼는데 아쉬웠다. 언젠가 하남시청 뒤 산책로를 천천히 가면서 한눈팔다 벤치를 박는 바람에 헤드튜브가 안쪽으로 휘어서 앞바퀴와 페달이 눈에 띄게 가까워지고 핸들도 좀 뻑뻑해졌다. 방심하는 바람에 어처구니없는 사고가 난 이후 새 자전거로 사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새 자전거는 도난 위험이 있었으므로 그냥 탔었는데…
어느새 자전거는 내 몸의 일부 또는 친구가 된 모양이다. 가까운 길을 갈 때도 자전거를 타게 되고 일단 자전거에 오르면 너무 경사진 길이 아니면 저단으로 바꾸어 갈 수 있어 내 몸의 일부처럼 되었다. 보도에서 끌고 갈 때는 친구와 나란히 어깨동무하고 걸어가는 느낌이어서 의지하는 마음을 가졌는데 없어지니 공허감이 더 큰 것이다.
하지만 현관 앞에 매어 둔 자전거가 한 대 더 있다. 9년 전인 2006년 여름, 막내가 지인과 함께 남한 일주에 도전한 역사적(?)인 산악자전거-American Eagle인데 이제 다시 발진시켜야 한다. 그 동안 공백 기간이 길어서 바람도 빠졌고 핸들 그립이 오래 되어 잡으면 끈적끈적하고 타고 나면 손에 시커멓게 묻어서 비누칠을 여러 번 해도 지워지질 않는다. 튜브를 갈고 그립도 바꾸고 기어도 정비하였다. 시운전하면서 페달을 밟아 보니 탄력이 있고 기어를 넣고 빼 보니 역시 부드럽다. 그리고 자전거를 들고 층계를 올라 보니 훨씬 가볍다
그 해 강원도엔 폭우 피해가 엄청났다. 텔레비전을 볼 때마다 강원도 여러 곳에서 낙석 사고가 나고 산사태로 도로가 유실되어서 교통이 마비되었다는 뉴스가 반복되니 연락을 끊은 아들이 돌아올 때까지 걱정을 많이 했다. 하지만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같은 길이었지만 막내가 지나간 다음에 폭우가 내렸다고 하니 천만다행이었다. 홍보용으로 짐을 가득 실은 자전거용 트레일러까지 끌고 해안선을 따라 일주했는데 30일 만에 털보가 돼서 돌아왔다. 그 후 취업 면접이나 자기소개서 쓸 때 산 자료가 되어 많은 도움이 되었으니 귀중한 경험을 한 것이다.
이제 강원도 큰 산을 오르던 그가 매일 나와 함께 아파트 단지에 이어진 동산을 올라 ‘말바위’ 체력 단련장을 거쳐 약수를 뜨러 같이 가니 성에 안 찰 것이다. 하지만 달랑 빈 페트병 몇 개 든 배낭을 메고 동산을 오르는 건 앞으로 더 큰 산에 오르기 위한 적응 훈련이라고 말해 주고 싶다. 언덕길을 오를 때 가급적 통나무 계단 옆 좁은 길을 자전거 길로 쓰려고 해 보았지만 너무 좁아 핸들 조작이 생각처럼 쉽지가 않다. 아직은 미숙하여 주로 약수를 떠 오기 위해 발진하지만 앞으로 갈 길은 멀리까지 뻗어 있다. 강원도 산에 비할 수 없지만 중부고속도로를 가로지르는 육교를 지나 이성산성을 거쳐 남한산성으로 가는 길이 열려 있는 것이다.
앞으로 자전거를 거치대에 놔두고 마음 놓고 일을 볼 수 없으니 산책삼아 걸어 다닐 일이 많아질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좋은 일이 아닌가. 사실 자전거는 교통기관인 만큼 언제나 사고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자전거는 타고나면 자동차에 해당되기 때문에 차도로 다녀야 하는데 자전거 도로가 연속성이 없기 때문에 위험하기 그지없다. 이제 자전거 복장과 헬멧은 갖추지 않았지만 함께 남한산성을 바라본다. 편리하게 쓰던 막자전거를 잃어버리니 탈 생각도 안 했던 산악자전거가 내 시야를 넓혀 준 것인가. Korean Eagle의 꿈이다.
첫댓글 건강과 운동을 한꺼번에 다 할 수 있다니 두 마리 토끼를 한번에 잡으십니다
운동 후에 갖는 상쾌함은 돈 주고도 못 사는 갓이지요
나도 집 사람이년전에 자전거 타기를 시작해서 조금 관심을 가져 보았습니다
그런데 내겐 적은이 잘 안 되더라고요
다용도실에 잘 보관된 자전거를 볼 때마다 언제인가는 타야겠다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