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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金剛) 불교입문에서 성불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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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빛수레 광륜 스크랩 야단법석☆───── 병상의 선재가 되어 - 윤산 강행원
윤거사. 추천 0 조회 46 07.04.13 08:35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야단법석



병상의 선재가 되어 

-말로만 되뇌던 무상을 몸으로 체감한 현실-



윤산 강행원 (화가)




추석을 며칠 앞두고 할일이 산재되어 있는데도 꼼짝 못하고 누워서 창문에 드리우는 하늘의 뭉게구름을 보며 몸으로 체감한 무상함을 떠올려본다. 일산백병원 정형외과 병동 905호실 병상에서 바라본 새벽여명은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어둠을 몰아낸 여명의 하늘은 마치 불성광명의 찬란함으로 장엄하듯 타오르는 빛이 시야의 모든 것을 붉은 모습으로 바꿔놓았다. 그렇게 찬란한 빛으로 화하던 여명의 그 모습은 잠시 후에 사라지고 공활한 하늘만 한없이 높아 보였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8월 초순 뜻하지 않는 부상을 입게 되었다. 허리의 요추1번이 파손 되는 골절상과 엉덩이와 왼쪽어깨, 바른쪽 팔꿈치 등에 타박상을 입고 응급실에 실려 와서 병상에 누운 지 20여 일이 되어갔다. 찌는 더위는 어느새 물러가고 가을을 예고하는 8월 하순 한없이 높은 하늘을 보이던 28일, 그날은 퇴원을 결정한 날이었다. 그러나 퇴원은 완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후에도 10주 이상을 뼈가 회복될 때까지 몸을 곧추세우는 활동을 자재하고 되도록 누워서 안정하라는 요양지시를 받았다.


이렇게 된 데는 모두가 들떠있는 여름 휴가철 무더위가 막바지에 이른 8월 10일 2박3일 계획으로 한적한 곳을 골라 휴가 채비를 하던 날 이른 아침이었다. 목적지는 해인사가 위치한 가야산 백운동 숯가마였다. 시원한 바다 쪽은 인파가 너무 많을 것으로 생각되어 부처님 향훈이 깃든 주변에서 숯가마 속의 찜질로 이열치열의 이색휴가를 보낼 생각이었다. 사전 점검하고 약도까지 뽑아 출발준비를 마쳤던 휴가 계획이 변경되어 20일간의 긴 휴가를 병원으로 가게 되었다.


병상의 여정을 인연하기 까지 부상을 입게 된 것은 일상적으로 늘 다니던 옥상 사다리가 미끄러져 1층 높이에서 떨어졌기 때문이다. 예측하지 못하는 사고는 항상 다니던 낯익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절감케 했다. 초행길이라면 주위를 점검하고 잘 살펴 행동했었을텐데 하고 돌이키는 마음이야 간절하다. 잘 살피지 못한 부주의는 내 여름나기의 계획을 완전히 바꾸어, 법을 구하는 선재의 삶을 돌아보게 했다.


대소변을 받아내던 그 10여 일과 보조기에 의지하여 부축을 받아 겨우 몸을 가누던 병상의 20여 일은 20여 년과도 같은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마치 병상생활은 화엄경의 입법계품에서 나오는 선재라는 소년이 법을 구하기 위해 53명을 찾아 나선 이야기처럼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20일간의 짧고도 긴 여정을 날마다 누운 채로 새로운 사람들과 수인사를 하며 생사를 넘나드는 다양한 그들의 세계와 만나야 했다.


하지만 선재동자가 법을 구하기 위하여 만난사람 중에는 보살만이 아니라 비구, 비구니, 소년, 소녀, 의사, 뱃사공, 신, 선인, 외도外道, 바라문 등 다양하다. 그리고 그의 구도심은 계급도 종교도 문제가 되지 않는 그런 정신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그래서 현상세계의 상호교섭을 통하여 무한한 연관을 갖게 되는 화엄세계에서 말하고 있는 사사무애事事無碍의 큰 법계연기法界緣起를 굴린 그 무진한 세계를 열어 보인 것이다.


송구하게도 이와는 비교할 수 없는 일이지만 나의 경우는 그런 대법을 구하는 것과는 달리 잠시 상호연기하고 있었던 일들을 통해서 의미를 부여할 뿐 깨달음의 눈을 뜬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현상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비판적인 눈으로 보는 습벽의 감성에서부터 자신을 다시 돌아보는 계기일 뿐이다. 나의 20일간의 병상에서 있었던 무상한 일들은 가장 먼저 부딪치게 된 병원에서의 인술에 대한 소감이다. 인술은 생사를 가늠하는 중생들 육신의 갖가지 부상과 병을 치료하여 생명을 구제하는 소임의 명분을 쌓고 있다. 그러나 그 속사정의 긴 얘기는 생략하지만 자본주의와 결합한 그 허울은 인술이 아니라 전술錢術이 아닌가하는 생각과 만나게 되었다.


또한 정신주의가 자본주의와 결탁한 욕망의 산물은 종교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인지 종교가 자본주의와 결탁한 교세를 보면 마르크스가 폭소한다는 우스갯말이 있다. 모든 것이 대형화 추세 속에서 자신들의 교회를 선전하며 복음을 전하는 선교활동은 이곳의 병원 예배를 비롯해서 주위의 모든 교회들이 각축하는 모습은 좋아 보이지 않았다. 하루도 빼지 않고 환자들의 문전을 두들기며 천국을 외쳐대는 그들의 열성은 불교도인 나의 입장에서는 인내심이 필요했다. 매일 반복되고 있는 영원성에 대한 구제의 사명은 결국 자신들 교회의 몸집불리기에 지나지 않는 교세욕망으로 느껴졌다.


이러한 내 지적이 왜곡이기를 바라지만, 모든 것을 연기법에 맡겨버린 불교인들의 무소유와 무명은 이들에게 이해를 돕는 교화의 다리가 될 수 없었다. 과연 그들은 자기 자신을 얼마나 알고 있기에 그런 극성이 나오는 것인지 우리불자들이 본받아야 할 점은 없는가에 대한 생각과도 만나야 했다. 그러나 성자들의 한결같은 진정한 가르침을 생각해 보면 먼저 자기 자신을 찾는데 있었다. 예수께서도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갈 것을 알고 있다”고 했으며, 소크라테스도 “먼저 너 자신을 알라”고 했다. 부처님 법 역시 “나를 모르면 천지를 다 가졌어도 아무 가치가 없다”고 하셨다. 오직 자신들의 행위만이 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미 정보의 바다에 흘러넘치는 바른 대법을 보지 못한 우물 안의 독선이요 아집이다.


내 휴가지가 되어버린 이곳 병원은 매일 나고 죽는 일이 벌어지는 무상한 현장이기도 하지만, 그래서 더욱 그 희비가 상존하는 욕망으로 가득한 고통바다였다. 불치병으로 2년이 넘도록 병상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몸에 이상이 없는 데도 안 떠나는 사람이 있다. 전자는 돈에 시달리고 후자는 보험금을 더 타내려는 속셈인 듯 하다. 저마다 병상의 사연은 구구하지만 불후의 사고로 이어진 재활의 장애를 극복하지 못한 처절한 안타까움도 많았다.


그러나 한 세기에 이르도록 풍미한 삶을 살만큼 살았다면서도 생에 대한 애착을 감추지 못하는 노욕을 보이는 이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합병의 노환을 앓고 있는 갓 70에 이른 몇 분은 그 지역의 계발이익으로 부자가 되어 그랜저에 삽을 싣고 다니며 논일을 하러 다닌다는 농촌의 새로운 풍속도를 자랑하는 분도 있었다. 시가 2백만 원을 호가하는 땅을 몇 천 평씩 소유한 그들은 5~60억대가 넘는 부호들이었다. 그런데도 만족하지 못하고 비싼 땅을 조금 나누어 팔아 싼 땅에 투자하려는 고민을 하고 있었다. 이런 얘기를 들으면 도시 서민들은 상대적 빈곤감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부유한 이들은 좋은 음식을 많이 섭취해서 얻은 당뇨 합병으로 그 건강의 심각성은 바람 앞에 등불처럼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어 보였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자신들의 병은 고민하지 않고 투기로 재산을 더 늘릴 계획을 병상의 자랑꺼리로 삼고 있었다. 이들이 농촌의 가난했던 지난날의 순박함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면 죽음 앞에서도 이러한 욕망에 시달리고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이곳 병상의 공간에서 만난 다양한 인연들은 여기에 모두 거론하지는 못하지만 물질주의에 젖어 살아온 욕망의 실체는 그대로 화택고해의 불집이었다.


하지만 누구나 “태어난다는 것은 한 조각 뜬구름이 일어남과 같고, 죽는 다는 것은 한 조각 뜬구름이 흩어짐과 같다[生也一片浮雲起(생야일편부운기), 死也一片浮雲滅(사야일편부운멸)]”는 허망ㆍ무상함을 못 느끼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욕망의 모습은 가상假相 즉, 거짓모양에 지나지 않지만 헤아리지 못하는 뭇 중생이 사는 현상세계는 생ㆍ노ㆍ병ㆍ사의 고해안에서도 자취가 없는 욕망의 불집은 타오르기 마련인가보다.


보조국사의 수심결에 “凡夫迷時(범부미시), 四大爲身(사대위신), 妄想爲心(망상위심), 顚倒夢想(전도몽상)”이란 법구가 있다. 이 말은 범부가 미혹했을 때는, 지ㆍ수ㆍ화ㆍ풍 사대로 이루어진 이 몸뚱이를, 망상을 마음으로 삼아서, 거꾸로 뒤바꿔 본다는 뜻이다. 범부성을 몸으로 하고 있는 무명업에 가린 공업중생이 병상에 누워서 뒤바꿔 본 욕망의 실체를 느낀 20일간의 연기 소견이다.


그리고 이곳 병상에서 보고 느낀 일들을 통해서 그동안 내 모습을 한번도 돌아보지 못하고 살았던 점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그 점은 우리의 생명이 무상한 것이어서 어느 때 죽게 될지 정말 모를 일이라는 것을 새삼 인식하게 된 것이다. 병들어 죽을지, 사고를 당할지, 천재지변으로 죽게 될지 알 수 없는 무상한 존재라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었다. 부주의의 결과가 낳은 인연들을 생각해 보면 입으로만 외치던 인생무상을 몸으로 체감하였다. 나의 이번 사고는 병상의 다른 이들에게 비하면 참으로 다행한 것이었다. 그나마 부처님 법을 신앙한 덕으로 여행 중에 불행하게 될지도 모르는 더 큰 사고를 막으려고 여행을 중지시키기 위해서 일어난 액땜이라고 교우들의 위로를 받고 있다. 믿음을 확신한 고마운 말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은 집에 부처님을 모시는 불단을 장엄하고 살면서도 세상일에 마음이 흩어져 분향을 소홀히 한 탓에 신장님이 벌을 내리신 것이라고 믿고 싶다. 큰스님의 가르침이신 천지우주가 다 오로지 불성뿐이라는 일상의 생각과 자신이 부처임을 믿고 일행으로 아미타불을 관찰하여 집중하는 실천을 따르지 못한 업장이 참으로 크다. 이렇게 외상이 하나도 없이 요양을 요구하는 사고를 입은 것은 그동안 잘못 살아온 일들을 반성하여 짧은 인생을 더 열심히 정진하라는 뜻으로 새겨 회향코자 한다.


나무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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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7.04.13 12:23

    첫댓글 참으로 좋은 글과의 인연에 감사합니다.............아미타불.............()()()

  • 07.04.13 13:26

    보리방편문을 염하고 이렇게 중간 중간 카페에 들어와 글을 읽으면 해천님과 같은 마음이 들어요. 참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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