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3년 다해 3월1일 사순 제2주간 금요일
[청주] 언제나 당당하게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독서 : 창세 37, 3 - 4. 12 - 13ㄷ. 17ㄹ - 28
† 복음 : 마태 21, 33 - 43. 45 - 46
★ 야곱은 늘그막에 얻은 요셉을 다른 어느 아들보다 더
사랑하였다. 이를 두고 그의 형들은 요셉을 질투하고
증오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요셉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다가
구덩이에 던져 넣었다. 결국 요셉은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은전 스무 닢에 팔려 이집트로 가게 된다(제1독서).
★ 포도밭 주인이 정성껏 가꾼 포도밭을 소작인들에게 믿고
맡겼다. 그러나 그들은 주인의 은혜를 잊고 그 밭을 차지할
욕심으로 주인이 보낸 종들뿐 아니라 그 아들까지도 살해한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들과
당신을 외면하고 박해하였던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을
나무라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의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에 나오는 소작인들의
폭력성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철학자 마르틴 부버의
『나와 너』라는 책의 내용을 통해 이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 책에 따르면, 인간의 만남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곧
‘나와 그것’의 만남과 ‘나와 너’의 만남입니다. ‘나와 그것’의
만남이란 비인격적인 만남입니다. 필요에 따라 이용하고자
갖게 되는 만남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용 가치가 없으면
사라지게 되는 만남입니다. 이를테면 학생이 볼펜을 만났을
때 그것은 ‘나와 그것’의 만남이 됩니다. 이와 반대로 ‘나와
너’의 만남은 인격적인 사랑의 만남입니다.
함부로 상대를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사랑을 주고
받음으로써 그 만남이 풍요롭게 되고, 발전하며, 아름다워져
가는 경우입니다. 이를테면 부모와 자식, 연인들의 만남은
‘나와 너’의 만남입니다.
오늘날 참으로 불행한 것은 ‘나와 너’의 만남이 점점 더 ‘나와
그것’의 만남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돈 버는
기계로, 자식을 공부하는 기계로, 엄마를 밥해 주는 기계로
생각하여 상대를 이용 가치에 따라 만나는 풍토로 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소작인들에게 주인은 ‘너’가
아니라 ‘그것’입니다.
이들은, 포도밭을 애지중지 가꾸어 그들에게 믿고 맡긴 주인의
그 마음을 헤아리지 않습니다. 다만 포도밭을 차지할 욕심에
주인도, 주인이 보낸 종들도, 그 아들까지도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삼을 뿐입니다. 이들의 폭력은, 바로 인격적인 만남을
바라는 주인과는 달리 비인격적으로 주인을 대하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역시 주위의
사람들을 ‘너’가 아니라 ‘그것’으로 바라보는 것은 아닌지요?
-매일 미사 -
◈ [청주] 언제나 당당하게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2013년 다해 3월1일 사순 제2주간 금요일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자.>
+ 마태오 21,33-43.45-46
언제나 당당하게
우리의 삶은 하느님께서 주신 포도밭이고, 우리는 그 밭의
일꾼입니다. 일꾼은 열심히 일을 해야 합니다. 일꾼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지 않고 주인이 원하시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좋은 열매를 맺어 그 열매를 주인께 바쳐드려야 합니다.
만약 일꾼이 주인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일을 한다면 아무리
많은 일을 하였다 하더라도 그는 이미 일꾼으로서의 자격을 잃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지 않는다면
이미 하느님의 일꾼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하느님께서 주신
포도밭에서 마음껏 일할 수 있는 하느님의 훌륭한 일꾼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무리 많은 일을 하여도 사랑이 담기지 않으면 적게
일한 것이고, 적게 일한 것처럼 보여도 사랑이 담기면 많은 일을
한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일을 하여도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다면
적게 일한 것이고, 적게 일한 것처럼 보여도 해야 할 일을 했으면
많은 일을 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를 통해서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롭지 못한 삶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군중이
두려워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왜 군중이 두려웠을까요?
자기들이 의롭게 살았다면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의인은 아무도
겁내지 않는 법입니다. 그러나 “도둑이 제발 저린다” 는 옛 말이
있듯이 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 한 것은 곧 자기들이 하는 일이
옳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말해주는 것입니다.
반면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당당하셨습니다. 바리사이나 수석
사제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하시는
일이 아버지의 뜻에 의합하고 당신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요한5,19).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보내주신 아버지의 뜻만을 추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이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아버지 안에
머무는 만큼 당당히 가실 길을 가야만 하였습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걸으신 그 길을 당당히 걷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신상옥씨의 ‘내 발을 씻기신 예수님’을 묵상합니다.
그리스도 나의 구세주, 참된 삶을 보여주셨네.
가시밭길 걸어갔던 생애, 그분은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네.
죽음 앞둔 그분은 나의 발을 씻으셨다네.
내 영원히 잊지 못할 사랑, 그 모습, 바로 내가 해야 할 소명.
주여 나를 보내주소서.
당신이 아파하는 곳으로 주여, 나를 보내주소서.
당신 손길 필요한 곳에 먼 훗날 당신 앞에 나설 때
나를 안아주소서.
주님께서 걸으신 길, 기쁨으로 걸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메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봉헌의 힘
2013년 다해 3월1일 사순 제2주간 금요일
<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자.>
복음: 마태 21,33-43.45-46
리지외의 아기예수의 성녀 소화데레사의 평전, [빈손]에 봉헌의
중요성을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타고로의 우화가 있어 소개합니다.
이 몸이 시골길로 이 집 저 집 구걸을 하러 다녔을 때에, 그대의
황금 마차가 멀리서 마치 황홀한 꿈과도 같이 나타났기에 이 왕
중의 왕이 누구신가 하고 놀랐나이다.
내 가슴은 기대에 부풀고, 이제 내 불운의 날은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 나는 청하지 않아도 동냥을 주리라고 눈치만 살피고
있었나이다. 보화가 사방 흙 속에 흩어져 있었으니까요.
내가 선 곳에 마차가 멈췄나이다. 임의 눈길이 이 몸에서 머무옵고,
임께서는 빙그레 웃으시며 내려오셨나이다. 드디어 내 생애에
행운이 왔다고 느꼈나이다.
그러나 갑자기 임은 오른손을 내미시며 이렇게 물으셨나이다.
“그대는 내게 뭐 줄 것이 있느뇨?”
오! 거지에게 구걸하여 임이 손바닥을 벌리시다니, 이 무슨
왕후다운 농이시나이까!
나는 어리둥절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 있었나이다.
그러다가 바랑에서 제일 작은 낟알 한 개를 꺼내서 임께
드렸나이다. 그런데 그날이 저물어 바닥에 내 자루를 쏟아놓고
그 초라한 무더기 속에서 한 개의 아주 작은 황금 낟알을 보았을
때 내 놀람은 얼마나 컸던고!
나는 애타게 울며,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임께 바칠 용기가
있었더라면!’하고 원했나이다.
[타고르의 ‘기탄잘리’중에서]
전에 최봉도 신부님께 찾아왔던 한 자매님에 대해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4식구가 단칸방 월세로 살았는데, 그 자매님의
감사하다는 말 때문에 일주일 새에 모든 어려움이 사라지고 복이
가득 찬 집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 먼저 우리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지부터 물어보십니다. 이는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 이사악을 바치라고 한 것과 같고, 인류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 인류의 대표인 예수님께 무엇을 바칠 수 있느냐고 물어보시는
것과 같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바쳤듯이, 가장 소중한 것을
바치는 것이 복을 주실 수 있는 분께 대한 합당한 자세입니다.
성모님과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온전히 남김없이 바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못된 소작인들의 문제점은 포도원을 자신들의
것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소출에 합당한 도조를 바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주인이 자신의 땅을 갈취하려는
소작인에게 그대로 땅을 맡기겠습니까? 그래서 포도원은 다른
사람에게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행복을 빼앗기게 되는 것입니다.
중동에서 두 남편이 각자의 아내에게 몇 년 동안 돈을 붙여왔습니다.
한 아내는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그 돈을 제비에게 다 뜯겼고, 한
아내는 그 돈을 잘 저축했습니다. 두 남편이 김포공항으로 돌아오던
어느 날 한 아내는 자살을 하였고 한 아내는 돈 액수가 가득 찍힌
통장을 들고 공항으로 남편을 마중 나왔습니다.
내 것처럼 사용한 아내는 결국 모든 것을 잃고 고통을 견디지
못하여 목숨을 끊었지만, 남편에게 다시 돌려주려고 한 아내는
남편의 사랑과 함께 그 돈도 다시 자신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봉헌의 힘입니다. 내 것이라 생각하면 그것을 준 분과 내
것이라 생각한 모든 것까지 잃게 되지만, 그 분 것이라 고백하여
다시 돌려드리려고 하면 모든 것을 다시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내 자신의 포도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
일을 하고 포도원을 가꾸며 살고 있습니다. 단지 그 포도원이
천국이 되느냐 지옥이 되느냐는 내가 내 포도원을 내 것으로
삼으려고 하느냐, 아니면 하느님의 것이라 생각하느냐 뿐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믿음에 대한 소출을 잘 내는 민족입니까? 믿음에
대한 소출은 오늘 복음대로라면 ‘감사의 봉헌’이 될 것입니다.
십일조라도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내 시간의 십일조,
능력의 십일조, 소득의 십일조를 참 주인님께
봉헌하고 있습니까?
감옥과 수도원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두 곳 다 거친 음식을
먹고 밖에 자유롭게 나올 수도 없으며 꽉 짜인 삶을 살아야
하는 곳들입니다. 그러나 두 곳은 천국과 지옥의 차이가
있습니다. 한 곳은 불평이 있고, 한 곳은 감사가 있을 뿐입니다.
도조를 제 때에 바치는 이에게 하느님은 절대 포도원을
빼앗아가지 않습니다. 도조를 바친다는 의미는 감사한다는
의미입니다.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인천] 주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심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분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고 계시더군요. 가정이 평화롭지
못한 것, 남편과 자녀들이 잘 되지 못한 것, 그리고 자신 역시
행복하지 못한 것이 바로 자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큰 죄를 지은 자신을 과연 주님께서 용서해주실
것인가 라는 불안감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사실 종교생활을 하시는 분들 중에 그것도 가톨릭 신자나
개신교 신자 중에 지나친 죄의식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주님의 심판과
벌에 대해서 지나치게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주님께서 인정 없이 처벌하기 위한 심판을 하시는
무시무시한 분일까요? 왜 가장 중요한 사랑의 계명을 전혀
보지 못하는 것일까요? 사랑의 계명이 가장 중요한
계명인데도 불구하고, 이를 보지 못하고 주님의 심판을
자신의 생각에 끼워 맞추다보니 절망스러운 결론밖에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니, 자신의 틀에 주님을 맞추는 것입니다. 결국 주님을
잘 아는 사람은 더욱 더 겸손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내 틀에 맞추기보다, 내가 주님의 틀에 맞추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으로 기쁘게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을 알면 알수록 그 큰 사랑을
깨달을 수 있고, 주님께 맞추는 생활을 통해 자신 안에서
커가는 사랑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분, 온갖 불평불만을
간직하며 살아가는 사람, 세상의 기준만을 최고로 여기는
분들... 모두가 바로 주님께 맞추기보다, 자신의 틀에 주님을
맞추려는 욕심을 가지고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러한 차원에서
오늘 복음의 비유 말씀을 이해 할 수 있습니다.
만약 포도원 소작인들이 포도밭 주인을 제대로 알았다면
심지어 상속자인 아들까지 죽이려는 생각을 했을까요?
소출을 받으러 갔던 종을 죽이기까지 했지만, 주인은 곧바로
처벌하지 않지요. 더 많은 종을 보내는 등 기회를 줍니다.
그리고 여기에서도 멈추지 않고, 자신의 외아들까지도 보내어
또 다시 기회를 준 것입니다. 이렇게 계속해서 기회를 주는
주인의 따뜻한 마음을 알았더라면 그런 잔혹한 행동을 하지
않았겠지요.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틀에 모든 것을 맞추었던
것입니다. 주인은 자신에게 필요 없는 존재로, 자신들보다도
힘이 없는 나약한 존재로 또한 세상의 것들에 대한 욕심
때문에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했던 것입니다.
이 비유 말씀은 예수님과 이스라엘 사람들의 관계를 들어
말씀하신 것만은 아닙니다. 지금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들을
향해서도 하시는 말씀입니다. 자신의 틀에 주님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주님의 틀에 맞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겸손의 삶, 사랑의 삶을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3월의 첫 날이 시작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행복의 삶을 향해 주님께 철저히 맞추시길 바랍니다.
내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오늘이 좋은 날이며 오늘이 행복한 날이 되게 하는 것이다
(시드니 스미스).
오늘 신학교에서 직수여식이 있습니다.
제가 독서직 받을 때를 떠올려봅니다.
실수를 두려워하지 마세요.
자신의 실수에 대해 어쩔 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자신을 싫어할 것이라고, 자신을 어떻게 볼 것이냐고,
앞으로 사람들을 어떻게 만나야 할지 모르겠다는 말을 합니다.
저는 이런 분들을 보면, 독심술을 사용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다 아는 양 생각하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지요. 사람들은 실수하는 사람을 그리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긴 ‘너무 맑은 물에는 물고기가 살지 않는 법’이라고 하지요.
실수 없는 사람, 정말로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인간적이지
않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실수하는 사람을 싫어하지 않는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 자신이
실수투성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중에서 실수 한 번 하지 않은 분이 있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실수에 대해서도 관대할 수 있는 것이며,
그런 사람을 돕고 싶어 하는 마음이 드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인 것입니다.
실수를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실수에 멈춰버리는 것이
아니라, 이 실수를 넘어 지금보다 더 나은 나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용기를 가지십시오.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많은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시지 않습니까?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서울] 인간에게 원래 박혀진 그 무엇
2013년 다해 3월1일 사순 제2주간 금요일
◆ 인간에게 원래 박혀진 그 무엇
군중이 시대상황에서 진리의 노선을 어떻게 아는지 신기합니다.
인간에게 원래 박혀진 그 무엇이 있는 게 확실하다는 생각입니다.
마음과 생각을 제대로 성숙시키면 도달하게 되는 그 단계
말입니다.
깨닫는 능력, 판단의 능력, 예감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갖고 태어난 이런 성능을 가꾸지 못하면 흉해지기도
하고요. 예수님을 당시의 군중은 예언자로 봤는데 우린 달리
봐야 하나요?
“그분을 붙잡으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웠다.
군중이 예수님을 예언자로 여겼기 때문이다(마태오 21,46)”
-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님의 묵상 글 -
◈ [서울] 고통의 원인, 질투
어느 날 예수님께서는 길을 가시다가 눈먼 사람을 만나신다.
그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이유에 대한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요한 9,3) 하느님의
구원사업을 완성하셔야 하는 예수님의 처지에서 나올 수 있는
대답이다.
때로 우리도 자기 자신이나 이 세상의 누군가가 고통을 느낄
때, 한 번쯤 그 원인에 대해 자문해 보곤 한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우리를 통해서 하느님의 일을 드러내시려는 안배이겠지만,
우리 처지에서 생각할 수 있는 대답을 찾을 필요가 있다.
제1독서에서 야곱이 늘그막에 얻은 요셉을 더 사랑하자 형들이
그를 미워해 죽이려 했다. 요셉을 향한 형들의 질투심이 원인이
되어 죄 없는 요셉이 곤경에 빠진 것이다. 또 오늘 복음을 보자.
포도원 소작인들은 상속 재산을 차지하려는 속셈에 소출을
받으러 갔던 주인의 종들뿐 아니라 아들까지도 돌을 던져 죽였다.
소작인들의 질투심이 원인이 되어 죄 없는 상속자가 죽음에까지
이른다.
만일 여러분 자신이나 이 세상 누군가가 커다란 불행에 떨어졌다고
느낀다면, 지금 누군가의 질투심이 원인이 되었을 수도 있다. 또한
반대로 여러분 자신의 질투심이 지금 누군가에게 고통을 안겨줄
수도 있다. 이런 질투심이 모든 고통의 근원이다. 질투심은 각자의
고유함을 바라보지 못하고 서로를 비교하는 가운데 생겨난다.
따라서 비교하는 마음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하다. 그럴 때 우리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천할 수 있다.
- 전영준 신부(서울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교수) -
◈ [기타] 자신의영혼의 상태를 제대로 바라보고
2013년 다해 3월1일 사순 제2주간 금요일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자.>
(마태 21, 33-43,45-46)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제대로 바라보고(마태 21, 33-43,45-46)
인간에게 양심을 주시어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악을 피하여
선으로 나아가게 하여주신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오늘 창세기에서 우리는 사랑받는 요셉이 형들에게 어떻게
버림을 받고 팔려가게 되는지 보게 됩니다. 요셉의 형들은
아버지가 어느 형제보다 그를 더 사랑하는 것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정답게 말을 건넬 수가 없었습니다.
형제들 모두에게 악이 들어왔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얼마나
악에 사로 잡혀있는지 모릅니다. 이런 현상은 요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죄악 속에
살아가면 자기 자신의 죄도 별거 아닌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양심조명을 받아
자신의 죄악을 보게 되는 날 자기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
깨닫게 되면, 그 충격은 말도 못하게 클 것입니다.
양떼를 몰고 있는 형들에게 요셉이 나타나자 형들은 “저기 저
꿈쟁이가 오는구나. 자, 이제 저 녀석을 죽여서 아무 구덩이에나
던져 넣고, 사나운 짐승이 잡아먹었다고 이야기하자. 그리고
저 녀석의 꿈이 어떻게 되나 보자.”
그들은 이런 끔찍한 계획을 하지만 양심의 가책을 받아
자신들이 요셉을 죽이지는 않으려 요셉을 구덩이 던져버립니다.
후에 그들은 선심이나 쓰는 듯 요셉을 이스마엘인들에게
은전 스무 닢에 팔아넘깁니다. 이것 역시 커다란 죄악이지만
그들은 자신의 양심에 따랐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양심이 무디어 져서 죄악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자기 자신 안에 얼마나 큰 죄악들이 담겨져 있는지 모르고
살아갑니다. 정부가 가족계획을 방송하고, 남들도 다 낙태를
하니까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고, 남들도 다 부정하게 살고,
많은 사람들이 음란문화 속에 살아가니까 그것에 무디어져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회개의 은총을 구해야합니다.
성모님께서 회개하라고 계속해서 말씀하시는 것에는 커다란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의 은총의 때에 자기
자신의 전체 삶을 보게 되면 회개하여 돌아올 수 있게 하기
위해서 그러한 것입니다.
메주고리예 성모님 발현목격자들은 각자마다 열 가지씩 비밀
메시지를 받습니다. 그리고 그 일(???)이 있기 열흘 전부터
고해사제와 함께 단식을 하고, 그 일이 있기 삼일 전에
고해사제에게 비밀을 전하고 고해사제는 전 세계에 공표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선택 받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듯이 선택받은 그리스도인들 역시 무디어진 자신의
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또다시 사형에 처하게 할 수
있습니다.
저희에게 양심을 주어 바른 삶에로 나아가게하신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은총으로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제대로 바라보고 좀 더
거룩한 삶에로 나아가게 인도하소서. 아멘.
- 희망 신부님의 묵상 글 -
◈ [기타] 사순 제2주간 금요일
2013년 다해 3월1일 사순 제2주간 금요일
예전에는 사람들을 신분에 따라서 구분하였습니다. 양반, 농민,
상민, 천민입니다. 같은 사람이지만 신분에 따라서 먹는 것,
입는 것, 사는 것이 달랐습니다. 노비는 말을 하고, 배울 수
있고, 사랑을 할 수 있지만 물건처럼 매매가 가능했습니다.
사람들을 피부색으로도 구분하였습니다. 백인들은 생각과
문화가 다른 흑인들을 폭력으로 억압하였고, 노예로 팔아
먹었습니다. 흑인 노예들은 정든 고향을 떠나서 살아야했고,
그들에게는 단지 피부색이 다른 것만으로도 이 세상은 평등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민족으로도 구분하였습니다. 게르만족들은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유대인들을 포로수용소에 가두었고,
가스실로 끌고 가서 죽였습니다. 동양 사람인 제가 보기에는
모두 같은 백인인데 그들은 다른 종족들을 차별하고,
침략하였습니다. 참 이상한 세상입니다.
마약 중독자와 알코올 중독자인 여성들이 불임수술을 받으면
돈을 주는 나라가 있습니다. 몸무게를 감량하고, 혈당이 정상이며,
콜레스트롤이 정상이면 돈을 주는 나라도 있습니다. 책을 한 권
읽고 문제를 풀면 돈을 주는 나라도 있습니다. 담배를 끊고, 술을
끊으면 돈을 주는 나라도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어떤 동네는 3째
아이를 출산하면 지원금을 주기도 했습니다.
고백성사를 보면 돈을 주고, 주일미사를 참례하면 돈을 주고,
이웃을 사랑하면 돈을 줄 수도 있을까요? 부모가 자식을 돌보면
돈을 주고, 길 잃은 사람에게 집을 찾아 주면 돈을 주는 것도
좋을까요? 거의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 할 수 있고, 거의 모든
것을 돈 때문에 버릴 수도 있는 세상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나오는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을 돈을 받고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팔았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돈을 받고
팔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돈을 얻기 위해서 죄를 짓고 있습니다.
돈은 우리들의 거래를 편하게 해 주던 수단이었는데, 돈은 우리의
모든 것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습니다.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으로 많은 감동을 주었던 마이클 샐던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라는 책을 새로이 출간하였습니다.
조금 감상적이기는 하지만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는 꺼리를
주는 책입니다. ‘자본, 경제, 물가, 집값, 일자리’ 거의 모든 것은
‘돈’과 관련이 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사람다운 세상, 참다운 세상, 행복한 세상은 과연 ‘돈’으로 만들어
질 수 있는 것인지요? 아니면 그것은 서로 사랑하고, 나누어주고,
이해하고, 용서해주면서 만들 수는 없는 것인지요? 신앙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주어진 현실에 최선을 다하고, 감사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나에게 도움을 준 사람들이 있다면, 나 역시 도움을
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성서말씀은 욕심과 시기심
때문에 신앙이 약해지고, 하느님과 멀어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의 능력을 인정하면서도
시기와 질투를 하였습니다. 요셉은 형들의 질투와 시기 때문에
뛰어난 능력이 있었지만, 은전 스무 닢에 팔려갔습니다. 시기와
질투는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합니다. 사랑하는 가족까지도
죽음으로 몰고 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포도원
소작인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소작인들은 욕심과 교만 때문에
주인이 보낸 종들을 죽였습니다. 세상 많은 사람들이 욕심 때문에
양심을 속입니다. 욕심 때문에 죄를 짓게 됩니다.
우리의 내면에 있는 ‘시기와 질투, 욕심과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 마음 안에 요셉이 보여주었던 ‘인내와 용서’를 채워야 합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었지만 비천한 종의 모습으로 오셨던 예수님의
‘겸손과 희생’을 채워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참다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 조 재형 -
◈ [기타] 사탄의 승리?
2013년 다해 3월1일 사순 제2주간 금요일
(창세기 37, 3~4. 12~13. 17~28절)
<저기 저 꿈쟁이가 오는구나. 저 녀석을 죽여 버리자.>
렉시오라는 보드게임이 있습니다. 3~4명이서 하는
게임인데요. 방식이 간단합니다. 9개에서 15개의 패를 받아
먼저 다 내려놓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입니다. 아무렇게나
내려놓는 것은 아니고요. 먼저 내려놓을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선에 의해서 자기 차례에 내려놓을 수 있는 개수가
제한됩니다. 예를 들어 선이 1개를 내려놓으면 다음 사람도
그보다 큰 수를 한 개만 내려놓을 수 있고, 선이 5개 조합을
만들어서 내려놓으면 다음 사람도 그보다 큰 5개의 조합을
만들어야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건 계속 선을 잡는
것인데요. 선을 계속 잡기 위해 내 패를 잘 읽어야 합니다.
한 개씩 내려놓아야 계속 선을 잡을 수 있는지, 아니면 두
개 이상 큰 수를 내려놓는 것이 유리한지 잘 계산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처음 게임을 시작할 때는 많이 내려놓고 싶은 마음에
나에게 선의 기회가 주어지면 무턱대고 다섯 개 조합만을
내려놓을 때가 있습니다. 쉽고 빠르죠.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상대방에게 승리의 디딤돌이 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상대방이
가진 패가 나보다 많아서 나의 승리가 당연해 보이지만, 내가
다섯 개 패를 내려놓는 순간 상대방은 기다렸다는 듯이 더 큰
다섯 개의 조합을 연속으로 내려놓고, 선을 잡아 자신의
페이스대로 게임을 마무리하곤 합니다.
‘나’는 다섯 개를 내려놓고 승리에 다가섰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상대방이 기다리고 있었던 계획에 도움만 주고..
패하게 되는 참담한 상황을 맞이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비슷한 느낌을 사탄도 느낄 때가 있는 거 같습니다. 이기려고
일을 벌여 보지만, 결국엔 그 일이 상대방의 승리를 도와줍니다.
예를 들면 독서에 나오는 요셉의 일이 그렇습니다. 사탄은
형제들의 마음속에 시기심과 미움의 감정을 만들어 요셉을
없애버리고자 하지만, 그 일이 오히려 더 큰 하느님의 계획과
승리를 드러내게 합니다. 이집트로 팔려간 요셉은 그곳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재상이 되고, 이스라엘을 먹여 살리는 큰일을
하게 됩니다.
모세도 그렇습니다. 이집트의 젊은 왕자인 모세는 동포들을
구해내기는커녕, 그들 때문에 이집트로 도망을 가게 됩니다.
아마도 사탄은 잘 됐다고 좋아했겠지만, 하느님은 그 일로
모세에게 광야 생활과 겸손을 가르치십니다. 그리고는 모세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파견하시어, 그들을 이끌고 광야를 건너
약속의 땅으로 향하게 하십니다. 하느님은 광야로 달아난
모세를 데리고 더 큰 일을 이루신 겁니다.
바오로도 보면.. 아마도 사탄은 바오로를 감옥에 가두면
조용해 질 줄 알았을 겁니다. 실제로 그의 입은 조용해졌죠.
하지만 그는 펜을 들고 편지를 쓰기 시작합니다. 그 편지들이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에게 전해지고, 지금 우리에게도 중요한
진리들을 가르쳐 줍니다. 사탄은 자기가 승리했다고
생각했겠지만, 오히려 그것이 더 큰 선교를 이루는 데에
발판이 됩니다.
이처럼 사탄이 이겼다고 자신만만한 일들이 결국은 하느님의
더 영광과 승리를 만들어 내곤 하는 거 같습니다. 오늘 하루,
사탄의 유혹에 걸려 넘어졌다고 하더라도, 일으켜 세워주실
수 있는 주님을 믿고 다시 한 번 일어나 봅시다. 그분이
계획하신 일들 안에서 더 큰 승리를 체험할 수 있을 겁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아이들이 피자 먹을 때 강아지를 내다놨다.
강아지를 보고 루치오가 개를 기르는 누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누나네 개.. 누나랑 진짜 닮은 거 같애...”
그래서 내가 “강아지는 주인 닮는다잖아~” 라고 했더니,
고등학교 올라가는 데레사가
“신부님 개는 존재감이 없는 거 같은데요...” 했다.
그러자 루치오가 어린 여동생에게 이런 말을 했다.
“너네 개는 똥개잖아~”
그러자 여자 아이가 놀림 받은 게 억울해서 울었다.
- 밤송이 신부님의 묵상 글 -
◈ [기타] 허윤석신부의 오늘의 강론
제목: 군중!
2013년 다해 3월1일 사순 제2주간 금요일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자.>
마태오 21,33-43.45-46
사순절 성금요일 전례때 우리는 수난 복음을 묵상하면서
2000여년전 군중으로 돌아간다.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십자가에!”
우리는 이 대목을 군중이 되어 함께 외친다. 사제인 나역시
동참한다.
나는 사제이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대사를 한다. 그리고 동시에
군중의 함성에 동참한다.
복음에서 군중은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예수님이 군중을
대하시는 태도를 보면 사뭇 바리사이나 율법학자 그리고 당시
예수를 죽이려는 사제들과 달랐다.
예수를 질투하고 죽이려던 그 지배계층들은 비겁했다. 자신들의
소신! 물론 그릇된 예수에 대한 판단이지만 군중을 의식한다.
기회주의적이다.
군중역시 어리석었다. 예수님을 죽이려는 지배계층의 간계한
모함과 선동에 놀아난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다. 아버지의 뜻만을 소신껏 펼치셨고
군중을 사랑하셨다. 나는 오늘 복음의 내용중 군중을 대하는
예수님의 모습과 그릇된 지배계층의 극명한 대조가 묵상거리이다.
앞으로 사순시기 내내 군중의 모습 그리고 예수를 죽이려는
이들의 마음을 읽어 볼 것이다.
나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면서 동시에 부끄러운 사람이다.
나는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면서 동시에 군중이며 동시에
바리사이이기 때문이다.
고백성사를 집전하면서도 고백성사를 보는 이가 겪는 자의
마음을 누가 알것인가?
용서하면서 동시에 용서받아야 할자가 현대를 사는 사제라는
사람이다.
회복의 시간 Hora Recreationis
http://cafe.daum.net/credohur1004
- 허윤석 신부님의 강론 말씀 -
◈ [기타] “나는 너와 함께 할 것이다.”
“나는 너와 함께 할 것이다.” – 이사야 43,2
“나는 너를 구할 것이다.” 시편 50,15
“나는 너를 지켜 볼 것이다.” – 시편32,8
“나는 너의 말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 예레미아 29,12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2013년3월1일 목요일 복음묵상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마태오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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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귀하고 소중한 것을 내어주실 때까지 인간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마음이 잘 그려져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그 마지막 바람도 무너지고 만다.
나는 이 소작인의 비유를 읽을 때마다 가슴이 편치가 않다.
인간이 이렇게 잔인할 수는 없다며 부정을 하다가도, 우리가 걸어온
역사를 돌이켜볼 때,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자행되고 있는 가슴
아픈 일들을 볼 때,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현실에 아픈 마음을
다스릴 수 없기 때문이다.
가끔 사람들에게 사람은 선한 존재라는 것을 강조해야 하는지,
아니면 악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강조해야 하는지
갈등을 느낄 때가 많다. 어떤 것이 우리가 하느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그 뜻을 따를 수 있게 하는 것일까를
생각하게 된다. 어떤 것이 우리가 참된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자유의지라는 말을 생각해본다.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왜 인간에게
악을 허락하셨냐는 질문을 자주 듣는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질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악을 허락하신 것이 아니라,
악을 이길 수 있는 자유의지를 허락하신 것이다.
그렇다. 인간은 한없이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다. 둘 중
어느 것을 선택하냐는 환경도 조건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나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사랑으로 지으셨으니,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하셨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사랑으로 지으셨다면서
인형이나 로봇을 만들지는 않으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창조주마저
거부할 수 있을 정도의 자유의지. 그 자유의지를 잘못 이해한 것은
인간들이었고, 그 결과 죄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결국
하느님께서는 그에 대한 책임을 지시고 만다. 당신의 외아들을
대속(代贖)의 제물로 내어주신 것이다.
사랑이란 그런 것인가 보다. 내가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중심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을 사랑이라고 하나보다.
하느님께서도 이미 알고 계셨으리라, 우리 인간이 빗나갈 수 있다는
것을. 하지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지어내신 인간들. 그러기에
사랑이어야 하는 인간들. 하지만 배신의 역사를 쓴 인간들.
당신의 사랑에 책임을 지셔야 했던 하느님. 그 마음을 감히 헤아려
본다.
알면서도 번번이 죄에 주저앉고 마는 우리의 나약함. 가능하면
최선을 다해 보속의 마음으로 주어진 삶을 살아야 한다. 죄의
무게가 버겁게 느낄 때, 징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아파하실 마음 때문에 힘들어 해야 한다.
악과 죄는 극복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아니다. 우리가 각자의 삶을
통해서 작은 예수가 되려는 자기 싸움이 있다면, 그분께서 함께
하실 것이고, 그 어떤 악과 죄도 힘을 잃고 말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살아야 한다.
비록 우리가 많은 죄에 넘어지는 삶 속에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제 자리에 돌아올 것을 끝까지 기다려주시는
그분의 간절한 마음에 응답하는 삶이기를 희망한다.
-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기타] <거룩한내맡김영성> 최후의 방법?- 이해욱신부
<斷想> 5. 최후의 방법?
이 세상에는 하느님을 알고 믿도록 가르치는 수많은 교사들이
있다. 그들은 하느님을 알고 믿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을 가르친다.
하느님을 알고 믿고 그분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는 첫째로는
이렇게 해야 하고 둘째로는 저렇게 해야 하며, 성령은 어떤
분이시고 어떤 일을 하시고, 기도란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하고,
관상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하고 등등의 수많은 방법을
제시한다.
하느님을 알고 믿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야 하며,
또한 하느님 때문에 돈을 벌어들이고 먹고 사는 사람이 셀 수도
없이 많은 것이다.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가 바로 나였다. 하느님 때문에 많은
이들로부터 대접도 많이 받고 돈도 벌고 말이다. 우화 "임금님과
당나귀" 이야기에서처럼 당나귀인 내가 임금이신 하느님처럼
대접받고 호화호식하며 아주 잘 살아왔다.
하느님을 알리고 믿게 하는 교사들은 그저 검소하게 먹고 살면
된다. 그 이상은 분명히 도적질이다. 하느님의 것을 강탈하는
것이다.
하느님을 알고 믿고 더 나아가 그분의 뜻대로 거룩하게 살도록
하는 것은 너무 쉽다.
하느님을 알고 믿는 방법이 어려워서야 되겠는가 말이다.
하느님을 알고 믿고 그분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 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야만 한다면, 그것은 분명 하느님이 크게 잘못하고
계시는 것이다.
하느님은 절대로 그러한 하느님이 아니시다. 하느님은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더 단순한 분이시다. 단순한 하느님이시기에 누구나
단순하게 그분을 알고 믿고 그분의 뜻대로 살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을 알고 믿고 그분 뜻대로 살 수 있는 방법이 복잡하면
할수록 그 방법 안에는 인간적 지식이라는 불순물이 많이 섞여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느님을 알고 믿고 사랑하며 그분의 뜻대로 살 수 있는 마지막
최후의 방법이 바로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이다.
그분께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 맡기고
그분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면 그것으로 그만 끝이다.
더 이상 하느님을 알고 믿고 하는 다른 방법이 전혀 필요치 않다.
그분께 내맡기기만 하면 모든 것을 그분이 다 해주신다.
정말 사실이고 진실이다!
병으로 죽다가 살아난 신부가 왜 거짓을 말하겠는가?
삶으로 직접 체험한 바를 전하는 것일 뿐이다.
거룩한 내맡김의 삶은 정말로 신비스럽기 끝이 없다.
정말로 기가 막힐 정도를 넘어서는 일이다.
너무 신비스럽고 너무 놀랍고 너무 오묘하기에
마음에서 입에서 탄성이 그치지 않는다.
그칠 수가 없다.
인간의 것들은 얼마 가면 신비가 다 벗겨지지만,
하느님의 신비는 날이 갈수록 더욱 깊어지며 더욱 신비해진다.
신비의 하느님이시다. 마르지 않는 샘이시다.
누구나 한 번만 굳게 결심하면, 하느님 신비의 삶을 살 수
있는데 너무나 안타깝다. 한 시라도 늦추면 너무 아까울 뿐이다.
내가 알고 사랑하던 이들이여!
나의 사랑하는 이들이여!
나 같은 놈도 내맡겼는데 그대들이 못할 게 무엇이 있는가?
내가 한 것처럼 나를 따라 하면 그만 끝이란다.
내가 알고 사랑하던 이들이여!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여!
나처럼 주님께 모든 것 내맡기고 그분께서 가까이 부르실
그날까지 나와 함께 그분을 찬미하며 이 세상을 정말로 천국처럼
살아 보기를 간구한다네.
- 동경한인성당 이해욱 프란치스코 신부 -
거룩한 내맡김의 집 <마리아처럼>
http://cafe.daum.net/likeama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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