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호-스나이퍼-제2권
제1장 재등장
[윤우일이 나타났어?]
퍼뜩 눈을 치켜 떴던 박동진이 천천히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입끝을 조금 올리면서 희미하
게 웃었다.
[언제?]
[어제 학교로 복학 수속하러 온 것을 후배놈이 봤다는거야.]
눈을 가늘게 뜬 한문석이 박동진을 보았다.
[그 자식, 학교는 졸업할 모양이지? 그동안 어디 있었다고 하디?]
[뭐, 후배놈이 말도 제대로 못 붙인 모양이야, 그냥 인사만 하고 갈라섰다는데.]
한문석이 카운터에 앉아만 있는 아가씨에게 화난 듯이 소리쳐 커피를 시키더니 다시 박동진을 보았
다.
[어떻게 할래?]
[뭘 어떻게 해?]
[만날 거야?]
[봐서.]
뱉듯이 말한 박동진이 다시 입술 끝을 비틀고 웃었다.
[한국에 미련이 남았던 모양이군, 그 자식.]
[한국 땅이 아니라 희연이한테겠지.]
한문석이 제꺽 말을 받자 테이블 주위에는 잠시 정적이 덮였다. 잠시 무겁고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2월 중순의 저녁, 압구정동 골목 안에 있는 카페 그린에는 손님이 그들 한 테이블뿐이었다. 영하 15도
가 넘는 추위가 엄습해온 데다 이틀째 눈이 내려서 서울 시내 전 도로가 빙판이 되어 있기 때문일 것
이다. 이윽고 박동진이 머리를 들더라도 가라앉은 시선으로 한문석을 보았다.
[재미있게 되겠다, 이야기가--]
그날밤, 박동진은 폭음을 했다. 단골 나이트클럽 버지니아의 룸에서 위스키를 맥주 잔에 따라 마셨는
데 한문석 앞에서는 처음있는 일이었다. 박동진은 여자도 부르지 않은 터라 웨이터가 불안한 표정으
로 몇 번이나 눈치를 보고 갔다.
[그럼 그 자식 가족도 다시 온 건가?]
흰 창에 조금 붉은 기가 돌 뿐 말짱한 얼굴의 박동진이 마침내 그렇게 물었을 때 한문석은 머리를 저
었다.
[설마 그랬을라구. 부도를 50억 넘게 맞았다는데.]
[그렇다면 혼자 온 걸까?]
[내 생각은 그렇다.]
방음장치가 잘 되어 있는 방 안은 음악소리 대신 진동음만 느껴졌다. 한문석이 진동에 맞춰 발 끝을
흔들더니 문득 쓴웃음을 지었다.
[벌써 5년이 되었군 그래. 세월 빠르다.]
[애가 참 착해.]
힐끗 명혜를 내려다본 미연이 말했다.
[하긴 아직 세 살이니 더 커봐야 알지.]
[얘, 아침 먹자.]
어머니가 주방에서 불렀으나 아직 찌개도 내려 놓지 않았다. 미연의 말을 차단하려는 의도였다. 어제
저녁때 부산 친정에 내려온 미연은 희연에게 제대로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엄마, 나 아침 먹고 바로 올라가야 돼.]
미연이 말하자 어머니가 놀란 듯 눈을 둥그렇게 떴다.
[아니, 왜? 어젠 내일 간다더니?]
[대전에 들를 곳이 있어. 그이 심부름이야.]
[그럼 아버지한테 인사도 못하고 가겠구나. 이 양반은 이 날씨에도 산에를 가시니 원--]
희연은 식탁위에 수저를 내려놓으면서도 미연이 자신을 보려고 내려온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 어
머니한테 용돈을 두둑하게 드렸을 것이고 그 돈은 명혜의 옷가지를 사거나 잡비에 쓰이게 될 것이다.
네 살 차이가 나는 언니였지만 미연은 어렸을 때부터 희연을 친구처럼 대해주었다. 지금 형부가 된 이
태현과 결혼하기 전에는 만났을 때의 일까지 시시콜콜 다 말해주는 바람에 결혼식장에 갔을 때 자신
이 신부가 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식탁에 셋이서 둘러앉았을 때 희연이 불쑥 말했다.
[언니. 나, 3월 신학기부터 학원에 나가기로 했어.]
미연이 눈만 치켜 떴고 어머니가 놀란 듯 물었다.
[아니, 무슨 학원에?]
[해운대에 있는 학원인데 거기서 중학생 영어 반을 맡기로 했어.]
시선을 내린 미연이 잠자코 국을 떠 입에 넣었다. 어머니는 수저를 내려 놓았다.
[얘, 그렇게 서둘 것 없지 않니?]
[반 년이나 쉬었어. 그리고 명혜도 이젠 하나도 안 성가시고.]
그리고는 희연이 어머니를 정색하고 보았다.
[엄마, 힘들면 명혜 유아방에다 맡기고 학원 갈게.]
[얘가 미쳤니?]
어머니가 화난 듯 소리쳤다. 미연이 희연을 향해 싸늘하게 말했다.
[넌 꼭 저질러놓고 통보하는구나? 나쁜 년, 이혼할 때하고 똑같애!]
[내 인생은 내가 살아.]
희연도 차갑게 대꾸했다.그녀는 미연과의 시선을 피했다.
[언니, 사랑해.]
[얘, 징그럽다.]
시선을 돌린 미연이 아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미연하게 가려 보이지 않았던 식탁 옆의 달력이
보였다. 2월 17일 토요일이다. 이혼한 지 6개월하고 23일이 되었다.
원룸 하우스는 신혼부부용으로 만들어졌다지만 입주자 대부분은 독신 남녀였다. 그리고 저녁때가 되
면 아름답게 치장한 미인들이 3층 건물을 나왔는데 들어가는 사람은 적었다.
저녁 7시 반이었다. 커피잔을 든 윤우일은 창가의 의자에 앉아 창 밖을 내려다보았다. 이미 짙게 어둠
이 깔린 거리는 인적이 뜸했고 여자들도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논현동 시장이 가까운데가다 위쪽은
특급 호텔들이 늘어선 논현로여서 일명 나가요 아가씨들한테는 입지조건이 꽤 좋은 거처일 것이었다.
엊그제 내린 눈이 녹지 않은 터라 여자 하나가 아주 조심스럽게 골목길을 걸어 들어가고 있었는데 몸을 잔뜩 움추린 모습이었다.
이윽고 몸을 돌린 윤우일이 집안을 둘러보았다. 10평짜리 말 그대로 원룸이라 왼쪽 끝은 주방이고 그
옆이 욕실 겸 화장실일뿐 나머지는 거실 겸 침실이다. 그래서 침대에 책상과 컴퓨터 하나, TV세트만
놓인 집안은 꽤 넓어 보였다.
그 때 책상 위에 놓인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윤우일이 가라앉은 소리로 말했다. 그는 0.5초 쯤 후에 울리는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저쪽은 금방 뉴
욕이라는 것을 알았다.
[우일이냐?]
어머니였다.
[예, 어머니.]
[거긴 저녁 7시 반이겠다. 여긴 아침 5시 반이야.]
[앞으로는 제가 할 테니까 어머닌 그냥 계세요. 새벽에 일어나지 마세요.]
[방은 따뜻해?]
[그럼요, 새로 지은 건물인데요.]
[조금 전에 아버진 가게에 나가셨고 병일이는 잔다.]
어머니의 목소리에는 생기가 느껴졌다. 그 목소리에 그의 가슴도 따뜻해졌다. 100만 달러, 이 돈은 있
는 자들한테는 몇 년 용돈쯤 되겠지만 가난한 자에게는 일가족을 일으킬 수 있는 돈이다.
[저, 신학기 등록했어요.]
[잘했다. 그리고 고맙구나.]
[제 걱정 마시고 , 제가 전화할 테니까 이만 끊어요.]
[얘, 끼니 거르지 말고.]
[글세, 걱정하지 말라니까요. 그럼.]
전화기를 내려놓은 윤우일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3학년을 마치고 입대했으니 졸업학점 남은 것은 얼
마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졸업 학위가 필요해서 귀국한 것은 아니었다.
[너, 우일이 소식 못 들었어?]
한문석의 돌연한 물음에 김대영이 벌떡 상반신을 세웠다. 그들이 있는 북창동 골목의 삼겹살집 안은
퇴근길 직장인들로 가득 차 떠들썩했다.
[뭐? 우일이가 뭐라고?]
[그 자식이 복학하려고 학교에 나타났단다. 내 후배가 보고는 가서 인사까지 하고 왔다더라.]
[그 자식, 미국에 있었던 거냐?]
[그런 모양이지? 가족들이 모두 미국으로 도망쳤으니까, 제대하고 곧장 따라 갔겠지.]
[동진이도 알아?]
[내가 엊그제 만나 이야기 해줬더니 새끼가 실실 웃더구만, 이야기가 재밌게 되겠다고 하더라.]
그러자 소주를 한 모금에 삼킨 김대영이 입술 끝을 비틀었다.
[친구 애인 빼았아 결혼해 놓고 애까지 낳은 다음에 걷어차 버린 놈이 재미있는 이야기라고 했단 말이
지?]
[야 이 자식아, 말 똑바로 해. 희연이가 좋아서 동진이하고 결혼했고, 이혼도 희연이가 나서서 한 거
다.]
한문석이 눈을 치켜 뜨고 김대영을 보았다.
[너도 내막을 알잖아? 우일이는 제대 1년쯤 전부터 희연이한테 전화 한 통 안 했어. 면회 갔는데도 만
나 주지도 않았단 말이다.]
[집이 부도가 나서 식구가 모두 미국으로 도망가는데 그놈 성격에 기집애 앞에서 질질 짤 것 같으냐?
결혼을 약속했다면 그쯤은 이해하고 기다렸어야지.]
큰 목소리에 옆 테이블의 시선이 옮겨왔다. 술잔을 든 한문석이 잇사이로 말했다.
[그만하면 희연이는 할 만큼 했다. 입 닥쳐, 이 자식아.]
[그렇다면 동진이는 할 만큼 한 거냐?]
김대영이 불쑥 묻자 한문석이 입맛을 다셨다.
[글세, 그놈들 둘은 전부터 라이벌 의식이 강해서 아마 동진이가 희연이를 전부터 노리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희연이 결혼하고 이혼도 주도했다면서? 증거가 있어?]
[동진이한테 들었어.]
그러자 이맛살을 찌푸린 김대영이 머리를 한쪽으로 틀었다.
[책임을 회피하겠단 수작인지도 모르지. 일이 깨지면 남의 탓이고 잘 되면 제 공으로 아는 놈이야, 그
놈은.]
한문석이 대답 대신 종업원에게 소리쳐 소주 한 병을 더 시켰다. 그리고는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그 자식 우리한테 전화도 안 하는걸 보면 뭔가 찜찜하구만 그래.]
그 말에는 김대영도 대꾸하지 않았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히 읽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미 끝장난 여인과의 로맨스 시작인가
감사히 읽습니다...
ㅈ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