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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장 비바람에 꺾인 꽃가지
광명송과 등아는 호젓한 산기슭에 두 칸짜리 초가집을 마련해 조촐하게 살림을 차렸다. 이 부부는 참으로 의가 좋았다. 그토록 표독스럽던 향녀 등아도, 강호를 쩌렁쩌렁 울리던 대협 곽명송도 하루아침에 순박한 시골 남정네와 여인네로 변한 듯싶었다. 둘의 산림은 날마다 깨알이 쏟아졌다.
하지만 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런 여염집의 오붓한 살림에도 비바람이 찾아드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인 모양이다.
이날도 두 내외간은 마주앉아서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문득 멀리서부터 말발굽 소리가 요란스레 울리더니 바로 밖에서 멈춰 서는 것이었다.
"바로 이 집이지요, 이 집!……."
자기들끼리 뭐라고 떠들어대더니 다시 요란스레 말발굽 소리를 남겨 놓고 떠나가 버렸다.
곽명송과 등아는 들창으로 다가가 언뜻 내다보았다. 풀썩풀썩 뽀얀 흙먼지를 날리며 한 무리 사람들이 멀어져 가고 있었다. 둘의 얼굴엔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곽명송은 등아의 손을 꼭 잡아쥐며 비장하게 중얼거렸다.
"아마 우리 둘의 아늑한 생활도 끝장이 나는가 봐."
등아가 괴로운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저 때문에 서방님이 욕을 보네요. 정말 죄송스러워요!"
"또 그 말이군. 실은 나 때문에 당신이 고생하는 게요. 앞으론 절대 그런 말은 꺼내지 마오!"
"아니에요! 저 같은 향녀를 아내로 맞았기 때문이에요."
등아는 일순 설움이 북받쳐서 방을 나가 부엌으로 뛰쳐 들어갔다. 총명하고 아량 깊은 등아는 진작부터 자기 때문에 곽명송이 이처럼 쫓겨 다니고 숨어 다니면서 갖은 멸시와 수모를 당하고 있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등아는 한참 동안이나 부엌에 주저앉아 눈시울을 적셨다. 자기의 심경을 어떻게 무슨 말로 표현할 길이 없었다. 곽명송은 부엌문을 부여잡고 그녀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한 순간 등아가 몸을 일으키자 그는 얼른 방으로 몸을 피했다. 등아는 선뜻 밖으로 나오더니 집에서 기르던 씨암탉을 냉큼 잡았다. 그리고는 분주하게 손을 놀려 이내 닭을 푹 고아서는 한상 차려 곽명송 앞으로 가져 왔다.
"씨암탉을 두고 갈 수도, 그렇다고 안고 갈 수도 없어서 잡았어요. 저는 생각 없으니까 어서 든든히 잡수세요."
그리고는 등아는 뒤로 물러앉았다. 그러자 곽명송이 손목을 잡아 끌어 앉히며 사람 좋게 웃었다.
"아따 사람도! 이 골짜기에서 닭 한 마리면 진수성찬인데 어찌 나만 포식을 하겠소. 자, 괜히 체면 차리지 말고 이 좋은 안주에 술이나 한잔 나눕시다!"
등아는 못 이기는 척 다가앉았다. 두 사람은 서로 술을 따라 주고는 마주보면서 뜨거운 눈길을 주고받았다. 바로 그때였다.
"우리도 한 추렴 들자구요!"
두 내외는 깜짝 놀라 얼른 고개를 돌렸다.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는데 어느새 웬 험상궂게 생긴 사내 다섯과 계집 셋이 방문을 확 열어제치고는 두 편으로 갈라 서서 징글맞게 웃고 있었다.
곽명송을 노려보고 있는 네 사내는 정파 패거리요, 등아를 쏘아보고 있는 네 사람은 사파 패거리였다. 두 패거리 사이에는 서로 경계하는 눈빛이 오갔다.
곽명송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픽 웃었다.
"서로 소 닭 보듯 하는 양반들이 어찌하여 두 손 맞잡고 이 누추한 집엘 다 찾아오셨소? 좌우간 이렇게 왕림해 주시니 고맙소이다."
곽명송은 조금도 당황하는 빛이 없었다. 그러자 정파 패거리의 두목인 쾌도(快刀) 악기(岳琦)는 바싹 약이 올라 느물느물 미소를 지으며 대뜸 쏘아붙였다.
"고마울 거야 없지! 화산파의 명예를 훼손시킨 당신을 단죄하러 왔으니까!"
사파패거리에 끼여 있는 충피도 질세라 소리쳤다.
"화산파에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우리가 알 바 아니고, 대환희 보살님을 노엽게 한 죗값만은 이 세 아가씨에게 똑똑히 치러 줘야 하겠어. 황약사를 등에 업고 너무 우쭐대지 말란 말야!"
두 패거리는 너나없이 살기등등했다. 곽명송과 등아는 내심 가슴이 서늘해졌다. 하지만 등아는 눈웃음을 치며 충피에게 말했다.
"저희들이 대환희 보살님의 노여움을 샀다니요? 도통 까닭을 모르겠는데요."
"이봐, 눈 가리고 아웅할 셈인가? 그때 동정호 일 벌써 잊었단 말이더냐? 황약사를 등에 업고 대환희 보살님의 막중한 수하들을 죽인 게 너희 둘이 아니고 누구 다른 사람이라더냐? 우린 너희 두 연놈을 잡아다가 사내 놈은 보살님 시중을 들게 하고 계집년은 보살님의 미혼탕을 먹여 뚱뚱한 여장군으로 만들어 주겠다. 그러니 순순히 오라를 받으면 목숨만은 살릴 수 있으리라."
충피는 키들키들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버들처럼 호리호리한 등아가 절구통 같은 뚱뚱보 계집으로 변해 있는 모습을 떠올리니 절로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돌연 쾌도 악기가 말을 가로챘다.
"곽명송은 화산파 사람들을 죽였으니 그 죄를 달게 받으라!"
그 말에 등아가 한마디 오금을 박았다.
"말끝마다 화산파, 화산파 하는데 대관절 당신은 화산파에서 뭘 하는 사람인가요?"
그러자 악기는 입이 헤벌어지며 말 한마디 못했다. 그의 아내 육사고(陸四姑)는 화산파에서도 방자하고 지독한 여인으로 소문이 높을 뿐더러 기실 악기 자신은 화산파와는 담을 쌓고 사는 터라 정정당당히 내놓고 할 말이 궁색했던 것이다.
등아는 곽명송을 건너다보며 고개를 떨구었다.
"정말 미안해요. 원체 당신은 떳떳하게 나설 수 있는 강호의 협객이었건만 저같이 명성을 더럽힌 향녀 계집과 만나는 바람에 이 사람들의 미움을 받게 됐군요……."
"등아, 왜 또 부질없는 말을 하는 거요? 나는 협객의 명예보다, 아니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그대가 귀중하오!"
곽명송은 짐짓 성을 내며 앉은걸음으로 다가가 한 팔로 등아의 동그란 어깨를 껴안았다.
"제길, 퍽도 약을 올리는군. 얘들아, 저 놈을 당장 끌어내라!"
쾌도 악기가 손짓을 하자 대번에 정파 세 사내가 달려들어 마구잡이로 곽명송을 잡아 일으켰다.
난쟁이 충피도 황황히 뚱뚱보 여인들을 돌아보며 외쳤다.
"저 년도 잡아들여랏!"
세 여인은 각기 칼이며 밥주걱이며 쇠스랑을 들고 우악스럽게 등아에게 달려들었다. 등아는 얼른 피했다.
"쾌도, 자네도 사내대장부가 아닌가? 왜 꼭두각시처럼 여편네 말만 듣고 그 장단에 춤을 추는 건가?"
곽명송은 쾌도 패거리들을 밀치며 사납게 쏘아붙였다. 쾌도는 태연자약하니 느물느물 대꾸했다.
"남정네가 주변머리가 없으니까 여편네 말을 듣는 거지. 아무리 사납다 해도 내 여편넨데 남보다야 낫지 않나? 아무려면 제 남편을 속여먹겠어?"
곽명송은 할말이 없어 피식 웃고 말았다. 평소에는 매섭게 으르렁거리며 여편네와 티격태격하던 놈이 갑자기 자기를 깎아내리고 여편네를 추어올리니 정말 종잡을 수 없는 녀석이 아닌가.
정파 패거리 세 사내는 곽명송이 완강히 뻗대자 각기 채찍이며 환도며 몽둥이를 정신없이 휘둘러댔다. 채찍이 등허리를 후려치고 환도가 배를 찌르고 몽둥이가 정수리를 내리치는 것을 곽명송은 용케 피하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서방님, 조심하세요!"
등아는 손에 땀을 쥐고 동동거리며 소리쳤다. 그러자 충피가 눈을 핼끔거리며 비웃어댔다.
"이 오지랖 넓은 것아, 네 년 발등의 불이나 먼저 꺼라!"
충피가 감때사납게 눈을 번득이자 세 뚱뚱보 계집은 날렵하게 달려들었다. 등아는 바삐 물러서며 훌쩍 몸을 날려 밖으로 나왔다. 충피는 신바람이 나서 소리를 쳤다.
"등아, 뛰면 어디로 뛰겠느냐? 순순히 칼을 받지 못할까? 조만간 너희들 두 연놈은 지옥으로 가게 돼 있어!"
그 말에 뚱뚱보 여인들은 한층 기가 살았다. 그녀들은 등아를 깔아뭉개려고 들소처럼 달려들었다. 대환희 보살은 등아를 눈엣가시처럼 미워하고 있으니 등아만 잡아죽인다면 대환희 보살에게 큰 상을 받을 터였다.
등아는 경공으로 슬슬 몸을 피하다가도 틈만 있으면 이 여인들의 가슴과 얼굴에 번개같이 장을 날렸다. 대환희 보살이 기른 계집들이라 심성이 지독하고 손아귀가 드셌지만 그래도 곽명송을 둘러싼 사내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등아는 몸을 피하면서 가끔 곽명송 쪽을 힐끔거렸다.
굵직한 채찍은 윙윙거리며 허공에 원을 그리다가는 철썩 소리를 내며 곽명송의 등허리며 머리를 향해 곧추 떨어졌다. 향미사(向眉蛇)가 곽명송을 향해 달려드는 듯한 형상이었다. 곽명송이 채찍을 피해 바삐 몸을 피하고 나면 다시 시퍼런 환도가 사정없이 들이닥쳤다. 그러기를 수십 합, 일순 곽명송은 틈을 보여 환도에 어깨를 찔리고 말았다. 대번에 시뻘건 피가 확 뿜어 나왔다. 곽명송은 급히 자세를 가다듬으며 한 손으로 어깨를 잡고는 이를 악물었다. 꺼꾸러지는
한이 있어도 비명을 지를 수는 없었다. 비명을 지르면 자칫 뚱뚱보 계집들과 맞서고 있는 등아가 흐트러질지도 모른다.
곽명송은 더는 피할 길이 없자 쓱 검을 빼 들었다. 쾌도가 가로세로 날쌔게 검을 휘두르며 다가들었다. 한 쌍의 서슬 푸른 검은 허공에서 멋지게 어우러지며 십여 합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좀체로 승부가 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검을 맞대고 빙빙 도는데 난데 없이 채찍이 날아와 곽명송의 오른손 손등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웬만한 사내가 맞았더라면 아마도 단박에 뼈가 으스러졌을 터이나 곽명송은 그래도 검을 꼭 쥐고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검을 바로 쳐들 수는 없었다. 다시 채찍이 매섭게 날아들었다. 곽명송은 슬쩍 갈지자로 몸을 피하며 왼손으로 채찍을 휘두르는 사내의 면상에 번개같이 한 장을 날렸다. 사내는 흠칫 놀라 얼른 물러섰다. 그러느라 곽명송은 자연 틈이 생기고 말았다. 한 순간 눈앞에 우지끈 몽둥이가 날아들며 눈에서 불꽃이 번쩍 튀더니 앞이 캄잠해졌다.
"못된 놈들!……."
곽명송은 화가 머리 끝까지 솟구쳐 이제는 무작정 좌충우돌 장을 내질러댔다. 일순 가슴팍이 선뜩했다. 쾌도 악기가 틈을 노리다가 그의 가슴에다 깊숙이 검을 찔러 넣은 것이었다. 곽명송은 한 길이나 뛰어올랐다가 가슴에 박힌 검을 부여잡고 쿵 떨어져 내렸다.
등아는 너무나 놀라 얼른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슴 한복판으로 서늘한 바람이 불고 지나갔다. 등아는 뚱뚱보 여인들을 보고 급히 사정했다.
"당신들이 이겼어요. 잠깐만요……."
등아는 새파랗게 질려서는 얼른 손을 거두었다. 뚱뚱보 여인들은 으쓱해서는 입을 일그러뜨리며 코방귀를 뀌었다.
등아는 한달음에 곽명송에게로 달려갔으나 그 모습이 너무나도 처참하여 그만 질끈 눈을 감아 버렸다. 가슴을 찌르고 들어간 칼날은 등허리까지 삐죽이 나와 있었다. 등아는 왈칵 눈물을 쏟으며 곽명송의 몸 위로 쓰러졌다. 곽명송은 가쁜 숨을 몰아 쉬며 등아의 손을 꼭 잡아 쥐었다.
"등아, 왜 이럴까? 다, 당신이 보이지 않는구려……. 화산파 손에 잡혀 죽을 줄 알았지만 이렇게 어이없이……."
곽명송은 손을 들어 등아의 얼굴을 더듬다가는 고개를 외로 꺾으며 왈칵왈칵 피를 토해냈다.
등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쾌도 악기를 쏘아보았다.
"쾌도, 쾌도! 네 놈 같은 불한당도 정파의 영웅이냐? 네 놈은 한평생 여편네의 치마폭에 감싸여 놀아난 비겁한 놈……. 듣자니 네 놈 여편네는 선우순의 외조카라더니, 이번 일은 선우순과 네 여편네의 사주를 받고 한 짓이야! 그렇지?"
쾌도는 웬일인지 한풀 죽어서 곽명송의 가슴에 꽂힌 자기의 칼자루만 괴롭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정 두지 않고 찌르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험하게 찌를 생각은 애시당초 없었다. 그는 애써 등아의 눈길을 피했다. 그러나 등아는 바락바락 악을쓰며 외쳐댔다.
"강호의 영웅호걸! 칼을 아주 잘 부리는 것 같은데 이 가슴에도 한번 찔러 봐라, 어서! 왜 찌르지 못해, 왜? 또 여편네의 호령이 있어야만 찌르겠나? 퉤, 더러운 놈!"
등아는 설움이 복받쳐 연해 피울음을 토해냈다. 쾌도는 본시 성미가 칼날 같은 사내였지만 등아의 악다구니를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그러더니 일순 길게 한숨을 내쉬며 곽명송에게 공손히 읍을 하고는 잽싸게 부하들을 돌아보았다.
"그만 가자!"
네 사내는 바람처럼 사라졌다.
등아는 피멍이 든 곽명송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면서 좀처럼 울음을 그칠 줄 몰랐다. 곽명송은 거센 숨을 몰아 쉬며 등아를 올려다 보았다.
"등아, 검을 뽑아 주오, 이 검을……."
그러나 등아는 힘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검을 뽑아 버리면 그 즉시 사랑하는 이는 숨을 거두게 될 터였다. 등아는 더욱 슬피 울부짖었다.
"등아, 울지 마오. 울면 내 마음이 더 아파……."
곽명송은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두 손으로 있는 힘껏 칼자루를 잡고는 쑤욱 칼을 뽑았다. 등아가 미처 말릴 새도 없었다. 그는 비명 한마디 지르지 않고 조용히 등아의 품에 쓰러졌다. 등아는 곽명송의 너부죽한 얼굴에 미친 듯이 뺨을 비비며 울고 또 울었다.
간악한 충피마저도 콧날이 시큰해져 고개를 외로 돌렸다. 피를 보는 싸움이 한두 번이 아니라서 돌처럼 굳어진 그였지만 웬일인지 가슴이 뭉클해져 견딜 수가 없었다. 이런 느낌은 실로 처음이었다. 정녕 사랑이란 이토록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뚱뚱보 여인도 측은한 목소리로 말했다.
"등아, 그 양반은 이미 죽었으니 저리 비켜 놓으라구."
등아는 곽명송의 상반신을 안은 채 조용히 흐느끼고 있을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충피가 짐짓 헛기침을 해 가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저, 저리 좀 비키라구. 우리가 힘을 도와 묻어 줄 테니."
그 말에 등아는 흠칫하더니 더욱 으스러지게 곽명송의 어깨를 그러안았다. 아직도 몸이 이처럼 따뜻한데 어찌 그 싸늘한 땅속에 묻을 수 있단 말인가?
뚱뚱보 여인들은 물끄러미 등아를 바라보며 끌끌 혀를 찼다. 세상에 저처럼 제 서방을 사랑하는 계집도 있을까. 뚱뚱보 여인 하나가 콧마루가 시큰해서 힝 코를 풀고 나서는 울먹울먹 한마디 꺼내놓았다.
"등아, 이젠 그만 울고 대환희 보살님한테로 가자구. 자네가 향녀 무리들을 데려오고 대환희 보살님의 말만 듣는다면 보살님도 필히 한자리 내주실 테니!"
옆에 있던 두 뚱뚱보 계집도 한마디씩 토를 달았다.
"보살님이 말씀하셨어, 여자들이란 사내들을 어를 줄도 알고 닦달할 줄 알아야 한다고. 한데 우리 뚱뚱보 여자들은 사내들의 멱살을 틀어 잡고 뺨을 후려칠 수는 있지만 사내들의 애간장을 녹일 줄은 모르거든. 그러니 이제 자네 향녀들까지 오게 된다면 손발이 척척 맞지 않겠는가 말이야!"
"아무렴! 자네네 향녀들까지 손을 맞추어 준다면 보살님께서 천하를 얻기는 여반장이지!"
등아는 고개를 들고 멀리 남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 머나먼 남쪽 하늘 밑에 대리국이 있다. 그녀는 그 대리국에서 나고 자랐다. 그녀는 눈물 자국이 얼룩진 동그란 얼굴에 담담히 미소를 지으며 조심스럽게 곽명송을 내려놓고 중얼거렸다.
"단칼에 염통을 찌르지 못하는 검객은 검객이 아니지……."
등아는 뚱뚱보 여인들을 조용히 둘러보았다.
"보살께 말해 줘. 향녀 무리는 진작에 흩어졌다고. 이제는 덮어놓고 남자들을 저주하는 향녀들은 없어. 그리고 사내는 진정 사내다워야 하고 등아는 그런 사내를 따라 달갑게 죽는다고……."
한마디 한마디 또박또박 말하더니 등아는 불쑥 단도를 빼어 들고 왼편 가슴을 푹 찔렀다. 그리고는 곽명송에게로 천천히 쓰러졌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도저히 말릴 틈이라곤 없었다. 충피와 세여인은 넋을 놓은 채 멀거니 서 있었다.
"또 사람을 죽였군, 사람을 죽였어! 대관절 어찌 된 일인고?"
문득 누군가 웅글진 목소리로 외쳐댔다. 충피와 뚱뚱보 여인들은 급히 고개를 돌렸다. 주백통이었다. 그는 뚱뚱보 여인들을 힐끔거리며 혀를 끌끌 찼다.
"또 화근거리군, 화근거리야!"
그리고는 불에 덴 사람처럼 뒷걸음질을 치다가 다시 슬금슬금 다가와 세 계집을 차례로 뜯어보았다.
"좋았어. 비곗덩이처럼 추하게 생겨 먹었으니 성은 허물어지지 않겠어."
뚱뚱보 여인들은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느냐는 듯 주백통을 흘겨보았다. 그러자 그는 또 히죽거리며 주워섬겼다.
"잘 죽었어, 잘 죽었고말고! 향녀들이란 본시 미로를 믿고 사내를 홀리는 요물들이야. 해죽해죽 웃으면 그걸 보는 사람은 애간장이 다 녹아난단 말야. 애간장이 녹으면 큰일이지, 큰일이야!"
주백통이 치신머리없이 굴자 뚱뚱보 여인들과 충피는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주백통의 무공이 뛰어남을 잘 알고 있는지라 감히 뭐라고 대꾸조차 못하고 씨근덕거릴 뿐이었다. 물 덤벙 술 덤벙 하는 노완동 주백통은 세상 무서운 것이 거의 없었지만 독사만 나타나면 혼비백산 날뛰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오늘 충피는 독사를 가져 오지 않았다. 충피는 속으로 장탄식을 하면서 살살 주백통 눈치를 보며 굽실 허리를 꺾었다.
"너희들 짓이지? 너희들이 여기서 사람을 죽였지?"
주백통은 일순 눈알을 부라리며 따지고 들었다. 그러자 충피는 대뜸 손을 저으며 살살거렸다.
"아니 무슨 말씀이우? 사실은 두 젊은 내외간이 순사하는 것을 가슴 아프게 지켜 보고 있었을 뿐이오."
"순사라니? 뭐가 순사란 말야?"
주백통은 바짝 호기심이 동해 재우쳐 물었다. 그러자 충피가 어물쩍 되물었다.
"어떻게 말할까? 가령 당신을 좋아하는 계집이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 계집이 당신을 위해 죽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소?"
주백통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내가 왜 죽는단 말이야? 내가? 사형님은 앞으로 전진교 일을 나더러 맡아 보라고 하셨어. 그 밖에도 할 일이 태산 같은데 내가 왜 실없이 죽는단 말이야. 내가 죽는다는 건 당치도 않은 일이지, 당치도 않은 일이고말고."
충피는 이맛살을 찡그리며 면상을 바짝 들이댔다.
"그러게 한마디만 대답해 보우. 당신을 좋아하는 여자가 죽었다면 당신은 그녀를 따라 죽겠느냐 말이오?"
"그녀가 나를 위해 죽는다고? 그럴 리 없겠는데……. 아니, 왜 나를 위해 죽느냔 말야? 천부당만부당한 일이지!"
"여보시오, 이 사내는 화산파 사람인데……."
"나도 알아! 이름이 무엇이더라…… 옳지, 화산파의 곽명송이라는 협객이야. 한데 죽기는 왜 죽었나?"
"글쎄 죽은 건 사실인데 문제는 곽명송의 색시도 따라 죽었다는 것이오. 새서방이 죽으니 새색시도 단검을 뽑아 제 가슴을 찔러 함께 순사하더란 말입니다. 이 새색시는 남자들을 아비 죽인 원수 이상으로 미워하는 향녀 무리의 두목이오. 이런 여자도 제 서방을 위해 죽는데 당신은 좋아하는 여자를 위해 죽을 수 없단 말이오?"
"그렇고말고! 나만은 죽을 수 없어, 나만은……."
주백통은 얼핏 영고의 아리따운 얼굴이 떠올랐다. 뒤이어 대리국 황궁에서 그녀와 즐겁게 지내던 그때가 새록새록 눈앞을 스쳐갔다. 그는 새삼 가슴이 떨리기 시작했다. 지금 영고는 분명 자기 여인이 아니라 단황의 여인이다. 영고는 잡을 수 없는 아지랑이처럼 그저 눈앞에 가물거릴 뿐이었다.
"안 돼, 나는 죽을 까닭이 없어. 그 여자가 좋은 남정네 품에 안겨 있는데 내가 왜 속절없이 죽는단 말이야. 그런 죽음은 허무맹랑한 죽음이고 어디 묻힐 자격도 없어……."
충피는 얄궂게 웃으며 바싹 약을 올렸다.
"그래도 끔찍하게 아끼고 사랑하는 여자라면 함께 죽어 줘야 하우. 당신이 그렇게 순사한다면 내 잘 묻어 주고 제사까지 지내 드리지. 당신이 원한다면 시체가 썩지 않게 무덤 안에 독약도 넣고 뱀도 두어 마리 순장해 드리지. 뱀도 말이오."
"뭐야? 뱀? 뱀은 싫어! 난 죽어도 뱀은 질색이야!"
주백통은 대번에 눈이 화등잔만해지더니 가재걸음으로 주춤주춤 물러서다가 천방지축 도망을 쳤다.
화산 기슭 한적한 언덕 위에 이고암이라는 암자가 자리잡고 있다. 이 암자에는 오로지 여승만 살고 있는데 개중에는 열서너 살밖에 안 되는 새파란 애기 중이 있는가 하면 여든에 가까운 늙은 여승도 있다. 그런데 이곳 여승들은 나이가 어릴수록 심성이 착하고 부드러운 반면, 나이가 많을수록 괴벽스럽고 심술 사납기 그지없었다.
이 암자에서 제일 늙은 여승이 바로 한연 사태이다. 그녀는 매일 아침 일어나 자그마한 뜨락을 쓰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그런데 어찌나 일손이 굼뜬지 향불을 붙일 때까지도 다 쓸지 못할 때가 많았다. 어린 여승들은 이 늙은 여승의 일손을 재촉한다거나 도와주는 일이라고는 없이 늘 때가 되면 이 노파를 스쳐 지나가 향불을 붙이곤 했다. 노파는 뜨락을 다 쓴 다음에는 꼭 대문 어귀의 섬돌에 올라서서 먼 산자락을 망연히 바라보곤 했다. 이때면 문을 지키던
세 늙은이가 쪼르르 마중을 나와 아침 인사를 올렸다.
그날도 한연 사태가 섬돌 위에 나서니 세 늙은이가 앞다투어 달려와 인사를 건넸다.
"밤새 안녕하셨수?"
노래소가 먼저 선수를 치니 노불락과 노시락도 뒤질세라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셨수?"
"안녕하셨수?"
이럴 때 한연 사태는 웃는 얼굴을 보이는 법이라고는 한 번도 없었다. 이날도 그저 무뚝뚝하니 합장을 하고는 천천히 돌아서서 다시 암자로 들어갔다. 그녀가 암자로 들어가 문을 꽁꽁 닫자마자 세 늙은이는 뜨락에 내려와 갈라서더니 주먹질, 발길질을 해 가며 성난 장닭처럼 싸우기 시작했다. 후닥닥 튀어 올라 주먹을 나누고 내려섰다가는 다시 다리를 휘저으며 장을 내질렀다. 이 세 늙은이들의 솜씨가 어찌나 날쌘지 눈 깜짝할 사이에 무려 서른 합이나 맞붙었다가 갈
라졌다.
노래소가 씩씩거리며 대뜸 노불락을 보고 시비를 걸었다.
"네 녀석은 정말 욕심꾸러기야! 아까 왜 한연 사태님을 우리보다 한 번 더 도둑질해 봤냐?"
하나 노불락도 숙이고 들지 않았다.
"이거야 정말 적반하장이로군. 우리 셋이 약속한 대로 '안녕하셨수?' 하고 다섯 글자만 말하면 될 걸 왜 '밤새 안녕하셨수' 하고 일곱 글자나 말했느냐 말이야. 흉측스럽게 '밤새'는 왜 덧붙여?"
그러자 노시락이 능글맞게 껄껄 웃으며 넙죽 되받아쳤다.
"쳇, 둘 다 검둥개 돼지 흉보는 격이로군. 한 놈은 훔쳐보고, 한 놈은 잘난 체 인사말 한마디 더 했으니 둘 다 욕심꾸러기요, 피장파장이지 뭐가 다른 게 있어?"
"뭐야?"
셋은 또다시 어우러져 티격태격 싸우기 시작했다. 팍팍 장이 오가고 허공에서 발길이 원을 그리는 품이 세 마리 용이 얼기설기 얽혀서 노니는 듯싶었다. 일순 세 늙은이는 문득 싸움을 멈추더니 머리를 맞대고 허리를 굽혀 땅에서 무엇인가를 들고 일어섰다. 보검이었다. 얼핏 보아도 화산파 보검에 틀림없었다. 화산파 검은 칼날이 좁고 끝이 뾰족한데 영락없이 그 모양이었다. 누구 것일까.
노래소가 노불락에게 대뜸 검을 앗아다가 찬찬히 보더니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러자 노시락이 또 곁에서 앗아다가 찬찬히 뜯어보았다. 그 역시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노불락은 두 노 친구를 번갈아 쳐다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대관절 무슨 일이야? 누구 검이야?"
"곽명송 것 같아……."
두 노인은 심상치 않은 기색으로 대꾸했다. 그들은 이제 화산파 일이라면 강 건너 불 구경하듯 무심히 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화산파의 정직한 젊은이 곽명송의 일만은 무심히 스쳐 지날 수 없었다. 언젠가 선우순의 명을 받잡고 그를 처치하려 했으나 한연 사태의 만류로 살려 준 적이 있었다. 그 호젓한 백사장에서 이상야릇한 밤을 함께 지내고 난 후에는 되레 늘 곽명송과 등아의 행복을 남몰래 빌곤 하지 않았던가. 뿐더러 장차 곽명송이 강호 무림을 호령하는 영웅이
되어 주기를 내심 바라 마지않았었다. 한데 그 젊은이의 검이 이렇게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다니, 아무래도 불길한 징조였다. 검을 잃었다 함은 목숨을 잃었음을 의미하는 법이다.
도대체 어떤 놈이 화산파의 곽명송을 죽이고 그의 생명 같은 검을 이 한적한 암자 앞에 던져 놓았을까? 대관절 누구에게 으름장을 놓고 위세를 보이려는 것일까? 삼로의 머리 속에는 불현듯 선우순의 표독스런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 놈은 화산파 장문인의 절대적인 권위를 상징하는 보검을 꼭 틀어쥐고 있으니 필시 그 기세를 믿고 또 곽명송을 모해하라고 호령했을 것이다. 얼마 전 자기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런즉 이번에는 선우순이 직접 나서서 곽명송을 죽
이고 검을 여기에 던져 놓았을지도 모른다.
삼로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비록 선우순의 명으로 그를 죽이려고 했지만 그들은 결단성 있고 괄괄한 등아와 어리숭하면서도 씩씩한 곽명송을 매우 아끼고 좋아했었다.
"더러운 자식! 내가 가서 그 선우순 놈을 죽여 버릴 테야!"
노래소가 불끈 주먹을 쥐고 외쳤다. 그러자 노불락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렸다.
"안 돼! 화산파의 계율에 장문인을 죽이고 모반하는 자는 팔다리를 자르고 돼지처럼 뒷간에 처넣는 법이야! 다리도 없고 팔도 없는 괴물이 된단 말이야. 그런 괴상망측한 꼬락서니를 해 가지고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가겠나?"
그러자 노래소는 왈칵 눈물을 쏟았다.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도저히 묵과할 수 없어!"
"돼지가 된 다음에는 죽을 수도 없단 말이야."
노시락이 노래소를 힐끔 쳐다보며 울적하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노래소는 바락 화를 냈다.
"돼지가 되든 소가 되든 난 그 불쌍한 것들을 대신해서 복수하고야 말 테야. 두 노형은 여기서 문이나 지키고 있어요."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홱 돌아서서 씩씩거리며 걸어갔다. 다른 두 늙은이가 바삐 팔소매를 잡았다. 노래소는 잔뜩 독이 올라 두 늙은이를 번갈아 쏘아보며 외쳐댔다.
"놔, 놔! 노형네 둘은 이 문이나 지키라니깐! 나 혼자 복수하러 갈 테니! 흥, 화산파 삼로는 개떡 같은 삼로! 남의 문이나 지켜 주는 강아지 같은 삼로지!"
그때였다. 뒤쪽에서 나직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방금 무슨 말을 했지요?"
삼로는 흠칫 놀라 홱 뒤를 돌아다봤다. 그들 셋이 몇 십 년을 하루같이 짝사랑을 바쳐 온 그 준엄한 노파가 서 있었다.
노래소는 더는 떠들어대지 못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가 지껄이는 걸 다 들었겠군요?"
노파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매서운 눈초리로 노래소를 흘겨보면서 쏘아붙였다.
"문은 안 지키고 그냥 가겠단 말이죠?"
노래소는 대번에 낯빛이 벌개졌다. 그는 도적이 매를 드는 격으로 불뚝 심통을 부렸다.
"나 원 기가 막혀서! 화산파는 곽명송이란 그 젊은이를 내놓고는 말짱 다 한 가마에 잡아 넣을 놈들뿐인데 그 망할 놈의 선우순이 곽명송을 잡아죽였단 말이오. 이를 어찌 참을 수 있겠소!"
노불락은 근심스레 노래소를 보면서 나직이 물었다.
"그래, 정말 가겠소?"
"정말 후회하지 않겠소?"
노시락도 거들었다. 노래소는 연방 힘있게 고개를 끄떡거렸다. 그러자 늙은이 둘은 노래소의 손을 법석법석 잡았다.
"좋아, 우리도 가지."
순간 세 늙은이는 한 덩어리가 되어 저마다 두 눈에 맑디맑은 이슬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들은 더는 노파를 아랑곳하지도 않았다.
"으흠!"
노파가 헛기침을 했다. 삼로는 노파에게 공손히 합장을 했다.
"한연 사태님, 문 하나 지켜 드리지 못해 정말 죄송하외다."
삼로는 그 한마디만 남겨 놓고 부랴부랴 길을 나섰다. 뒤에서 다시 붙잡아 세울까 봐 바삐 서두르는 눈치가 역력했다.
노파는 다시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내 말 한마디 듣고 가면 못쓰나요?"
그러자 삼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주춤 멈춰 섰다. 몇 십 년을 하루같이 사모하던 여인의 말 한마디를 듣지 않고 훌쩍 떠나간다는 것은 너무나 무정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말뚝처럼 굳어진 채 뒤 한 번 돌아보지 않았다. 아니, 감히 돌아다볼 엄두조차 못 내고 있었다. 은근하면서도 매서운 그녀의 눈초리를 마주 대한다는 것은 정녕 가슴 떨리는 일이었다.
다시금 또랑또랑한 노파의 목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잘들 생각해 봤나요? 그쪽에 가서 누가 나설 셈이에요? 셋이 함께 나설 셈인가요?"
"내가 나서겠소!"
노래소가 대뜸 큰소리를 쳤다. 그러자 노시락이 펄쩍 뛰며 퉁을 주었다.
"아 참, 이 친구는 무슨 일에나 욕심을 부린단 말이야!"
노불락도 기세등등하니 대들었다.
"자네들은 언제 보나 큰 고기는 제 그물에 넣으려고 설친단 말야. 그러니 난 늘 기분만 잡치는 거라구. 이번만은 결단코 내가 나서야 쓰겠네!"
그러자 한연 사태가 정색을 했다.
"화산파의 무공은 시원치 않지만 그들의 계율은 실로 무섭지요. 장문인을 죽이는 자는 어김없이 팔다리가 잘려 뒷간에 처박히고 말 것이에요. 그래도 안 무서워요? 그래, 누가 나설 건가요?"
"내가 나서겠소!"
셋은 똑같이 대답했다. 노파는 잠시 말이 없었다.
삼로는 한연 사태가 더 할 말이 없으리라 짐작하고 우쭐우쭐 발걸음을 뗐다. 그때 다시금 노파가 발목을 잡았다.
"잠깐만!"
셋은 못박힌 듯 다시 그 자리에 섰다. 한연 사태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연이어 들려 왔다.
"세 분은 잘 들어 두세요. 누구든지 만약 돼지가 돼서 돌아온다면 이 한연 사태는 늙어 죽을 때까지 그분을 모시겠어요."
삼로는 일순 가슴이 뭉클했다. 그렇게만 된다면 그거야말로 속세의 사람들은 맺을 수 없는 기이한 연분일 것인즉, 한연 사태야말로 절세의 여걸이요 참사랑을 간직한 진짜 여인이 아니겠는가? 그들 셋은 이렇듯 한연 사태와 도저히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연분으로 맺어져 있었던 것이다. 삼로는 차마 뒤를 돌아다보지 못했다. 그들은 모두 울고 있었다. 뿐더러 울고 있을 한연 사태의 얼굴을 마주보기도 가슴 아픈 일이었다.
화산에는'한검당(閒劍堂)'이라고 하는 넓고 아늑한 대청이 있었다. 지금은 화산파 두목이 집무청으로 쓰고 있지만 기실 이 대청에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깃들여 있다.
옛날에 화산파에 세상의 모진 풍파를 다 겪은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그는 늘그막에 오묘한 도리를 깨쳤다. 즉, 가장 뛰어난 검술은 검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검을 조용히 놓아두는 것이라는 깨달음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한검당'이라는 대청을 짓고 그후 십년이고 이십 년이고 장구히 검을 놓아두었다 한다. 그랬더니 천하가 태평해지더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화산파 사람들은 검을 놓는 대신 검을 부여잡고 싸우기만 하니 남도 죽이고 자기들도 죽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야 어쨌든 선우순과 그의 깐깐한 마누라는 요즘 아무런 근심걱정 없이 흥청망청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저 혼자만 의롭고 정직한 체하던 곽명송도 감쪽같이 죽여 없앴겠다, 귀찮게 잔소리만 늘어놓던 삼로도 알아서 이고암에 가 있겠다. 이젠 정말 무서울 것이 없었다. 선우순은 허파에 바람든 사람처럼 온종일 입을 벙싯거렸다. 보다 보다 못해 하루는 그 마누라가 얼마간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이봐요, 너무 그렇게 좋아하지 마세요. 그 귀신 같은 세 늙은이가 또 기신기신 찾아올지 모르니까!"
"허, 괜한 근심! 이 어른이 좋은 꾀를 생각해 두었으니 그런 근심일랑 딱 붙잡아 매라구! 한번 들어 보겠소? 일단 그 한연 사태라는 노파를 쥐도 새도 모르게 잡아온단 말야. 그 노파만 볼모로 잡고 있으면 감때 사나운 삼로도 고분고분 말을 들을 게지 별수 있겠어? 제기랄, 여차하면 그 노파를 죽여 버리면 될 것이니까!"
그때였다. 문득 와르르 기왓장 뒤엎는 소리가 나더니 꼬장꼬장한 삼로가 허공에서 불쑥 떨어져 내렸다. 삼로는 이글이글 불타는 눈길로 매섭게 쏘아보더니 개중 노래소가 성큼 나서며 을러댔다.
"선우순, 네 놈이 사형을 모해하고 화산파 장문인 자리를 빼앗은 죄, 오늘 우린 그 죄를 따지러 왔다."
뒤이어 노불락과 노시락도 연달아 한마디씩 호통을 내질렀다.
"네 녀석이 화산파의 대들보 협객 곽명송을 죽였으니 그 죄 역시 가볍지 않으리라!"
"네 녀석은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해쳤느냐! 그 죄는 일일이 논할 수조차 없다. 그러나 사형과 명송을 모해한 죄는 기어코 보응을 받으리라!"
선우순은 등골이 서늘했지만 짐짓 목청을 높여 으름장을 놓았다.
"호오, 그렇소? 그대들은 화산파의 원로 대신이나 다름없으니 화산파 계율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겠지?"
그는 보검을 쓱 꺼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이 한검당의 보검을 보시오. 이 보검의 권위를 거역하는 자는 팔다리 없는 돼지 신세가 될 거야!"
선우순은 여편네와 의미심장하게 눈짓을 주고받으며 느긋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 말만 던져 놓으면 고분고분 수그러 들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장문님의 명령이니 물러들 가세요!"
선우순 곁에 있던 노파가 대뜸 소리쳤다.
"뭐, 장문? 장문은 무슨 개코 같은 장문이야!"
장문 앞이라면 이 삼로도 설설 기었건만 오늘따라 안하무인으로 코방귀를 뀌었다. 그들은 화산삼현(華山三現) 초수로 껑충 공중제비를 돌아 선우순 앞에 바싹 내려섰다. 다음 순간 삼로의 시퍼런 검이 무섭게 춤을 추었다. 선우순의 길다란 몸뚱이는 단박에 가로세로 대여섯 토막으로 잘려 버렸다.
"아이고, 삼로인지 뭔지 하는 두상들이 장문님을 죽였고나! 이 두상들아, 하늘이 있고 땅이 있는 줄 모르느냐? 네 놈들은 흉물스러운 돼지가 되고 말리라!"
선우순의 괄괄한 여편네는 화들짝 놀라 금세 눈물 콧물 쏟아 내며 울부짖었다. 순간, 노래소의 날카로운 칼끝이 노파의 입 안을 슬쩍 후비고 지나갔다. 그러자 혀가 뭉텅 떨어져 나가고 비릿한 것이 입 안에 그득 찼다. 그녀는 그래도 삿대질을 해 가며 바락바락 삼로에게 대들었다. 그러나 혀가 잘렸는지라 그저 윽윽거릴 뿐 무슨 허튼소리를 내뱉는 것인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말 못하는 돼지는 저 년이 먼저 되는 판이군."
노불락은 낯을 찡그리며 검을 치켜 들어 단칼에 그녀의 두두룩한 모가지를 쳤다.
그때 화산파 무리들이 소란스런 기척을 듣고 모두들 대청으로 달려왔다. 그러나 누구 하나 나서는 사람이 없이 그저 놀란 기색으로 서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모두 삼로의 조카뻘 되는 후배들인지라 감히 화산파의 세 원로를 건드릴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잠시 후 유독 사납기로 이름난 육사고가 냉랭하게 웃으며 선뜻 나섰다.
"세 좌상 어른께서 사람을 죽이시니 감히 막아 나서지는 못하겠으나 화산파의 계율만은 그냥 지나칠 수 없군요. 화산파 원로들이시니 여러 후배들 앞에서 귀감이 돼야 하지 않겠나요?"
삼로는 어쩐지 한풀 죽어 면구스럽게 육사고를 훔쳐보았다. 비록 화산파의 장문 자리에는 선우순이 앉아 있긴 했지만 화산파의 대소사는 필시 육사고가 참여해야 결판을 내곤 했다. 아무튼 만만치 않은 여자였다.
삼로는 그저 멋쩍게 서 있었다. 잠시 후 누군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한걸음 나섰다. 쾌도 악기였다. 쾌도는 침울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화산파가 문파를 연 지 백여 년 되도록 강호에서 그럭저럭 살아 나갈 수 있었던 것은 그래도 화산파 내부가 화목하고 상하지분이 분명했기 때문이었소. 한데 오늘에 와서 서로 물고 뜯고 싸우기만 하니 강호의 어진 이들은 통탄을 금치 못할 일이옵니다."
화산파 무리들은 너나없이 죄지은 놈들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숙연하게 정적이 감돌았다. 한 순간 노래소가 정적을 깨고 키들키들 웃어젖혔다.
"네가 쾌도란 녀석이지? 세상에 입 가진 사람은 다 말할 수 있어도 네 놈만은 입을 닥쳐야 해! 죄는 선우순이 냈겠지만 하수인은 분명 네 놈이야. 아직 곽명송을 죽인 죄를 묻지도 않았거늘 왜 주둥이부터 놀리는 게냐? 화산파 계율은 하룻강아지인 네 놈보다 수염이 시허연 우리가 더 잘 알고 있다. 네 녀석은 잔말 말고 구경이나 하거라!"
노래소는 말을 마치자마자 두 늙은이에게 냉큼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삼로는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약속이라도 한 듯 단박에 허공으로 솟구쳐 올라 번개같이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팔다리가 뭉텅뭉텅 떨어져 나가고 세 몸뚱이만 쿵, 쿵, 쿵 땅에 떨어졌다. 좌중은 짧은 숨을 들이켜며 얼른 고개를 숙였다. 대청 마당에선 마치 돼지 세 마리가 꾸물거리는 듯했다.
쾌도 악기는 적이 송구스러워 푹 고개를 숙였다.
화산파 젊은 제자들은 쭈뼛쭈뼛 눈길을 들었다. 일순 피투성이가 된 삼로의 얼굴이 달려들 듯 두 눈으로 뛰어들어 저마다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눈물을 왈칵 쏟아 냈다. 화산파 제자라면 응당 삼로 같은 사내대장부가 돼야 하리라!
삼로의 팔다리가 끊어져 나간 부위에서는 선지피가 흘러 나와 실개천을 이루었다. 더는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조금만 더 놓아두면 피를 다 흘리고 죽게 될 게 분명했다. 좌중은 우르르 다가갔다.
"가만 놔두지 못할까? 다가가는 놈은 가차없이 죽이리라!"
육사고가 표독스럽게 고함을 지르며 쓱 검을 빼 들었다. 그녀는 매섭게 좌중을 노려 보다가는 삼로를 흘겨보며 내뱉었다.
"이젠 옴짝달싹 못하고 죽게 됐군. 내 그 누구도 다가서지 못하게 하리라! 너희 삼로는 피를 몽땅 쏟아 내고 거미처럼 말라 죽게될 게야. 그래야 장문님 내외간을 죽인 피 값을 물어낼 수 있어!"
화산파 제자들은 두 눈 뻔히 뜨고 삼로가 죽어 가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 그들은 못내 한스러워서 발을 동동 굴러댔다. 더러는 발을 구르며 목놓아 울부짖기도 했다.
노래소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왜 아직도 아니 올까?……."
"너무 보채지 말게! 그 여인은 꼭 오고야 말아!……"
"암, 오고말고!……."
노불락과 노시락이 연달아 입을 열었다.
삼로는 점점 정신이 가물가물해지면서 둘러선 사람들을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세 노인은 이따금 까무러쳤다가는 다시 깨어나곤 했다. 쾌도 악기는 사람들 속에 끼여 그 처참한 광경을 보고 있다가 차마 그대로 있을 수만은 없어 육사고에게 사정사정했다.
"사고, 저 죽어 가는 선배님들을 저대로 내버려두는 건 너무 지독해……."
그러자 육사고가 눈꼬리를 치뜨며 쏘아붙였다.
"당신은 손님이지 결코 화산파 사람이 아니란 걸 알아야 해요!"
쾌도는 기가 막혀 낯선 사람 보듯 아내 육사고의 표독스러운 얼굴을 노려보았다.
그때였다. 늙은 여승 하나가 허공에서 휘익 떨어져 내려 곧장 삼로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찬찬히 살펴보더니 혀를 끌끌 찼다. 여승은 대뜸 꿇어앉아 삼로를 하나하나 부축해 앉히고는 약을 한 알씩 꺼내 먹였다. 그리고 안주머니에서 대나무 잎 같은 약초를 꺼내 피가 뿜어 나오고 있는 곳에 붙여 주며 또 한 번 끌끌 혀를 찼다.
"이, 이게 무슨 꼴인가? 이런 봉변을 당할 줄 내 미리 알았지만 그래도 도리를 다 하려는데 야……."
육사고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쾌도에게 얼른 눈짓을 보냈다. 저 주제넘은 여승을 어서 몰아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악기는 두 손 딱 붙이고 선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육사고는 잡아먹을 듯이 그를 흘겨보고는 신경질적으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대관절 당신은 누구요? 왜 주제넘게 화산파의 내분에 끼여드는 거요?"
그러나 여승은 먼 산을 쳐다보며 건성으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묻는 거요? 화산파 장문이라도 되오?"
화산파 장문인 선우순은 물론이요 그의 여편네마저 삼로의 칼에 맞아 비명횡사했으니 이젠 표면적으로 육사고가 장문 아닌 장문 아닌가? 여승은 코를 벌름거리며 빈정댔다.
"검을 고이 모신다고 한검당이라고 했건마는 검이 춤추고 피비린내가 코를 찌르니 견딜 수가 없구려!"
그녀는 한마디 던지고는 장삼 자락에 삼로를 싸안고 쓱 대청을 나섰다.
"섰거라!"
육사고가 훌쩍 날아와 여승 앞을 가로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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