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백순(李百順)
문하. 삼태성(三台星)이 빛나니 제좌가 그로써 빛나고, 높은 산이 우뚝하니 지유(地維)가 그로써 진정되었다. 팔다리 같은 어진 보좌와 심장과 척추 같은 대신이 있어서, 이미 널리 보필하는 공을 이루었다면, 어찌 표창하는 은전을 내리지 않으리오. 이에 길한 날을 가리어 조정에 고한다.
구관(具官) 이연수(李延壽)는 지감(知鑑)과 식견이 통하고 밝으며, 지조와 수양이 깨끗하고 바르다. 이(吏)로 문(文)을 수식하고 문으로 이(吏)를 수식하니 널리 옛 일을 상고하였고, 너그러움으로 사나움을 보충하고 사나움으로 너그러움을 보충하니, 크도다. 때의 적당함을 따랐도다. 젊어서 문음(門蔭)으로 출사하여 곧 임금의 뜰에 오르게 되었다. 이미 여러 조정을 내리 섬기었고, 또 온갖 직책에 오랫 동안 수고하였다. 세 방면에 수령으로 나아가 다스리매 말고삐를 잡았으니, 어진 은혜는 봄볕보다 따뜻하였고, 두 변방에서 장수로 있었으매 삼엄한 기운이 추상같았다. 안팎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고, 험하고 평이한 것을 갖추어 겪었다. 먼 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나라를 빛내니 금(金) 나라 사람들은 그 가문을 물었고, 군대의 일을 총괄하여 맡으니 거란(契丹)의 도적들이 그 위명을 두려워하였다. 영화(英華)를 날리어 일찍이 용후(龍喉)를 대신하였고, 일을 아뢰면서 매양 계설향(鷄舌香)을 머금었다. 두 번 헌부를 맡았고, 세 번 이조에 들어갔다. 유악(帷幄)의 꾀는 일찍이 자추(紫樞)에 참여하였고, 묘당(廟堂)의 정책은 황각(黃閣)에서 오래도록 오로지 하였다. 중산보(仲山甫)처럼 임금의 모자란 점을 보필하였으니, 얼마나 지혜로운 생각을 짜냈던가. 부열(傅說)의 소금과 매실로 국의 간 맞추어 여러 사람의 입에 맞게 하였다. 나는 그대의 덕을 아름답게 여기고 백성들은 모두 그대를 우러러보았다. 총재(冢宰)로 있는 10년 동안에
순욱(荀勖)의 봉(鳳)이 높이 날았고, 상백(常伯)으로 있는 3년 동안에 김일제(金日磾)의 매미를 꽂았다. 백료들의 영수였고, 한 나라의 동량이었다. 그러므로 먼저 지극한 높은 직위를 갖추고, 다시 융숭한 작호를 더한다. 특별히 삼중대광(三重大匡)을 제수하고, 나머지는 모두 전과 같이 한다.
구관(具官) 최우(崔瑀)는 학식은 사람과 하늘의 이치를 통달하고 재주는 정승과 장수의 재능을 겸하였다. 동쪽의 발해(
渤海)를 기울여 씻어서 천하를 깨끗이 할 마음이 있었고, 서쪽의 곤륜(崑崙)을 밀어내고 구구(九區)를 넓히어 국경을 개척할 뜻을 품었다. 힘써 공도(公道)를 펴서 태평을 이룩하기를 기약하였다. 나는 이에 이광필(李光弼)과 같이 여겨 나라의 안위를 부탁하였고, 배도(裴度)처럼 보아 문무의 정사를 맡기었다. 이에 경은 나라에 바치는 정성이 깊었고, 임금을 사랑하는 뜻이 간절하였다. 금오(金鼇)가 산을 떠받고 높직이 창파(蒼波) 위에 서 있는 것 같고, 옥룡(玉龍)이 해를 끼고 높이 황도(黃道) 앞에 나는 것 같았다. 큰 일에 다다르자 흔들리지 않고 무너진 기강을 일으켜 다시 바로잡았다. 대(臺)와 성(省)을 겸하여 맡아 온갖 사무를 재결하되
칼날을 놀리는 것이 여유가 있었고 이부와 병부를 총괄하여 백료를 살피되
햇빛이 용납되는 데는 반드시 비추었다. 때 묻은 것을 빗질하고 가려운 데를 긁으며, 흐린 것은 막아 버리고 맑은 것을 들추었다. 더러운 습속을 깨끗이 하여 증삼(曾參)과 사어(史魚)의 정을 품게 하였고, 탐욕하는 자를 감화시켜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의 지조를 갖게 하였다. 지난번에 난리가 북쪽에서 일어났을 때 모든 지모를 짜내어 천리 밖에서 적을 막았고, 근자에 왜적의 배가 남쪽을 엿본다는 소문을 듣고
공을 놀리어 두 나라의 난국을 해결하였다. 이것이 나의 힘이 아니라, 모두 너의 아름다운 공이다. 자금(紫禁)의 성이 불타 버리니 문객들을 내보내어 역사를 도왔고, 태창(太倉)의 곡식이 썩으니 지하에 창고를 만들어 쌓아 두었는데, 온갖 계획이 모두 그대의 마음속에서 나왔다. 태조(太祖)의 유풍을 도로 회복하였고 선공(先公)의 업적을 떨어뜨리지 않았다. 마치 유씨(劉氏)의 한(漢) 나라가 병길(丙吉)로 말미암아 중흥하였고, 이씨(李氏)의 당(唐) 나라가 곽자의(郭子儀)에 힘입어 재건된 것 같다. 이러므로 공을 갚는 아름다운 칭호를 내리고, 귀한 사람을 대접하는 아름다운 품계를 더한다. 특별히 광벽 익대(匡辟翊戴) 공신을 주고, 나머지는 모두 전과 같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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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글만 딸랑올리면...
고려의 동쪽에 있었단 발해가...곧, 중국지명대사전류들엔...현 황해의 북해인 발해(渤海)라 명기돼어 있고 원문출처 확실하니...
발해를 내륙해라 할 근거가 도통 돼질 않을 것이기에...
다른 조상님 글도 하나 더 겸합니다.
밑의 우리 조상님들이 직접 쓰신 글엔...
연경은 청나라 한 구텡이의 골자기에 두른 성일 뿐이며...발해는 지류(내륙에 있어야 가능)일 뿐이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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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음.
소동(小東)과 우선(芋仙)이 함께 편지를 보내 왔다. 소동의 편지에,
“해관(海觀) 존형 대인(尊兄大人)의 시회(詩會) 자리에 올립니다. 어제 중화원(中和園)의 한번 모임은 먼 곳에 있는 사람이 보지 못하고 듣지도 못하던 것을 알기에 족했습니다. 다만 양관 삼첩(陽關三疊)을 읊으심에 이르러서는 슬퍼서 넋을 잃게 함이 너무 심하였습니다.
보내는 사람도 이와 같으니 가는 자의 심정을 알만 합니다. 당신께서 출발하실 날이 23일로 정해졌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제(弟)는 오늘 곧 화송옹 댁(花松翁宅)에 가서 축수(祝壽)를 한 다음 연극을 관람하고 내일 늦게야 성을 나와 여관에 돌아가게 되어 몸소 작별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희원(希員) 제는 명년 3, 4월 사이에 곧 소주(蘇州)에 가서 현승(縣丞)이 될 것인데 그 역시 종군(從軍)할 것입니다. 제는 병법(兵法)과 경세(經世)의 학에 유의하였는데 비록 과거(科擧)와는 인연이 없으나 이 길을 말미암아 크게 될 것이매, 진실로 명운(命運)이 있다면 후일에 독무 사도(督撫司道)는 바랄 만하니 의당 승쉬(丞倅)로 평생을 마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드님 석전(石顚)은 재주가 높고 기개(氣槪)가 장하여 위대한 그릇이 될 것이니 정히 소동파 시 가운데에
아들의 재주가 굴레 안 씌운 말 같으니 / 有子才如不羈馬
알괘라 그대 마음 늦게 시들 소나무임을 / 知君心是後凋松
이란 두 글귀와 꼭 합치합니다. 그도 절구(絶句) 두어 수를 지었으니 제도 반드시 두어 수 시를 지어 부쳐 드리되 갖추 풍속을 채택해서 문망(文望)에 전해 드리겠습니다. 일후에 제를 생각하여 편지를 쓰시면 인편에 부치되 도중(都中) 서장안문(西長安門) 밖, 남쪽 경신당(耕莘堂) 마지휘(馬指揮) 댁에 보내면 받아서 곧 남방(南方)으로 부쳐 줄 것입니다. 마군(馬君)은 같은 고을에서 서로 좋게 지내는 사람으로 이름은 승무(繩武)이고 호(號)는 송포(松圃)입니다. 그 사람은 오성 병마사 부지휘(五城兵馬司副指揮) 후보로 뽑혔으므로 3~5년 간은 경사(京師)에서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형에게 편지를 보내려면 일후에 마땅히 귀관(貴館) 편에 보내서 그들로 하여금 귀국으로 보내야 할 것인데, 어느 지방 누구의 집을 찾아야 되는지 형과 담옹(澹翁)께서는 자세히 적어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어제 책궤를 점검하다가 법가암(法可庵) 관찰(觀察) 시 2본(本)과 신책편주(新策編珠) 4본을 얻었기에 아의(雅意)에 보답하오며, 또 향회시권(鄕會詩卷)과 전시권(殿試卷) 모두 십수 본이 있기에 청람(淸覽)하심에 이바지하오니 이것을 보시면 요즈음 선비를 뽑는 대략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송설(松雪) 조맹부(趙孟頫)의 고수부(枯樹賦) 1본과 우인(友人)이 쓴
정무난정체(定武蘭亭體) 1본을 고루 받들어 드리오니 웃으시며 거두어 주시기 바랍니다.
두어 소리 바람 젓대에 이별 좌석 늦어짐은 / 數聲風篴離亭晚
그대는 소상으로 나는 진 나라로 향함이라 / 君向瀟湘我向秦
한 것은 당 나라 사람이 이별을 노래한 시입니다. 오늘 다시 그 글을 읊으니 다시 목이 멥니다. 오로지 이 심정을 알아주시고 행차에 편안하기를 바라오며 향모하는 마음 가이없습니다. 소제 방삭(方朔)은 돈수하나이다.”
하였다. 우선(芋仙)의 편지는,
“해관 낭중 인형 족하(海觀郞中仁兄足下) 천해 망망(天海茫茫)한 타국(他國)에서 우연히 만나서 문자(文字)로 사귐을 맺어서 곧바로 사랑하시기를 골육(骨肉)과 한가지로 하시니, 이생에 형과 더불어 우란 추밀(友蘭樞密) 담인 학사(澹人學士)를 뵈옵게 되어 지기(知己)를 삼아 주신 데에 감명이 깊어서 가히 유감이 없습니다.
더구나 거듭 시와 편지를 혜증(惠贈)하시어 삼가 표구하여 네 벽에 펴놓았더니 앞에도 빛이 나고 뒤에도 빛이 납니다. 다른 날 도성을 떠날 때에 싣고 서쪽에 가서 우리 자손들에게 보여 주고 길이 보존하여 썩지 않게 하리니,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별에 임하니 슬퍼서 100가지 정회가 엇갈려 일어나 이루 어떻게 말할 수 없습니다. 이 뒤에는 당연히 편지를 부쳐 각각 서로의 생각을 써서 더욱 문장(文章)ㆍ도의(道義)ㆍ풍절(風節)로 서로 권면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하늘이 만약 기회를 주신다면 다시 만날 것을 기다리려니와 그렇지 못하면 글로 다하기 어려운 것은 꿈속에라도 가서 당신과 함께 대대로 형제가 되고, 내생에 다하지 못한 인연을 다시 맺겠습니다.
붓을 잡으니 목이 멥니다. 다만 먼 길을 가시는 동안 도체(道體) 애호(愛護)하시고 돌아가 임금을 뵈옵고 오래오래 녹(祿)을 받으신다면 심히 다행스러우며 아주 위안이 되겠습니다.
함풍(咸豐) 5년 12월 22일 서촉(西蜀), 제(弟) 우선(芋仙) 이사분(李士棻)은 머리를 조아려 두 번 절하고 경사(京師) 정양문(正陽門) 밖 온화점(蘊和店) 장무상망지실(長毋相忘之室)에서 삼가 글을 올립니다.”
하였다. 또 시를 나에게 보냈는데, 제(題)하기를,
“기쁘게 신 담인 굉문 좌모(申澹人宏文佐模), 서 해관 낭중 경순(徐海觀郞中慶淳) 두 선생께서 저의 머무는 집에 들르시어 날이 다하도록 아담(雅談)하심을 받았으므로 심히 즐거웠기에 시를 써서 사례합니다. 때는 함풍(咸豐) 을묘년 섣달 열 사흘.”
하고,
천상께 조회하고 돌아오다 부유를 찾으니 / 天上朝回過腐儒
한때 관개들로 거리를 메웠었네 / 一時冠蓋塞通衢
이날 담인 서장관이 예부(禮部)의 사연(賜宴)을 받고 예가 끝난 뒤에 문득 해관과 함께 찾아왔다.
구름 연기 손에 드니 시권을 헤쳤고 / 雲煙入手披詩卷
두 선생이 나의 북위잡감시(北闈雜感詩)를 화답해 쓰신 것이 큰 책이 되었는데 먹 흔적이 낭자한 게 보배롭다.
도포에 홀을 잡고 종용히 화도에 절을 하네 / 袍笏從容拜畫圖
실중(室中)에 모셔 놓은 소 문충공(蘇文忠公)의 소상(小像)에 두 선생께서 기쁘게 첨배(瞻拜)하시므로 내가 거듭 본떠서 2본을 드렸다.
급히 찾던 해인을 참으로 서로 만나니 / 亟索解人鎭相得
비로소 우리 도가 아직 외롭지 않음을 알았네 / 始知吾道不曾孤
죽어도 못 잊으리 존전께서 하시던 말 / 百年莫忘尊前語
골육 같은 우리 친함 권속이 성기리다 / 眷屬猶疎骨肉俱
내가 술에 취하여 두 선생에게 말하기를 “우리는 문자(文字)로 맺은 인연이지만 일가 권속과 같다.” 하니 해관이 말하기를, “서로 골육과 한가지로 보니 권속이 오히려 성기다.” 했다. 그 말이 간절하고 지극해서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케 했다.
아름다운 글귀를 가지고 계림에 가서 / 肯携佳句到鷄林
해상에 연을 이뤄 거문고를 타리니 / 海上成連對鼓琴
바라노니 작은 종이에 만 본을 써 주오 함은 / 乞與矮箋鈔萬本
못난 나로 천금을 누리게 하심이라 / 敎同敝帚享千金
두 선생이 잘못 내 시를 칭찬하시고 여러 폭을 써 줄 것을 부탁하여 해동에 전파하신 것은 실로 나의 다행이었다.
재주를 사랑함은 어찌 중국과 외국이 다르랴 / 憐才心豈殊中外
오래도록 이름이 고금에 중하리라 / 壽世名應重古今
외로운 등 비바람 밤에 오시지 않았던들 / 不徃孤燈風雨夜
한평생 신고하며 청음이나 하였으리 / 平生辛苦事淸吟
하고,
“해관 선생(海觀先生) 인형(仁兄)의 단점(壇坫)에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충주(忠州) 제(弟) 우선(芋仙) 이사분(李士棻)은 배고(拜藁)하고 아울러 경사 독립루(京師獨立樓)에 기록함.”
이라 했다.
이날 행탁(行槖)을 점검하니, 다만 사들인 책 10여 질이 있을 뿐이었다. 행장을 꾸려서 대차부(大車夫)에게 부치고, 단신(單身)으로 베개를 높이 베고 밤 깊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때마침 한 주부가 왔다가 내가 무료하게 홀로 누워 있는 것을 보고 나에게 말하기를,
“내일은 일찍 출발하게 될 것이니 기쁘기 비할 데 없는데 어찌 이처럼 무료한 생각을 하십니까?”
하기에, 내가,
“그대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는가? 내 시험삼아 말해 주지. 조선 사람은 나이 대여섯 살부터 약간 지각이 있으면 물건의 기교(奇巧)한 것을 구할 적에는 꼭 대국(大國)의 물건을 말하고, 잘난 인물(人物)을 말할 때에도 꼭 대국의 인물을 들어 말하며, 심지어 문장(文章)ㆍ서법(書法)ㆍ산천(山川)ㆍ궁실(宮室)까지도 모두 대국(大國)을 칭도하여, 한번 보지 못한 것을 평생의 한으로 삼는데, 지금 내가 본 바로는 그 지난날의 한(恨)은 족히 한스러울 것이 못되었네.
연경은 북방 한 모퉁이 땅에 불과하고, 산천은 의무려산과 발해(
渤海)로서 역시 지류(支流)와 여맥(餘脈)일 뿐이며, 인물로 말하면 요(堯)ㆍ순(舜)ㆍ우(禹)ㆍ탕(湯) 같은 성군(聖君)과 고(皐)ㆍ기(蘷)ㆍ직(稷)ㆍ설(契) 같은 현신(賢臣)이 있었지만 한번 흑취모(黑毳帽)와 마제수(馬蹄袖)를 착용하였으니, 그 나머지는 더 볼 것이 없네.
황막(荒邈)한 사막, 흰 자갈뿐인 천 리 광야에 높직이 벽돌담을 쌓아서 빙 둘러 놓고는 성첩(城堞)이라 하고, 높다랗게 정각(亭閣)ㆍ전우(殿宇)를 세워 조각과 단청을 하여 궁궐이라하며, 관리(官吏)는 높은 자인지 낮은 자인지 등위를 분변하기 어렵고, 민간의 아이와 어른은 관동(冠童)을 분별할 수 없으며, 음식은 반드시 돼지 기름으로 조미를 하므로 냄새가 고약해서 먹을 수 없고 의복은 반드시 털 갖옷으로 입은 모양이 흉해서 볼 수가 없네. 혼사와 상사에 풍악을 사용하니 선왕(先王)의 예는 쓸어 버린 듯 남은 것이 없고 알아들기 어려운 웅얼거리는 말소리는 오랑캐 풍속이 천성에 박혔기 때문이네.
그리고 금령(金鈴)ㆍ호로(葫蘆) 등은 모두 손이 스치기만 하여도 깨어지고 부서지는 쓸모없는 물건으로서 어린아이들을 속여 돈을 빼앗으려는 계책에 지나지 않으니, 저 옛날의 당(唐)ㆍ우(虞)ㆍ상(商)ㆍ주(周)의 큰 나라에서도 역시 이러했다면 그래도 보지 못한 것이 한이 되겠는가?”
하였다. 한 주부가,
“이미 중국에 들어와서 천자(天子)의 얼굴을 보지 못했으니 이것이 한스럽습니다.”
하므로, 내가,
“천자의 상을 알기가 무엇이 어렵겠나. 두 눈 두 귀에, 높은 코 모진 입의 한 나이 젊은 천자이겠지. 나는 도광 황제(道光皇帝)의 상과 도광 황후(道光皇后)의 상(像)을 보았지.”
했더니, 한 주부가,
“집사(執事)의 농담 말씀은 모두 허탄에 가깝지만 얼굴을 맞대 놓고 나를 속이시니, 집사의 말씀을 듣기를 원치 않습니다.”
하기에, 내가,
“언제 허탄한 말로 나에게 속임을 당했던가? 내가 서화포(書畫鋪)에서 두 상(像)이 그려진 화장(畫障)을 보았는데, 늙고 경강(硬强)하게 생긴 상은 황제라 하고, 뚜렷하고 예쁘게 생긴 상은 황후의 상이라 했네. 점포 주인이 나에게 사겠느냐면서, 값은 은자(銀子) 30정(錠)이라고 했네. 나는 생각하기를 돈이 산같이 쌓였다 해도 이것을 사서 어디에 쓰며 비록 그냥 주더라도 차라리
태상 노군(太上老君)이나
요지 왕모(瑤池王母)의 상이 실내의 벽상(壁上)을 빛내는 것만 못하다고 여겼네.”
하니, 한 주부가,
“과연 그런 게 있더란 말씀입니까?”
한다. 내가,
“그토록 나를 못 믿겠거든 내일 문회당(文繪堂) 서화포에 가서 서쪽 벽상에 걸려 있는 것을 보게나.”
하니, 한 주부가 말하기를,
“살아 있는 천자도, 죽은 천자도 다 못 보았으니 나는 천자와 인연이 너무 희박한가 봅니다.”
하였다. 내가 한 주부에게 묻기를,
하니, 대답하기를,
“아직 못 보았습니다.”
하기에, 내가,
“천단(天壇) 북쪽에 약왕묘가 있는데 무청후(武淸侯) 이성명(李誠銘)이 창건(創建)한 것으로 벽상(壁上)에는 태호 복희씨(太昊伏犧氏)의 위패(位牌)를 모시고, 왼쪽에는 신농(神農), 오른쪽에는 헌원(軒轅)을 위시하여 역대의 명의(名醫)인 손진인(孫眞人)ㆍ기백(歧伯)ㆍ편작(扁鵲)ㆍ화타(華陀)ㆍ장중경(張仲景)과 같은 분들을 배향하였는데 많아서 다 기억하지 못하네.”
하고,
하니, 한 주부가,
“하필이면 배향을 합니까? 당연히 따로 사당을 세워 단독으로 제향을 받게 하고 그 사당의 편액을, ‘용의묘(庸醫廟)’라 써 붙이는 것이 옳지요.”
하기에, 나는 벌떡 일어나며,
“기이하다. 그대의 자찬(自贊)이여! 내 마땅히 그 편액을 주(註) 내기를 ‘용(庸)은 용렬하고 미련하다는 용 자가 아니요, 바로 중용(中庸)이라 하는 용 자이다.’라고 하면 어떻겠나?”
하였더니, 한 주부가,
“용(庸) 자가 바로 ‘녹비(鹿皮)에 왈(曰) 자’ 같은 용 자이군요.”
하였다. 한 주부가 나에게 묻기를,
“황성(皇城)이 지금은 순천부(順天府)에 속해 있는데 송(宋) 나라 이전에는 어느 주(州)에 소속되었습니까?”
하기에, 나는,
“고서(古書)를 상고해 보니, ‘북경(北京)은 곧 당(唐)의 번진(藩鎭)이었던 요(遼)ㆍ금(金)의 별도(別都) 구성(舊城)인데, 원(元) 나라가 도읍을 조금 동쪽으로 옮기어 구성의 동쪽 반이
조시(朝市) 사이에 들어갔고, 서쪽 반은 아직도 보존되어 소태후성(蕭太后城)이라고 하는데 소태후란 곧 요후(遼后)다.’ 했네, 또 ‘당 나라 때에 이곳을 범양(范陽)의 번진으로 삼았다가
안(安)ㆍ사(史)가 반란을 일으킨 뒤로 이름을 노룡(盧龍)이라 고쳤으나 그 치소(治所)였던 유주(幽州) 계현(薊縣)은 고치지 않았는데 지금 와서 계현을 옮겨 주(州)라 명칭하고 노룡을 옮겨 현(縣)으로 이름하였다.’ 하나 이곳에서 모두 수백 리 거리이니, 당의 노룡과 계주는 이곳에 있었을 것이네.”
하였다. 한 주부가 또 묻기를,
“영고탑(寧古塔)은 만주에 소속됐는데
폐사군(廢四郡)과 서로 연접되었습니까?”
하기에, 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렇다. 영고탑은 바로 옛날 숙신씨(蕭愼氏)의 유허(遺墟)인데, 한(漢) 나라와 당(唐) 나라 때 와서는 동북 지방에 강국(强國)과 웅부(雄部)가 없고, 오직 우리나라 한 지역만이 동쪽 땅의 형승(形勝)을 독차지하게 되니 이것이 수(隋)ㆍ당(唐) 때에 와서 조선(朝鮮)을 공격할 때마다 ‘동을 치는 큰 역사[征東大役]’라 하게 된 원인이다. 그때에는 요동(遼東)의 동ㆍ서가 태반이 우리 땅이었고, 산(山) 안팎의 여러 종족이 우리에게 복속하는 자가 많았더니, 한번 여진(女眞)의 만 명이나 되는 종족이 경박호(鏡泊湖 경파호(鏡波湖)로 영고탑에 있음)를 중심으로 일어나면서부터 점점 번성하고 커져서 송 나라 때에 이르러서는 중하(中夏)에 들어가 임금이 되니, 이를 금(金) 나라라 한다.
그들이 원 나라 사람들에게 쫓겨 동쪽으로 오게 되자, 그 부락(部落)이 두만(豆滿)ㆍ압록(鴨綠) 두 강의 서쪽과 북쪽에 흩어져 살았는데, 그들을 혹은 야인(野人)이라 하고 혹은 번호(藩胡)라고도 하였으며 우리나라를 침범하던 중에 북쪽은 이탕개(梨湯介 다른 기록에는 ‘梨’가 ‘尼’로 되어 있음), 서쪽은 이만주(李滿住)가 그 큰 자였고, 이때부터는 우리나라 국경이 편안하지 못하였다.
대저 여진의 나머지 부족 중에
숙여진(熟女眞)ㆍ생여진(生女眞)의 구별이 있었는데, 명 나라 만력(萬曆) 이후에 와서는 생여진 동산(董山) 일파가 갑자기
건주위(建州衛)에서 커져서 모린위(毛麟衛)ㆍ좌위(左衛)ㆍ우위(右衛) 등의 종족을 통속(統屬)하였다.
그런데 폐사군이 그들과 아주 가까웠으므로 그의 폐해를 가장 많이 받았으니, 이것이 4군(四郡)이 폐하게 된 원인이었다. 홍타시(弘它時) 이후에 와서는 병력이 더욱 날로 강성하여져서 그 세력으로 북상(北上)하여서
개원(開元)으로부터 심양(瀋陽)을 평정하고 동쪽으로 내려와 요양(遼陽)을 차지하였다. 그러자 심양을 성경(盛京)이라 하고, 요양을 동경(東京)이라 하고 건주를 흥경(興京)이라 하여 영고탑 서쪽을 모두 점령하여 소유로 하였다. 그리고 크고 작은 여러 성책들 사이에는 싸움을 거듭하더니, 숭정(崇禎) 말년에는 연경(燕京)에 들어가 임금이 되었다. 건주는 곧 능묘(陵墓)가 있는 곳이고, 노성(老城)은 곧 도읍이 있는 곳이기 때문에 제도와 설치가 성경과 다를 것이 없다.
황도주(黃道周)의 《박물전휘(博物典彙)》 ‘건주고(建州攷)’를 상고해 보니, “건주는 즉 금 나라의 별부(別部)였는데 원 나라는 만호부(萬戶府)를 설치했었고, 청 나라는 나누어 셋을 만들어 건주(建州)ㆍ해서(海西)ㆍ야인(野人)이라 했다. 건주가 그중에 으뜸으로 땅이 가장 요해처였는데, 영락(永樂) 원년에 건주위를 설치하여 해마다 10월에 입공(入貢)케 하니, 이것이 건주가 크게 된 시초였다. 그리고 요야(遼野) 동쪽에 3장군(三將軍)을 열치(列置)하였는데, 그 하나는 봉천(奉天) 등처의 지방을 진수(鎭守)하되 본부를 심양에 두었고, 하나는 영고탑(寧古塔) 등처 지방을 진수하되 본부를 항창(航艙)에 두었으며, 하나는 흑룡강(黑龍江) 등처의 지방을 진수하되 본부를 애호성(艾滸城)에 두니 그 관질(官秩)은 모두 1품직으로 각각 만주를 통치하게 하였다. 강희(康煕) 말년에는 가장 큰 걱정거리가 흑룡강(黑龍江) 이북의 몽고(蒙古)였기 때문에 백도납장군(白度納將軍)을 더 설치했다고 하나, 그 본부가 있었던 지방은 자세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흑룡(黑龍)ㆍ혼동(混同) 사이에 있었을 듯하다.
그리고 몽고 48부(部) 중에 동북방의 여러 종족이 가장 강성하였다. 대비달자(大鼻獺子)도 역시 흑룡강 북쪽에 있어서 동으로 흑룡강으로부터 개원(開元) 이북까지 이르렀고, 연변이 진(秦) 나라 장성(長城) 밖에 와서는 북으로, 서로 꾸불꾸불 뻗쳐서 한(漢) 나라 서역(西域)
우진(于闐) 지방에까지 이르러 이것이 모두 몽고의 경계여서 그 넓이가 중원(中原)에 비하여 여러 배나 되었다.
상고 시대에는 판도(版圖)상에 실리지도 않았으며 황막(荒邈)한 사막일 뿐 사람이 사는 곳이라고는 없었는데, 당(唐)ㆍ송(宋) 이후에 와서야 땅이 더욱 넓혀지고 사람이 더욱 번창하여 지금은 46부나 된다. 그들은 서로 웅장(雄長)이라 하여 각각 한 모퉁이의 임금이 되어 동ㆍ서ㆍ남ㆍ북 황제라 호칭하니, 하나는 황태극(皇太極), 하나는 청태극(靑太極)인데, 이들은 중국 서남 지방에 있어서 하나는 액라사(厄羅斯)니, 곧 대비(大鼻)이며, 하나는 탑이객(嗒爾喀)이니, 이들은 중국의 동북 지방에 있었다.
영고탑은 동쪽은 동해까지 3000여 리, 서쪽은 개원ㆍ위원보(威遠堡)까지 590여 리, 남쪽은 장백산(長白山)까지 1200여 리, 북쪽은 특합변(忒哈邊)까지 600리나 되었다 한다.
대개 우리나라는 지형(地形)이 북(北)은 높고 남(南)은 낮으며, 중간은 잘록하고 아래는 퍼졌는데, 백산(白山)을 머리라 하고, 대령(大嶺)을 등마루라 하면, 사람이 옆으로 등을 구부리고 서 있는 것과 같으며, 영남(嶺南)의 대마도(對馬島)와 호남(湖南)의 탐라도(耽羅島)는 두 발로 괸 것과 같아, 서북쪽에 앉아 동남쪽을 바라보는 형상이라는 것이 감여가(堪輿家)들의 정론(正論)이다.
그래서 경도(京都)를 중심으로 사방(四方)의 방위를 정한다면 온성(穩城)이 정북쪽이 되고 해남(海南)이 정남쪽이 되며, 정서쪽은 풍천(豐川)이요, 정동쪽은 강릉(江陵)이니, 이에 의거하여 본다면 강역(壃域)의 향배(向背)ㆍ편정(偏正)을 알기란 손바닥을 가리키는 것과 같은데, 지금의 지도(地圖)라 하는 것은 틀리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
지도마다 모두 폭(幅)을 따라 위치를 정하고, 위치에 따라 그림을 그렸으므로, 어떤 것은 장광(長廣)이 틀리고 어떤 것은 활협(闊狹)이 맞지 않아, 서(西)의 의주(義州)와 북(北)의 장흥(長興)으로 살펴보면 이 동(東) 서(西) 양계(兩界)의 기준인 것 같다.
그러나 마주 펴놓은 양각이 부채를 편 것과 같아서, 압록강이 바다에 들어간 것을 극서(極西)로 하고, 두만강이 바다에 들어간 것을 극동(極東)이라 한 뒤에 8도(八道) 360주를 바둑판 위에 바둑알을 뒤죽박죽 펴놓듯이 벌여 놓고 억지로 지점(指點)하며 산천(山川)ㆍ정로(程路)를 의논하는 것이 거의 거울을 엎어 놓고 비춰지기를 구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어서
직방씨(職方氏)의 웃음소리가 되지 않을 것이 드물다.
지도가 이렇게 된 것은 다만 백두산(白頭山)의 두 줄기 물이 서쪽으로 흘러서 압록이 되고, 동쪽으로 흘러서 두만이 된다는 옛말만을 가지고 고집부린 데 불과하다. 두 물이 동서로 나누어졌다 한 것은 특별히 최초(最初)에 발원(發源)한 곳을 가지고 말한 것이요, 그 말류(末流)가 흘러간 곳까지는 의논하지 아니했음을 알지 못함이다.
시험해 보면 두만강이 온성(穩城)으로 향한 것은 혹은 동으로 혹은 북으로 흘러서 미철보(美鐵堡)에 다다른 뒤에, 곧 남쪽으로 쏟아져 서수라(西水羅)에 가고, 압록강은 그 흐름이 점점 길어져서 삼수(三水)ㆍ갑산(甲山)과 폐사군(廢四郡)을 지날 즈음에는 허다한 굴곡이 강계ㆍ위원(渭原)을 엇갈려서 오히려 서남쪽을 향하다가 창성(昌城) 아래에 와서는 곧바로 남쪽으로 쏟아져 통군정(統軍亭)의 서쪽을 싸고 돌아 대총강(大總江)으로 들어간다. 때문에 우정(郵亭)들이 6진(六鎭)에 나가는 자를 모두들 ‘북상(北上)한다.’ 하고, 연경(燕京)을 향하여 가는 사신을 모두 ‘서도(西渡)한다.’ 하니, 이로 본다면 나의 말이 터무니없는 말은 아니다.”
내가 묻기를,
“그대는 융복사(隆福寺)를 보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아직 못 보았습니다.”
하므로, 내가,
“들으니, 융복사는 인수방(仁壽坊) 동쪽 사패루(四牌樓) 마시(馬市) 북쪽에 있는데, 명(明) 나라 경태(景泰) 때에 남문 안의 상봉전(翔鳳殿) 목석(木石)을 거두어다 지었고, 옹정(雍正) 때에 중수(重修)하여 라마승(喇嘛僧)을 살도록 하였다. 그리고 매월 9일과 10일에는 묘시(廟市)가 서는데 백화(百貨)가 많기로는 여러 시장의 으뜸이라 한다. 또 들으니, 친왕(親王)과 벼슬하는 귀인들도 몸소 많이 가서 골동품ㆍ진보(珍寶)ㆍ서화(書畫) 유(類)를 찾는다 하는데 송광웅(宋光熊)의 시에, ‘옛 노리개 좋은 보물 많기도 하여 전대 속 가득하던 황금 다 녹나났네.[古玩珍奇百物饒 黃金滿橐儘堪鎖]’라 한 것이 곧 이 지방이다.
중주(中州)의 재상(宰相)들도 모두 다사(茶肆)ㆍ주방(酒房)ㆍ청루(靑樓)ㆍ화시(貨市)에 출입하는데 이른바 조선(朝鮮)의 양반(兩班)들은 스스로 표치(標致)만을 높여 중국에 와서 유람할 때에도 오히려 남들이 보고 들을까 싶어 가지 못하는 곳이 있었다. 내가
양한(養漢)들이 사는 곳을 슬며시 한 번 가보려 했더니, 마두배(馬頭輩)가 나를 향하고 큰소리로 하는 말이, ‘노야(老爺)의 행동이 옳지 못합니다.’ 하므로 나도 그 말을 듣고 물러나와 융복사에 갔을 뿐 아직 보지 못하였다. 이렇게 조선 사람은 촌스럽고 어둡지 않은 사람이 없으니, 어찌 한탄스럽지 않은가?”
하였다. 한 주부가 말하기를,
“만부(灣府)로부터 이곳에 올 때까지 방향은 알지 못했으나 사람마다, ‘산해관(山海關) 이동은 황성(皇城)에 비하여 심히 춥다.’고 하니, 귀로(歸路)에 추위를 미리 염려하셔야 합니다.”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요동에서 심양까지는 축방(丑方)으로 향(向)하고, 심양에서 고가자(孤家子)까지는 술방(戌方)으로 향하고, 고가자에서 산해관까지는 오미(午未)간으로 따라가는데, 산해관 이동은 바다와의 거리가 5~10리에 불과하여 좌측으로 끼고 가자면 해풍(海風)을 쏘이게 되어 본래 추운 지방이라고 한다.”
하였다.
힘들게 원문인용 해 놓고선...정작 제 특기인 제 주관적 수다를 않 떨어 놓으면 섭섭해...
저의 발해 지명에 대한 사설을 늘어놔 보겠습니다.
발해(渤海)...
우쩍 일어난 바다.
막말로...남성의 성기가 발기한 것 같이 우뚝 솟은 바다...
그 한자를 적절히 적용한 지명유래라면...
발해는 상대적으로 우뚝 솟은 고지대에 위치한 내륙해란 인상이 느껴집니다.
맨 위의 글에서 발해를 기울여 세상을 씻어 버린단 표현을 보건데...
내륙해(내륙지류=강줄기 중간의 바다?)라서...그 범위가 대충 둥그스름한 바다로 한게지워졌기에...
그를 솥단지 같이 번쩍 들어 기울인단 표현을 한 것이라 전 이해합니다.
중국 출판의 지명사전류 말고...
우리선조님들도 이런 글을 남기셨단 점 ...조상님들께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이에 이의있으신 선생님들의 조언을 달게 받겠습니다.
첫댓글 "연경은 북방 한 모퉁이 땅에 불과하고, 산천은 의무려산과 발해(渤海)로서 역시 지류(支流)와 여맥(餘脈)일 뿐이며"
의무려산이 어디에 있는것인가요 결코 발해는 신강~감숙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것입니다.
연경은 연나라가 있던 고유 방향이니...대륙조선(중원)의 서북방이라 봅니다.
고로 거기에 있었단 지류(발해)는...현 청해성 청해나 그 주변 내륙호들 중 어느것이라 봅니다.
그럼 의무려산이라면...그 청해의 북쪽 감숙의 남단 백설이 여름에도 쌓인...서북에서 동남으로 몇천리 길게 뻗은 고산산맥지대라 봅니다.
"동쪽의 발해(渤海)를 기울여 씻어서~, 서쪽의 곤륜(崑崙)을 밀어내고~"라는 것은 발해가 동쪽 끝에 있었다는것이 되는 군요 결코 신강 ~감숙 지경에 없었다는 것이 됨니다. 아무튼 홍진영 선생님이 발해가 서쪽에 있었다는 문문 선생님의 학설에 대하여 학설지지를 철회하고, 반대하여 동쪽의 내륙해로 변경한 것은 큰 진전이 있었던 것으로 평가합니다. 펌하느라고 수고하셨습니다.
중심감각을 잡아 주십시요...
고려기준 서쪽에 곤륜...동쪽에 발해이니...곤륜산 부터 청해지역까지로 봄이 적당한게...
현재의 발해같은 대해가 아닌,..지류...지류라 분명 명기했습니다.
글의 이해력이 부족하시는군요 "東傾溟渤而洗六合 /西蹴崐崘而廓九區" 동쪽에는 溟渤이며, 서쪽에는 崐崘으로 서로 대조되는 문장입니다. 그러니 서쪽 끝단에 있는 곤륜과 대조하여 동쪽 끝단 발해를 설명한 것입니다.
현재 답답하신건 박선생님이십니다.
박선생님은 원문을 이미 고정관념을 가지고서 보셔서 제 말을 이해하질 못하시는겁니다.
즉, 박선생님은 고려의 강역을 이미 중원 동부로 뇌리에 각인시키고 계시기에...당대 현 만주는 금나라의 동쪽 강역였단 시대적 상황을 잊으시고 계신겁니다.
윗 글을 기존의 선입관없이 보면...고려는 곤륜산을 서쪽 경계로한 나라요...
동쪽의 발해를 동쪽 경계로 한 나라..즉 당대 서하(탕구트)란 얘기고...그 동쪽 발해는 지금같은 창해(대양)가 아닌...지류(내륙해)중 하나란 말이 의미가 크단 겁니다.
표절의 예를 들겠습니다.
명발溟海이라는 표현은 현대의 저작권 관점으로 보면 표절인 것입니다.
남조 송나라의 포조 《대군자유소사》에서, [築山擬蓬壺 , 穿池類溟渤]
당 리섭 《각귀파릉도중주필기당지언》시에서, [後輩無勞續出頭,坳塘不合窺溟渤]
지금 반도의 대학 강단에서는 논문 표절이 다반사이듯이 옛선비들도 좋은 글귀나 시귀의 구절들은 차용하곤 하였습니다.
하기사 당시엔 표절이라는 관념이 없었기 때문에 현대의 관점에서 비판하여서는 안될것이라 생각됨니다.
긴존 강단사학 방식으로...이러실 줄 알었습니다.
자기나라 국토 경계를 넓였단 지나라 지명에 대한 설명에...왜 남의나라 지명을 궂이 인용했을까는 생각도 않하십니다.
당대 고려의 강역과 남조 송나라의 강역이 대충 같았기에 그 표현을 다시 빌어썼단 발상은 왜 못하시는지 답답합니다.
동해를 쏟아 부어 부상을 씻어 버리고...태산을 밀어 국토를 넓힌단 말은 왜 않 썼을까요...?
거긴 공려땅이 아닌 금나라 동부영토기 때문이겠져...
우리 조상이 쓴 글은 무조건 중원의 표절이란 고정관념에서 벋어나시길 부탁드립니다.
위의 명발溟海의 표절을 제가 어떻게 알아내었을까요? 홍진영 선생님이 그렇게 싫허하는 <한어대사전>에서 찾아 낸 것입니다. 참아이러니 하죠....
또 알고보면 西蹴崐崘而廓九區에서 西蹴崐崘도 표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蹴崐崘은 머 쉬운 표현 이라 쉽게 사용할 수 있는 문장이기는 하죠
《진기(晉紀)》에서 [蹴崐崘使西倒]라고 하였습니다.
대단하시고 부럽습니다.
모든 역사서의 지명기준 잣대인 동북공정의 중화인들 한어대사전을 가지고계셔서요...
발해(渤海)는 지류(支流)일 뿐이다란 중요한 대목은 한어대사전엔 않 나오시나 봅니다...?
젤 중요한 내용인데요...
대륙조선사 연구 간단하군요...
구한말기 대륙조선(청)을 해체...파녈시키고... 새 주인이 됀 신해혁명(천지회똘마니들)세력들부터 지속됀 대륙지명 왜곡 총람인 한어대사전만 전도사 아주머님들 같이 옆꾸리 끼고 다니면서...
역사연구가들 글이 이 틀에 맞으면 딩동뎅~합격이십니다...한어대사전에 나온 내용입니다.
한어대사전 내용과 다르면...땡...!...출처가 불분명 합니다...ㅡ. .ㅡ...
한자실력 현재 세계최강들이신 중화공산당 검열 바이블 한어대사전에 다르게 나온 내용입니다...
하면 역사연구 간단하니여...^. .^
부럽습니다.
투정 부리시는군요
한어대사전은 누누히 말씀드리지만 인용서에 불과합니다.
한미 FTA 일부 독소 조항 때문에 FTA는 무조건 나쁘다는 논리와 같습니다.
왜 한어 대사전에 나오는 원전들은 왜 전혀 검토하시지 않는지요?
저는 환단고기 원문 텍스트를 전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어디서 구했나하면 중국얘들 인터넷에서 얻은 것입니다. 반도 인터넷에서는 구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 홍진영님의 글을 보시기 바랍니다. 달랑 해석본만 올려놓고 이것은 정말 성의 없는 것입니다. 원문텍스틀을 못 구한다고여? 그럼 저는 어떻게 구하였을까요?
이것은 번역본만 중시하는 홍진영님과 원문을 중시하는 저의 차이점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이건 또 무슨 말씀이신지요...?
한국고전번역원에 있는건 원문취급 못받고...중국 인터넷 서점건 원문이다...?
대단하십니다.
"고려=송" 인지 "고려>송" 인지 먼저 정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조상"은 누구입니까? 반도에 살았던 사람입니까 대륙에 살았던 사람입니까? 김종윤 선생님의 저서 "한국인에게 역사는 있는가? " 라는 책은 한반도에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김종윤 선생님 주장에 따르면 홍진영 선생님의 "우리 조상"이란 것은 지금의 대륙에 있었습니다.
홍진영 선생님이 말하는 우리조상이란 것이 현 김종윤 선생님의 학설을 부정하고 반도에 살았던 조상을 말하는 것이라면
다시 말씀드리지만 서역파들로 부터 "반도주의자"로 낙인 될 수 있습니다.
삼국사 고려사 조선사를 쓴 분들은 대륙조선 조상분들...
현 반도는...그 분들이 극동의 땅으로 이주한 극동조선 조선(고려)선조님들...
전 대륙과 한반도 둘 다 대륙고려(조선)의 후예들이라 봅니다.] 뭘 궂이 둘로 나눌것도 없습니다.
꼭히 나누자면...현재 중원땅을 차지하고 있는 지배세력들이...대륙조선 파탄낸 주범들이자 수혜자인 서남방 짱께(쭝가르)족들이다란 저의 줄기찬 주장을 보텝니다.
달랑 해석본만 내놓고 본인의 일반적 주장으로 남을 호도하지말고 이왕이면 원문을 올려 다른사람들도 검증하게 하여야 합니다.
역사 연구는 남이 내놓은 번역본만 보는 사람들은 남의 주장에 속아 넘어갈 수 있습니다.
저도 예전에는 그러하였기에 경험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홍진영 선생님도 예전에는 최두환 선생님의 학설을 따르다가
지금은 그것을 부정하고 문무선생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물론 문무 선생님의 주장이 전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백날 남의 번역된 문장만 보면 남에게 속고 자신도 속이는 것입니다.
속지 않으려면 실력을 갖추어야합니다. 제가 한자 실력이나 자랑하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님니다
무슨 원문이 없다 하십니까...?
중국 인터넷 서점글은 원문이고...우리 조상님들이 쓰신걸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올린건 원문이 아니란 말씀
도대체 뭐가 원문의 기준입니까...?...저 위에 한자로 됀 글이 분명 원문이라 거기 적혀있던데...
그게 원문이 아니라고 한어대사전에 벌써 나왔습니까...?
저 위의 한국고전번역원 번역과 원문을비교해 어디 부분이 번역이 턱 없이 잘 못 됐는가 설명도 없이...
무조건 번역문만 올렸단 말씀은 도데체 무슨 말씀이신지요...?
저 위의 한자가 왜 원문이 아니신지요...?
원문을 같이 올렸는데도 원문이 없다...실력을 쌓아라...이거 도대체 어느나라 화법인지요...?
그럼...박선생님이 중국 인터넷 서점에서 구입하신 원문은...
당대 학자들이 직접 붓으로 적은 원문인가요...?..산해경 중간저자 곽박의 글씨도 가지고 계시단 말씀이신지요...?
왜 우리 한국고전번역원 원문은 원문취금을 않 하신단 겁니까...?
홍진영 선생님이 올리신 것은 이백순(李百順)이 한문으로 쓴글을 한글로 번역한 번역문입니다.
원전의 내용은 門下。台星赫赫。帝座以之光明。嵩岳巍巍。地維因而鎭定。其有股肱良佐。心膂大臣。旣成匡弼之功。盍示褒嘉之典。肆涓穀旦。誕告理廷。
具官李延壽。鑑識通明。操修潔正。吏飾文文飾吏。博哉稽古之謀。寬濟猛猛濟寬。大矣隨時之義。少階門蔭。便躡天庭。旣歷事於累朝。亦久勞於百職。三方攬轡。仁恩暖於春陽。二塞擁麾。肅殺侔於秋露。荐更中外。備閱險夷。遠耀使華。金人問其家世。都知兵事。丹寇畏其威名。飛英早代於龍喉。奏事?每含於鷄舌。再持霜憲。三入天曹。
내.중원 공산당 역사사이트것만 원전이고...
우리의 사서들은 그걸 다 한문으로 다시 베낀 번역서들입니다.
이런말을 듣고 싶으신지요...?
고전번역원의 저 한자들은...원문이 왜 아니냔 겁니다...?
사서를 쓸 때...중국 누구 누구는 이렇게 적었다...
그걸 보건데 이게 맞는듯 하다...이런 식으로 역사서를 썼다면...그게 표절이 됀단 겁니까...?
그럼 수 많은 중국사서들에...단군신화나 고주몽,박혁거세 신화를 인용했는데...
그건 중국애들이 조선거 표절한 것이겠습니다...?
幄謀甞預於紫樞。廟筭久專於黃閣。補山甫之衮。幾費巧心。和傅說之梅。盡調衆口。予嘉乃德。民具爾瞻。冢宰十年。高翔荀勖之鳳。常伯三載。榮珥日磾之蟬。冠冕百寮。棟樑一國。是用先備官資之極峻。更加爵號之增崇。可特授三重大匡。餘並如故。
?具官崔瑀。識際人天。才兼將相。東傾溟渤而洗六合。有洒淸天下之心。西蹴崐崘而廓九區。懷開拓寰中之志。務行公道。期致大平。朕於是寄光弼以?安危。任裴度於文武。卿所以誠深許國。
意切愛君。若金鼇之戴山屹立蒼波之上。如玉龍之挾日高飛黃道之前。臨大節而不移。振頹綱而復正。兼臺省裁萬務。游刃有餘。揔吏兵察百僚。容光必照。櫛垢爬癢。激濁揚淸。使汚俗懷曾史之情。化貪夫作夷齊之操。昨値兵塵之北漲。轉籌折千里之衝。近聞倭舶之南窺。弄丸解兩家之難。此非予力。皆是乃休。紫禁之城煨燼則遣門客而經營。大倉之粟紅腐則開地囷而儲峙。凡百規畫。出一胷襟。盡還太祖之風。不墜先公之業。有如金刀之漢。由丙吉而中興。木斗之唐。賴子儀而再造。是用錫報功之懿號。加馭貴之美階。可特授匡辟翊戴功臣。餘並如故。
한자실력과 인용출처...자기 주체적 해석능력...이걸 자꾸 강조하시는데...
제 보기에 현재까지의 수 많은 대륙조선연구가들 중...이 분야에선 문무님이 단연 최고입니다.
박선생님 글과 문무님의 글을 나란히 한 번 비교해 보십시오...
문무님은 여러 사서들을 모두 나열해 공통점을 유출하시는 반면...
박선생님의 예의 전가의 보도인 중국인들 지명사전만..한어 대사전류만 드리 대십니다.
그새 또 보십시오...
문무님은...철저히 원전에 대한 친절한 주석을 다는데...
박선생님은 딸랑 한자원문만 올리고...한 번 풀어 봐라...니깟것들이 그 짧은 한자실력으로 역사를 논하겠다고,.,?
란...조금 안다는 먹물쟁이들 특유의 오만함이 글 전체에 진동합니다.
번역문은 이미 홍선생님이 올렸는데 제가 무엇때문에 다시올려야 하는것인가요? 이치에 없는 말씀만 하시는 군요
이백순 선생님의 글 한문 원문을 홍진영 선생님이 직접 번역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번역자의 의도적인 해석에 따라서 역사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에게 똑 같은 설명을 반복하게 만드시는 군요
전 한국 고전번역원의 번역을 그 강역을 한반도로 해설하는 해제부분만 빼곤 대체적으로 다 신뢰합니다.
딱,보니 대체적으로 지역이긴 해도 아주 잘 썼습니다.
뭐가 문제인지는 박선생님이 불만인 부분을 지적해 보십시오.
아. 윗 글중 麻制"부분의 원문없음을 이르신 것이군요...?..죄송합니다...다시 올렸습니다.
틀림없이 원문을 올렸는데...제가 뭘 작동을 잘못해 달아난 모냥입니다.
책 자랑하려고 하는 것이 아님니다. 저에게 열권이 넘는 산해경에 대한 책이 있습니다. 맹자도 그 정도 되는 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도의 산해경 번역문은 역자에 따라 번역문이 다르며 맹자도 그러합니다.
대륙의 산해경 주석서도 조금씩 주장하는것이 다름니다. 사서 3경에 속하는 맹자도 주석이 다르지요.
반도의 산해경이 번역문이 왜 다른지 대륙의 산해경 주석서들에서 찾아서 그 이유를 찾아봅니다.
맹자는 유학 정통으로 치는 주희의 맹자집주가 있지만 어떤 책은 맹자집주를 은근히 비판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맛에 맹자라는 책이 더 재미 있어지는 것입니다.
제아무리 태고적 원전이라도...박선생님 말씀대로...누가 주석을 달았냐로 내용이 뒤짚힙니다.
그러기에 저는 대륙조선 파괴세력들의 후손들인 중국 국민당&공산당이 교열한 사서들은 반도조선 사서들보다 믿기 어렵단 말씀을 드리는 중입니다.
자... 원전이 누구게 끝발이 세다는 식의 지리한 댓글다툼 말고...
본연의 역사연구로 돌아가...燕京不過北方一隅之地。山川則醫閭,渤海亦是支流餘脈而已..연경은 북방의 구텡이에 불과하고...발해 역시 지류(支流)일 뿐이단 저 원문의 문장에 대한 해설이 아직 없으셨습니다.
이게 이 글의 핵심인데...정작 여기에 대한 논평이 없으셨습니다.
발해가 현재의 발해라면...대양(大洋)인데...어찌 지류일 뿐이란 말을 썼을까요...?...전 내륙강줄기에 낀 내륙해란 설명 같습니다만...?
支流라는 것은 내륙해는 아님니다. 어떤 하천의 본류에서 갈라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국책을 들멱여서 죄송합니다만 문무 선생님도 가끔인용하는책입니다.<사기지명고>에서 [播為九河,同為逆河 入於渤海]라고하였습니다.
"구하로 나뉘어지니 역하와 같고 발해로 들어간다" 하였습니다. 水名으로서 발해는 당시에는 구하 즉 역하의 지류인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황하 하구의 흐름은 시대별로 바뀌었기 때문에 당시의 황하의 흐름과 고증하기 힘든 면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勃이란 것은 우공시에는 황하하구가 넘쳐기에 발해의 勃과 역하의 逆은 상통한 면이 있다고할 수 있습니다.
지류 는 내륙에서 나 있는 것이라는 것은 확고부동한 상식이라 왈가 왈부의 여지 가 없는것 입니다 ㅇ수많은 지류들이 일단 경해로 들어가면 하나의 경해일 뿐 입니다 [사기지명고]의 발해는 산동성 에 있는 발해로 황해 라고 생각됩니다 번역은 ''' 갈라지면 구하가 되고 합쳐지면 역하 인데 발해로 들어간다 ''' 입니다
산해경의 발해에 대한 해석은 漢 때의 사가들은 조금 당황한듯 합니다. 후대에는 이 漢 때의 주석서를 비판하고 그 후대는
또 그 주석서를 비판하곤 합니다. 淸 때에는 실증적인 고증학 학풍이 일어나 이러한 학풍이 극에 달하였습니다.
산해경의 발해가 서쪽 신강~감숙에 있었다는 주장은 근세에 극히 소수의 일본학자도 주장하는 바가 있었습니다.
현 일본도 한자 문화권이기 때문에 그런 주장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漢때라든지 淸 때의 발해가 산해경에 글에서
나오는 발해와 일치하였다면 그런 주장이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漢나라 이후 발해는 적어도 계속 지금의 산동 하북 근처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건 하루죙일 또 댓글다툼해도 다람쥐 챗바퀴니...
위의 본문글의 발해는 지류일 뿐이란 구절에 대한 구체적 해석을 부탁드립니다.
그게 맞든 않 맞든...저 글을 쓴 당시의 저자가 그렇게 썼단 것은...대양이 아닌 내륙해를 지칭한 것이라 전 본겁니다.
여기에 대해 논평을 좀 해 주십시오.
그리고..이전은 몰라도... 청 말기의 그 실증학 유행당시는...
제가 보기엔 대륙조선(청)의 파멸시기이니...그 저자들 또한...대륙조선인들이 아닌...이방인들이라 전 생각합니다.
즉, 태평천국 몰살한 세력의 후예...신해혁명 주도한 세력들의 조상인 1960년 북경파괴 전후의 세력들과 그 학자들은...정체가 심히 의심돼는 자들과 학설이라 전 생각합니다.
어쨋거나 위 문장의 발해는 지류일 뿐이다에 대한..진위를 떠난 그 문장상으로만의 풀이를 부탁드립니다.
그만 하죠 홍선생님과의 논쟁은 제게 보탬이 없습니다. 원전따로 자기주장 따로이니 그렇다는 것입니다.
사료 원전에 없는 이야기는 소설입니다. 저는 소설에 관해서는 상상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홍진영 선생님과 논쟁에세 이길 수 없겠습니다.
다만 혹자는 홍진영님의 소설을 진짜처럼 생각하여 믿는 사람들도 없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게 걱정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소설얘기가 아닙니다.
박선생님이 그리 주장하신 원전 내용이고...
그 내용 중 발해는 지류일 뿐이란 원전내용의 해석을 부탁드린겁니다.
확실하게 하셔야지 정작 원전내용 올려 해석을 부탁했는데 왠 난데없이 소설이라 호도하시는지요...?
발해에 관해 산해경을 위주로 보면 발해는 신장 감숙지역에 있습니다 발해는 솟구치는 물이라는 뜻 입니다 발해군도 있는데 이는 솟구치는 물을 지명으로 쓴 겁니다 솟구치는 물은 우임금이 속에다 수로공사를 하고 돌로 산을 만들어 물의 거센 힘을 적절 하게 만든 적석산을 통과하여 나오는 물을 말하는 것인데 이 물을 발해라고 합니다 산동성의 발해는 대조영의 발해가 산동성까지 였다고 생각되는데 지명이 이동됬거나 아니면 고의적 인 왜곡 이라 생각 됩니다 그 외 발하시호가 발해 아닌가 생각 되기도 하지만 발하시 는 (밝해) 로 보는게 더 타당합니다
그리고 박자우님 이 소장하고 계신 책들이 고서이며 귀중한 책들이고 그 책을 집필한 사람들은 거짓없이 사실대로 기술 했겠지요 그러나 하화 가 동이역사를 감추고 왜곡한 것이 그책이 나온 때 보다 더 오래 된 일 이기에 그점을 간과하지말고 참작해서 보아야 합니다
자금쇄술 참 재미 있군요 조선의 지도 형태를 논하는데 어디인지 알겠네요 우리세대는 한반도 로 오인해 들을거 같지만 조금만 잘 살펴보면 한반도가 아닙니다 여러분들도 관심 가지시고 정독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두고 두고 여러번 읽어봐야 되겠습니다
사람이 옆으로 구부정하게 서있는 형태의 조선지도 그러면서 서북쪽에서 동남을 보고 있는 형태라고 합니다 영남의 대마도와 호남의 탐라는 발 뒤굼치에 해당 한답니다 번역문에는 두발을 괴고 있는 형태라고 했지만 두발의 뒤굼치라고 번역하는게 한자의 의의에 맞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