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인: 매리안 드레서(Marianne Dresser)의 선불교 수행은 1986년 시월에 방문한 일본, 동경에 있는 작은 절에서 방문 그룹의 좌선을 지도하던 미국계 비구니 지호(Jiho)스님과, 후지산 중에 위치한 절, 서악원(Zuigakuin瑞岳院)에서 다이교 모리야마 선사(Daigyo Moriyama Roshi)의 제자로 수행하는 프랑스계 비구니, 조신 바쇼 스님(Joshin Bachoux Sensei)과의 만남을 통해서 시작되었다. 지성, 감성, 그리고 중독성 등의 다양한 성향을 지닌 여성 동성애자인 매리안에게 일본 절에서 짧은 기간의 수행 체험은 선불교에 대한 강한 호기심을 넘어 발심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경험이었다. 그 후, 매리안은 샌프란시스코의 집 근처에 있는 하트포드 젠 센터(Hartford Street Zen Center)에서, 불평등하고 탐욕스러운 세상 속에서 고통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조용히 자비 수행을 하다가 세상을 마친 선수행자이자 그녀의 스승이었던, 이싼(Issan)과의 만남도 그녀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부장적인 종교로 알려진 불교 전통 안에서, 여성 동성애자인 매리안은 수행자들 속에서 부정적인 주목을 받으며 그녀의 선수행이 불편하고 낙담스러운 경험임을 인식하게 되었다. 매리안은 여성성을 포함한 인간성에 관한 이슈는 개인적인 경험의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집단적인 차원을 형성하고 있는 사회, 문화, 그리고 그 집단의 심리 전반에 대한 깊이 있는 의문과 통찰로부터 이해되어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맥락에서 그녀는 질문을 던진다. “서양에서 여성 불자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불교의 발전과 변화에 어떠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을까?”
“가장자리에 서 있는 서양 여성 불자들의 현대적 시각,”이 책은 바로 그러한 내용을 토론하는 장이다. 미국 여성 수행자들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관심들을 살펴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성별, 인종, 계급 등의 이슈들; 문벌, 전통, 권위에 대한 불교의 제도와 틀; 승가와 재가의 수행, 심리적 관점들과 감정들의 역할; 그리고, 각 문화 간의 적응과 전용 등에 관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또한, 그들의 다양한 시각들은 각각의 삶의 경험과 연결되면서, 그 내용의 깊이와 명료함을 드러내고 있다. 이 책에서, 매리안은, 역사 속에서 소외되고,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던 목소리들, 즉 여성들뿐만 아니라 성 소수자, 동성애자들과 양성애자들, 더 나아가서, 미국 흑인, 라틴계와 아시아계 미국인, 그리고 미국 원주민 등의 유색인종들과 노동자 계층, 또한 빈곤자들에게까지 불교 토론의 장을 열어주고자 하는 의도를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에게 들려져야 할 필요가 있을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젠 윌리스가 지적한 것처럼, “그 사람들이 불교에 제공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 책은 미국 여성 불자들의 경험과 우세한 담론의 풍요로운 여백에서 나온 시각들의 단면을 드러내고 있다. 가장자리로부터의 광경은 전경(全景)이고, 맑으며, 얻어 가진 지식이나 옳다고 하는 시각들에 대한 성문화된 관념으로부터 덜 방해받는 광경이다. 이러한 광경은 가장자리에 서서 말할 수 있는 용기에서 나온다. 같은 맥락에서, 미란다 쇼(Miranda Shaw)는 우리 문화 속에서, 여러모로 여성의 정체성이 공격받고, 비하되며, 이렇게 산산 조각난 자부심은 반드시 자발적으로 회복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미란다 쇼와 더불어 이 책의 다른 필자들도 여성 불자들이 불교 수행을 통해서 그러한 목표를 다져가야 한다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제안하고 있다. 매리안은, 따라서, 이 책의 달성은 불교의 가장 핵심에서 여성의 정당한 자리를 되찾는 것이라고 끝맺음한다.
미란다 쇼(Miranda Shaw)
“자생적이며, 지혜롭고, 열정적인, 미국의 다키니들”
(Wild, Wise, Passionate: Dakinis in America)
미란다 쇼
필자: 미란다 쇼는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는 버지니아주에 있는 리치먼드 대학의 종교학과에서“불교와 여신 전통들”을 가르치고 있다. 히말라야 지역으로 여행하면서, 그녀의 주요 연구 분야는 신성한 춤, 여신들, 그리고 그곳에 존재하고 있는 여성들의 고대 영적 전통 등에 관한 내용이다. 쇼는 이 글에서 오늘날 미국에서 티베트 불교로 잘 알려진 바즈라야나 불교(Vajrayana Buddhism) 전통의 기원과 내용을 소개하고, 이 책의 중점적인 이슈인 여성성의 주제와 연결하여 독자들에게 이 책의 첫 번째 글로서의 유용한 내용을 제공하고 있다.
탄트라(Tantra, 좌도 밀교)는 인도의 선사시대부터 뿌리를 내려온 원시 신앙으로, 7세기경에 불교와 합류하면서 오늘날 탄트라 불교(Tantric Buddhism, 밀교) 또는 “금강승”을 의미하는 바즈라야나 불교(Vajrayana Buddhism)라고 불리고 있다. 가장 초기 문서들에 의하면, 탄트라 활동의 기원은 한적한 외딴 시골의 숲, 화장터, 또는 요가 수행 절에서 함께 수행하는 여성들의 집단에서 유래 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비 위계적 체계 안에서 함께 축제를 베풀고, 서로 영적 교류를 했다; 서로에게 참선과 요가를 가르쳤고, 그들을 궁극적인 현실로 이끄는 성스러운 춤과 비밀스러운 노래들을 통해 서로 영감을 나누었다.
*[각주: 산스크리트어 “탄트라”는 무명의 상태에서 깨우침의 상태로 가는 “연속성” 혹은 “끊어지지
않는 시냇물”을 의미하는 말로 두 가지 뜻이 있다: 일련의 토대, 길, 결과, 그리고 탄트라 여러 층의 연속성을 설명하는 문헌을 가리킨다.]
초기 여성 탄트라 수행자들을 “요기니(yogini)” 또는 “다키니(dakini)” 라고 부른다. “요기니”는 여성 요가 수행자, 또는 영적으로 뛰어난 여성을 의미하고, “나른다”(to fly)는 의미에서 유래된 “다키니”는 문자 그대로 “나르는 여성”이라고 번역된다. 이는 자유의 날아다님; 즉 사회적 속박으로부터의 자유, 또는 궁극적인 현실을 알게 됨으로써 오는 자유, 그 자유가 날아다닌다는 의미이다. 문헌에는 이러한 여성들은 말과 행동, 아무것에도 제약받는 바가 없기 때문에 자부심과 교만성이 강하고, 공격적이고 지배적이며, 겁이 없고 자신들의 표독함에 도취하여있다고 서술되어 있다. 그들의 목표는 남성의 독선주의를 주저하지 않고 비판하는 것이었고, 남성들도 그들의 제자로 받아들여 탄트라 전통을 전수했다.
마침내는 성별, 감각들, 성적 취향에 대한 획기적이고 새로운 이해로 불교를 변혁시켰고, 그들의 가르침들과 수행들은 오늘날 살아있는 전통으로서 티베트와 네팔 불교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탄트라에서 시작되어 티베트 금강승 불교 전통 안에서 지켜온 여성의 개척적인 역할과 지속적인 지도력은 미국 내에서 많은 형태로 이어졌고, 따라서, 오늘날 여성의 어떠한 권위도 서구 페미니즘에 의해 새롭게 개발된 것이 아니라, 이 전통을 일으킨 원동력의 회복으로 이해되고 있다. 여성 수행자들에게 종교적 행위나 예술적 창조, 또는 학문적 방법으로 남성 중심의 편견으로 손상된 탄트라 전통을 복구하는 것은 고귀한 도전이고 필수적인 일이다. 이 전통을 영속시키기 위해서, 미국 금강승 여성 불자들은 요기니 또는 다키니들의 기본적인 종교 의식인 주문, 명상, 염불, 기도, 암송 등의 수행을 지속하며, 여성들 모두가 함께 모여 서로 나눌 수 있는 통찰력과 능숙한 기량이 있음을 인식함으로써 자신들의 강한 힘을 발견하는 것이다. 쇼는 우리 문화 속에서, 여러모로 여성의 정체성이 비하되고, 병적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그러한 비하의 많은 형태가 종교적 뿌리를 가지고 있고, 그러한 여성들의 산산 조각난 자부심은 반드시 자발적으로 회복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자신에 대한 불안감이나 불 확신은 자아의 왜곡이고 깨달음으로 가는 장애일 뿐이라고 한다. 탄트라 수행 방법에서 말하는 신성한 자부심은 특수한 형태의 자부심으로서, 이것은 교만과는 질적으로 다른 자존감으로서, 여성 안에 있는 신성한 여성성을 발견할 때 생기는 견고하고, 흔들림이 없는 자부심이다.
오랫동안 여성의 강한 존경 대상으로, 명상의 객관적 실체로 역할을 하는 바즈라요기니 (Vajrayogini), 바즈라바라히(Vajravarahi), 나이라트미야(Nairatmya)와 같은 금강승의 원형적인 여성 신들은 여성성에 대한 긍정적 이해를 성장시키는 힘의 근원이다. 이들은 아름답고, 감각적이며, 성적으로 활발하면서, 동시에 잘 단련이 되어 영적으로는 깨달은 상태이다. 그러나 이 여성 신들은 일반 통념의 이분법적인 범주로서 인간의 모든 면을 통합하는 남성들의 부적절한 해석의 틀 안에서 이해되어 왔기 때문에, 그들 여성성의 완전함이나 진위성에 대한 통찰이 전달되지 못했다. 이 여성 신들의 형상은 모든 여성의 신적인 잠재력을 묘사하고 있고, 그들의 내적인 신성을 인식한 여성들은 깨달음을 성취하여, 살아있는 여신 또는 붓다 들로 드러난다. 이와 같은 형상들을 떠올리며 하는 선 수행은 여성의 육체와 영혼에 다시 활기를 불어넣고, 그녀의 신적인 잠재력을 자각시키며, 영적 수행과 삶의 목적을 충족시키는 열정을 다시 불러일으킨다. 금강승 여성 수행승(guru)의 지도에 따라 입문 의식(initiation ceremony)을 치른 여성은 여신의 에너지를 받고 그 여신이 그들 안에서 구현되는데, 이것은 곧, 성공적인 수행을 시작함으로써 그 여성의 내면에서 여신의 깨달은 성품을 자각하게 되어 능력과 에너지, 그리고 진리의 궁극적 근원으로 다가가게 됨을 의미한다.
옛적부터 단련된 전통 수행 방법으로서, 여성의 몸을 다시 인식시키고, 양성시키는 탄트라의 성스러운 춤은 티베트와 네팔에서 보존되어왔고, 미국에서도 그 비밀스러운 형태들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석을 통해서 발전되고 있다. 미란다 쇼는 네팔에서의 자신의 체험을 통해, 탄트라 춤을 “변혁을 일으키는 요가(yoga of transformation)”로 소개하고 있다. 쇼는 직접 춤을 배우면서, 그녀의 특별한 연구 대상인 푸른색 몸의 여성 붓다, 나이라트미아의 모습 하나하나가 더 이상 이차원적인 평면상의 그림이나 조각이 아니라, 그녀의 몸의 일부가 되어 살아서 움직이고 있음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 모습들은 하늘에서도, 구름 속 에서도, 또는 높은 산 위에서도 그 빛을 발하며, 쇼에게 평온함, 무아(無我), 그리고 공(空)의 경지들을 느끼게 했다. 쇼는 “춤은 여성의 정신(mind), 마음(heart), 그리고 몸(body)을 해방시키고, 신성불가침의 감각을 강화시키어, 변화를 일으키는 강력한 매개체임을 인식했다"고 서술하며 다음과 같이 결론 맺는다.
미국 여성 불자들은, 탄트라 전통의 여성 선지자들이 지혜와 자비, 행복과 자유로서 닦아놓은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 더욱 자유롭고, 영향력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는 여성들로 나아갈 것이다. 그들은, 미국의 다키니로서, 금강승 바즈라야나 불교가 미국 땅에서 모든 중생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고, 행복을 증진시키어, 모두를 자유롭게 하는 불교의 참 목적을 수행해 낼 것을 믿는다.
샐리 지코 티즈데일(Sallie Jiko Tisdale)
“색(色)과 공, 공(空)과 색”
(Form, Emptiness; Emptiness, Form)
샐리 지코 티즈데일
필자: 오레곤에 있는 법운 젠 센터(Dharma Rain Zen Center)의 선사였고, 고인이 된 교겐 칼슨(the late Kyogen Carlson)의 재가 제자인 샐리 지코 티스데일은 현재 법운 젠 센터의 지도법사이며, 동시에 트라이사이클(Tricycle) 불교 잡지의 자문 편집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여성 불자이다. 이 글은 편집인으로서 샐리가 받은 많은 불자의 생각과 의견들을 담은 편지들을 바탕으로 쓴 스스로와의 대화이다.
이 글의 제목, “색과 공, 공과 색”은 이분법적인 용어로 나열되어 있다. 필자, 샐리는 이글에서 이분법의 논리를 사용해서 남성과 여성의 성별(gender) 문제를 집중 조명하며 불교의 본질적 원리에 접근하고 있다. 몇 년 전 불교 승가의 한 모임에서 여러 남녀 신도들과의 대화를 떠올리며 그녀의 글이 시작된다. 들려오는 소리 속에는 어느 여성의 외침, “외롭다,”
곧바로, 다른 남자의 반응, “그게 무슨 소리인지 이해할 수 없다,” 또 다른 편에서는 “성별이 문제다, 성별이 차이를 만든다” 등의 여성과 남성들의 산만하고, 불안정한 소리였다. 마침내 누군가의 소리가 들렸다. “성별은 환상(illusion)일 뿐이다.” 불교 잡지들에 실린 여성들의 이야기들과 그것들에 대한 남성들의 혹독한 비판과 반응들을 통해서 샐리는 성 구별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고, 남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것은 오직 환상이니까 편안하게 받아들이자고도 생각해본다.
“색(form)은 모두 공하다(empty), 그리고 공(空)은 색(色)이다. 완전하고, 어마어마하게 큰, 하나 (One) 안에서, 성차별은 대단히 해롭고, 반드시 거론되어야 한다는 많은 여성의 우려는 괴물다운 망상일까?” 한편으로는 여성들의 고통, 한숨과 눈물 섞인 울부짖음의 많은 이야기가 들려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서로서로 알아주고, 공유된 경험의 특이한 결합으로 느끼는 즐거움도 가진다. 샐리는 외친다; 고유의 여성성과 남성성이 있고, 그 둘은 원래부터 같지 않다는 것은 더욱더 착각이다. “여성적인 것(femaleness)”과 “남성적인 것(maleness)”은 단순히 사회 속에서 만들어진 개념들이며, 그 개념들은 무지와 변화의 연속적인 순환 속에서, 세상을 만들고, 만들어지는 모든 다른 것들과 함께 이 세상에서 생겨났다. 우리의 미로와 같은 복잡한 몸과 마음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나서, 문화와 경험 때문에 “남자들”과 “여자들”이 만들어졌고, 그 개념들을 실행하고, 받아들이며, 그리고 즐거워하는 것은 그러한 분별의 사이(between)에서, 또는 그 너머(beyond)에서 추는 춤이다. 따라서, 성별은 환상(illusion)이 아니고, 행위(karma)이다. 불교 잡지 편집인으로서 샐리가 받은 편지에, 자신을 “선사(Roshi)”라고 자칭하는 한 수행승은 “성별에 대한 내용은 여성 법사들이 만들어 낸 유치한 횡설수설이고, 수행으로만 극복될 수 있는, 억지로 짜 맞춘 개념”이라고 화를 내며, “마음을 하늘만큼 넓게 하여, 남자도 만들지 말고, 여자도 만들지 말아라!”라고 혹평했다. 이에 대하여 샐리는 “이 말들은 어느 쪽 상황도 있는 그대로 알려고 하지 않고, 양쪽 안에서 편리하게 사는 것일 뿐이라는 것을 그 자신은 모르고 있다.”라고 답한다.
현재 안에서 나타난 과거, 그리고 우리가 물려받은 문화적 신념들에 대한 인식은 역사적 상황에 의해 왜곡되어 있고, 그러한 상황은 계속될 것이다; 그것은 아주 미묘한 부분으로, 수행의 중심점이다. 우리는 그냥 서로 보려고만 하지 말고, 함께 완전하게 살려고 해야 한다; 그것은 받아들이며 동시에 행동하는 것이다. 샐리는, 끝으로, 우리가 삶에서 경험하는 모든 분별의 현상들을 통해서 연기적인 중도의 자리를 찾아가는 수행의 길을 강조하며 다음과 같이 이 글을 맺는다.
공(空)과 색(色)의 사이(between), 그리고 그것들을 넘어선(beyond) 자리가 있다; 즉 공즉시색(空卽是色)이고 색즉시공(色卽是空)인 자리, 그곳은 열반(涅槃) 즉 생사(生死)이고, 생사 즉 열반의 자리이다. 그곳에서는 우리가 남자들이고 여자들이다; 남자들도 아니고 여자들도 아니다; 그리고 여자들이며 동시에 남자들이다. 그곳에서는 우리가 서로 둘이 아니면서 또한 둘이다. 특히 사람들의 공동체인 승가에서 어떤 다른 방법으로 함께 우리의 길을 찾을 수 있겠는가?
케이트 오닐(Kate O’Neill)
“침묵의 소리”(Sounds of Silence)
필자: 케이트 오닐(Kate O’Neill)은 아일랜드계 미국인이고, 동성애 여성 불자로서 하버드 대학에서 인간 발달과 심리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84년부터 위파사나(vipassana)와 선(Zen) 전통들을 배우며, 여러 경전 공부도 함께 했다. 1992년에는 틱낫한(Thich Nhat Hanh) 베트남 스님으로부터 “Order of Interbeing” (接現)의 14계도 받았고, 그 후, 여러 해 동안 메사추세츠 또는 뉴멕시코에 있는 불교 사찰을 다니며 수행 경험을 쌓아왔다. 오닐(O’Neill)은 이 글 첫머리에 수잔 그리핀(Susan Griffin)이 쓴 침묵에 대한 강한 메시지를 소개하며 시작한다. 그리핀이 말하는 “침묵”은 잠자는 동물의 침묵이나 텅 빈 마음에서 나오는 침묵과 같은 조용한, 평화로운 침묵이 아니다. 그것은 시끄럽고, 무서운 침묵이고, 아픈 침묵이다; 학살당한 한 무리의 사람들 침묵이며, 진실을 인정하기 두려운 마음의 침묵이다.
이 글에서 오닐은 첫 번째로, 그동안 그녀가 특별한 관심을 가져온 ‘정치와 실천의 통합’에 관한 주제로 몇 가지 예를 들어서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성별(gender), 성적 성향(sexual orientation), 그리고 정치가 어떤 방법으로 불교 수행과 함께 엮어질 수 있을까에 대
한 그녀의 견해를 드러내고 있다. 우선 영어로, “politics”라는 말은 라틴어, “polis”에서 온 것으로 “people”이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따라서 불교의 정치(politics of Buddhism)는 모든 사람 간의 상호 연관(interconnection of all beings)에 있다는 것이다.
오닐은, 1990년대 초에 매사추세츠, 보스턴에 있는 한 베트남 불교 사찰에서 있었던 일을 예를 들어 소개한다. 전에 농구 운동장이었던 장소가 개발되어 베트남 불교 사찰이 들어서게 되었는데, 이에 불만을 품은 한 젊은이가 사찰에서 컴퓨터를 도둑질한 일이 뉴스에 보도되었다. 이 사찰의 주지 스님은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도둑에 대한 보복이나 벌칙보다는, 그 젊은이를 위하여 농구장 문제를 해결하도록 주선하였다. 스님은 컴퓨터를 돌려받았고, 그 젊은이는 범죄의 책임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스님의 이러한 자비로운 태도는 어떻게 불교 수행과 정치가 조화롭게 연결될 수 있을까에 대한 영향력 있는 가르침의 예다. 이와 연관 지어, 오닐은 틱낫한 스님이 말하는 “사회적으로 연계된(socially engaged)” 불교를 떠올린다. 틱낫한 스님은 “만일 불교와 평화 중의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평화를 택해야 한다. 불교에 대한 이해는 모든 불교 형상이나 의식(ritual)보다는 먼저 각자의 마음과 삶에 그 뿌리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불교의 이러한 해석이 "비워진 마음(emptied mind)” 또는 “관념들을 벗어난 마음(a mind beyond concepts)”의 침묵을 의미한다.
오닐의 두 번째 내용은 불교와 페미니즘(feminism)이다.
두 분야 모두 일어나는 현상과 경험의 본성에 대하여 열린 마음과 깊은 관찰을 통한 자비로운 인식을 요구한다. 특히 불교 수행은 우리 자신의 경험들을 스스로 입증하면서 자신들과 깊은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1984년 초하룻날, 오닐이 눈을 감고 처음으로 참선을 시작했을 때, 그녀는 과거에 당했던 성폭행 트라우마 (trauma)에 대한 몸의 기억들을 느끼기 시작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그저 불안하고 유약한 느낌이었고, 지워 보려고 했지만 되지 않았다. 결국 오닐은 태극권(t’ai chi) 수업에서 육체적 자기방어를 수련하면서 정신적 불안감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고, 동시에 편안하게 참선에 집중할 수 있었다. 오닐은 이러한 수행과 인식의 과정을 통해서 우선 자신의 경험을 스스로 알아차리게 하고, 그 경험을 일상 생활 안에서 육체적, 감정적으로 완전하게 회복시킬 수 있음
을 체험했다고 증언한다.
1980년대 후반에, 오닐은 매사추세츠, 케임브리지에 있는 위파사나 명상 센터(Insight Meditation Center)에서 티베트 스승, 타라 툴쿠 린포체(Tara Tulku Rinpoche)로부터 의외의 법문을 듣게 되었다; “여성들은 오랜 세월 동안 억압받아왔기 때문에, 여러분들 자신이 어떻게 인지하는가를 주의 깊게 보아야 합니다”라는 내용이었다. 모든 생각, 느낌들에 집착하지 말고 내려놓으라고 하는 일반 불교 법문과는 다르게, 특히 그것들을 집중해서 살펴보라고 하는 린포체의 법문에 오닐은 놀라웠고, 의아한 침묵의 명상 속에서 그 법문에 대해 무언가 좀 더 분명함을 원하고 있었다. 심리학을 전공한 그녀는, 불교 수행을 할 때 남성들과 여성들에게서 일어나는 심리적, 영적 현상의 차이를 인식하며, 그것은 생물학적인 차이라기보다는 유전적으로 부과된 문화적인 차이임을 지적하고 있다. 특히, 어려서부터 여자아이들은 관계(connection)를 바탕으로 심리적 감각이 발달하는 반면에, 남자아이들은 개별성(separateness)에 바탕을 두고 감각이 발달한다는, 사회학자, 낸시 쵸도로(Nancy Chodorow)의 이론을 인용하면서, 오닐은 불교 수행에서도 여성들은 관계성의 중심이 더 빨리 경험될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특히 여성들에 있어서, 자기 자신과의 관계와 깊은 친밀감은 수행의 핵심이고, 궁극적으로는, “상호 간의 공감(mutual empathy)” 또는 불교 용어로는 “자비(compassion)”로 표현되는 모든 존재와의 진정한 관계와 친밀감으로 발전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불교 수행과 연결하여, 오닐은 자신을 포함한 여성 동성애자들의 경험과 고통에 대한 근원적인 인식의 필요성과 더불어, 전통적으로 남성 중심적인 불교의 가르침과 수행의 문제점들을 서술한다. 1994년에 선조들의 고향인 아일랜드(Ireland)에 방문은 오닐에게 자신과 본 적도 없는 조부모들과 살아있는 관계성, 다시 말해서 연기적 공존(inter-being)을 감각적으로 체험하게 하였고, 그녀의 명상 수행 속에서 오닐은 자신처럼 수많은 여성뿐 아니라 모든 중생의 삶 속에 녹아 있는, 그러나 한 번도 알려진 적이 없는, 알려고 하지도 않은 영원한 침묵의 소리를 듣고 있다.
앤 클라인(Anne C. Klein)
“사람 그리고 가능성”(Persons and Possibilities)
앤 클라인
필자: 앤 클라인은 라이스 대학(Rice University)에서 종교학과 교수로서 학과장과 참선 지도 교사를 역임하고 있다. 라인은 1970년부터 미국과 아시아에 있는 불교 스승들과 함께 불교 사상과 수행을 공부를 해왔고, 여러 종류의 중요한 불교 저서를 발간했다.
클라인은 이 글의 첫머리부터 불교의 가장 핵심 사상인 ‘무아’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시작한다; 왜 불자들은 자아를 부정하는가?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가? 붓다는 존재하지 않았는가? 우리는 어떻게 몸을 가지고, 울고, 웃고, 해탈을 구하는, 부정할 수 없는 자아를 무아와 연관시킬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접근하기 위하여 클라인은 불교 가르침의 근본적인 이해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클라인은 불교 가르침과 수행이 단순히 우리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없앰으로써 개인적 향상을 얻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러한 삶의 현상들을 개인적 생각이나 의도 없이,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고, 스스로 존재 될 수 있는 기능 자체가 수행의 기본이고, 힐링(healing)을 의미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수행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self-acceptance), 현재에 머무는(being present) 노력을 말하는데, 이것은 곧, 몸에 기반을 두고 마음에 중심을 갖고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받아들이는 노력이라고 설명한다.
불교 철학과 수행의 가장 중심에 있는 “무아(selflessness)”의 개념은 사람에 대하여 풍부한 이해를 해야 하는 개념이다. 모든 존재는 무아이면서, 동시에 자아(self)가 없이는 수행을 할 수 있는 기반이 없기 때문이다. 무아와 자아가 둘이 아님에 대해서 클라인은 고타마 붓다의 비유를 소개한다;
“내가 나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인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각자 자신이 스스로 가장 소중한 존재이다.” 이 말은, 다른 사람의 자아가 각각 나만큼 소중한 자아라는 것을 인정해야 이 말의 논리가 성립한다. 즉, 내 존재 안에 수많은 다른 소중한 존재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클라인은 불교 수행은 내 안에서 모든 생명체를 자비심으로 소중하게 여기는 무아의 실천이고, 중도(中道)이며, 그리고 모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공(空)의 움직임이라고 불교 학자다운 결론으로 마무리한다.
제인 허시필드(Jane Hirshfield)
“붓다의 감성적인 삶은 무엇일까?”
(What is the Emotional Life of a Buddha?)
제인 허시필드
필자: 제인 허시필드는 시인이고, 여성을 주제로 한 여러 시집을 출간했다. 그녀는 1974년부터 1982년까지 샌프란시스코 젠 센터를 포함해서 몇 군데 조동종 젠 센터(Soto Zen monastery)에서 선(禪)수행을 했고 1979년에는 재가 불자의 계를 받았다.
붓다의 감성적인 삶은 어떤 것일까? 이 질문은 제인 허시필드에게 밀려오는 화두와 같은 궁금증이었다. 불단 위에 앉아계신 전통적 부처의 고요하고 빛나는 모습은 한동안 제인을 망상 없이 선에 몰두시키기에 충분하였지만, 어느 시점에서는 그러한 적멸의 상태만을 유지하는 것은, 15세기 일본 임제종의 일휴 선사(一休宗純 Ikkyū Sōjun)의 표현처럼, “귀굴에 빠지는 길(a path of intimacy with demons)”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평정함에 감정이 제외되어 있다는 생각은 어디에서부터 나왔을까? 물론, 불상의 고요함으로부터 나온 것은 아니다. 불교 가르침은 모든 생각과 감정을 망상의 상징인, 마야(maya)의 출현이라고 말한다. 여러 불교 전통들은 감정에 관하여 쓰인 이야기와 시를 통해서 각각의 관점을 드러내기도 한다. 허시필드는, 중국의 한 출가 수행승에게 육체적인 접근을 통해 그의 깨달음의 정도를 시험해 보려는 재가 여성 수행자 사이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예로 들어, 그 출가 수행승이 보여준 목석과 같은 감정 상태와 반응에 대하여 몇몇 선사들과 서양 학자들이 언급한 몇 가지 다른 시각을 조명하였다; Paul Reps는 그의 책, Zen flesh, Zen Bones에서 “사랑과 자비행이 결여된 수행승”이라고 표현했고, 조동종 선사, 스즈키(Suzuki)는 “진정한 선사는 참선 수행을 할지라도, 목석이나 벽이 아니라 인간이어야 한다”라고 설명하며, 또 한편으로는, “그 출가 수행승도, 여성 재가자도 모두 훌륭한 스승들이다.”라고 그들의 수행을 칭찬한 13세기 일본의 대선사, 도겐의 언급도 덧붙였다.
요약하면, 깨달음이란, “욕망이나 분노, 또는 어떤 종류의 감정이라도 완전히 소멸한 상태가 아니라, 깨달은 의식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에너지가 일시적이고, 자성(自性)이 없다는 것이지, 그 에너지의 힘과 유용성이 없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선(禪)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는 감정으로부터 분리된 감성적인 삶이 따로 없다고 설명한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허시필드는 “붓다의 감성적인 삶은 어떤 것일까?”라는 질문은 “참 본성 안에 있는 나 자신의 감성의 삶은 어떤 것일까? 라는 질문이 된다는 것이다. 붓다의 의식에는 모든 전반적인 감정이 폭넓게 일어나지만, 그것들은 붓다 자신만을 위하여 일어난 느낌이 아니라, 모든 다른 존재들에 대한 관심과 자비심을 수반한 감정이며, 그것은 관세음(觀世音)보살 명칭 그대로 “세상의 모든 괴로움을 듣고 응답하는” 자비의 감정이라고 한다. 따라서 만일 보살행이 모든 자갈돌과 풀 조각들이 깨우칠 때까지 계속된다면, 그러한 서원(vow) 안에는 당연히 그 열정과 어려움, 또는 기쁨의 감정이 포함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에 깨달음이 이미 모든 곳에 존재하고 있다면, 어찌 그 감정이 모든 유정(有情), 무정(無情)의 각각의 삶의 일부가 아닐 수 있겠는가? 제인 허시필드는 수행의 경험은 우리에게 깨달은 존재에 대한 어떠한 이상적인 개념도 오직 방해가 될 뿐이라는 것을 가르친다고 결론 짓는다.
아니타 배로우스(Anita Barrows
“분노의 빛: 여성들, 분노, 그리고 불교 수행”
(The Light of Outrage: Women, Anger, and Buddhist Practice)
아니타 배로우스
필자: 아니타 배로우스(Anita Barrows)는 캘리포니아 버클리에 있는 라이트 연구소(Wright Institute)에서 심리학 부교수로 있으며, 개인 상담 진료도 함께 하고 있다. 아니타는 두 권의 시집과 함께 여러 저널과 문집에 자신의 글들을 출판하여, 국가예술기금(NEH)을 포함한 여러 종류의 수상을 하였다. 개인적으로는 오랫동안 위파사나 수행을 해왔고, 학문적으로는 학교 동료들과 함께 심리학 이론을 ‘전면적 생태 보호운동(Deep Ecology)’이나 ‘불교의 영성(Buddhist spirituality)’과 연계하여 연구하고 있다.
아니타는 이 글에서 특별히 “분노(anger)”에 관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그녀가 하는 남방불교 수행의 한 부분은 강하고 부정적으로 인식되는 감정을 극복하기 위한 통찰력을 키우는 수행 방법이다. 이러한 불교 전통의 관점에서는 “분노”는 부정적인 것이고, 인내 되어야 할 감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 아니타는 학대받고, 소외된 여성들과 아이들을 위한 상담을 하는 서양 여성 심리학자로서, 그들이 그들 자신의 분노를 인식하고, 표현하는 방법들을 찾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한다. 아니타가 여기서 말하는 분노는, 일반적인 “화”의 종류와는 다른, 자기기만이나 길들여진 상태를 꿰뚫고 지나서 커다란 변혁을 일으킬 수 있는 “신성한 분노”(holy anger)를 의미하고 있다.
분노에 관한 대화는 미국에서 여성 정신분석학자들이 해오던 것처럼, 불교 수행이 한참 꽃을 피우던 1970년대부터 여성 불자들 사이에서도 시작되었고, 불교의 다르마(dharma)는 오랜 세월 남성 중심의 문화를 견디어 온 여성들의 내면에 잠재된 고통 또는 분노의 감정을 온 세상의 필요한 부분을 치유하는데 쓸 수 있는 에너지로 변화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여기서 다르마의 도움으로 분노를 변화시킨다는 의미는 자신을 억제하고, 비하하므로 써 감정을 잠재우고 없애는 것이 아니라, 다르마의 능숙한 방편을 수행하여 우리의 분노를 탐구하고, 여실히 보고, 그 자체의 활력과 유용성 등을 되살릴 때, 그 분노에 내포된 권리와 품격, 그리고 확신이 회복된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분노를 알고, 느끼기 위해서는 분노와 함께 하는 방법을 배워야 하고, 그 방법 안에서 오히려 마음이 열리고, 분노는 사랑과 불가분의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되는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타는 불교 수행과 연관하여, 불자들이 분노를 추한 모습으로 간주하여 성급하게 “용서(forgiveness)” 또는 “자비(lovingkindness)”의 감정으로 대체하므로 써, 분노에 담겨있는 불균형이나 불평등을 바로 잡을 기회가 상실될 수 있다는 강한 우려를 나타내며 다음과 같은 구절로 이 글을 마친다.
우리 [여성들]은 우리의 분노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가를 알아낼 때까지 그것을 소멸시키지 않고, 잃어버리지 않게 할 수 있겠는가?
케이트 윌러(Kate Wheeler)
“비굴하게 굽실거리지 않고 절하기”
(Bowing, Not Scraping)
케이트 윌러
필자: 케이트 윌러는 트라이사이클(Tricycle) 잡지의 편집인이고 여성 불자이다. 윌러는 자신의 저서들과 더불어 많은 상을 받았고, 최근에는 미국에서 그란타(Granta) 잡지가 추천하는 최우수 소설가 스무 명 중 한 사람으로 지명받기도 하였다.
지난 18년 이상 불교 수행을 해 온 여성 불자 케이트는 여러 가지 회의(懷疑) 섞인 의문들을 던지며 이 글을 시작한다;
“왜 불자인가?,”“상당히 방어적이고, 남성 중심의 위계질서로 되어있는, 이런 고루한 종교 안에서 나는 뭘 하고 있는 걸까?” 그녀는 불교의 논리가 이미 주어진 여성의 존재와 불균형의 상황을 업과 윤회의 개념들로 합리화한다고 지적한다.
케이트는 역사적 붓다가 부인과 아들을 버리고 떠난 사실부터 시작하여, 특히 티베트, 한국, 일본 등의 승가에서 비구니들을 포함한 여성에 대한 성적 비하와 또는, 극락정토에는 여성이 제외되어 있다는 불경의 내용, 등을 거론하며 불교 전반에 흐르는 여성 불평등에 관한 근본적인 문제에 접근한다. 구체적인 예를 들면, 부처님 당시, 초기 승가 안에서 여성들은 승려가 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던 것을 비롯한, 비구니들의 위치를 비구승 밑으로 예속시켜 비구승 중심으로 만들어진 승가 계율들의 불공평성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케이트는 이와 같이 불교 안에서 남성들의 편견이 모든 의미 있는 것들을 지배하고 있다면, 그들의 억압과 부패는 당연한 결과라고 외친다.
1977년 대학 졸업 후, 케이트는 캘리포니아에서 처음으로 위파사나 선 수련을 시도해보았고, 그 후 타일랜드와 미얀마에서 지내면서 선 수행을 계속하다가, 1988년도에는 마침내 미얀마, 랑군에 있는 한 사찰에서 비구니가 되었다. 버마에서 비구니로서, 동시에 여성으로서, 케이트가 경험한 것은 권위 의식으로 싸인 비구승들의 여성에 대한 “불평등” 그 자체였다. 그곳에서는 비구니도 오로지 여성일 뿐이었다. 그 후, 케이트는 티베트 금강승(Vajrayana) 전통을 만나게 되었고, 그 전통 안에서 수행을 시작하며 불법을 익혔다. 처음으로 들었던 마음의 본성에 대한 금강승의 가르침은 케이트를 매료시켰고, 미얀마에서의 남방불교(Theravada) 전통과는 여러 면에서 사뭇 다른 티베트 전통은 그녀를 기쁘게 수행으로 이끌었다. 케이트가 시도했던 십만 배의 오체투지(prostration) 절수행은 금강승 수행의 준비 작업으로서, 자신이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깨친 마음의 본질을 알게 하였고, 모든 장애를 순화시키는 수행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수행은 그녀가 불자이기를 원하는 충분한 이유였다, 지금까지도... 티베트 라마승들은 남방불교 스님들보다는 훨씬 호탕하고, 자유롭게 생활하였고, 티베트 전통에는 타라(Tara), 관인(Kuan Yin), 또는 예세 쏘걀(Yeshe Tsogyal) 등의 많은 여성 붓다들이 있어 그들에게도 동등하게 절하는 수행도 하였다. 비록 그 자신의 영향력만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현실의 상황일지라도, 티베트의 영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 역시 남녀 승려들 간의 불공평한 성적 차별에 깊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고, 티베트의 몇몇 훌륭한 라마승 지도자들도 그들의 전통 안의 불평등한 제도에 조금씩은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그러나 케이트는 자신이 끊임없이 절을 하는 라마승들이나 여성 붓다 형상들을 관조하면서, 그들의 모든 노력과 변화가 성적 차별 속에서 일어나는 노력이고 변화이지,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넘어서, 인간 본래의 성품 자체를 깨달은 바탕에서 행해지는 근본적인 변화는 아니었고, 또한 그러한 변화는 쉽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케이트는 여성 평등성과 관련하여 2,500년 전 붓다가 언급한 내용을 소개하며 이 글을 맺는다.
붓다를 키운 양모(養母)이고, 비구니 승단의 최고 자리에 있는 마하파자파티 고타미(Mahapajapati Gotami)가 “만일 부처님 승가 안에서 남성들과 여성들이 평등한 바탕에서 서로 서로의 위치를 뒤바꿀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라고 말한 것에 대하여, 경에 기록된 붓다의 답변은 “만일 옳지 못한 많은 스승이 여성들에게 평등한 위치를 허락하지 않는다면, 참 스승인 부처가 얼마만큼이나 이 여성들에게 평등한 위치를 허락할 수 있겠는가?” 라는 내용이었다. 케이트는 여성의 입장에서는 붓다의 생각이 틀렸다고 단언한다. 그리고 우리 여성들은 붓다의 말이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각주: 여성의 평등성에 대하여 케이트가 강조하고 있는 이 부분은, 여성의 존재에 대한 부처님의 생각은 어떻게 기록되어 있고, 불교 교단 안에서 초기불교에서 대승불교에 이르는 사이 여성관에 대한 어떠한 변천이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상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는 대목이다. 이 부분에서 케이트가 인용한 고타미의 청원에 대한 붓다의 답변에 대해서만 부연 설명한다면, 우선, 부처님 당시의 인도 사회는 극도의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인 사회였기 때문에, 여성의 평등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고려한 붓다의 실용적인 답변이었다. 이 답변은 마치 붓다가 옳지 못한 많은 비구 수행승들의 압력으로 어쩔 수 없이 내린 결정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당시, 인도 사회의 고질적 카스트 계급 관행을 부정하고, 45년 펼친 붓다의 평소 언행이나 가르침의 내용으로 보아 여기 인용된 “붓다의 답변”은 붓다의 직설로 보기 어렵고, 불평등한 승가 계율의 형성과정은 붓다 이후 비구승 중심으로 오랜 세월 동안 가미되어 만들어진 사실을 상기하면서, 초기 경전 니카야에 나타난 여성에 대한 붓다의 부정적인 내용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잰 윌리스(Jan Willis)
“불교와 인종: 아프리카계 미국인 침례교도-불자의 관점”
(Buddhism and Race: An African American Baptist-Buddhist Perspective)
잰 윌리스
필자: 잰 윌리스는 코네티컷주, 미들타운에 있는 웨슬리안 대학(Wesleyan University)의 종교학 교수이고, 사회과학 석좌교수이다. 잰은 거의 30년 동안 인도, 네팔, 스위스, 미국에서 티베트 불교를 공부했고, 22년 동안 가르치며, 금강석 빛(The Diamond Light:An Introduction to Tibetan Buddhism),무착(無着)의 보살지지경(菩薩地持經)의 타트바르타 장, 깨달은 존재들(Enlightened Beings) 등의 여러 저서를 발간했고, 그 외에도, 불교 명상, 성인 전, 여성과 불교에 관한 많은 글을 발표하였다.
잰은 자신을 침례교도-불자라고 부른다. 그것은 두 믿음이 함께 어우러지는 주제로서 마음을 채워서 때문이 아니고, 오히려 그녀는 자신을 아프리카계 미국인 불자로 더 생각한다. 잰은 지난 세월 동안 친구나 동료들한테서 자신의 주체성(identity)에 관한, 즉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서 티베트불교를 공부하고 또 가르친다는 다소 변칙적으로 보이는 사실에 대하여 자주 질문을 받기도 했으나 본인 스스로에게는 변칙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자신의 삶 자체이기 때문이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하는 것이 다른 아프리카계 미국인, 그리고 다른 유색 인종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지난 몇 년 동안 여러 불교모임에서 유색 인종 몇몇이 잰을 보고 다가와, “당신을 여기에서 만나서 참으로 반가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고, 잰은, 그곳은 자신들의 선택으로 참석할 수 있는 곳이고, “다른 사람”이라고 무시 당하지 않는 곳이며, 또 그 안에서는 온전한 정신을 찾는 곳이라고 확신했다. 불교 사찰이나 명상 수련회 같은 큰 모임에 가면 극소수의 흑인들을 볼 수 있다. 잰은 1995년 9월 달라이라마가 보스턴에서 법회 할 때 수백 명의 관중 가운데 흑인은 단 3명만 있었음을 기억한다. 그런데도, 한때 요기라고 불렸고, 지금은 잠파 쿤초그 존자(Venerable Jampa Kunchog)로 불리는 훌륭한 아프리카계 미국 승려 등, 몇몇 아프리카계 미국 승려나 불자들이 있다.
“불교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에게 무엇을 제공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특히 탄트릭 불교는 자신감을 향상하게 하는 하나의 방법론을 제시한다고 간단히 대답한다. 왜냐하면, 탄트릭 불교는 우리가 인간으로서 누구인가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일상적이고 제한된 인식에서 완전한 변형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잰은 1969년 가을 네팔에서 만난 라마 툽텐 예쉐(Lama Thubten Yeshe)의 가까운 제자가 되었고, 그가 쓴 “탄트라 개론”(Introduction to Tantra)에서 간단하면서도 깊이 있게 피력된 라마 예쉐의 생각 중 몇 가지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불교 탄트라에 의하면 우리는 현실에 관한 견해가 좁고 갑갑하기 때문에 불만스러움 속에 갇혀있다. ‘우리가 누구이고 무엇이 될 수 있나’에 대하여 매우 제한된 견해에 사로잡혀있다. 그 결과 우리의 자아상은 낮아지고 부정적으로 계속 남아 있게 되어 부적절하고 희망이 없음을 느끼게 된다. 우리 자신에 대한 견해를 비참하게 유지하는 한 우리의 삶은 의미가 없어진다. (Introduction to Tantra, Lama Yeshe, p. 41)
모든 단계의 탄트라에서 가장 필수적인 수행 중의 하나는, 우리 자신에 대한 일상적인 개념들을 녹여버리고, 이러한 개념들이 사라져 버린 텅 빈 공간으로 부터 ‘신성의 눈 부신 빛의 몸’(Glorious light body of a deity)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즉, 우리의 가장 깊은 존재의 본질적인 명료함의 화현이다... 이러한 신성한 자아상은 우리가 삶의 주도권을 잡고 살아가는 데 힘을 보태주고 우리의 가장 깊은 본성이 드러날 수 있는 순수한 환경을 조성하는 데 힘을 실어준다. (Lama Yeshe, p. 42)
몸과 마음의 건강은 주로 우리 자아상의 문제로서 무슨 이유에서든지 자신을 나쁘게 생각하면 비참하게 되지만 자신의 내적 자산을 인정하고 끌어낼 수 있는 사람은 가장 깊은 난국에서도 극복해낼 수 있다. 그와 같은 본존 요가(deity-yoga)는 자아상을 고양하는 가장 깊은 수행 방법의 하나이다. (Lama Yeshe, p. 46)
잰은, 덧붙여서, 미국에서 불교를 공부하고 수행하기 위하여 돈과 여가의 두 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을 지적하고, 또한 국제적인 불교 지도자들과 미국의 불교학자들이 불교와 다른 분야의 학문이나 종교와 연계하여 광범위한 대화의 장을 만드는 것이 다양한 계층의 미국인이 모든 형태의 불교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진정한 미국불교의 출현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서평자: 주 현 (뉴져지 드루대학에서 불교심리학 전공, 현재 스토니부룩 대학에서 불교학 강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