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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설명: 2010년 1월 23일 토요일 저녁, 대전 용문동 새빛문화아카데미에서 토요문학포럼 첫 초청 시인으로 초대된 허형만 시인과 새해 덕담을 나누었다. 사랑과 존재의 서정시 밭을 일구어 온 시인은 현시단이 추구해야 할 시정신과 자신의 시세계 및 시론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 허형만 시인
1945년 10월 26일(음) 전라남도 순천에서 태어났다. 중앙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1973년《월간문학》으로 등단하였으며, 현재 국립목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중국 옌타이대학교 명예교수이다. 목포대학교에서 이미 인문대학장, 교육대학원장, 인문과학연구소장 등을 역임했다. 초등학교 6학년 1학기 국어교과서에 시 「동전 한 닢」이 수록되어 있으며, 2001~2002 IBC 인명사전에 ‘세계의 시인’으로 등재되었다. 소파문학상, 전남문학상, 목포와이즈멘예술봉사상, 전라남도문화상, 평화문학상, 한국크리스챤문협상, 우리문학작품상, 편운문학상, 한성기문학상, 광주문화예술대상, 순천문학상, 월간문학동리상, 영랑시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현재 국제펜클럽한국본부 이사 겸 인권위원장, 한국시인협회 심의위원장, 계간『시와 사람』편집 고문, 계간 『시안』자문위원, 격월간『시를 사랑하는 사람들』공동주간, 목포현대시연구소장, 광주 전남 현대문학연구소 이사장, 무등포럼 대표, 전라남도와 광주광역시 문화예술진흥위원, 무등일보 편집자문위원장 등으로 활동 중이다. 시집으로『청명』(78, 평민사),『풀잎이 하나님에게』(84, 영언문화사),『모기장을 걷는다』(85, 오상),『입맞추기』(87, 전예원),『이 어둠 속에 쭈그려앉아』(88, 종로서적),『供草』(89, 문학세계사),『진달래 산천』(91, 황토),『새벽』(93, 대정진),『풀무치는 무기가 없다』(95, 책만드는집), 『비 잠시 그친 뒤』(99, 문학과지성사),『영혼의 눈』(2002, 문학사상사), '첫차' (2005. 시안 황금알),『눈 먼 사랑』(2008, 시와사람) 등이 있고, 번역시집으로『許炯万詩賞析』(2003, 정봉희 역), 시선집으로 '새벽' (93. 대정진), 『따뜻한 그리움』(2008, 시와사람), 수필집으로『오매 달이 뜨는구나』(87, 오상) 등이 있으며, 기타 저서로『시와 역사인식』(88, 열음사),『우리시와 종교사상』(90, 김향문화재단),『영랑 김윤식 연구』(96, 국학자료원),『문병란 연구』(2003, 시와사람사),『오늘의 젊은 시인읽기』(2003, 시와사람사),『박용철전집-시집 주해』(2004, 깊은샘),『시문학 1~3호 주해』(2008, 문학사상사) 등이 있다.
■ 김명원 시인
1959년 충남 천안에서 출생하였으며 ·이화여대 약학과 및 성균관대 대학원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문학박사이다. 1996년 《詩文學》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슬픔이 익어, 투명한 핏줄이 보일 때까지』와 『달빛 손가락』이 있고, 2002년 '노천명문학상'과 2007년 '성균문학상' , 2008년 제13회 '시와시학젊은시인상'을 수상했다. 현재 대전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이며 웹진『시인광장』편집위원이다.
김명원의 시인탐방 5 시인은 죽되 시는 살아야한다는 시 순장인, 허형만
웹진 시인광장【Webzine Poetsplaza SINCE 2006】2010년 봄호(2010, Spring)
2010년 새해가 밝았다. 밝았다는 것은 희망을 향해 시간의 지평이 활짝 열려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늘도 창을 열어 오랜 어둠을 닦아내고, 지치고 시름 앓던 대지들은 순연한 몸을 곧추 세워 심호흡을 한다. 다시금 시작이라는 것을, 다시금 열정이라는 것을 그들은 증거해 낼 것이다. 새 길을 내고, 새 물을 틀고, 새 꽃을 피워내면서, 이제 새날들이 펼쳐지리라. 새해를 맞아 새 지면에 가장 잘 어울리는 시인으로 허형만 시인을 모시고자 한다. 허형만 시인은 우리나라의 다순 지형 목포에서 농투사니들의 신산스러운 삶과 애환을 정답게 끌어안고, 변화하는 역사의 현장을 결코 떠난 법 없이 울음을 울 때는 울음으로, 사랑을 노래할 때는 사랑으로, 서정이라는 기율을 시 안에 넉넉하게 떠안고 예까지 온 시인이다. 시인의 시에는 남도 특유의 징한 정서가 녹아 있고, 가슴 애절하게 만드는 질박한 모국어가 숨 쉬고 있어, 새해를 시인의 방순한 음성으로 기원해 보는 시적 소망으로서 적격일 터다. 내가 만났던 시인들 중 기억을 위해 메모해 둔 ‘시인 사전’에는 “허형만 - 세련된 외모와 고귀한 인품의 교수님, 사랑과 존재의 서정시 밭을 일구는 시인”으로 기재되어 있다. 삼년 전, 충북 제천시 백운면 애련리에 있는 ‘원서문학관’에서 처음 뵙고 쏟아지는 은하수 밑에서 참 좋은 말씀을 많이도 들었다. 그 때, 나는 인연이 있는 사람들은 반드시 만나게 되어 있다는 운명 예정설을 굳게 믿으며 함부로 익어가는 여름밤에게 감사했다. 허형만이라는 큰 별과 김명원이라는 작은 별이 이루는 소통의 시내는 밝고 환했다. 그 후로 나는 선생님께 문득 그리움을 담은 메일을 드렸고, 선생님께선 정중한 답신을 보내주셨다. 또한 내가 ‘시와시학 젊은시인상’을 수상할 적에도 추위와 함께 먼 걸음으로 상경하여 격려해주셨다. ‘선연선과(善緣善果)’의 깊은 뜻이 체감되는 순간들이었다. 2010년 1월 23일 토요일 저녁, 새빛문화아카데미에서 선생님을 뵙고 새해의 덕담을 나눈다. 토요문학포럼 첫 초청 시인으로 초대되어 선생님께서 특강을 하신 날, 결빙의 겨울이 자욱이 지워지는 흐린 창가에 앉아 시인과 나는 영혼의 화롯불을 지핀다. 얼마나 많은 세월을 담고서, 그리고 또 한 번의 새해를 맞고서, 시인은 하많은 사연을 담고 오시어 우리 곁에 있는 것일까. 이토록 사무치는 정겨움과 따스함으로 계시는 것일까.
■ 김명원: 늦은 새해 인사지만 올해에도 더욱 건승 건필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선생님의 새해 계획이 궁금한데요. □ 허형만: 올해 출간 예정으로 13번째 시집을 준비 중에 있습니다. 그리고 2010년에도 지난해들과 마찬가지로 열심히 작품 쓰고, 열심히 책을 읽고, 열심히 강의를 해야겠지요. 제가 맡고 있는 한국시인협회 심의위원장 등의 직책에도 더욱 충실해야겠고요. 요즘은 독서 중 일정 시간을 내어 마르셀 레몽의『보들레르에서 초현실주의까지』를 독파 중인데 흥미롭습니다. 김화영 교수가 현대문학사에서『프랑스 현대시사』라는 제목으로 출간한 책입니다. ■ 김명원: 선생님께서는 1973년《월간문학》으로 등단하셨으니, 시력이 거의 사십년이 되어 갑니다. 만만치 않은 세월인데요. 선생님께서는 언제부터 시에 관심을 두셨는지요. 그리고 등단 시절까지의 이야기가 듣고 싶습니다. □ 허형만: 어렸을 때부터 책 읽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시집도 많이 읽게 되고, 자연스럽게 시에 관심을 갖게 되었지요. 1963년 순천고등학교 재학시절에는 문예부장으로 활동하면서 <씨크라멘>이라는 동인회를 결성하여 프린트로 동인지를 만들고 시화전을 여는 등 대학입시보다 시에 더 열정을 기울였지요. 그때 저에게 시의 싹이 잘 자랄 수 있게 성원해주신 분이 문병란 시인이셨습니다. 그 후 1965년 중앙대학교 국문학과에 입학하여서는 <정오>라는 문학동인회를 조직하여 활동했습니다. 1967년에는 고향인 순천 시내 「청맥」다방에서 입대기념 시화전을 개최하였고, 1972년에 복학해서는 중대신문 현상문예에 시 「제대병」이 당선되었습니다. 졸업 후 1973년 전남 함평군 학다리고등학교에 임용되고 나서, 같은 해《월간문학》에서 시「예맞이」로 신인상에 입상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고요. ■ 김명원: 등단하신 후, 서울의 <반시>, 대구의 <자유시>와 더불어 1980년대 동인지시대의 서막을 알리는 길라잡이 역할을 했던 <목요시> 동인회를 결성하셨지요. □ 허형만: 1979년 3월이니까 제가 첫 시집『청명』을 발간한 이듬해네요. 당시 삼십대의 젊은 시인이던 강인한, 고정희, 국효문, 김종, 그리고 저까지 다섯이서 <목요시> 동인을 만들었어요. 그 해 가을에 동인지 창간호를 출간하였는데, 제1집의 서문에서 “시는 시인의 성실한 삶을 반추하는 그 시대의 사회적인 산물이며, 무엇보다도 시 정신을 내포해야 한다는 점을 결코 우리는 잊지 않을 것이다.”라고 밝혔지요. 그 후 송수권, 김준태, 장효문 시인이 동참해서 여러 차례 동인지를 발간하며 동인 모임은 더욱 활기를 띠었습니다. <목요시> 동인회는 광주의 <오월시> 동인회를 탄생시키는 데 영향을 미칠 정도로 사회 모순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였지만, 안타깝게도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직접 겪은 몇 년 뒤 해체되었습니다. 이후 <원탁시> 동인에도 참여했는데《원탁시》20집부터 원탁시회에 가입하여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고, 회장을 맡기도 했지요. 지금도 <원탁시>는 건재하는데 젊은 시인들이 주축이 되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답니다. ■ 김명원: 선생님께서는 1984년 창작과비평사의 17인 신작시집 『마침내 시인이여』에 「허송씨」외 4편을 발표하시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창작 활동에 임하신 후 12권의 시집을 상재하셨는데요. 선생님의 시세계를 평론가들은 확연하게 달라지는 시적 어조나 주제 등으로 대략 3기로 분류하고 있고요. 제가 선생님 시를 포괄하여 거칠게 명명하자면, 제1기는 1973년 등단 이후부터 1978년 시집『청명』까지의 시기로 개인 순수 서정기, 제2기는 1979년부터 1995년『풀무치는 무기가 없다』출간까지로 ‘진솔한 삶의 역사와 향토적 서정’으로 수렴되는 역사의식 발현기, 제3기는 1996년 이후『비 잠시 그친 뒤』(1999), 『영혼의 눈』(2002),『첫차』(2005),『눈 먼 사랑』(2008)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내면의 깊이와 고요를 획득하고 있는 사유 성찰기로 구분할 수 있을 듯 합니다. 동의하시는지요? 그리고 이러한 시세계의 변모 양상은 시를 쓰게 하는 시적 환경, 즉 사회 상황 등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 허형만: 네. 물론 동의합니다. 아주 세밀하게 잘 파악하셨네요. 요즘의 제 시들이 예전의 시들과 많이 달라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것, 사실입니다. 저는 처음 시를 쓰기 시작할 때는 주로 전통성에 기대었습니다. 다시 말해 전통적 발상법을 충실히 따르는데서 출발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습작기에 고등학교 은사 문병란 시인이나 대학 시절의 조병화 시인과 김현승 시인으로부터 시 이론을 습득하여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되어지지만 좀 더 깊이 제 시를 들여다보면 전통성에 천착해온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고전적 숨결과 그 아름다움을 많이 탐닉한 데서 기인하다고 생각되어집니다. 그것은 시어의 선택이나 남도적 가락의 조율에서 특히 두드러진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 김명원: 선생님 시 중에서 발견되는 기막힌 순수 우리말이나 남도 고유의 방언들이 얼마나 쫄깃한 감흥을 일으키는지요. 예를 들어, ‘조숙조숙’이라든가, ‘니일니일’, ‘바름바름’, ‘욜그랑살그랑’, ‘굼깊은’, ‘팔느락팔느락’, ‘휘추리’, ‘꽃숭어리’ 등은 발성하기만 해도 가슴에 물결이 이는 시어들인데요. 이들 중에서도 시「첫차」에 나오는 ‘조숙조숙’은 그야말로 백미입니다. □ 허형만: 전 시어 하나를 생각해도 싱싱하게 살아있는 우리의 것을 찾아 헤맵니다. 시「첫차」가 만들어진 배경을 잠깐 설명하자면요. 광주에서 목포로 출근하던 어느 날, 첫 차를 탔는데 모두가 졸고 있는 거예요. 연민이 서리는 이 풍경을 시로 쓰자 싶었지요. 가장 신경이 쓰였던 부분은 시의 첫 행인데, 지난하고 곤고한 사람들이 첫차를 타고 조는 모습을 어떻게 표현할까 고심하면서 얼마나 많은 자료를 찾고 몸부림을 쳤는지요. 그러다가 발견한 시어가 바로 ‘조숙조숙’이에요. 완판본 춘향전 중, 옥에 갇힌 춘향이가 사후에 남을 어머니 월매를 걱정하는 대목에서 ‘조숙조숙’을 가져왔지요. 아마도 “조숙조숙 조는 사람들”이라는 표현을 “꾸벅꾸벅 조는 사람”이라고 했으면 이 시는 실패했을 것입니다. 한 작품의 시가 완성 되는 것은 이처럼 절절한 모국어로 세례를 받을 때 가능한 것이지요. 시의 생명은 언어니까요.
조숙조숙 조으는 사람들 눈송이와 개똥벌레처럼 아름다운 난쟁이 은하의 푸른 별들이여 ― 「첫차」전문
첫차를 탄 사람들은 남들보다 일찍 깨어 삶의 현장으로 나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당연히 잠이 부족할 것이고, 고단한 삶일 터이지만 거기엔 신성한 노동이 있지요. 힘겹고 남루하지만 그것이야말로 그들의 삶을 지탱하는 맑고 빛나는 힘입니다. 그러하니 “난쟁이 은하”로 표상된 기층민들이 “눈송이와 개똥벌레처럼 아름다”웁게 조는 상황을 “조숙조숙 조으는”으로 묘사하였을 때, 어떠세요? 첫 차를 탄 그들과 잘 어울리는 이미지로 거듭나지요? 제 평론집『시와 역사인식』에서도 말한 바 있듯이 이처럼 시는 언어를 싱싱하고 정확하게, 그리고 구체적으로 사용할 때만이 생명력을 가져요. 저는 이런 조건을 갖춘 시를 살아있는 시, 혹은 움직이는 시라고 부르고요. 언어의 싱싱함은 시인 자신이 살아 뿌리내리고 있는 곳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시의 서정성과 생명성 회복을 위해 시인이 할 수 있는 일에 관해서라면 저는 전적으로 ‘시문학’ 동인의 선언에 동의합니다. 그들은 민족의 언어를 완성 하는 일(『시문학 1』), 우리의 감각이 여릿여릿한 기쁨을 일으키게 하는 자극을 전하는 미, 우리의 심회에 빈틈없이 폭 드러안기는 감상(『시문학 3』) 등을 추구했어요. 게다가 제가 남도에 살고 있으니 당연히 이 지역의 거성인 영랑이나 용아의 영향을 받았기도 했겠지요. 그래서 전남 강진 출신인 김영랑의 연구서『영랑 김윤식 연구』와 송정리 출신인 박용철 시인의『박용철전집』중 시집의 시어 주석본, 그리고 박용철이 발간하고 김영랑이 참여한, 우리 한국현대시사에서 가장 빛나는『시문학』1~3호의 주해서를 각각 복간하기도 했고요. 그분들 시에는 남도 가락과 언어가 숨 쉬고 있어요. 아마도 이런 면에서 제 시와 시적 상황이 상관 관계가 있겠지요. ■ 김명원: 선생님 시세계 중 변화를 겪는 시기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 허형만: 1979년 이후 시에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1980년 광주민주항쟁을 기점으로 거세게 몰아닥친 민주화 열풍은 젊은 시인들에게 “시란 무엇인가”, “시는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또 어떻게 써야 하는가”를 심각하게 자문하도록 했지요. 80년대라는 시대가 나의 시적 자아에게 내면의 집을 뛰쳐나오도록 한 것이에요. 시적 화자 또한 ‘나’에서 ‘우리’로의 전환이 이루어지기도 했고요. 이후 저의 시적 자아는 1995년까지 16년 동안 거친 역사의 현실에서 진솔한 삶의 역사를 중심으로 일관되게 노래합니다. 그때 나온 시집들이『풀잎이 하나님에게』(1984)에서『풀무치는 무기가 없다』(1995) 까지 무려 7권에 이릅니다. 이 무렵 저의 역사의식이 큰 목소리로 변해가는 것은 시대상황상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풀무치는 적 앞에서도 무기가 없다 오직 튼튼한 뒷다리뿐 펄쩍펄쩍 뛰어 도망 갈 오직 뒷다리뿐 도마뱀, 사마귀 곰팡이, 진드기, 긴호랑거미 도처에서 적은 잡아먹기 위해 혈안인데 오직 튼튼한 뒷다리뿐 파닥파닥 날개짓으로 상공 멀리 날아 도망 갈 오직 뒷다리뿐 도망 가서 도망 가서 적의 눈에 안보이게 숨을뿐 풀무치는 적 앞에서도 무기가 없다 -「풀무치는 무기가 없다」전문
태 태풍이 몰아쳐도 뿌리 뽑히지 않게 하시고 들 들불져 와도 타지 않게 하소서 비 비록 어둠 속에서도 두 눈 크게 뜨게 하시며 나 나팔을 높이 불어 쓰러진 동족을 일으키소서 -「 -「풀잎이 하나님에게」부분
손 손님이 와도 짖지 않는 개는 개 개가 아니다 잡 잡상인이 와도 짖지 않는 개는 개 개가 아니다 (… (…중략…) 무 무엇이 목청껏 짖지 못하게 할까? 무 무엇 때문에 시원스럽게 짖을 수 없을까? -「 -「개로 인하여」부분
1984년 창작과비평사에서 발간했던 17인 신작시집『마침내 시인이여』에 참여하면서 저는 자유실천문인협의회와 함께 했습니다. 지금도 한국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고요. 치열하던 80년대, 숨어 다니는 운동권 제자들을 위해 힘을 모으기도 했던 그 당시, 여러 사건들을 겪었습니다. 신문에 실린 제 글이 통째로 삭제되지를 않았나, <원탁시>에 실렸던 시「흔들리는 차 속에서」가 문병란 시인의 시와 함께 문제가 되어 동인지 회수령이 내려지고 안기부로부터 출두 명령을 받기도 했으니까요. 심지어 1981년 9월에는 현재 봉직하고 있는 대학에서 누군가가 학장에게 저를 ‘반체제 시인’이라고 하는 바람에 임명 1주일 만에 쫓겨나 목포 혜인여고에서 반년동안 국어 교사를 하다가 이듬해에 복직할 수 있었습니다. 그 무렵『풀잎이 하나님에게』와『이 어둠 속에 쭈그려 앉아』는 널리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어둠의 시대를 겪으며 하느님을 향해 토해 낸 가슴속 신앙시였지요. 또 기억해야 할 시집인『공초(供草)』의 경우, 시집 발간 당시 처음에는 시 제목을『허형만 공초』라고 하려다가 제 이름이 들어가면 너무 강하게 생각될 것 같아 그냥『공초』라고 했어요. 그 ‘공초’라는 말은 심문자의 질문에 답변하는 것인데 전봉준 장군의 ‘전봉준 공초’에서 따왔습니다. 전봉준 장군이 동학운동에 실패하고 일본 헌병에게 문초를 받으면서 “고향이 어니냐, 누구랑 만나서 무엇을 했느냐”고 묻는 것에 대한 답변이 ‘공초’였거든요. 전 최루탄이 터지고 몽둥이가 왔다 갔다 하던 중에도 목숨을 담보로 서명교수 명단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이처럼 시대적인 아픔들이 담겨 있는 시집이 바로『공초』지요. 그때의 제 시세계를 문학평론가 강정구는 ‘비판 서정’이라고 명명하였습니다. 특히 이『공초』시집은 연작시집인데, 이 시집 속에 있는 시「녹을 닦으며」는 요 몇 년 사이 전국 수능모의고사나 각종 대입 문제집에 단골로 나오고 있답니다. ■ 김명원: 언급하신 강정구 평론가는 1999년에 상재하신 시집『비 잠시 그친 뒤』로부터 2008년『눈먼 사랑』에 이르기까지를 비판적 서정의 시대를 지나서 ‘존재 서정’의 한 흐름으로 파악하고 있는데요. 이즈음의 시들은 세계를 향한 자기 성찰과 탐색의 여정을 시로 구체화시키고 있는 점 등으로 선생님 시세계의 제3기라고 칭할 수 있겠습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우주 삼라만상 앞에서 겸손한 시인의 시가 좋은 시이다”가 무엇을 이르는 지 뚜렷이 드러나는 시들을 만날 수 있는 시기이기도 하고요. □ 허형만: 시 쓰는 일이 무력한 현실에 절망했던 세월‧ ‧ ‧ 16년이나 되었지요. 저는 제 시에 싫증을 내기 시작하면서『풀무치는 무기가 없다』이후 시 쓰기와 발표를 삼가는 공백기를 가졌습니다. 이 공백기는 스스로 진중한 시적 변모를 꾀하기 위한 시간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서 펴낸 시집이『비 잠시 그친 뒤』였습니다. 이 시집은 그 이전의 시집들과는 여러 가지로 성격을 달리 합니다. 첫째로 시적 관심사가 현실의 전면에서 일상과 자연으로 물러나 있다는 점, 둘째로 세상을 보는 눈은 깊게 하면서 저의 목소리는 낮추고 고요해지려 노력했다는 점, 셋째로 직설적으로 토해내지 않고서 절제된 표현미를 획득하려 한 점 등입니다. 이는 시대상황이 시인들을 거리로 내몰던 시대가 지난 것도 이유였겠지만 무엇보다도 오십대 중반의 연륜이 사물을 깊이 응시하게 하고 자신을 들여다보게 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리하여「영혼의 눈」과 같은 작품으로 비평가들로부터 가장 대표적인 서정시라는 평판을 얻기에 이르렀지요.
이태리 맹인 가수의 노래를 듣는다. 눈먼 가수는 소리로 느티나무 속잎 틔우는 봄비를 보고 미세하게 가라앉는 꽃그늘도 본다. 바람 가는 길을 느리게 따라가거나 푸른 별들이 쉬어 가는 샘가에서 생의 긴 그림자를 내려놓기도 한다. 그의 소리는 우주의 흙 냄새와 물 냄새를 뿜어낸다. 은방울꽃 하얀 종을 울린다. 붉은점모시나비 기린초 꿀을 빨게 한다. 금강소나무 껍질을 더욱 붉게 한다. 아찔하다. 영혼의 눈으로 밝음을 이기는 힘! 저 반짝이는 눈망울 앞에 소리 앞에 나는 도저히 눈을 뜰 수가 없다. -「영혼의 눈」전문
■ 김명원: 또 한 가지 특기할만한 것은 선생님 시에는 아버지를 그리워한다든가 가족사가 많이 등장하는데요.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지요? □ 허형만: “시인은 왜 시를 쓰는가”라고 자문할 때, “진솔한 삶의 역사를 위하여”라는 것이 저의 대답입니다. 주변 지인들로부터 “한 편씩 발표되었을 때는 잘 모르겠더니 시집 한 권으로 묶어놓은 걸 읽어보니 그토록 감동이 깊은 줄 몰랐다”는 격려를 자주 듣습니다. 저는, 누가 무어라고 해도 ‘시와 삶은 하나’라고 굳게 믿고 있지요. 나의 삶이 잠시도 쉬지 않고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이라면, 그래서 전력투구 온 몸으로 나의 삶을 사랑하고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면, 저의 시 또한 그러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래서 제 시에는 가장 가까이에서 존재하는 가족사가 많지요. 그런데 이 가족사가 한정된 범주의 나만의 가족사에 머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온 인간사, 나아가서 온 생명 있는 우주사에까지 확산되기를 바라며 나의 시적 영역의 확충에 부단한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따라서 나의 이웃, 나의 부모 형제들의 삶을 비롯하여 가까이에 있는 조그마한 부분에서부터 놓치지 않고 살아 숨 쉬는 삶의 현장, 삶의 역사를 거짓 없이 표현했을 때 그것이 시의 소임이자 흔적임을 믿습니다. ■ 김명원: 선생님 시「문 열어라」는 장사익 선생님께서 <아버지>라는 노래로 만들어 부르셔서 대중들의 사랑을 흠뻑 받고 있지요. 저 역시 오 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를 회억하면서 자주 듣던 노래이기도 하고요.
산 설고 물설고 낯도 선 땅에 아버지 모셔드리고 떠나온 날 밤
문 열어라
잠결에 후다닥 뛰쳐나가 잠긴 문 열어제치니 찬바람 온몸을 때려 꼬박 뜬눈으로 날을 샌 후
문 열어라
아버님 목소리 들릴 때마다 세상을 향한 눈의 문을 열게 되었고 마음의 문을 열게 되었고
그러나 나도 모르게 그 문 다시 닫혀졌는지 어제 밤에도
문 열어라 -「문 열어라」전문
□ 허형만: 저의 아버님께서는 귀가하시면서 “문 열어라”고 외치셨습니다. 저는 반드시 아버님께서 집에 들어오시는 것을 보고 잠이 들곤 하였지요. 그런데 한겨울, 아버님 돌아가시고 삼일장 후 소한 날, “문 열어라”는 호통에 자다가 벌떡 일어나서는 “이제 혼났구나” 싶어 후다닥 밖으로 나갔더니 찬바람만 휭하니 불고 있더라고요. 환청이었지요. 새벽 3시 즈음이었는데, 아마도 이 꿈은 “이제 나 없어도 너 혼자 세상 살아가는 데 있어서 네 눈의 문을 열어라”는 아버님의 말씀이겠다 싶어서 쓴 시입니다. 저도 장사익 선생이 곡을 부친 이 노래를 굉장히 아끼며 종종 부르곤 한답니다.
(선생님께서는 구성지게 이 노래를 불러주셨다. 본인의 구구절절한 사연이 스며있는 노래였으므로 가슴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아버지>는 너무도 아름다워서 슬펐다.)
■ 김명원; 선생님께선 가브리엘이라는 세례명을 가지신 가톨릭이신데요. 하지만 시에서는 불교나 샤머니즘적 요소들이 더 표출되고는 합니다. □ 허형만: 어머니께서 태몽을 꾸셨는데 꿈에 산신님이 현몽하셔서 아주 크고 예쁜 도자기를 품에 안겨주셨답니다. 그래서인지 어머니께서는 제게 절에 가면 산신각에 먼저 들르라고 말씀하시곤 하셨습니다. 또한 어릴 때부터 뒤뜰에서 비손하시거나 부엌을 관장하는 조왕신에게 정안수를 떠 놓으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자랐습니다. 그러니 햇볕 좋은 날이면 울타리 위에 구렁이가 나와서 햇볕을 쬐는 모습이 하나도 무섭지 않았답니다. 저는 가톨릭이지만 내면에는 아마도 기층문화로서 샤머니즘적인 것이 핏속에 녹아있고 그런 것들이 저도 모르게 우러나온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 김명원: 선생님, 우문인데요. 시인임을 후회해 보신 적은 없으세요? □ 허형만: 제가 살아 온 증거로서 지난 2008년과 2009년에 걸쳐 2년 동안 발표한 신작이 72편이었더군요. 저로서는 그동안에 두 차례나 병원에 입원할 정도로 힘겨웠지만 오로지 시 쓰는 일이 사활이 걸린 작업이었음을 실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고충을《현대시학》2010년 2월호 신작 소시집 산문에서 밝혔는데요. 저는 시작(詩作)이 생을 마감하는 날, 끝내는 허망하게 한줌의 재로 날릴지라도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렇게 시적 경험, 다시 말해서 창조적 경험을 진지하게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한 저는 지상의 까닭모를 신선한 아름다움에 경련을 일으켰으며, 저 또한 다른 시인들처럼 시에 관하여 진지하게 명상했고 시에 대한 꿈을 꾸었기 때문입니다. 전 제 시에 녹아 흐르는 수많은 고통과 아픔과 눈물까지도 바닷물을 말리워 소금을 만들 듯 ‘사랑’의 결정체로 남기고자 합니다. 작금의 문단사가 당대에 평가받고자 하거나 평가해 버리고자 하는 현기증 나는 탁류 속에서 먼 훗날 단 한 줄이라도 ‘사랑’의 앙금으로 남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밤도 시를 씁니다. 세상을 하심(下心)으로 살면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과 부처님을 모시듯 가녀린 풀잎 한 촉, 가을 들판 햇살 한 부스러기도 마음에 담아 모시는 시인으로 사는 것이 행복합니다. ■ 김명원: 대학에서 후학들을 지도하시면서 절감하고 계실 텐데요. 오늘날 서투른 산업 내지는 문명의 물결은 노래하는 시정신을 상실케 하고, 상실 된 그 터전에 전복과 난무하는 엽기 혹은 야유라는 다소 경박한 해체주의적 신기가 떠도는 시단 풍조를 형성하기도 했고요. 이런 경향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으신가요? □ 허형만; 젊은 평론가나 시인들이 미래파 운운하던 때가 있었지요. 그러나 저는 이 순간에도 서정시가 나아갈 길에 대해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참된 서정성만이 우리 시가 살아남는 길이기 때문이지요. 기계 문명에 오염되지 않고 더욱 더 인간성을 옹호하며 높고도 깊은 생명감에 젖은 시를 위한 길이 서정시가 나아갈 길임을 믿거든요. 21세기에 창궐한 컴퓨터의 세계가 우리 정신, 특히 시정신을 지배할 수는 없으리란 것이 제 생각입니다. 아니 오히려 더 치열한 시정신은 불꽃을 피울 것입니다. 좋은 시는 어제도 있었고 오늘도 있으며 내일도 있을 것이고요. “사람은 날지 않으면 길을 잃는다.” 이것이 시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저의 신조이자 학생들에게도 강조하는 부분입니다. ■ 김명원: 참, 선생님께서는 2002년부터 여름방학이 되면 중국 옌타이대학에서 시학 강의를 하시지요. 같은 맥락에서 중한대조시집『許炯万詩賞析』을 펴내시기도 하셨고요. □ 허형만: 2002년 8월부터 6개월 동안 중국 산동성에 있는 옌타이대학에서 한국현대시를 강의한 것이 시초가 되었습니다. 그때 당시 옌타이대학은 물론이고 우리 현대시를 모르는 중국 학생들을 위해 산동대학, 옌타이사범대학, 청도대학 등에서 무료로 특강을 했지요. 그러던 차에 마침 옌타이대학 한국어학과의 정봉희 교수가 제 시집『비 잠시 그친 뒤』와『영혼의 눈』에서 50편을 뽑아 중국어로 번역했습니다. 이 시집은 중한대조시집으로 각 편마다 정교수 나름대로 해설을 곁들였는데 번역이나 해설 모두 상당한 수준이라고 평을 받았지요. 그 시집을 통해 중국 학생들이 우리 시를 이해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저를 기다리는 중국 대학생들을 위해 기꺼이 중국에 가 한국시를 가르치는 일은 제게도 즐거움입니다. ■ 김명원: 마지막이 되겠는데요. 2010년, 또 다시 치열하게 시창작의 행보를 시작해야 하는 이 땅의 시인들에게 들려주고 싶으신 격려의 말씀, 부탁드립니다. □ 허형만: 저는 “시인이 죽고 시가 살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말은 곧 쓰여 진 작품이 중요하지 그 시를 쓴 시인이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말에 다름 아니지요. 마르틴 하이데거의 글을 읽고 제 나름대로 터득한 시의 본질입니다. 그가 1950년 10월 7일 뷜러회의에서 <언어는 말한다(Die Sprache spricht)>라는 제목으로 독일의 시인이자 문예학교수 막스 코멜렐을 위한 추모 강연을 하면서 27세의 나이로 요절한 게오르크 트라클의 시「겨울날 저녁」을 인용한 적이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하이데거는 “트라클이 시인이라는 점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시 한편을 제대로 썼기에 시인의 사람됨이라든가 이름을 부인할 수가 있을 만큼 되어야만 제대로 쓴 시의 참된 값어치가 빛난다고 하겠다.”고 하면서, 주어진 강연 시간을 모두 트라클의 시를 분석하는데 데 바쳤습니다. 그리고 그는 “언어는 말한다.”고 마무리하였지요. 여기서 언어가 말한다고 하는 것은 말한 내용 가운데서 말한다는 뜻이지요. 일전에 <한국 현대시 감상>이라는 강의 시간에 학생들에게 시인의 이름을 뺀 작품만을 나누어주고 감상하게 한 적이 있습니다. 시를 쓴 시인이 누구냐에 얽매이지 않은 채 자유자재로 감상할 수 있었는데, 시인의 이름을 지우고 유명 시인들의 시를 읽히면 감동이 없다고 의구심을 드러내었습니다. 말하자면 지명도가 높은 시인의 시는 무조건 다 좋다는 식의 평가가 사라졌습니다. 작금의 문단은 이름 석자가 지배하는 곳이 되어서 이름에 상을 주는 세태이지요. 절대 이름에 신경 쓰면 안됩니다. 오로지 작품에만 주력해야지요. 이런 점에서 로망 롤랑의 “쓴다는 행위는 타동사가 아니라 자동사”라고 한 말, 시인들이 꼭 실천해야 할 행동강령이라고 생각해요. 그러기에 저는 시를 구상하고 쓰고 완성할 때까지 항상 저의 신념을 되새기며 작업에 임하는 편이에요. 까다로울 정도로 언어에 신경 쓰고, 완성 후엔 꼭 소리 내어 낭송해봄으로써 음악성을 따집니다. 좀 모자란 듯싶지만 컴퓨터 대신 한사코 원고지에 만년필로 쓰는 것도 시정신을 곧추세우는 방법이 되고 있습니다. 시의 내용이 너무 어렵지는 않는가,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른다거나 애매한 구절은 없는가, 나 스스로 읽어보아도 미심쩍거나 감흥이 오지 않는 부분은 없는가 등등을 점검합니다. 왜냐하면 시를 쓴 시인이 어렵고 애매하고 감동이 없는데 하물며 독자는 어떠하겠는가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작품을 쓸 때마다 홍역을 치르지요. 시인은 모름지기 시 한편마다에 목숨을 걸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시 한 편이 주는 깊이와 넓이와 크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음에섭니다. 시는 정신의 표현이니 시의 역사는 응당 정신의 역사입니다. 그러하니 시인들이란 늘 깨어있어야 합니다. 우주 삼라만상이 보내오는 신호를 시인이 꺼버린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늘 안테나를 켜서 해독해야 할 임무가 시인의 역할입니다. 우리가 쓰는 언어 중에서도 가장 순수한 것이 시라고 할 때, 시인들이 시로써 현실의 저 깊은 곳을 꿰뚫고 거기에서 터져 나오는 빛으로 우주의 영혼을 울려주기를 바랍니다.
1월이다. ‘1월’이라고 발성하고 나니 입 안이 서늘해진다. ‘1월’이 함의하고 있는 ‘첫’의 설렘으로 인해 순결한 심상이 도래한 탓도 있겠지만, 내가 즐겨 낭송하는 허형만 시인의 시「1월의 아침」이 연상되어서일 것이다. 시인은 시에서, 세월의 머언 길목을 돌아 한 줄기 빛나는 등불을 밝힌 우리의 사랑은 어디쯤 오고 있는가, 라고 노래하고 있다. 아직은 햇살도 떨리는 1월, 살아갈수록 사람이 그리웁고 사람이 그리울수록 더욱 외로와지는 우리네 겨울의 가슴, 어머니의 젖가슴 같은 땅도 풀리고 꽃잎 뜨는 강물도 새로이 흐르리라, 아아, 차고도 깨끗한 바람이 분다, 고 시로써 1월에 품어야 할 생명론적 사랑과 서정적 진정성을 소북히 담아 들려준다. 우리네 사람과 함께 이 세상을 살아 숨 쉬는 돌 하나와 풀잎 한 촉에서부터 저 하늘의 구름이며 빗물이거나 눈보라거나 저녁노을, 안개, 바람까지도 모두 귀하고 소중하다고 말하는 시인, 어려운 시대를 살며 너무도 많은 은총으로 살고 있어 그에 대한 감사로 독자에게 공감을 줄, 살아 움직이는 시를 쓰고자 가열한 삶을 한시도 멈춰 본 일이 없다는 시인, 오직 진솔한 삶과 시가 전부라는 시인은 이미 우주 삼라만상과 겸허히 교통하고 교류하였기에 자연을 닮아 있었다. 과장되지 않고, 더구나 미흡하지 않고도, 참으로 가득 찬 감동으로 감겨드는 시인의 음성은 고요한 풍경으로 채색되어 갔다. 나는 시인으로부터 새해 연하장을 받은 느낌이 든다. 이 연하장을 새해 선물로 소중하게 간직하리라. 그리고 희망이 필요한 많은 시인과 독자들에게 이 아름다운 연하장을 나눠줘야겠다. 어둠이 하얀 노래로 쌓이는 1월 밤이다.
■ 웹진 시인광장【Webzine Poetsplaza】2010년 봄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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