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재 이언적의 경주 – 옥산서원과 경주 양동마을을 중심으로
20142338 역사학과 윤은비
목차
1. 들어가며
2. 옥산서원(玉山書院)
2. 경주 양동마을(慶州 良洞마을)
3. 마치며
1. 들어가며
이번 역사학과 춘계정기답사의 장소는 경주였다. 이번 답사의 주제는‘금관을 쓰려는자 그무게를 견뎌라’ 즉 신라왕들이 중심이된 답사였다. 그렇기에 첫날 옥산서원과 경주 양동마을, 그리고 이튿날의 경주최씨고택을 제외하곤 답사지 대부분이 신라의 왕들의 흔적이 담긴 유적지들이었다. 답사지를 두 주제 로 나누자면 왕의 무덤과 왕의 정치라고 할수있는데, 오릉 무열왕릉 같은 신라와 통일신라시대의 왕릉과 불국사, 기림사등 정치와 관련된 곳이 주된 답사지였다. 대부분의 답사지들은 이 두 주제의 맥락에 속하였다. 이번 답사의 주제가 신라의 왕이었기에 신라의 역사에 대해서 배울수 있었다는 점이 좋았다.
이번 답사보고서의 주제는 옥산서원(玉山書院)과 경주 양동마을(慶州 良洞마을)에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첫날 서원과 양동마을을 감명 깊게 본점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신라의 유적지를 볼 때 빠질 수 없는 불교문화가 느껴지지 않았기에 다른 유적지들과 색다른 느낌을 주어서 인상이 깊었다. 단순히 다른 느낌을 받은 것 뿐만 아니라, 이 수업이 조선시대 생활사라는점에서 조선시대의 유적인 옥산서원과 양동마을을 좀 더 공부해 보고싶었기 때문이다. 특히 회재 이언적 (晦齋 李彦迪)이라는 인물로 연결되는 옥산서원과 양동마을에 대해 추가적 공부를 하여 답사보고서를 서술하려 한다.
2. 옥산서원(玉山書院)
옥산서원은 회재 이언적의 사후 경주지역 사림들이 그의 학통을 계승하기 위해 선조 5년(1572) 장수지지(藏修之地인) 경주부北 50여里의 자옥산하(紫玉山下)에 건립되었다. 옥산은 선생이 42세때에 김안로(金安老)에 의해 파직되면서 내려와 별업(別業)을 짓고 학문에 힘썼던 곳이다. 옥산서원의 건립은 이시기 다른 사원들과 마찬가지로 제향자(祭享者)의 내외손(內外孫), 향촌사림, 지방관의 상호 협조하에 성사되었는데 특히 부윤 이제민이 친히 터를 잡고 인부를 고르는 등 창건역사를 실질적으로 주관하였다고 한다. 현재 이곳에는 이언적의 저서들 외에 명필들의 글씨와 작품들이 보존되어있다. 옥산서원에 처음 도착할 때 들어가면서 본 亦樂門의 글씨가 정말 정갈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했는데, 교수님의 설명을 듣고나서야 그 글씨가 바로 명필 한석봉(韓石峯)의 서체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경주에 와서 한석봉의 서체를 볼 수 있을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해서 뜻밖이고 놀라웠다.
옥산서원은 전학후묘(前學後廟)의 서원이었다. 앞에 공부하는 장소와 뒤에 제사를 지내는 형식을 취했다. 이전 답사에서 갔던 서원은 전묘후학(前墓後學)의 형식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왜 서원마다 위치가 달랐는지 궁금했는데, 예전에 교수님께 들었던 설명을 기억해보니, 지대가 더 높은 곳에 제사지내는 곳을 두기위해 형식의 차이가 발생한다는 것이었다. 제사를 지내는 곳이 자신보다 낮은곳에 위치하면 안되니 지대가 높은 곳에 사당을 두거나 혹은 인위적으로 단을 쌓아 높이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옥산서원도 사당이 계단이 있어 높았던 것을 보니, 교수님의 설명을 더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앞쪽에는 구인당(求人堂)이 위치했는데 구인당은 말그대로 인을 구한다. 공자의 인을 구한다는 주리론의 핵심을 담고 있었다. 예전 답사때는 서원의 장소나 명칭에 대해 들어도 그것이 무엇을 상징하는 지 몰랐었는데, 그동안의 역사학과 수업을 통해 배우고 나니, 이제 명칭이 그 서원의 연구하는 학론을 나타내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구인당 양옆에는 민구재(敏求齋)와 암수재(闇修齎)가 있었는데 서원에서 공부하는 유생들이 기숙하였다고 한다. 구인당에 걸려있는 옥산서원이라 쓰인 편액은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의 서체였다. 매번 답사에서 느끼는 것이지만 추사 김정희의 서체는 답사마다 한번씩 마주치는 것 같았다.
체인묘(體仁廟)는 제사를 지내는 곳이었다. 진성규 교수님의 설명에 따르면 체인은 인을 실천한다는 어짐을 체험하는 공간이라고 해석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이 공간에서 특이했던 점은 신도비(神道碑)가 건물안에 위치한다는 점이었다. 옥산서원의 구조에 관한 교수님의 설명이 끝나고 나서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는데. 확실히 설명을 듣고나니 서원의 구조를 감상할 때 더 도움이 되었다. 옥산서원을 다니면서 느꼈던 점은 그의 사후에 그의 학통을 계승하기 위해 후손들이 서원을 세우고 그 서원이 경주지역 유림들의 대표적인 교육기관으로 자리매김했다는 것이, 비록 이언적은 유배에서 사망했지만 이 곳에서 그의 학문적 업적이 자리잡고 인정받았다는 것이 다행스러웠다.
3. 경주양동마을 (慶州良洞)
양동마을은 2010년 하회마을과 더불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결정된 곳이다. 양동마을은 동북쪽에는 설창산과 성옥산이 성벽처럼 둘러싸있고 서남쪽에는 안락천과 형산강을 낀 평야가 펼쳐져있으며, 크고작은 150여가옥과 15개소의 정자, 학당, 사당등이 조화를 이루면서 세워져있다. 조사한바에 의하면 여강 이씨(驪江 李氏)인 이광호((李光浩)가 이 마을에 거주하였으며 그의 손서(孫壻)가 된 풍덕 류씨(豊德 柳氏) 류복하(柳復河) 처가를 따 라 계거한데 이어 그의 무남독녀에게 장가든 손소(孫昭)가 처가의 재산을 상속 받으면서 이 마을에 살게되고 여기에 이어 이광호의 5대 종손인 이번(李審)이 손소의 7남매 가운데 장녀에게 장가들어 옮겨와 살게되면서부터 손(孫), 이 (李) 두 씨족이 주축을 이루면서 오늘의 양통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두 씨족중 유명한 인물은 손중돈과 이언적인데 둘다 류복하의 외손이자, 이언적은 손소의 외손이기에 외손의 마을이라고도 불리고 있다.
그림 양동마을
그림 양동마을의 전경
양동마을이 크다보니 길을 잃을 위험이있어 총 세팀으로 나누어져 정해진 장소 세군데만 드르게 되었다. 그래서 가본곳이 관가정(觀稼亭), 무첨당(無忝堂), 강학당(講學堂)이었다. 관가정은 손씨의 파종가인데 흥미롭게도 이씨 파종가인 향단(香壇)과 서로 대립적인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다. 양동마을의 지도를 살펴보니 손씨는 주로 서백당(書百堂) 부근과 관가정, 수운정(水雲亭) 부근에 군집해 있고 여강이씨는 무첨당파, 양졸당파,설천정파,등이 각각 파종가 부근에 군집해있었다. 관가정은 손중돈(孫仲暾)이 건축하였다고 전해온다. 관가정은 언덕에 자리를 잡고 있어 처음에는 눈에 띄지 않았지만 , 직접 올라가 보니 전망이 한눈에 보이는 좋은 경관을 가지고 있었다. 관가정의 사랑채와 안채가 ㅁ자형을 이루고 있으며 가운데 마당을 중심으로 남쪽이 사랑채 나머지는 안채로 구성되어있었다. 소박함과 유교적인 절제성이 느껴지는 기품있는 곳이라고 느껴졌다.
그림 관가정
그다음으로 이동한곳은 무첨당이었다. 무첨당은 여강이씨대종가( 驪江李氏大宗家 )이며, 파종가인 香壇과 더불어 이씨종가 문중의 대표적 문화유산이다. 능은 이곳역시 마을 가운데에서 길지로 꼽히는 장소인데, 마을에 들어서있을 때 한눈으로 쉽게 보이진 않았다. 좁은 길로 올라가서 무청당에 오를 수 있다. 민가들 사이에 있지만 독립된 영역을 형성하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무첨당은 사랑채이면서 정자였고, 누각 형식을 빌린 복합 건물로, 양반 가옥의 한 전형을 보여주는 건축양식을 갖추고 있었다. 이번 답사때는 봄에 왔지만 여름에 다시와보면 또 다른 느낌을 받을 수있을 것 같았다.
그림 무첨당의 입구
마지막으로 본곳은 강학당이다. 안락정(安樂亭)이 월성손씨의 문종서당이라면 강학당이 여강이씨의 문중 서당이라고 한다. 특이한점은 서당이 일반적으로 ㅡ자형 배치를 가지고 있는데 이와 다르게 강학당은 ㄱ자형 건축배치로 지어져있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아마 안방아래로 마루와 책방을 덧붙이면서 변화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림 강학당
강학당을 마지막으로 양동마을의 답사를 마쳤다. 아쉬웠던 점은 좀더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있었으면 더많은 곳을 돌아보고 좀더 손씨와 이씨의 대비되는 건축물의 위치를 직접적으로 확인할수 있었을 텐데 사정상 그래지 못했던 것이 너무 아쉬웠다.
4. 마치며
이번 답사는 그동안 역사학과 수업으로만 배웠던 것을 실제로 경험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뜻깊었던 답사였다. 확실히 일학년때 처음 갔었던 답사와 달리 더 적극적인 자세로 답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이번 답사보고서를 쓰면서도 그전까지 몰랐던 회재 이언적이라는 인물과 그와 연관된 옥산서원과 양동마을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었다. 보고서에서 옥산서원의 사진이 빠져있는데 , 첫날 휴대폰 배터리가 없었어서 옥산서원의 사진을 찍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답사를 오기 전까지 나는 양동마을의 존재자체도 몰랐었다. 이번 기회를 통해 양동마을에 대해 더 알게 됬으니 이번 여름에 다시 혼자 답사를 가보고 싶었다. 답사보고서를 쓰기위해 양동마을을 더 조사하지 않았다면 아마 이런 생각도 들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 양동마을에서 당산제를 지낸다는 논문을 보았는데, 만약 아직까지도 전통이 계속되고 있다면 다음번 양동마을을 갈때는 당산제에 참여하여 이 수업시간에 배웠던 것을 직접 경험해 보고 싶다.
참고문헌
<논문>
권용옥,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과 양동(良洞) 마을」, 『儒學硏究』, Vol.26,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2012
옥선호, 「양동마을의 관가정과 향단: 문화유산탐방」,『지역사회』 Vol.40, 한국지역사회연구소 ,2002
이수환, 「晦齋 李彦迪과 玉山書院」,『경주사학』, Vol.16,경주사학회,1997
20142338 윤은비 답사보고서.hwp
첫댓글 후발로 참여하게되어 서원을 못 본 아쉬움이 많았는데 서원관련 글을 써주셔서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양동마을과 옥산서원은 춘계 답사 때는 가지 못하고 겨울에 갔었는데, 기행문을 읽어보니 그 때 기억이 잘 납니다!! 옥산서원 모습은 보지 못해서 아쉽지만 전반적인 유적지 설명 덕분에 잘 알고 갑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