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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8일 구체적인 것을 길어오기 위해 벡송의 물질과 기억의 먹물내 가득한 글에 빠져 봤던 날. 1년 전 요약 8번과 다시 원문으로 보는 차이를 담다보니 결국 흑산도 제주 후쿠시마가 떠올랐다. 이번 글은 계속 퇴고를 해야하지만 일단 오늘 새벽 올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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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산어보는 언젠가 읽어보리라 했는데 두 딸과 제주일상의 중요한 정거장인 서귀포 기적의 도서관에서 하게 될 줄이야. 일단 유배지에서 소일거리했던 인물들이야 차고 넘치니 이상할 것은 없는데 물고기 도감이라니. 사실 원전에는 삽화 하나 없는 것과 달리 대중해설서나 아동을 위한 근래 편집본에는 그림과 삽화가 빠짐없이 곁들여져 있다. 사실 정약전의 본 목표는 도감 즉, 그림으로 텍스트의 한계를 넘어서 보려는 나름대로 거대한 구상이었다. 이른바 해족도설. 동생 정약용과의 서간에서 본디 자신이 밝혔던 집필구상이었다. 자산어보를 현산어부로 부르든 그렇지 않든지 간에 더 중요한 것은 도감이 어보로 변한 연유에 동생이자 유배지 먹물의 최고봉이라 할 정약용의 조언이 한몫 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림은 어떻게 하시렵니까? 글로 쓰는 것이 그림을 그려 색칠하는 것보다 나을 것입니다."
이렇게 동생 정약용의 조언을 따른 것에는 동생에 대한 존경의 마음이 적잖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십년 동안 오로지 힘써도 어찌 이백분의 일이라도 이에 미치겠는가."
했으니 말이다.
어쨌든 그림은 빠졌지만, 글로 묘사와 설명의 강도를 보다 밀도있게 이끌어 가려는 열정으로 가득한 저서가 된 것만은 분명하다. 어쩌면, 창대라고 지칭된 공동저자였던 소년과 함께 했기에 가능했을 지도 모른다. 실제 원문은 고공기니 주례니 하는 고전들에 실린 허무맹랑한 기록들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요리법이나 세척법 치료효능 생김새나 서식 양태에 대한 설명들은 보다 생동감있게 제시된 것으로 보아 인민이 먹물을 자극한 좋은 사례가 아닐까 싶다.
멜빌의 모비딕과 모래미 마을의 고래이야기의 차이에 대해 생각해 본다. 바다를 점령하면서 세계를 식민해 나갔다던 서구 역사가들의 15세기 대항해 시대에 대한 과도한 오마쥬들. 그런데 19세기 멜빌이나 쥘 베른의 작품을 보면 당시 서구인들은 바다 세계 자체에 대한 공포가 더 컸던 것으로 보인다. 카리브 해 히스파니올라 섬의 원주민을 말살에 가까운 인종청소로 제거하는데 성공했는지는 몰라도 바다에 대한 공포만은 다른 어떤 민족 국가보다 더 히스테리컬하게 발전시켰던 것 같다. 그러니 마음 깊은 곳에는 바다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했던 대항해의 후예들을 어떻게 봐야할까?
흑산도에 전해 내려오는 모래미 마을의 고래는 멜빌의 포악하고 인간에 늘 적대적인 의인화된 괴물과는 달라도 너무 달라 보인다. 표류를 밥먹듯이 하던 뱃사람들이 안전하게 섬으로 귀환하는 것을 도와주는 고래이야기가 오랫동안 전해져 왔다. 현대에 이르기까지도 전통이라면서 살육에 가까운 포경산업을 놓치 못하는 일본의 포경문화와 멜빌의 백경에 묘사된 흰수염 고래에 대한 적의는 우연일까? 최근 도올이 박경리 선생으로부터 들었다는 말에 따르면, 일본 문화 근저에는 칼잽이들의 폭력이 자리잡고 있어 천박하기 이를 데 없다는 것이다. 일본이 탈아입구를 기치로 대항해 시대의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을 어서 빨리 모방해 대동아공영을 외치며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들었던 것이 우연은 아닌 것이다.
19세기 말 포경산업으로 멸종위기에 빠진 고래와 식민지 시대의 조응을 한반도에서 찾아보는 것은 너무나도 적절한 사례가 될 지도 모른다. 구한 말 1300마리 넘는 흑산도 귀신고래 포획과 멸종에 일제 강점기 포경산업이 저지른 가학성 또는 살육제적 특성과 사무라이 문화 사이의 연관성을 읽어내는 것이 그리 허무맹랑한 일만도 아닌 것이다. 일제 강점기는 단순히 인간의 인간에 대한 지배로 끝난 것이 아니라 일본의 칼문화가 한반도의 삶의 터전을 철저하게 침탈했으며 아직까지도 개발시대의 논리로 식민성의 대표적 잔재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닐까?
다크 투어리즘이라는 어려운 용어로 제주를 설명하기보다는 송악산 자락의 알뜨르(아랫뜰의 제주 사투리)에 가보라고 하고 싶다. 사실 나도 화보로만 본 것이지만, 21세기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20세기 일제 군국주의가 파헤쳐 놓은 흉물스런 지하비행장이 있다. 세계 화산학회에서도 찬탄해 마지않아 21세기 자연유산에 오를 정도의 송악산 자락에 떡 하니 존재하는 일제 만행의 흔적이다. 제주 인구 20여만 당시 일본군이 7만에 가깝게 있었던 2차 대전의 최전선이라 할만한 곳이었다. 남경 대학살의 만행이 저질러지기 직전 일본 공군의 중간 기착지가 바로 이 곳 알뜨르 비행장이었다. 그렇다면 제주는 일제의 병참기지 이전에는 아무런 지정학적 중요성을 갖지 못했던 것인지 의문이 든다.
육지의 역사를 위주로 사서들이 기록되어 있다보니 탐라에서 제주로 명칭이 바뀐지가 고작 1000년이 넘은 지역에 대해 자세한 사정이 남아 있을 리가 없는 것이 이상하지도 않다. 분명한 것은 10만년 전에서 4만년까지 빙하기에 이 곳에는 회색곰 순록과 같은 큰사슴을 비롯한 혹한에서나 생존할 동물종들이 호모 사피엔스와 공존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오늘날 섬으로서의 제주와는 달리 빙하기 제주는 중국 한반도 일본과 모두 연결되어 있는 지역으로서 구석기 유적의 미개척지로 남아 있다. 천지연 폭포를 여러 번 가 봤어도 그곳에서 발굴되었다는 생수궤 구석기 유적을 스쳐 지나본 적조차 없으니 여행자든 현지인이든 역사에 눈감으면 그렇게 묻어가게 마련인 것이리라. 심지어 제주도 남단의 가파도에는 고인돌이 100여기가 넘게 있다. 선사시대 유적으로 놓고 본다면, 우리는 지금까지 제주에 대해서 알고있던 모든 것을 새롭게 봐야 할 지경이다. 아직도 발굴이 진행되고 있으며, 최근 논의되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제주가 고대 동아시아 해양 교류의 중추였다는 점은 분명해지고 있다. 사실 삼성혈이나 양고부을나의 탐라건국설화는 오히려 다채로운 탐라의 역사를 단선적으로 이해하게 만드는 위험을 안고 있다. 제주 이전의 탐라에서 더 깊이 밀고 들어갈 역사적 심층이 무궁무진한 지역이 바로 이 곳이다.
백제나 신라 고구려에게 탐라는 아직 완벽히 정복되거나 길들여지지 않은 독립된 집단을 의미했다. 무엇보다 필리핀 대만 유구국(오늘날 오키나와) 일본에 이르는 쿠로시오 해류와 편서풍을 이용한 탐라의 항해술은 고려시대까지도 독보적이었다. 오죽했으면, 원의 일본정벌 때 3000척의 배를 징발했을까! 또한 장보고의 청해진 해상왕국이 기능하기 위해서도 탐라와의 표면적인 공조 없이 당-신라-일본에 이르는 해상루트의 안전한 해로 확보란 요원했을 것임이 분명하다. 한 가지 의미심장한 것은 선사시대나 고대 및 고려 때 탐라의 주요 기착지가 주로 북제주 지역을 기반으로 했던 것과 달리 임진왜란 전후 즉, 동아시아에 서구의 뱃전이 밀려오던 16세기 중반 네델란드나 포르투갈이 일본과 접촉하던 시기에는 남제주권이 중요하게 급부상했다는 것이다. 하멜이 표류했던 곳은 바로 서귀포 인근 강정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일제 강점기 알뜨르 비행장은 바로 서귀포 인근 대정현, 추사 김정희의 유배지로도 유명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말이 나온 김에 추사의 그 유명한 세한도가 바로 이 곳 대정현에 유배왔을 때 영감을 얻어 완성되었다고 한다. 거센 풍파에도 버티고 꼿꼿이 서 있던 제주에서 만난 해송을 그렸다는 것인데, 내가 보기에 추사는 그 시절 가렴주구에 시달리던 제주 인민을 자세히 들여다 보지는 않은 듯 하다. 그저 정치적 박해로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달래보려 감정이입한 대상이 소나무였던 게다. 다산을 통해 남도 차문화를 획기적으로 발전시킨 초의선사와 인연을 맺은 추사는 제주에 와서도 어떻게든 그 차맛을 즐기려고 숱하게 서신으로 협박성 독촉까지도 서슴치 않았다. 자신의 미각을 그리 챙긴 만큼 제주 인민의 고달픈 삶에 대해서도 곱씹어 보았다면 세한도에서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과도한 추사에 대한 오마쥬들에 대해서 불편할 때가 많다. 19세기 말 그 얼마나 인민들이 힘들었을 시절에 청과 조선을 아우르는 먹물클럽의 좌장에 대해 과도한 찬사가 구한말의 문화적 자존감을 높이는 유일한 길인 것처럼 생각하는 먹물들이 많다. 역사는 결국 의지인데 이미 이것밖에 안된다고 여기고 들어가면, 작금의 한일전쟁처럼 일본과 대화로 타협하라는 어쭙잖은 먹물 훈계나 늘어놓기 십상이다.
추사가 유배오기 200년 전쯤부터 제주에는 출륙금지령이라는 희안한 어명이 내려져서 제주 인민의 삶이 피폐해 있었다. 섬사람들에게 먼바다로 나가 일하지 못하게 큰배를 타고 나가는 것을 엄격하게 통제하는 법이란 섬이 감옥이 됐음을 의미한다. 사실 육지로 도망하던 제주인민들을 못 나가게 하려다보니 아예 어로 활동 자체를 축소시켜버린 그야말로 빈대잡겠다고 초가삼간 다 태운 꼴인 것이다. 19세기 중반 헌종 때에 와서야 풀린 출륙금지령으로 고대 해상교류의 한 축이던 탐라의 유산은 사라져 버리고 가렴주구를 일삼는 육지것들인 탐관오리들의 폭정과 수탈의 섬이 되어 간다. 일전에 언급했듯이 고려시대 지방현으로 정식 포획된 제주에서 끊임없이 민란이 있었다고 했으니, 이미 두 왕조를 거치면서 제주는 수탈의 역사를 수백년간 오롯이 감내해 오고 있었다. 4.3 민주항쟁에 어떤 저력이 있다면, 제주의 역사를 제대로 직시하면 저항정신은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탐라가 자신만의 능력을 제대로 인정받았던 시대는 고려가 몽골의 위성국가로 전락한 때였다. 너른 목초지에 맹수하나 없는 섬나라, 이보다 더 좋은 말사육지가 있었으랴! 몽골제국이 15개에 가깝게 육성한 제국 내 목초지 중 하나가 바로 탐라에 있었다. 몽골주둔군이 고려에서 물러나던 때에도 탐라에서 말사육을 담당하던 몽골에서 파견된 목호관들은 그대로 남았다. 원나라 사서에 제주호트(제주마을)라는 시가가 전해지는데 원의 목호관으로 파견된 남편을 그리워하는 몽골여인들의 애수를 담은 노래라고 한다. 그러니까 탐라의 목호관들은 현지의 제주여인들과 토착화를 선택했던 것이다. 탐라 시대 최대 살육전이라 할 최영의 탐라정벌은 바로 공민왕이 원으로부터의 독립을 명목으로 토착세력화한 목호세력을 정벌하면서 제주인민까지도 살육했던 슬픈 탐라의 모습이기도 했다.
탐라하면 떠오르는 집단으로 삼별초가 있다. 일본의 역사가들 중에 삼별초의 중요성을 언급했던 이들은 바로 원의 일본 침공이 삼별초의 3년간에 걸친 항쟁으로 늦춰졌던 것에 주목한다. 제주에서 마지막으로 묵었던 북제주 함덕 해변을 걷다가 우연히 마주친 함덕포전적비. 강화에서 진도를 거쳐 탐라로 내려와 여몽연합군에 항거하던 삼별초는 제주 해안에 장성을 쌓고 침공에 대비하는데 성동격서의 전법으로 토벌군 김방경이 승리했다는 내용이었다. 독립을 외치던 삼별초를 원과 어용왕조 고려가 합심해 토벌했다는 서사를 곧이곧대로 수긍할 수 있을까? 마치 독립운동가를 때렵잡은 것을 자랑하던 일제에 부역했던 밀정이 현충원에 잠들어 있는 것을 보고 마냥 기릴 수 없는 것과 같다.
역사에 가정이 있으면 안된다 했지만, 신채호가 묘청을 필두로 한 북방 세력이 김부식의 남방세력에 의해 괴멸된 것에 한탄하던 것을 떠올려 본다. 탐라가 해상제해권과 목축지로서의 장점을 십분 가졌다는 것을 활용했다면, 공민왕이 토벌이 아닌 방식으로 탐라의 저력을 흡수했더라면, 14세기 후반 창궐하던 남쪽 바다의 왜구나 중국의 해적을 저지하는 동시에 반도에 국한된 조선으로의 전환이 저지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조선 초기부터 지속된 왜구에 대한 공포와 청의 등장으로 북방대륙과 남방해상 양쪽에서 샌드위치 신세가 된 조선의 먹물들이 내린 출륙금지령 앞에서 실소를 금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다시 자산어보의 저자이자 인민스런 먹물 정약전을 돌아보게 된다. 아마도 경세유표의 저자로 유배 중에도 끊임없이 위정자의 자세로 세상을 통관하려 했던 동생 약용과는 달랐던 것이 분명하다. 정약전은 섬주민과 격의없이 지내고 '창대'라는 섬소년과도 의기투합했던, 먹물성의 색감이 너무도 특이한 인물로 보인다. 오죽했으면 다산이 먼저 유배에서 풀리자 장차 자신을 만나러 올 때 더 쉽게 오도록 흑산도에서 내륙쪽으로 유배지를 옮기려 했을 때 섬주민 전부가 들고 일어나 막무가내로 막아섰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라니! 사람은 사람과 엮이면서 뭔가를 남기기 마련이다. 먹물은 서적과 이름을 남기려 할 지도 모르나 인연을 맺지 못한다면 빛이 바래지 않을까?
정약전에게 8살난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유배지로 가는 수레 앞에서 흑산도는 섬이라 뱀이 많다고 들었다면서 호신할 인형을 전해주고 엎드려 울었다 한다. 그 인형이 무슨 징험이 있을까마는 그렇게나마 해야 마음이 풀렸을 것이다. 어린 아들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유배지에서 들은 정약전의 마음이 자산어보에 간간이 깃들어 있다. 아이들과 관련해 어족이 가진 효능들에 관해 꼼꼼하게 기록해 뒀기 때문이다. 특히 뱀에 물린 상처에 좋다는 효능을 가진 무슨 생선 얘기도 있었다. 어린 아들의 모습이 떠올랐을 법한 기록이다. 두 딸과 여행하다 보니 이런 소소한 것들에 가슴이 뭉클해 지는 것은 또 어쩔 수가 없구나!
정약전의 아이사랑과 어족의 치료효능, 요리법 제시, 까치복과 우도의 밤유희, 태안의 갯벌체험과 우도의 보말줍기, 농게는 사라지고 칠게의 시대, 민꽃게와 복어의 향연. 복어이빨과 문어의 먹물. 진도와 제주 우럭의 수출, 감귤 9천억 중 2500억은 만감류. 갑오징어와 피둥어꼴뚜기의 이름 대체
정약용의 오지랖은 유명하지만 자산어보와 관련해서도 그렇다.
"섬은 우리의 그윽한 수풀이니 진실로 한번 경영만 잘하면 장차 이름도 없는 물건이 물이 솟고 산이 일어나듯 할것이다." 경세유표 중 해양정책. 조선판 해수부 창설 제안. 숲에 필적하는 생산력 자랑하는 해양에 주목. 조선이 왜 명의 해금정책을 본받아 섬을 무인도로 제주를 출륙금지령에묶었는가? 명의 안좋은 것만 골라서 닮은 것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붙잡힌 하멜일행에게 던진 조선 관리의 쇄국의지. 스파이에 대한 두려움인가? 왜구와 여진에 대한 공포인가? 공포로 정치하기.
8월 10일 간만에 여행자의 분위기를 만끽하는 새벽녘 산책. 알고자 하는 탐욕에서 식물학과 박물학의 그릇된 욕망의 냄새를 맡는다. 운동기구에 점점이 퍼져있는 현지인들. 태풍이 몰고 온 구름 방랑객들. 구름이 우리를 낯설게볼 수도. 거센 바람과 감겨드는 물살의 조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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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폐쇄성과 고려의 개방성을 견주다보면, 과전법으로 먹거리를 찾은 고려 말 사대부의 진정한 욕망을 만나게 될 수도 있다. 먹물의 자유를 위해 인민의 피와 땀 그리고 정신마저 속박하려 했던 조선 먹물의 등장. 18세기 제주목사 이형상의 조선판 계몽식민주의의 시선에 놓인 제주에서 타파된 절과 무속. 개방성에서 바다의 문제. 바람과 바다로 유희.
다음 일정을 위해 여행지의 새벽을 걷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메히꼬의 어느 마을 아마도 와하까였으리라. 정약전의 자산어보의 촉수에 닿은 바다 세계의 일상과 숙소 앞 정원에 늘어선 나무들 아마도 난대성 상록수의 이름을 어떻게든 알아내려는 탐욕. 정약전과 예르생의 욕망은 이다지도 다르게 나타났는가! 비슷한 것도 많다. 주류 사회에서 내던져짐으로써 진정으로 속할만한 안식처에서 일상을 적은 약전과 침략자에 얹혀 박애주의자로 탐바꿈한 예르생. 모두 현지인의 숭배와 존경의대상이었다. 그리고 아이들이 모두 함께 했다. 박물학자는 묘심 즉, 고양이의 호기심을 가져야 한다. 그런가? 아이들의 호기심 가득한 눈빛과 어떤 두려움 섞인 떨림을 가져야 한다. 알수록 두려워지는 것이 공포라면, 모르고 있었던 것에 대한 깨달음으로 기쁨을 느끼는 것이 동심이렷다.
나는 이제 꽉 막힌 벽체 속에서 온갖 도시적 치장에 둘러싸여 술을 마시는 것을 견디기 어렵게 되었다. 이미 바다의 냄새와 바람의 손길에 맛이 들어 버렸다. 지칠 줄 모르는 파도의 부서지는 소리에 실려 사방에서 바람이 감겨드는 바닷가를 맛보았으니 말이다. 물안경 쓰고 바닷 물결 이끄는 대로 둥둥 떠다니는 즐거움. 떼로 지어 다니는 물고기들. 아 저들의 이름이 못내 알고 싶다. 아리스토텔레스라면 잠수가 아니라 해부를 해야 직성이 풀렸을 탐욕. 살아서 두고는 못보고 죽여서 형태적인 차이를 변별해야 하는 욕망. 개체들을 하나로 꿰고 싶었던 탐욕. 아무리 분류에 분류를 거듭해도 빠져나가는 그물코의 탈출자들은 존재하는 법. 오히려 그물을 벗어난 물고기가 더 많다는 것쯤은 어부들이, 인류가 물고기를 주식으로 삼았던 때부터 깨닫고 있던 진리가 아니었을까?
자산어보에 묘사된 문어의 꽃같은 손과 마주잡았을 때 소스라치게 놀라 던져 버렸다. 몸으로 깨닫는 앎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놀람이 전율처럼 온 몸을 타고 흐르다 결국엔 행동으로 끝맺는 것. 도대체 청어의 뼈마디가 몇 개인지 세면서 살 필요가 있었을까? 고둥소리를 듣고 싶어 하염없이 바닷가를 거닐던 창대와 약전의 욕망.
어제 깨달았다. 우도에서 나는 밤마다 알고 싶은 탐욕에 사로잡혀 밤바다를 헤매며 민꽃게 잡이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손가락을 물려 아플 것 같은데도 둘째 성연이는 한사코 바윗돌에서 기어 나온 칠게의 집게발가락을 잡으려 했다. 아프다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배움이 아니겠는가. 중문 색달해변에서 파도타기를 처음으로 맛본 첫째 딸 인희. 달랑 세 번이나 탔을까 싶은 그 찰나같은 경험이 며칠 째 온몸을 타고 흐르나보다. 내 어릴 적 파도타기는 거대한 자연에 대한 공포 그 자체였다. 두 번 다시 바다 근처에 가고 싶지 않았던 경험이 어느 새 파도와 바람을 밥먹듯 즐기고 있는 불혹을 넘겨 다시 떠오르다니! 바다가 남긴 끈적한 소금끼 어린 손길 모래 사장을 거슬러 바위를 솟구쳐 부서지는 파도소리의 가득찬 느낌이 하나가 아니라 무수히 많은 변양들로 내 몸을 훑고지나간다. 더 이상 표현의 한계를 맛보니 일어설 수 밖에 없다. 오늘 밤바다가 또 다른 배움을 주지 않을까? 해가 뜨고 있다. 이제 구름을 뚫고 내 이마를 타고 눈부신 햇살이 느껴진다. 걷자.
8월 14일 새벽. 완전체로 다시 만난 식구들. 오늘은 해산물 스파게티를 만들어 먹었다. 가까운 홍원항 수산시장에서 동죽 바지락 새우 가리비로 푸짐한 스파게티에 아내가 좋아하는 놀래미회까지. 네 식구가 만찬을 즐겼다. 진정 함께 먹고 즐기는 말 그대로 식구가 된 게다. 바닷가에서 맛집 찾아다니는 것은 이제 못할 것 같다. 이번 제주 여행이 내게 남긴 일상의 변화라면 변화다. 맑은 제주 바다를 떠올리면 들어가고 싶지 않은 춘장대 갯벌 해수욕장인데 요즘 파도타기에 맛들인 두 딸은 물빛이 에메랄드건 흙탕물이건 아랑공없이 어서 뛰어들자 한다. 하하! 내가 거부할 수 있으랴! 생명의 발랄함으로 가득한 두 딸의 고사리 손들을 붙잡고 깊이 더 깊이 파도 속으로 걸어갈 밖에. 아직도 나의 탐욕스런 주변 나무와 미지의 생명체들을 향한 지식욕에 대해서는 의문이 사라지지 않는 나날이 계속되고 있다. 바위 틈에서 문어 칠게를 잡고 밀물 때 자리돔을 잡는 낚시 위치를 아는 것과 수심을 재는 측량과 식생을 분류하고 잡아올린 물고기의 뼈마디로 서식지를 구분하는 것은 분명 다른 활동인데. 결국 과학은 탐욕과 지배, 측량은 어떤 보편적인 척도에 다른 모든 지식들의 공존을 거부하려는 것일까? 그런 균열 혹은 분기는 잠재성의 서로 다른 양상인가? 바다를 뿌리뽑힌 미역처럼 떠다니면서 파도를 넘나들 때 진정 바다에 빠졌다고 느낀다. 갯벌을 들쑤시고 다니다가 해가 저물다 못해 어둑해져서야 물 밖으로 나오고, 자정무렵이면 하릴없이 우도 바닷가를 미친 놈 마냥 헤집고 다니던 때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