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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를 맞아 드디어 2천년 베트남 시간여행 다 썼네요....행복. 역사이야기들을 별로 안좋아하는 듯 하여 역사 딸린 글은 생략...
56. 다낭에서 남은 여정을5)다낭은 행운이었다.
우리는 다시 한강다리를 건넜다. 한강다리가 일상이 된 현실이다. 어제 밤 숙소 근처 빈마트라는 곳을 찾았는데 늦어서 못 들어갔었다. 고급스런 건물이 그곳에는 K형이 찾는 와이셔츠가 있을 것 같았다. 들어서자 제일 처음 반긴 곳은 삼성전자 매장이다. 건물이 대표상품으로 자리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세탁기 세일을 하는지 사람들이 많이 몰려있다. 이제는 굳이 설명이 필요 없는 우리나라 전자제품이다. 그런데 아무리 둘러봐도 와이셔츠는 없다. 헛헛한 발길, 아무래도 와이셔츠는 운이 닿지 않는가 보다. 이 보다 더 큰 도시, 호치민은 가야 있는가 싶다. 우리는 ‘운이 없다 있다.’ 라는 표현을 종종 쓴다. 자신이 택한 선택임에도 자신이 문제가 아니라 세상이 그렇다고 아주 자연스럽게 말하곤 한다. 이 말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세상이 돌아간다는 표현도 곁들여 있다. 부지기수 그런 일들이 속출하니 그럴 만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선택은 자신이 한 거다.
한번쯤은 찾아보았던 네잎클로버. 찾으면 바로 뽑아 책갈피에 꽂고는 했다. 선택을 잘했다는 뿌듯함도 생긴다. 그렇다면 세 잎 클로버는. 가만 보면 세 잎 클로버도 예쁘다. 네 잎은 행운이고 세 잎은 행복이 아닐까. 산다는 게 행복이니까. 수없이 많은 행복 속에서 우린 행운만을 기다리는 것은 아닐지. 나이 들어 비로소 생각하는 세 잎 클로버의 예쁜 모양새다. 그래도 요행을 찾듯 행운을 바라는 마음은 또 어쩔 수 없다. 과연 다낭을 찾은 나의 운수는 어떨까. 점을 치러 가면 젓가락을 휘저어 뽑으라고도 하고 쌀을 휘저어 골라서는 운수가 어떻다 말을 하지만 굳이 그런 도구일 필요는 없다.
나가려는 데 직원들이 불렀다. Larue(라루)가 잔뜩 쌓인 매장, 이는 베트남 다낭지역을 대표하는 맥주다. 베트남은 프랑스영향을 일찍이 받아서인지 맥주 종류가 우리보다 더 많다. 333은 베트남 전역에서 마시는 일반적인 맥주이고 Tiger는 호텔내의 바에서 흔히 보는 고급형으로 홉 향이 진하고 부드러워 많이들 찾는다.Saigon도 있다. 곡류의 맛이 살짝 나면서 홉의 쓴맛이 나지만 아주 시원하다. Huda는 후에 에서만 맛볼 수 있다는데 '흐엉'강물로 맥주를 만들어 맛이 좋다고들 하는데 솔직히 그 말이 걸린다. 내가 본 흐엉강은 맑지 않았다. 아무튼 Huda맥주는 2013년 월드 비어 챔피언에서 은메달을 받았다고 한다. 아무튼 Larue(라루)도 맛에 있어서는 빠지지 않는다. 향도 진하고 거품도 풍부해 쉬 사라지지 않아 맥주 본연의 풍미를 오랫동안 즐길 수 있다. 다가서 보니 Larue(라루)의 날이라도 되나 맥주를 5개정도 묶음으로 나누어 놓고 고리를 던져 고리가 그 안에 쏙 들어가면 맥주를 선사한다고 했다.
몇 사람을 보니 쉬운 게 아니다. 그렇다면 나의 다낭의 점괘는 어찌 나왔을까. 줄 선에서 멈춰서 제일 앞에 위치한 무더기를 겨냥하고 휙 하고 던졌다. 맥주를 탁 하고 건드리더니 줄행랑이다. 그런데 웬 걸. 고리가 벌써 맥주에 취했는지 뒤뚱하더니만 바로 뒤 무더기에 탁 하고 안착을 한다. 아니 어찌 이런 일이. 내 생전 어디 가서 이런 행운을 잡은 것은 처음이다. 사람들이 일제히 와우!! 환호성이다. 내가 외국인인줄 알고 더 난리다. 덕분에 많은 매장 손님들이 몰려들었다. 그런데 한 번 더 던지라는 것이다. 이쯤이 좋은데 어디까지나 운이 좋아서일 것인데 또 던지라하니. 그런데 말이다. 이번에도 또 폴짝 하고 사뿐히 내려앉는다. 이쯤이면 이것은 행운이 아니라 실력이고 행복이 겹친 겹경사가 아닌가. K형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의 낭패에서 이는 바로 증명이 된다. 덕분에 Larue(라루) 3 캔을 얻었다.
새벽에 찍은 PARKSON
그런데 3 캔이 중요한 게 아니다. 그 이후 모든 게 술술 잘 풀렸다. 분명 행운의 여신이 강림한 게 틀림이 없다. 호텔에 들어와 우리는 가벼운 옷차림으로 포도주를 들고 호텔 옆집인 바비큐 집을 찾았다. 1인분에 4만5천동이란 말이 우리를 유혹했다. 사실 술을 들고 가는 것은 허용이 안 되는 것인데 덕분에 싸게 맛나게 실컷 즐겼다. 그리고 다음 날 나는 새벽 다시 꼰 시장으로 나가 앞서 말 한대로 참기름하고 바질을 사러 동분서주했다. 그리고 다시 아침을 챙겨 먹고 꼰시장을 향했다. 오늘 벌써 두 번 째 걷는 한강다리이고 꼰시장 동네다. 책자에 PARKSON 백화점에 폼 나는 게 있다고 적혀서 아마 그곳에는 와이셔츠도 있겠다 싶은 비장의 숨은 카드다. 하이 랜드라는 커피숍에서 너무도 단 진한 커피를 마셨다. 마시며 역시 콩 카페를 못 쫓아오는구나 싶었다. 그리고 탐방은 시작됐다.
그런데 PARKSON은 내 수준이 찾을 곳은 아니었다. 최하가 50만동이고 대부분은 1백만동이 넘었다. 설령 그곳에 와이셔츠가 있다고 해도 명품을 어찌 감당할 텐가. 그런데 바로 옆 건물 BIG C-MART, 북적대는 것이 고급스럽지는 않지만 우리 체질에 맞는 취향이 있을 듯싶었다. 예상은 적중했다. K형은 4천 원짜리 와이셔츠를 몇 벌을 사고 나는 5백 원짜리 런닝을 샀다.이글을 쓰는 나는 단돈 5백 원짜리 런닝을 걸치고 있다. 한 번 빨아봐야 본색을 알겠지만 섬유산업이 베트남으로 몰려든다하더니 질이 떨어지는 것도 아닌 것 같다. 반미가 단돈 7백 원인데 미처 챙기지 못한 게 아쉬움이다. 이것저것 사다보니 비닐봉지가 두 개나 돼 앞서 말한 대로 꼰 시장 할머니한테 들려 큰 비닐봉지를 얻었다.
그리고 Banh Xeo ba Duong이란 음식점으로 향했다. 비교적 외곽이다 할 위치한 음식점은 들어설 때부터 뭔가 느낌이 달랐다. 간판도 크지 않고 주택가 골목 안쪽 끝까지 따라 들어가야 나오는 게 알아서들 찾아오시라 하는 것만 같았다. 맛은 끝내준다는 다른 표시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도 왜 보면 맛있는 집은 굳이 알리려들지 않는 것처럼. 골목이 다 이 반쎄오를 파는 집들인데 이집이 워낙 유명하다보니 똑같은 이름을 쓰는게 아닌가 싶었다. 대기 줄에 질려 기다리다 지쳐 먹고 가는 사람이라도 잡자는 그런 것 같이만 느껴졌다. Ba 할머니, Duong 즈엉 (혹은 융 이라고도 읽는다.)은 사람 이름. 그러니까 즈엉 할머니네 반쎄오집! 이라는 뜻이다. 들어가서 왼쪽은 주방, 그리고 오른쪽 깊숙이 들어가서도 식사하는 곳인데 점심시간이 지났는데도 정말 사람이 많았다. 로컬식당치고는 천장도 높고, 밝고 깨끗한데다가 무엇보다 메뉴표시가 가격과 함께 딱! 되어 있어 외국인도 안심하고 주문할 수 있다.
<Banh Xeo Dac Biet (반쎄오 닥비엣/모듬 반쎄오) 55,000vnd/접시, Banh Xeo (반쎄오) 40,000vnd/접시, Thit Bo Nuong (팃 보 느엉/소고기 구이) 80,000vnd/접시, Bun Thit Nuong (분 팃 엉/고기 비빔쌀국수) 25,000vnd/그릇, Nem Lui (넴 루이/다진 고기구이) 5,000vnd/1개(꼬치)>
모듬 반쎄오와 그냥 반쎄오의 차이는 안에 들어가는 내용물 차이라 했다. 이왕이면 숙주, 새우, 고기 등 풍성한 내용물이 들어가는 모듬 반쎄오가 낫다. 상추, 고수, 박하같은 신선한 야채와 반쎄오를 얇은 라이스페이퍼에 싸서 각자 찍어먹을 소스에 푹 눌러 찍어 먹는 맛은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바로 이 맛이야. 배가 불러 감칠맛 나는 양념을 더해 구운 소고기 Thit Bo Nuong (팃 보 느엉) 하고 고기 비빔 쌀국수Bun Thit Nuong (분 팃 느엉)을 못 먹은 게 한이 된다.
우리는 이어서 미켓 해변으로 향했다. 새벽 내가 꼰시장을 향할 때 K형이 호텔에서 무료로 빌려주는 자전거를 타고 2킬로 떨어진 미켓 해변에 다녀온 터라 점 찍어둔 곳이 따로 있었다. 다낭은 나짱과 달리 해변가로 부터 일정 거리 떨어져 건물이 들어서 어수선하거나 그렇게 혼잡하지 않으며 질서정연했다. 해수욕을 마치면 샤워를 하고 갈아입고 나서야 하기 때문 무엇보다 비키니 차림으로 거리로 출현을 안 하는 게 좋았다. 우리는 미켓 해변 벤치에 앉아 한동안 무심히 바다를 바라보았다. 저 멀리 손짜(Son Tra)반도에 서있는 링엄사(靈應寺:Chua Linh Ung)의 해수관음상이 외로이 바다를 지키는 게 아주 작게 시야에 들어왔다. 푸른 색 바다, 짙푸른 물결이 출렁이며 마음을 흔들었다. 바다는 늘 변함없으련만 울고 웃고 싸우고 그렇게 사는 인간들. 프랑스 기병도 미 해병도 보트피플도 그렇게 밀려왔다 썰물처럼 빠져나간 다낭이다. 나는 바다를 바라다보면 덧없다 싶은 말이 절로 나온다. 그야말로 사연 깊은 다낭 미켓 해변이다.
우리는 도로를 건너 실내 수영장이 있는 숲속의 빈터라 할 가든에 가서 앉았다. 내가 다낭에서 실감하는 것은 어린아이들이다. 베이비부머가 30~40에 해당하니 주렁주렁 아이들을 둘 이상을 데리고 다니는 풍경을 자주 보게 된다. 도마뱀이 겁 없이 살살 다니는 수영장이 그런 아이들로 초만원이다. 내가 젊을 적 우리나라 경제속도가 두 자리 수이었던 것처럼 아마도 다낭이 그렇겠다 싶다. 나라가 융성하려면 활기찬 젊은 친구들이 있어야 한다. 우리보다 더 가족적이고 대가족들이 같이 산다더니 효자효녀들도 많아 보인다. 모임 속에는 어른들이 꼭 껴있다. 우리는 호텔로 돌아와 호텔 실내 수영장에서 몸을 담갔다. 참 하루가 빨리 지난다. 돈도 다 떨어지는 상황, 마지막 남은 100불, 만약을 대비해 비상용으로 들고 다니는데 이 마저 아낌없이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K형에게 제안을 했다. 지금부터 3시간, 그러니까 5시부터 7시까지는 내가 경영권을 쥐겠다. 우리는 다시 BIG C-MART로 향했다. 지난 번 호치민 여행 때 아들 녀석 모자를 쓰고 왔다가 잃어버려 나는 모자가 없다. 그래서 눈여겨 본 모자인데 돈을 쓸까 망설이다 그냥 돌아섰는데 그게 내 작은 아쉬움이었다. 2만원을 세일해 판다는 1만 원짜리 모자를 샀다. 그리고 달랏 포도주 3천 CC짜리 팩을 샀다. 돈도 돈이지만 부피가 커서 망설였던 포도주다. 지난 번 달랏 여행 때 사오지 못해 모임에 가지 못한 분한테 미안함을 가졌었다. 어느덧 경영권을 넘겨줄 시간, 남은 돈을 다시 K에게 넘겼다. 황혼이 물드는 시간, 우리는 강변에서 제일 높은 건물 노보텔 근처 맛집 마담 란 (Madame Lan)에 들러 저녁을 먹고 노보텔에서 칵테일을 마시기로 했다.
나는 3킬로 포도주를 들고 그를 열심히 쫓았다. 그런데 거리가 난리다. 한강다리를 건너올 때만해도 이렇게 붐비지 않았는데 그야말로 인산인해다. 뭔 일이 났는가. 어제 본 플래카드가 다시 떠올랐다. 불꽃 축제! 아차 싶었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 아닌가. 4월30일 . 베트남이 통일이 된 날, 탄손누트 공항으로 해서 통일궁에 탱크 두 대가 들어가 남베트남 항복을 받은 날이 오늘이 아닌가 말이다. 역사 기행 글을 쓰면서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다낭에 올 때도 전혀 의식치를 못했었다. 이런 행운이 있는가. 사람들이 한강다리로 몰려들었다. 우리도 노보텔을 향하여 열심히 걸었다. 사람들도 많은데 하필 이쯤 GPS가 엉망일 것은 뭐람. 불과 30분이면 갈 거리를 정확히 70분을 걸어서 겨우 찾는 마담 란 (Madame Lan)에 당도 했다. 노보텔이나 음식점이나 한강 변이기에 식당 안에도 밖에도 온통 사람물결이다.
일하는 종업원들도 마음이 들떠서인지 주문도 안 받고 우왕좌왕, 겨우 주문을 했다. 마당 한가운데 망고나무가 이채롭다. 왜 식당이름이 마담 란일까. 가문을 일으킨 부인, 자식을 잘 키워 나라에 바친 이, 아니면 음식을 잘 만드는 장인...필시 그중 하나가 아닐까. 여러 생각 속에 드는 부러움 하나. 기억 속에 간직하고픈 마음들이 모여 그대를 변하지 않는 이름으로 그곳에 두려한 것 일게다. 식사도중 계산서를 들고 왔다. 느낌으로 알 것 같았다. 불꽃에 반해 식사를 하다가 우리가 그냥 나갈 수도 있고 아니면 종업원도 불꽃이 보고 싶어 미리 계산을 하자는 것도 될 것이다. 그렇게 불꽃이 멋있고 화려한가. 드디어 축포가 울렸다. 마치 전쟁이라도 발발한 것처럼 따다닥 소리는 엄청났다. 종업원이 안보였다. 더 시켜먹는 것도 이번만은 안 될 것이다 싶다.
우리도 거리로 나왔다. 노보텔 전망은 고사하고 다리건너 호텔로 돌아갈 것이 꿈만 같다. 젊은 도시 다낭이란 것을 붐비는 인파들로 실감했다. 축포소리에 놀란 아이들이 울어대자 곳곳에서 또 아이들 울음소리다. 그래도 환호성은 줄기차게 강변을 뒤덮고 그들의 축제는 한껏 열기가 드높다. 아! 우리 광복절을 이 정도 아끼고 사랑했던가싶다. 한강다리로 겨우 빠져 나왔다. 이제 다리만 건너면 호텔 근처다. 그런데 다리위에 헤아릴 수 없는 초만원으로 도저히 나갈 수가 없다. 겨우 비집고 나서려는데 누군가 말을 걸어온다. 순간 이상한 생각이 들어 손을 바지주머니로 향했다. 녀석 손이 반쯤 내 바지 속에..다행히 아무 일 도 없었다. 이 또한 행운이 아닌가. 호텔 옆 미식가식당이라는 한국간판 식당 앞에 다다랐다. 거기도 사람들이 도로에까지 몰려들어 한바탕이다. 왜일까. 주인은 마이크를 잡고 한껏 신라의 달밤을 연주기에 맞춰 열창을 하고 있고 몰려든 사람들이 박수로 화답을 한다. 분명 한국사람 하고 베트남 사람들은 닮았다. 순간 그렇게 서로 닮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확 가슴 속에 닿는다.
우리는 드디어 다낭을 떠나야 한다. 또 다시 한강다리 건너 콩 카페에 들르고 마사지를 하고 반미를 사들고 호텔로 돌아와 택시를 잡아타고 공항으로 향했다. 참 기억에 남을 다낭이다. 숫한 전쟁 속에서 이제 비로소 베트남은 환하게 웃는다. 호치민이 달리 보이는 대목은 거기에 있다. 올해 말 또 다시 여행을 떠난다 하면 나는 다시 베트남을 택할 것만 같다. 왠지 베트남은 우수도 애틋함도 서글픔도 힘찬 발걸음도 우리와 닮아 있다 싶다. 그들 젊은 층들이 K-pop을 연호하는 것은 한 때의 단순함이 아닌 유사한 정서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제부터라도 우리와 베트남은 서로를 이해하고 감싸고 즐겁게 살아야 한다. 그동안 이데아의 늪에서 너무 힘들게 살았다. 진흙 벌 속에서도 연연히 꽃을 피우는 그들의 국화 연꽃이 이제 빛을 발할 때가 됐다싶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