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황금빛에 물들다
최 화 웅
살얼음 잡히고 첫눈이 내린다는 절기, 소설(小雪)이다. 세밑의 은행나무 나목(裸木)으로 떨고 섰다. 나는 특별히 단풍놀이를 가지 않는다. 내 곁에 있는 도회의 가로수 단풍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긴다. 더구나 쓸데없는 것에 시간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고집 때문이기도 하다. 가을이 깊어가는 날 프라타나스의 마른 잎이 갯벌 위를 걷는 게처럼 보도(步道) 위를 곁눈질하며 걷는다. 샛노란 은행나무 낙엽이 카펫처럼 깔린 거리의 풍경이 더 없이 아늑하다. 한차례 겨울비가 내린 을씨년스러운 거리에는 화려한 조명과 귀에 익은 크리스마스 캐럴이 흐르고 두터운 외투를 입은 행인의 종종걸음 이어진다. 해마다 이맘때면 나는 숨겨놓은 부산의 은행나무 단풍길을 걸으며 가을을 만끽한다. 광복동 입구 옛 시공관으로부터 중부경찰서에 이르는 중앙동 안길과 보수동 헌책방 골목이 끝나고 대창동이 시작되는 영선고갯길, 그리고 광복동 뒤 한적한 용두산 둘레길에는 은행잎이 인도에 쌓인 낙엽 단풍잎이 자동차가 지날 때마다 낙엽은 부서져 흙으로 돌아가려는 듯 황금파도를 탄다. 시비(詩碑)가 즐비한 용두산 공원길에는 누가 만들었는지 군데군데 앙증스런 은행잎 하트에 눈길이 머문다. 그 주위에서는 가로등이 스포트라이트가 된다.
은행나무 단풍이 그린 부산의 초겨울 풍경은 밝고 아름답다. 나는 그 길을 걸으며 초롱불 같이 흔들리는 젊은 날을 회상한다. 귀 기울이면 찬바람 부는 초겨울의 운치를 더하는 은행나무가 서정에 깃든 사랑을 속삭인다. 은행나무에 얽힌 전설을 더듬으며 황금빛으로 물든 밤거리를 걸으면 마음에 가을빛 짙게 물든다. 가을비 내리는 날이나 비온 뒤 빗물을 머금은 보도 위의 은행잎을 밟으면 더욱 선명한 노란색이 되살아난다. 비바람에 떨어진 은행잎이 가을의 등불로 마음에 짠하다. 은행나무 잎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큰 가지에서는 어긋나지만 작은 가지에서는 모여나기로 잎을 키운다. 은행잎은 마치 부채꼴 모양으로 두 갈래의 차상맥(叉狀脈)으로 자란다. 긴 가지의 잎은 깊이 갈라지고 짧은 가지의 잎은 가장자리가 밋밋하다. 잎 끝은 미세하게 물결치듯 양쪽으로 퍼져나간다. 은행나무의 엽질(葉質)은 가죽질이고 수분이나 양분의 통로인 잎맥(脈)은 잎기부에서 끝을 향하면서 몇 번 갈라진다. 잎맥이 한 줄로 오다가 Y字형으로 두 줄로 갈라져 표면의 살결은 곱다. 잎맥은 잎 속의 유관속계로 잎의 매무새를 지탱하면서 동물의 모세혈관처럼 잎 전체로 퍼져 나간다. 은행나무 잎맥은 잎 끝에서 서로 떨어져 있는 개방맥이다. 맥이 한 곳에서 3개로 갈라지는 일은 없고 분기가 집중되는 대(帶)를 이룬다.
잎이 하나이기도 하고 두 갈래로 갈리는 은행나무는 암수가 딴 몸이다. 그러나 때가 되면 찾아가 서로의 사랑을 나눈다는 사실이 놀랍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 중 하나로 알려진 은행나무(Ginkgo)의 고향은 중국이다. 중국에서는 열매가 살구를 닮아 ‘은빛 살구’라는 뜻에서 은 ‘은(銀)’자에 살구나무 ‘행(杏)’자를 써서 은행(銀杏)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1814년 8월 어느 날. 괴테가 프랑크푸르트 여행길에서 은행가 야콥 폰 빌레머의 집에 들러 약혼녀 마리안네 융(1784~1860)을 만났다. 그들은 보자마자 서로에게 이끌려 14세기 페르시아의 전설적 시인 하피스의 시를 매개로 편지를 주고받을 만큼 사랑에 빠졌다. “그녀에 대한 나의 사랑이 너무나 커서 여름철 무성한 나뭇잎이 모두 다 혀가 된다하여도 그 사랑을 다 말하지 못하리라.”고 스스로의 사랑을 고백한 괴테는 1819년에 발행된『西東시집(West-östlicher Divan)』에 실린 ‘은행나무’ 시에서 “둘로 나뉜 이 생동하는 잎은 본래 한 몸인가 아니면 서로 어우러진 두 존재를 우리가 하나로 알고 있는 것일까”라고 읊었다. ‘은행나무’ 시는 독일의 한 노시인이 고향을 벗어나 ‘순수한 동녘 땅으로’, 400년 전 하피스가 살았던 페르시아를 향해 상상의 여행을 떠나는 내용이다.
괴테는 자신을 동방의 유명한 노시인 하템, 사랑하는 마리안네를 페르시아의 전설 속의 주인공 줄라이카로 상정해 시를 노래했다. 그 사랑의 여정을 간추려보자. 괴테는 1814년 여름 홀가분한 마음으로 고향인 라인-마인-네카 지역으로 여행을 떠난다. 괴테는 8월 4일 비스바덴에서 처음으로 마리안네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녀는 당시 서른 살의 성숙한 여인으로 풍만한 몸매를 자랑했다. 그녀의 문학적 소양은 괴테가 만난 여인들 중에 가장 뛰어났다고 한다. 마리안네는 어린 시절을 빈에서 보냈다. 1788년 가을 어머니와 함께 프랑크푸르트로 와서 12월부터 배우로 공연에 참가해 무대에 올랐다. 괴테와 마리안네가 단둘이 만날 수 있었던 것은 1814년 10월 12일 괴테가 고향 프랑크푸르트를 떠나기 직전의 일로 기록했다. 마리안네의 남편 요한 야콥 폰 필레머는 출타 중이었고 이들은 10월 20일까지 아흐레 동안 괴테가 바이마르로 떠날 때까지 함께 지낸다. 이때 괴테와 마리안네는 연인처럼 사랑의 감정이 끓어올라 불타는 사랑의 감정을 시로 표현한 편지를 주고받는다. 이들이 주고받은 시를 통해 나이 든 작가 괴테와 젊은 부인 마리안네의 사랑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승화한다. 봄의 어원은 ‘보다’로부터 시작하고 그리움이 ‘긁다’라는 동사로부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움은 마음에 에스키스(esquisse)하듯 밑그림을 그린다.
학계에 따르면 은행나무가 지구상에 나타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2억 5천만 년 전이라고 한다. 그래서 은행나무를 흔히 ‘살아 있는 화석’이라고 일컫는다. 은행나무는 암수가 딴 몸이라 마주해야 열매가 열린다. 범어사 설법전 마당에서 600년 넘게 가람을 지키며 살아온 노승 같은 은행나무가 이를 잘 말해준다. 동물의 정충처럼 생긴 꽃가루가 스스로 움직여서 난자를 찾아감으로써 비로소 열매를 맺는 것이다. 우리 땅에는 은행나무의 자생지나 군락지가 없다. 일일이 한 그루씩 심은 것이다. 은행나무는 마을 어귀에서 마을을 지키는 동구나무로 3대 당산나무 중 하나다. 금련산 기슭 수녀원의 뜨락에서 산새의 보금자리로 자리 잡은 활엽수 중에는 가을마다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가 보는 이의 감성을 불러일으킨다. 은행나무와 제대로 사랑을 나누려면 짧게는 4계절을 함께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우듬지에서 새싹이 돋는 봄으로부터 성장이 왕성한 여름을 보내고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 가을을 지나 빈 가지에 찬바람이 머무는 겨울이 되어야 은행나무의 일생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은행나무 단풍이 가장 아름다운 곳은 아산 현충사 입구의 은행나무 단풍길이다. 곡교천 은행나무길은 ‘전국의 아름다운 10대 가로수길’로 선정되었다. 충남 아산 곡교천 충무교로부터 현충사 앞까지 2㎞가 넘는 길에는 은행나무 터널을 이룬다. 가을이면 3천여 그루의 은행나무가 일제히 노란색 초롱을 밝혀들고 임을 마중한다.
우리나라에서 키가 제일 큰 은행나무는 양평 용문사에 있는 천연기념물 제30호 은행나무다. 키가 62m로 30층 높이의 아파트만큼 높고 1,100년 정도 산 것으로 알려진 노거수다. 2009년 창립된 ‘천태산 은행나무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현재 500여 명의 회원이 천태산과 영국사 은행나무 주변의 자연 보호와 더불어 생명, 평화를 지키기 위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천년 은행나무도 운다.’는 시 모음집에는 ‘공광규, 나종영, 도종환, 유승도, 이원규, 장지성, 최서림 등 전국의 시인 330여 명이 참여하고 있다. ’천태산 은행나무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천년 은행나무도 운다.”는 시로 천태산을 오르는 길목으로부터 은행나무 주변까지 국내 최대 걸개 시화전을 연다. 그동안 이 단체는 문화재청으로부터 문화재 생생사업 시범사업기관과 우수사업기관으로 선정되어 ‘천년 은행나무 생명 스테이, 천태산 은행나무 문학상’등의 사업을 펼친다. 서울특별시는 1971년 4월 3일 서울을 상징하는 나무로 은행나무를 시목(市木)으로 지정하여 시민들이 계절의 변화 속에 서정과 정감 어린 가을을 느끼게 한다. 괴테와 마리안네가 펼친 '세기의 사랑'을 차마 필설(筆舌)로 다 하지 못한 사연을 시로 읊었을까? 찬바람 부는 거리에는 지금 우리의 사랑도 황금빛 파도를 탄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