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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다서 1장 18-19절 경건치 않은 사람들의 삶의 방식
사도들의 가르침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동일합니다. 영적인 미혹자들을 조심하여 자신을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도 미리 말씀하셨고 사도들 역시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미리 말씀하셨다는 것은 장래 일어날 일을 미리 보았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과 사도들에게 앞으로 될 일들 중 일부를 보고 예언하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성도를 미혹하는 영적인 가라지들이 교회에 침투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교회에는 다니지만 영원하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가 결여되어 있고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붙어있는 가지도 아니었습니다.
여러분들이 계속해서 유다서의 말씀을 들으시는 것처럼 그들의 죄는 도덕적인 차원에서의 죄라기보다 영적인 차원에서의 죄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도덕은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사느냐 그렇지 못하냐를 묻거나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그런 죄는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죄의 유형에 들어가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는 예수님의 몸을 공격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거리고 더럽히는 아주 악한 죄들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죄라고 하면 도덕적인 죄를 생각합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은 도덕적으로도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신 새 계명은 도덕 이상의 사랑과 헌신으로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시고 계십니다.
도덕은 함께 살기위해 무엇인가를 하지 않기만 해도 착한 사람, 또는 정직한 사람이라고 하며 칭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다릅니다. 사랑은 누군가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셨던 사람의 모습을 회복하고 하나님을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며, 또한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삶을 살 것을 요구합니다. 자기 안에서 그런 사랑의 마음이 불일 듯 하게 일어납니다.
그 마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면서 그 때 임하신 성령을 받은 사람들에게만 일어나는 하나님의 사랑의 불꽃입니다. 그리고 그 불꽃에 반응하며 함께 동참하는 사람들 역시 사랑의 불꽃을 마음에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그런 불꽃들이 모여 큰 불을 일으키며 세상의 죄를 태우고 하나님의 사랑과 공평과 정의의 나라가 서도록 합니다. 하나님이 이 일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를 훼파하는 거짓 이론으로 무장하고 헛된 꿈을 꾸는 이 사람들은 영적인 죄악에 사로잡혀 있어 불경건하게 말하며 불경건하게 생활을 합니다. 그들의 꿈은 결코 하나님께서 이루실 하나님 나라와 관계가 없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삽니다. 이것에 대하여 18-19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하지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하였나니 이 사람들은 분열을 일으키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이 없는 자니라”
이들의 경건하지 않는 삶을 보면 다섯 가지의 악을 행하면서 산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정욕대로 행합니다. 둘째로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조롱합니다. 셋째는 분열을 일으킵니다. 넷째는 육에 속합니다. 다섯째는 성령이 없는 자입니다. 이제 이 말씀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이들은 정욕대로 행합니다. 정욕은 요한일서 2장 16절 말씀을 보면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여러분들이 영적인 삶을 사는 것을 싫어합니다. 정욕대로 사는법을 가르칩니다.
그런데 이 경건치 않은 사람들 역시 영적인 삶을 산다고 하면서 세상과 똑같은 삶을 추구합니다. 그들은 정욕적입니다. 육신의 정욕은 몸으로 느끼는 모든 것들에서 정욕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지극히 육체적입니다. 먹고 입고 행하는 모든 것은 성적인 것들, 벌어들이는 모든 것과 모아들이는 것, 그리고 자기 집에 쌓아 놓는 모든 것들은 다 정욕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집에서 썩어나가도 다른 어려운 사람들에게 손을 펼쳐 나눠주지 못합니다. 나눠줄지라도 그것은 사람들로부터 칭찬받기 위한 의도로 나눠줍니다.
안목의 정욕은 눈으로 보는 것으로 인한 정욕입니다. 예를 들어 여자들의 경우는 쇼핑중독에 잘빠집니다. 보는 것에 의해 구매충동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홈쇼핑을 보다가 자기 집에 굳이 사지 않아도 되는 것을 전화해서 주문하고 봅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 집에 물건들은 쌓여가는 데 사용하는 것은 몇 가지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교회에서 누군가를 구제한다거나 선교사의 사역을 하기 위해 선교헌금을 하라고 하면 금방 인색해집니다.
홈쇼핑을 보면서 당장 필요하지도 않은 것을 몇 십만원, 몇 백만원을 사용하는 사람이 구제헌금을 한다거나 선교헌금을 한다거나 교회에 무슨 수리를 한다거나 구입을 위해 자원해서 헌금하라고 하면 만원도 아까워합니다. 드리기는 드리는 데 마지 못해서 드리는 일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남자들의 경우는 이성에 대한 정욕이 눈으로 보는 것을 통해 빠져들게 됩니다. 그래서 시대가 갈수록 선정적이 되어 갑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여성들이 남자들이 자기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본다고 고소 고발하면서도 누군가 자기를 보아주길 은근히 바라면서 짧은 치마나 짧은 반바지를 입고 몸의 여러분들이 드러나는 옷을 입습니다.
텔레비전의 가수나 아니면 무슨 시상식을 보면 깊이 파인 옷을 입거나 비추는 옷을 입음으로 남자들의 눈을 자극합니다. 여자들도 그런 모습을 보면 반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남자들은 그런 모습을 보면 남자들끼리 모였을 때 그것이 화제가 됩니다. 물론 목회자들끼리 모여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못보았지만 교회 밖 세상은 이야깃거리가 온 통 그런 것들로 가득찹니다. 그들의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그런 것에만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이생의 자랑은 자기가 누리고 있는 것들, 가지고 있는 것들을 자랑합니다. 돈이 있는 사람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돈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자기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지를 자랑합니다. 권력이 있는 사람들은 그 권력으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 지를 자랑합니다. 인기가 많은 사람들은 그 인기로 얼마나 많은 돈을 버는 지를 자랑합니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팬들이 있는 지를 자랑합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이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때 얼마나 크고 힘있고 풍부한지를 자랑합니다.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 지식으로 자기가 얼마나 돈을 많이 버는 지를 자랑합니다. 세상 적인 사람은 모든 자랑거리를 이 땅에서 찾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결국 정욕은 사람을 미혹하는 미혹의 덩어리일뿐 그 이상 이하도 아닙니다. 그 정욕을 따르는 자는 멸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다 자기 중심의 삶을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첫째가 정욕적이라면, 둘째로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조롱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처럼 정욕적으로 살지 않는 것을 보면서 조롱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바보같고 미련하다고 말합니다. 왜 먹을 것 안먹고, 누릴 것 누리지 않으면서 그렇게 어렵게 번 돈을 헌금하느냐 또 남을 위해 쓰느냐고 조롱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도 조롱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 있는 교회를 조롱합니다.
다윗이 시온성을 공격할 때 그 성 사람들은 다윗을 비웃고 조롱했습니다. 그들은 다윗에게 “너 정도는 우리 성에 있는 절름발이들도 이길 수 있을 거야”라고 하면서 조롱했습니다. 그 일로 화가난 다윗은 시온성을 정복한 후 절름발이들을 다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엘리사의 경우도 역시 젊은 청년들이 조롱하면서 놀렸습니다. “대머리야 올라가라, 대머리야 올라가라” 그때 엘리사는 말했습니다. “만일 내가 하나님의 선지자라면 숲에서 곰이 뛰어나와 이 청년들을 찢어 죽일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되었습니다. 예수님 역시도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사람들이 조롱했습니다. “야 네 아버지가 하나님이라면서 하나님에게 구해 달라고 해봐 그러면 네 하나님이 너를 구해주실 거야”
여러분들도 역시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사람들로부터 어리석다느니, 미련하다느니, 바보같다느니, 왜 그렇게 사느냐는 등 수많은 조롱섞인 말들을 듣습니다. 그러나 승리는 반드시 믿음을 지킨 사람들에게 돌아가며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상을 받게 됩니다. 여러분 세상이 여러분들을 조롱한다 할지라고 예수님만 바라보고 걸어가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평강이 여려분들이 옳았음을 보여주는 날이옵니다.
셋째로 그들은 분열을 일으킵니다. 분열은 하나님 됨의 반대말과 같습니다. 이것은 마귀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교회를 하나가 되게 하십니다. 이들은 마치 염소와 같아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수시로 들이받습니다. 그로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괴롭힘을 당합니다. 그들은 입으로 다른 사람을 험담함으로 자기가 이야기 하고 있는 사람들이 흉보는 대상과 멀어지게 합니다. 이간질을 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될 교회를 이렇게 이간질 시키고 흉을 보면서 다니면서도 자기는 의로운 척합니다. 그가 이렇게 하면서도 자기 죄를 알지 못하는 이유는 양심에 화인을 맞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그는 멸망의 냄새를 풍기면서 온 교회를 어지럽힙니다. 그런 사람은 어디든지 있습니다. 사탄이 그런 사람을 교회에 심어놓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좋은 씨앗을 뿌렸던 종들이 주인에게 “주여 우리가 좋은 씨를 뿌리지 않았나이까 그런데 어떻게 가라지가 났을까요?” 그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이것입니다.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 그러자 종들이 묻습니다. “우리가 저 가라지를 뽑을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그냥 두어라. 가라지를 뽑을까 하다가 괜히 잘못 건드려서 곡식까지 뽑을까 하노라 그냥 추수 때까지 두었다가 그때 분류해서 곡식은 창고에 가라지는 불태워버려라”
이것이 예수님이 그들을 교회 가운데서 악을 행하도록 그냥 두시는 이유입니다. 그들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그들을 멀리 하고 그들의 악에 대하여 하나님께 맡기면서 참으십시오. 그러면 주님의 때에 주님께서 손을 대실 것입니다.
넷째는 육에 속합니다. 그들은 근본이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적이고 육적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무엇을 더 중요시 여기는지가 금방 드러납니다. 그들의 관심은 영원한 천국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서도 일부가 이루어집니다. 여러분 안에서도 이루어지고 있고, 교회에서도 역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세상 끝을 행하여 확장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나라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완성되어져 갈 뿐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천국에서의 하나님 나라를 완전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그 나라에 소망을 품고 앞으로 전진하기를 원하십니다. 영적인 삶은 하나님께 속해 있으며 이 세상의 것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목표는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의 것을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만나는 거의 모든 것들이 소중합니다. 시간도, 재능을 활용하는 것도, 돈도, 인간관계도, 세상의 법조차도 다 소중합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것은 끝날 때가 옵니다. 모두 놓고 가야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예수님과의 관계만 남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믿음으로 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 뵙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과 여러분들의 사랑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나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을 만나는 천국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거기서 영원히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삽니다.
그 예수님 안에서의 누림이 육에 사람에게는 가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안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복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슬피 울며 영원한 지옥불에서 고통을 당합니다. 이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미래입니다. 행한 대로 보응을 받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성령이 없는 자입니다. 이들이 육체가 된 것은 그들 안에 성령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없는 사람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습니다(딤후 3:5). 사도 바울은 제자이며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에게 이런 말씀을 전해줍니다. 디모데전서 6장 3-5절까지인데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이 말씀은 유다서의 저자가 가르치는 바와 매우 동일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다른 교훈을 말합니다. 그리고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않습니다. 또한 교만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변론과 언쟁을 좋아합니다. 이로인해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납니다.
그리고 그들은 마음이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부패하여지고 그나마 들었고 남아 있던 진리를 완전히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이제는 경건을 하나님 앞에서의 삶이 아니라 이익의 도구로 생각합니다. 그로인해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끼리, 그리고 진정으로 경건한 삶을 사는 사람들과의 다툼이 일어납니다.
이들의 문제는 예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시는 성령의 음성을 듣지 못하며 성령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셔도 그게 무슨 말씀인지 도무지 알지 못합니다. 마음이 땅에 속해 있음으로 인해 하늘의 언어가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귀가 완전히 닫혀 있기 때문에 성령께서 목회자를 통해 진리를 선포해도 그의 마음은 지루함만을 느낄 뿐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의 충만함을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하나님 앞에서의 진정한 회개가 없습니다. 영적이지 않은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 영적인 돌아봄도 없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그들의 악은 하나님께서 다 계수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심판날 그 문제를 거론하실 때에야 자기들의 잘못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지만 그러나 회개할 기회를 잃어보렸기 때문에 영원한 불못에 던져 지게 됩니다.
여러분의 삶이 예수님 안에 있음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언제나 진리로 행하며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며 연합하고 영에 속하여 성령을 따라 행하시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성령께서 여러분들을 이 땅에서 믿음의 길을 걷게 하시며 거룩하게 하시고 경건하게 하시며 의의 열매를 맺도록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 복이 넘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