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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 에스더 : 역사 섭리를 통한 언약 | ||
창세기 1장 ~ 36장 : 하나님의 언약 섭리 창세기 37장 ~ 민수기 30장 : 자손언약 성취 섭리 | ||
창37장~출18장 : 언약자손의 번창 | ||
37장~50장 자손의 보호와 형통 | ||
37장~38장 언약자손들의 범죄 | 39장~45장 요셉과 형들의 화친 44장~45장 형들을 용서하는 요셉 | 46장~50장 언약자손들의 형통 |
44장과 45장은 요셉이 형들을 시험한 후에 스스로의 신분을 밝히고 형들의 잘못을 용서하며, 야곱의 온 가족을 애굽으로 데려오게 하는 내용입니다.
이러한 섭리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열조에게 세우신 언약을 이루시려고 언약 자손의 잘못을 용서하여 죽지 아니하고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약 자손의 모든 죄를 용서하여 구원을 얻게 하실 것을 언약하시는 예표로서의 모형과 그림자적 계시 섭리입니다.
형제들과 함께 음식을 먹으며 즐거워한 요셉이 또 다시 형제들을 시험하는 것으로 44장이 시작되면서, 1절에서 13절까지는 요셉이 과거에 자기를 미워하던 형들이 자기의 동복 동생 베냐민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알고자 자기의 은잔으로 그 형들을 시험하는 내용인데, 이 가운데 1절에서 3절 말씀은 요셉이 청지기에게 명하여 형제 각인의 자루에 곡식과 돈을 넣게 하고 베냐민의 자루에는 자기의 은잔을 함께 넣어 보낸다는 내용입니다.
요셉이 그의 집 청지기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양식을 각자의 자루에 운반할 수 있을 만큼 채우고 각자의 돈을 그 자루에 넣고 또 내 잔 곧 은잔을 그 청년의 자루 아귀에 넣고 그 양식 값 돈도 함께 넣으라”고 합니다(1,2절) 이에 청지기는 요셉의 명하는 대로 하였고 아침이 밝아 오자 형제들은 나귀를 이끌고 가나안 아버지 집으로 향합니다(3절). 본문에서의 ’그 청년‘은 베냐민을 가리킵니다.
본문은 요셉이 하고자 하는 시험의 계획과 대상이 무엇이며 누구인지가 분명함을 드러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요셉의 마음을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그 표현된 것이 ‘양식을 각자의 자루에 운반할 수 있을 만큼 채우고’입니다. 가나안 땅 아버지 집에 갈 때 가져갈 양식의 양입니다. 아버지와 가족들과 함께하는 사람들이 먹을 양식을, 돈의 가치에 따라 주려는 것이 아니라 실을 수 있을 만큼 싣게 하여 주었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또 한 번 형제들을 시험합니다. 그리고 형제들을 향한 시험을 요셉 뜻대로 마음대로 합니다. *왜일까요? 저들을 살리고자 함입니다. 청지기를 통하여 형제들 몰래 양식에다가 집에서 갖고 온 돈을 자루에 도로 넣었고 또 요셉의 은잔을 베냐민의 자루 아귀에 돈과 함께 넣으라고 지시한 것입니다. 이는 베냐민을 은잔을 훔친 도둑으로 모함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는 아침이 밝아 오자 눈치를 채지 못하도록 떠나게 합니다.
용서는 잘못된 마음이 완전히 돌아섰을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잘못된 마음으로 돌아서지 않았는데 하게 되면 용서의 효과가 없습니다. 용서는 화목을 동반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용서라는 것은 힘있는 자가 힘없는 자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이 형들의 지난날의 잘못을 용서해 주기 위해서 그들의 현재 마음의 상태를 알고 저들로 깨닫게 하고자 시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의 의문이 생깁니다. 요셉은 왜, 양식 값으로 받은 돈을 자루에 은잔과 함께 다시 넣었음에도 불구하고, 돈에 대해선 한마디 언급이 없이 오직 은잔을 갖고서 베냐민만 도둑으로 모는 계획을 세웠는가 하는 것입니다. 형제들이 양식을 구하고자 이전에 애굽으로 왔을 때에도 양식과 함께 돈을 도로 그 자루에 넣고서도 그것으로는 한마디도 언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서 이렇게 교훈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양식’은 곧 ‘하나님이시다’는 것이며 모든 것이 ‘은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열조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하란에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백성과 땅과 통치를 약속하셨습니다. 즉 아브라함으로 ‘나라’를 세우시겠다는 언약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아브라함과 후손들에게 양식을 주셔야만 합니다. 그래서 우물을 주시고 또한 기근 때에는 저들을 보호하시고 다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십니다. 가나안 땅에서의 양식은 자신들의 힘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셔야만 하고, 하나님께서 주심으로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십니다. 그래서 안식일을 지키며 안식년을 지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다는 것을 드러내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양식을 그저 주시며 은혜로 주십니다. 양식은 곧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양식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을 믿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기근을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요셉으로 하여금 양식 값인 돈은 다시 돌려보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계속 이어지는 은혜의 역사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만들어진 주의 백성들에게 신령적 양식은 ‘오직 예수’이심을 깨닫게 하시는 모형입니다.
4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은 요셉이 청지기에게 명하여, 길을 떠난 형제들의 뒤를 따라가 자기의 은잔을 가져간 사실에 대하여 그들에게 추궁을 하도록 하는 내용입니다.
요셉을 떠난 형제들이 얼마 가지 전에 요셉은 청지기에게 이르기를 “일어나 그 사람들의 뒤를 따라 가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선을 악으로 갚느냐 이것은 내 주인이 가지고 마시며 늘 점치는 데에 쓰는 것이 아니냐 너희가 이같이 하니 악하도다 하라”고 지시하고(4~5절), 이에 청지기는 형제들을 곧 따라가서 요셉이 일러준 대로 말을 합니다(6절).
요셉은 형제들로 죄인이 되게 하여 그들을 정죄하고자 이 일을 꾸민 것입니다. 청지기는 요셉의 지시에 따라 형제들에게, ’너희가 어찌하여 악으로 선을 갚느냐‘라고 말하였으나 형제들로서는 전연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입니다. 그리고 청지기는 계속하여 그들에게, 주인의 은잔을 가져간 것은 악하다고 말합니다.
위의 본문에서, 요셉이 형제들을 깨닫게 하고자 시험하여 죄인이 되게 만들지만 실상 요셉은 형제들을 향한 마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에 대한 증거가 창세기 50장 20절입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위 본문에서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에서 ’그것‘은 곧 ’악‘입니다. 이 말씀은, 형들의 악행으로 인해 요셉이 애굽으로 향하는 미디안 상인에게 팔려 종으로 살게 된 것과 그리고 감옥에서 지내게 된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열조에게 약속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행하신 것으로서, 결국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삼으시고 자기 백성을 안전하게 보호하시고자 하신 하나님의 뜻이었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11장 32절에서 바울은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를 이렇게 정리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요셉의 청지기는 요셉이 그의 입에 담아 준 그 명령 그대로 형제들에게 전달합니다. 이는 요셉의 명이었으나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의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향한 계획을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사용하셔서 반드시 이루어 가십니다. 그래서 청지기는 요셉의 명령대로 그대로 즉시 행하고자 곧장 형제들을 따라가서 일을 행한 것입니다.
7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은 요셉의 형제들이 청지기에게 자기들의 결백함을 증거까지 들어 변호하면서, 죄가 사실일 경우 그 죄에 대한 응분의 벌을 감수할 것을 약속하는 내용입니다.
형제들은 청지기에게 “내 주여 어찌 이렇게 말씀하시나이까 당신의 종들이 이런 일은 결단코 아니하나이다”고 대답을 합니다(7절). 요셉의 형제들은 청지기가 정죄하며 책망하는 말을 듣고도 아주 당당하게 대답을 한 것입니다.
사실 그들은 요셉의 은잔을 훔치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전에 요셉을 죽이려다가 애굽에 팔아넘긴 흉악한 죄인들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자세히 알고 있는 요셉이 그들 앞에 살아 있습니다. 이 사실을 만일 그 형제들이 알고 있다면, 그들이 요셉의 청지기 앞에서라도 당당할 수 있을까요? 실제로 요셉이 자기의 은잔을 베냐민의 자루에 넣어서 범인으로 위장을 한 사실을 알았다 하더라도 그 형제들의 입장에서는 절대로 당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요셉이 그들을 다 죽이겠다 하여도 아무런 할 말이 없는 자들입니다. 아직도 그 형제들은 너무도 뻔뻔스러운 자들입니다. 그것은 지난날 자기들이 요셉에게 행한 악독한 범행이 드러나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모든 인간의 모습입니다. 불꽃같은 눈으로 인간의 마음을 샅샅이 살피시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간들은 생활 속에서 드러나는 작은 범행을 하지 아니하였다 하여 얼마나 자고하며 당당하게 생각하며 살아갑니까?
만일 하나님 앞에서 자기 마음에 자리하고 있는 근본 악성이 다 드러난다 하여도 과연 자고하고 당당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요셉의 형제들은 아직까지 당당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자기들의 큰 범죄는 숨기고 주인의 은잔에 대한 작은 범죄는 하지 아니하였다는 자만심의 결과입니다. 요셉은 그 형제들로 하여금 자기를 애굽에 팔아넘긴 커다란 범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하여 함께 살아가고자 청지기로 하여금 이 일을 꾸민 것입니다.
이같은 내용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을 구원해 가시는 모형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을 율법 아래 가두어 정죄를 받아 죄인이 되도록 하게 하시는 것은, 그들로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을 가끔 사단에게 맡겨 범죄하게 하여 괴롭게 하시는 것 또한 그들로 자기가 죄인임을 철저히 뉘우치고 반성하게 하여 구원에 이르며 자라게 하시려는 섭리입니다.
마치 요셉이 그 형제들을 범인이 되게 하여 스스로의 숨겨진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게 하여 함께 살게 하려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로마서 11장 32절에서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고 하며
또 고린도후서12장 7절에서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 고백합니다.
이어서 형제들은 “우리 자루에 있던 돈도 우리가 가나안 땅에서부터 당신에게로 가져왔거늘 우리가 어찌 당신의 주인의 집에서 은금을 도둑질하리이까 당신의 종들 중 누구에게서 발견되든지 그는 죽을 것이요 우리는 내 주의 종들이 되리이다”(8~9절)라고 더욱 항변하듯이 자신들의 결백을 주장합니다.
여기서 문제는 ’은잔‘입니다. 당시 애굽에서의 ’은잔‘은 점을 치는 도구였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러한 점치는 도구를 훔치는 행위는 고대 근동 사회에서는 사형에 해당하는 죄라는 점에서 사태가 심각한 것입니다. 형제들은 이에 결백하며 훔친 자는 죽음으로 그리고 다른 이들 또한 요셉의 종이 되겠다고 자충수를 두어 버립니다.
본문의 시대적인 상황은, 길어지는 기근으로 인해 양식이 각국마다 고갈된 상태이며 이로 인해 가나안에서의 야곱도 해당되어 애굽으로 양식을 구하고자 온 상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마저 양식 빈곤으로 몰아 넣으시고 이방 나라인 애굽에서 양식을 구하도록 하셨습니다. 이때의 양식은, 구하고 구하지 못하는 것으로 ’생사의 갈림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애굽의 총리는 당시 이스라엘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는 자였습니다.
이러한 애굽의 총리 앞에 있는 형제들은 자신들의 생사를 쥔 자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요셉의 계획대로 당하기만 하는 처지입니다. 자신들을 구원해 줄 자는 오직 총리 뿐인데, 그리고 그 총리가 동생 요셉인데 아직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요셉은 형제들을 마음대로 조종하며 흔들고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창조주시며 전능자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모든 것을 선하신 뜻대로 이끌어 가십니다. 여기에 인생들도 포함됩니다. 자연 만물 풀 한 포기마저 주장하시고 날아다니는 새 한 마리도 다스리십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세상 어느 무엇도 그들 마음대로 행하거나 비켜 갈 수가 없습니다(행17:24~28).
요셉이 베냐민의 자루에 몰래 은잔을 넣어서 저들을 죄인되게 만들기도 하고 또한 구원을 베풀기도 합니다. 그 권세가 요셉에게 있는 것입니다. 요셉은 결국, 형들로 회개케 하여 화해하고 화목하려는 뜻입니다. 요셉은 이를 위한 계획자이므로 모두 알지만 형제들은 모릅니다. 요셉만이 이 모든 것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어진 10절부터 13절의 말씀에서 청지기가 요셉의 형제들의 말을 다짐하고 베냐민의 자루에서 주인의 은잔을 발견하자, 그들이 옷을 찢고 요셉의 성으로 다시 돌아가는 내용입니다.
10절에서 청지기는, “그러면 너희의 말과 같이 하리라 그것이 누구에게서든지 발견되면 그는 내게 종이 될 것이요 너희는 죄가 없으리라”고 하고서는 형제들 각각의 자루를 급히 내려놓고 풀기 시작합니다(11절).
청지기는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도 모르는 체하고서 명하였고, 형제들은 스스로 형량까지 정하면서 결코 무죄함을 확신했기에, 속히 벗어나고자 신속하게 행동하여 확인 절차에 들어갔습니다만 그 잔이 베냐민의 자루에서 발견되고 맙니다(12절). 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이 발견되므로 형제들은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옷을 찢고’ 각기 짐을 나귀에 싣고서 다시 요셉에게로 돌아갑니다(13절). 요셉의 원하는대로, 계획대로, 하게 하는대로 되어집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다시 한번 확인을 하고서 계속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요셉이 모든 가족으로 화해하고 애굽 땅으로 오게 하려는 이유는 무엇인가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창세기 46장 3-4절에서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창세기 15장 13절의,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라는 말씀에서 이어집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가족을 애굽으로 가게 하시고 애굽에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신 후에 하나님이 인도하여 다시 올라오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었습니다. 그런데 야곱 가문을 애굽으로 가게 하셨다가 다시 가나안 땅으로 올라오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굳이 그렇게 하실 이유가 있는가라는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답은, 애굽으로 가게 하셔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고 다시 올라오게 하시는 과정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그러한 과정을 겪게 하심으로 이스라엘에게 가르치시려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은 스스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존재임을 알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 광야를 통해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아는 백성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만약 야곱 가족이 가나안 땅에 그대로 거주한 채 큰 민족을 이루었다면 그들에게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당연한 것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거주할 자격이 없음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스라엘이 아니었기 때문에 애굽으로 가게 하셔서 사백 년을 두시며 언약대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신 후에 애굽에서 나오게 하시고, 다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는 과정에서 이스라엘의 모든 불의와 악함이 드러나도록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제들을 정탐꾼이라고, 도둑이라고 몰아넣으며 모함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요셉이 형제들 앞에서 감당하고 있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요셉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믿지 않고 요셉 자신이 한다고 생각했다면, 형제들이 아버지에게서 받아 가지고 온 예물과 베냐민을 보는 순간 그 자리에서 울었거나 아니면 형제들을 그냥 놔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신 목적에 대하여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5:32)고 말씀하십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요셉의 종 앞에서 당당하던 형제들의 기세는 씻은 듯이 사라졌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의 과오가 드러나면 당당하던 기세가 사라지고 겸비하여집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인간의 죄가 드러나게 하시는 것은,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겸비하게 낮아지도록 하시려는 것입니다. 범죄가 사실로 드러난 요셉의 형제들은 청지기와 함께 요셉이 거하는 성으로 도로 돌아갈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14절에서 17절의 말씀은 요셉이 자기에게 와서 땅에 엎드린 형제들을 책망하고 그들이 다 종이 되기를 자원하는 것을 거절하고 베냐민만 종으로 삼으려 하는 내용입니다.
요셉은 형제들이 다시 돌아올 줄 알고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은잔을 베냐민의 자루에 넣은 자가 요셉 자신이며 그리고 형제들을 뒤쫓아 청지기를 보낸 자도 요셉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집으로 다시 돌아온 유다와 그의 형제들이 요셉의 꾼 꿈대로 또다시 요셉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을 합니다(14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에게 꿈으로 계시한 것입니다. 요셉과 그 형제들 사이에서 되어지는 이러한 일들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그 일은 어디까지나 여호와 하나님의 작정 섭리에 따라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요셉은 다시 돌아온 형제들을 시험하려고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행하였느냐 나 같은 사람이 점을 잘 치는 줄을 너희는 알지 못하였느냐”며 강하게 책망을 합니다(15절). 요셉이 이렇듯 형제들을 시험하는 의도는, 앞뒤의 내용으로 보아 저들로 하여금 과거의 잘못을 돌이키게 하고(16절) 아울러 지금 위기에 처한 형제 베냐민에 대한 사랑을 알고 싶어서입니다(17절). 요셉의 의도는 형제들로 회개하게 하여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요셉의 책망에 유다는 은잔에 대해 무고함을 변명하지 않고서 “우리가 내 주께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무슨 설명을 하오리이까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정직함을 나타내리이까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으니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자가 다 내 주의 노예가 되겠나이다”라며 지난날의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합니다(16절).
위 본문에서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하는 표현은, 형제들이 아무 변명도 할 수 없게 되어 포기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이를 반복적으로 사용하여 도저히 스스로는 일어설 수 없는 상태가 되었으며 항복함을 뜻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정직함을 나타내리이까‘라고 하는 표현을 통하여 스스로는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더욱 가중하여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자신들의 최종 상태를 요셉 앞에 내어놓는데,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으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찾아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동사 ’마차(מצא)‘가 44장에서 이미 여러 번에 걸쳐 사용됩니다(8,9,10,12,16절).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8,9,10,12절) 자루에서 은잔이나 돈을 찾아내는 일과 관련하여 사용되었고 16절에서는 하나님께서 형제들의 죄악을 발견하시고 드러내셨다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유다는 지금의 이러한 환란과 위험들이, 지난날 형제들의 죄를 찾아내신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고백하며 댓가를 치르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유다는 지금 일어난 일련의 일들이 누군가의 인간에 의해서가 아니라, 지금까지 이스라엘을 이끄신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죄를 깨닫게 하시고자 이 난관을 주셨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결국 정탐꾼이라는 모함은 자신들의 죄를 생각하고 괴로워하게 했고, 도둑으로 모함한 일은 하나님 앞에서 악한 존재임을 깨닫게 하면서 노예가 되어도 당연하다는 인간의 실상에 눈을 뜨게 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같은 유다의 말에서 회개의 진정한 의미를 배웁니다. 즉 회개는 죄로 인해 괴로워하고 애통하면서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이 전부가 아니라 노예라는 신분으로 추락해도 당연한 악한 존재임을 인식하는 것으로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상한 심령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올바른 회개는 자신이 구원에 합당하지 않은 존재임을 보게 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회개가 있는 신자라면 현재의 형편이 힘들다 해도 힘든 형편에서 벗어나는 것에만 관심을 두기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부터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를 어려운 형편으로 끌어가신 하나님은 하나님이 의도대로 모든 일을 이루십니다. 그래서 어려운 형편에서도 자기 존재에 대해 눈을 뜨게 하시고 현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놀라운 현실을 발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고난과 위기 그리고 슬픔과 고통이 아무런 까닭 없이 온 것이 아니라, 전능자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돌이키게 하시고 돌아오게 하시고자 주신 것이라 말입니다. 탕자의 아버지는 집에서 내보낸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문밖에 서서 기다립니다(눅15:11~21).
유다의 자백을 들은 요셉은 “내가 결코 그러하지 아니하리라 잔이 그 손에서 발견된 자만 내 종이 되고 너희는 평안히 너희 아버지께로 도로 올라갈 것이니라”고 하며(17절) 유다의 제의를 거절합니다. 그리고 베냐민만 종으로 삼는다면서 나머지 모두는 평안히 아버지께로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이는 요셉 자신이 형제들에 의해 종으로 팔려 왔으므로 베냐민을 통해 형제들을 시험해 보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여기서도 요셉은 형제들에게 자루의 돈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1~3절 내용 참조).
위의 17절에서, 요셉은 베냐민만 종이 될 것이니 남겨 두고서 ‘너희는 평안히 아버지께로 도로 올라가라’고 하는 것은, ‘너희는 본래 그런 사람들이지 않느냐?’는 의미가 담긴 것입니다. 이는 마치 요셉을 상인에게 팔아 버린 후에 평안히 아버지께로 가서 숫염소의 피를 적신 요셉의 옷을 보여주며 짐승에게 잡아먹힌 것처럼 꾸민 그 때의 일들을 책망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요셉의 말대로 베냐민을 남겨 둔 채 돌아간다면 그것은 야곱의 아들들이 요셉을 버릴 때와 달라진 바가 없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이점을 생각하면 요셉이 베냐민만 남기고 평안히 돌아가라고 한 것은 형들을 시험하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주의 백성들을 향하여 시험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주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시험은 감당할 시험만 허락하시고 그리고 그 시험을 통해 더욱 단련시키고자 하는 시험이라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에,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는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시험은 우리 성도들이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하십니다. 둘째 아들이 재물을 가지고 기세등등하게 나갔으나 아버지는 붙잡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돼지우리를 통하여 회개하고 돌아오게 하기 위함입니다. 집안에서는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통하여 넘어지게 하시고 그리고 아버지 집을 그리워하게 하셔서 회개하며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으로 돌아오게 하십니다. 잠깐의 육체의 고난은 영원히 누릴 기쁨과 영광에 비교할 수 없습니다. |
18절에서 34절 말씀은 요셉의 판결을 들은 유다가 동생 베냐민이 애굽까지 오게 된 동기와 과정을 말하면서, 그가 반드시 아버지께 돌아가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며 자기가 그 대신 종이 되기를 자원하는 내용입니다.
베냐민 외에 모두 아버지께로 돌아가라는 판결을 들은 유다가 요셉에게 “내 주여 원하건대 당신의 종에게 내 주의 귀에 한 말씀을 아뢰게 하소서 주의 종에게 노하지 마소서 주는 바로와 같으심이니이다”(18절)라고 하며 간청하는 말을 시작합니다.
유다가 다른 형제들 앞서 베냐민의 사건에 뛰어드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베냐민을 애굽으로 함께 보내는 것을 절대적으로 반대하는 아비 이스라엘에게 반드시 베냐민을 데려 오겠다고 하며, 담보로 자신이 평생 그 죄에 대해 비난받겠다고 하고서 설득하여 데리고 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베냐민을 아비 이스라엘에게로 돌려보내려고 요셉에게 그 이유를 들어서 간청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유다는, “이전에 내 주께서 종들에게 물으시되 너희는 아버지가 있느냐 아우가 있느냐 하시기에”(19절)라고 하는데, 여기서 ’이전에‘라는 것은, 가나안 땅의 기근으로 인해 양식을 구하고자 첫 번째로 애굽에 왔을 때를 가리킵니다. 유다는 그때 요셉이 형들에게 아버지와 아우에 대해 물었던 것을 돌이켜 생각하게 하고서 아버지에게서 베냐민이라는 아들에 대해 설명하며, 베냐민을 구하려고 간절한 마음을 요셉에게 전하기 시작합니다(20~34절).
지금 그 형제들은 요셉 앞에 어떠한 죄도 전연 숨길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하물며 인간의 마음을 살피시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자기의 죄를 어떻게 숨길 수가 있겠는가 말입니다. 알고 보면,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변명이나 변호도 다 필요가 없고 어떠한 죄도 전혀 숨길 수 없는 존재입니다. 다만 인간 자신의 악함과 죄를 시인하고 겸비한 자세로 오직 하나님의 긍휼만을 기다릴 뿐인 존재입니다.
사실 유다와 형제들은 요셉 앞에 입이 열 개가 있다 하여도 할 말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베냐만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 때문에 너무도 급하고 당황하게 되니까 요셉에게 간절히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는 베냐민을 아비 이스라엘에게 돌려 보내고서 자기가 종이 되어야 하는 이유를 두 가지로 요셉에게 설명하고 있습니다(33절).
먼저는, 베냐민이 아비 이스라엘에게 돌아가지 아니하면 그 형제들이 그 아비를 흰머리로 슬퍼하며 음부에 내려가게 함이기 때문이며(29~31절) 다음은, 유다 자신이 아비에게, 베냐민이 돌아오지 아니하면 영영히 죄를 지겠다고 약속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32절).
유다는 요셉에게, “아버지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하나로 묶여 있거늘”이라 하며(30절) 아버지에게서 베냐민이 어떤 존재인가를 말하며 탄원하고 있습니다. 즉 아버지 이스라엘은 베냐민을 자신의 몸처럼 여긴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버지 야곱의 생명과 아이 베냐민의 생명이 서로 하나로 묶여 있어서, 만약 베냐민이 돌아가지 못한다면 아버지는 더 이상 살아계시지 못할 것이고, 그렇다면 자신들이 아버지를 슬프게 하고 죽게 한 자들이 된다고 호소합니다(34절).
형제들이 요셉을 죽이려다가 애굽으로 향하는 상인들에게 팔고 버렸을 때에는, 자신들보다 요셉이 아버지로부터 더 사랑받는 것만 생각하고 시기했습니다. 요셉을 사랑하고 요셉으로 기뻐하는 아버지의 마음보다는, 자신들보다 더 사랑한다는 요셉에 대한 미움과 시기로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형제들은 아버지의 아픔에는 관심도 두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유다는 베냐민이 돌아가지 않았을 때의 아버지의 마음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베냐민 대신 자신을 종이 되게 하고 베냐민은 형제들과 함께 아버지께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탄원하는 것입니다(33절). 유다는 아버지의 마음을 앎으로 해서 ‘베냐민 대신 나’라는 희생을 보이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희생은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만약 유다가 아버지의 마음에 관심이 없거나 몰랐다면 베냐민이 홀로 남는다 해도 자신은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보면 희생은 자신의 의지로 다른 누군가를 위해 손해 보는 차원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과 마음을 알고 그 뜻을 자신의 삶의 목표와 방향으로 삼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빌3:8 참조).
*그렇다면 유다는 어떻게 해서 희생을 알게 되었을까요? 그에 대한 답을 다말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다말 이야기는 38장 사이에 위치하는데, 37장과 39장을 보면 내용의 흐름상 다말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37장부터 요셉 이야기가 시작되고 애굽의 보디발의 집에 팔린 일까지 전개되다가 39장에서 애굽에서의 일이 계속 이어지는 것을 보면 38장에서의 다말 이야기는 불필요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말 이야기는 유다가 어떻게 해서 희생을 배우게 되었는지에 대한 답을 알려주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말 이야기는 알다시피 유다의 며느리인 다말이 창녀로 변장하여 유다와 동침한 일이 주요 내용입니다. 다말이 창녀로 변장하게 된 것은 순전히 유다의 이기적인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다말 때문에 아들이 죽는다고 생각한 유다가 두 아들이 죽은 뒤 하나 남은 아들 셀라를 다말에게 주지 않으려고 셀라가 어리다는 핑계로 다말을 친정으로 보내버린 것입니다.
다말이 창녀가 되어 유다와 동침한 것은 유다 가문을 이어가기 위해서였습니다. 그에 비해 유다는 가문을 이어가야 한다는 것보다 아들을 잃게 되는 것을 염려한 것입니다. 이러한 유다로 인해 다말은 시아버지와 동침하는 창녀와 같은 여인으로까지 스스로를 버려 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다말에게서 유다가 희생을 배운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창 38장 25~26절을 보면 “여인이 끌려나갈 때에 사람을 보내어 시아버지에게 이르되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나이다 청하건대 보소서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누구의 것이니이까 한지라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고 말합니다.
유다가 다말이 자신보다 옳다고 한 것은 다말의 희생이 자신으로 인한 것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죄로 인해 다말이 창녀가 되는 아픔을 겪게 되었음을 안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는 자신들이 베냐민을 데려가지 않았을 때 아버지 야곱이 겪을 아픔을 생각하며, 자신이 베냐민 대신 종이 되겠다고 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희생을 알게 된 유다가 야곱의 아들들에서 중심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