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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산 소 같은 일꾼/삼상 6:10-21
성경본문 : 사무엘상 6:10-21
10. 그 사람들이 그 같이 하여 젖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메우고 송아지들은 집에 가두고
11. 여호와의 궤와 및 금쥐와 그들의 독종의 형상을 담은 상자를 수레 위에 실으니
12.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까지 따라 가니라
13. 벧세메스 사람들이 골짜기에서 밀을 베다가 눈을 들어 궤를 보고 그것의 보임을 기뻐하더니
14. 수레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에 이르러 선지라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소를 번제로 여호와께 드리고
15. 레위인은 여호와의 궤와 그 궤와 함께 있는 금 보물 담긴 상자를 내려다가 큰 돌 위에 두매 그 날에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께 번제와 다른 제를 드리니라
16. 블레셋 다섯 방백이 이것을 보고 그 날에 에그론으로 돌아갔더라
17. 블레셋 사람이 여호와께 속건제로 드린 금독종은 이러하니 아스돗을 위하여 하나요 가사를 위하여 하나요 아스글론을 위하여 하나요 가드를 위하여 하나요 에그론을 위하여 하나이며
18. 드린바 금쥐는 여호와의 궤를 놓은 큰 돌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견고한 성읍과 시골 동리 곧 다섯 방백에게 속한 사람의 모든 성읍의 수효대로였더라 그 돌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에 오늘까지 있더라
19.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고로 그들을 치사 (오만)칠십인을 죽이신지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륙하셨으므로 백성이 애곡하였더라
20. 벧세메스 사람들이 가로되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를 우리에게서 뉘게로 가시게 할꼬 하고
21. 사자들을 기럇여아림 거민에게 보내어 가로되 블레셋 사람이 여호와의 궤를 도로 가져왔으니 너희는 내려와서 그것을 너희에게로 옮겨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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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리수라는 남자아이가 성전환 수술하여 여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자보다 더 예쁜 여자라고 하여 요새 젊은이들 사이에서 굉장한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그리고 vip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옛날 같으면 불쌍한 아이인데 요새는 그게 영웅이 되는 세대입니다.
이번에 미국장로교에서 동성 결혼자도 목사가 될 수 있다는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이게 남의 이야기라고 하니 우리가 웃고 넘어가지요. 만약 우리 이야기라고 생각해봅시다. 만약 우리아이가 남자가 되고 싶어서 어느날 수술하여 남자가 되었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러다가 만일 그것도 귀찮아서 또 여자가 되었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러면 저는 절대 용서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만약 여자를 데리고 와서 이 사람이 나의 신랑이라면서 결혼 시켜달라고 하면 머리가 돌 것 같아요. 세상은 생각하면 열 받을 일만 남았습니다. 안 그래도 덥고 짜증 나는 일이 많은데 자녀들까지 그러면 정말 괴로울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는 일들이 답답한 일들뿐입니다. 그러니 이번 여름만이라도 답답한 사람들은 일을 떠나서 자연을 바라보시고 또 동물을 보면서 순수한 본래 심성이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소를 보면서 교훈을 얻고 기분 전환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벧세메스로 법궤를 메고 가는 암소의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은 인재를 키우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전쟁이 일어나니 법궤를 빼앗겼고 제사장이 목이 부러져 죽었고 두 아들이 전쟁에서 죽었고 전쟁은 하면 할수록 사람들이 죽어서 34,000명이나 죽었습니다. 그뿐만아니라 며느리는 아기를 낳다가 슬픈 소식을 듣고 그 자리에서 죽습니다. 영광이 떠난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불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법궤를 빼앗아다가 불레셋 사람의 신인 다곤신상 곁에 두었는데 이튿날 일어나보니 다곤 신상이 법궤 앞에 엎드려져 있고 머리와 손목은 끓어져 있고 문지방에 몸둥이만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5지방으로 옮겨 봤는대 옮길 때마다 그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게 우연입니까? 아니면 법궤의 하나님이 벌을 내리신 것입니까? (이게 4장까지의 내용입니다. )
5장은 불레셋 지방에는 이스라엘 신 때문에 불레셋 신이 부숴지고 큰 재앙이 온 것이라는 소문이 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법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어서 불레셋 장관들이 의논을 하는데 중요한 결정을 합니다.
한 번도 수레를 끌어보지 못한 암소를 사용하였습니다. 7절 같이 읽습니다. 그러므로 새 수레를 만들고 멍에 메어 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소에 메우고 그 송아지들은 떼어 집으로 돌려보내고...
블레셋 장관들의 전략은 멍에를 한번도 메어 보지 아니한 암소들이기 때문에 틀림없이 가다가 힘들면 뛰거나 몸부림치면 법궤가 부숴지거나 내동댕이치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어미소들이기 때문에 뒤에서 새끼 송아지가 울면, 이 암소들이 울면서 날뛰거나 아니면 새끼 있는 곳으로 돌아올 것이다. 이때 불레셋 지방에 재앙이 일어난 것은 법궤 때문이 아니라 우연히 일어난 것이다. 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번도 멍에 매지 아니한 어미 소를 새끼를 그대로 둔채 법궤를 메고 베세메스로 향하게 합니다.
1.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소의 충성심입니다.
여기 소는 충성심이 강했습니다.
1) 이 소는 멍애를 한번도 매어보지 아니한 소입니다.
그리고 불레셋 사람의 입장에서는 볼품없는 소를 택해서 가다가 넘어지거나 임무수행을 하지 못하도록 일부러 능력없는 소를 택했습니다. 한번도 사용하지 아니한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아니할 것입니다.
이사야 53: 3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아서 우리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아니 하였도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우리를 멸시하는데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나는 나를 귀하게 여기지 아니하는데 하나님은 나를 귀하게 여기십니다. 우리는 이 직분의 귀중성을 몰랐는데 이 소는 알았다는 것입니다.
법궤는 나무로 만든 궤로서 그 안에는 십계명 돌판과, 만나를 담은 항아리, 아론의 싹난 지팡이 가 들어 있습니다.
법궤는 오늘로 말하면 교회를 상징합니다.
법궤를 메고 가는 소는 교회라는 법궤를 지고 하늘나라로 향하는 부름 받은 자로서 오늘날 교회직분 맡은 자 들입니다.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멍에가 있습니다.
직장의 멍에가 있고, 사업가의 멍에가 있습니다.
정치적인 멍에가 있고 세상에서 자기 직분에 따른 멍에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멍에는 무겁기만 하고 나중에는 인생을 괴롭게 만듭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교회의 멍에는 주님 나라에서 큰 축복의 멍에인 것입니다. 제직들을 비롯하여 성도들은 전도의 문을 열어주고, 새로운 성도들을 반갑게 영접하고, 봉사하며 물질로 헌금하며 교회를 즐겁게 헌신할 때 새벽이슬 같은 청년들이 자라게 되고, 교회 안에 이단이나 불순한 사상이 들어오지 못하고 소망을 제시하는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만나가 든 항아리는 양식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싹난 지팡이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알려줍니다.
법궤는 말씀으로 영의 양식입니다.
우리는 성도로서 이것을 맡은 사람들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시편 기자의 말씀대로 “주의 성전에서 한날의 왕궁에서 천 날보다 낫다”는 고백이 당연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가치를 모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소는 안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1:3에보면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만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사람도 모르는데 짐승같이 천한 자들이 알게 되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래서 이 소는 울거나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했습니다. 12절에 “암소가 베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바로 행하여 갈 때 울며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 하였고,”
처음 멍에를 져보지만 답답하다고 짐을 벗어버리기 위해 발버둥치지 아니했습니다. 또 짐이 무겁다고 좌우로 비틀거리지도 아니했습니다.. 정말로 멋있는 장면입니다. 우리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욥은 인생의 위기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욥23:10-11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 그 다음, 고백이 참으로 멋있습니다.
“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으며,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 하였으며,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구나”
똑바로 앞만 보고 나갔다는 것입니다.
물론 나중에 그는 곱배기로 축복을 받았습니다.
물론 여기의 소도 힘들어도 답답해도 비틀거리지 아니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푯대를 향하여 갔습니다. 그러니 불레셋 장관들이 약이 올랐습니다. 그래서 젖 먹는 송아지를 울렸습니다. 새끼가 우는데 설마 어미 소가 돌아오겠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소들은 조금도 흔들리지 아니하고 앞만 보고 나아갔습니다. 대단한 소들입니다. 자기 새끼들이 뒤에서 젖 달라고 우는데 어떻게 모른척하고 앞만 보고 나갑니까? 저는 본문의 설교를 하면서 많이 회개했습니다.
저는 신학교 다니면서 신학을 꼭해야 할 것인가? 망설인적이 있습니다. 신학교 갈 때는 내 갈 길은 이곳뿐이다. 그래서 모든 것 다 포기하고 목회를 한다고 결심했지만, 너무 외롭고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휴학하고 싶다고 생각할 즈음에 폐결핵을 걸리게 하더니 하나님이 훈련 시키셨습니다.
어머니가 아파서 고통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개척을 하도록 하나님이 인도하셨습니다. 위기가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고 그때마다 흔들릴 때가 있었습니다. 갈등도 많았습니다. 내가 이 정도밖에 안되나 자신을 애처롭기도 했습니다.
어떤 때는 주기철 목사님이 부르신 "눈물 없이 못 가는 길, 피 없이 못 가는 길, 영문밖의 좁은 길이 골고다의 길이라네. 영생복락 얻으려면 이 길만은 걸어야해 골고다의 험한 길을 나도 가게 하옵소서. 그 노래가 정말로 의미 있는 노래라는 것을 알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강변의 언약이 정해지면서 마음에 확신이 생겼습니다. 강변에 뿌리내린 나무는 더위가 와도 두렵지 아니하고 가뭄이 와도 걱정이 없고, 잎이 청청하여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니라. 이 말씀이 나의 삶을 반석 위에 세워놓았습니다. 이제는 목회에 감사하면서 흔들리지 아니하게 합니다. 예수님 역시 십자가지는 현장에서 뒤를 돌아보지 아니했습니다. 불평도 아니했습니다. 그는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함같이 하였도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를 바라보자고 말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한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이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3) 성도 여러분 뒤를 돌아보지 맙시다 그냥 갈지자로 걷지 말고 좌우로 기웃거리지 말고 오직 앞만 보고 나갑시다. 결과는 반드시 승리합니다.
2.이런 믿음은 어디서 나옵니까?
위대한 데서 나옵니다. 위대한 사람은 위대한 일을 합니다. 위대하다는 것은 위가 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이나 먹고 무엇이나 소화를 잘하기 때문에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레위기 11장에 보면 “육지 모든 짐승 중 너희의 먹을만한 생물은 이러하니 짐승 중 무릇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은 너희가 먹되”라고 말씀하고있습니다.
여기서 되새김질 한다는 말은 소화를 잘시킨다는 말이요. 소는 영양가가 있고 맛있는 음식을 먹기 때문에 힘이 센 것 아닙니다. 무엇을 먹든지 소화를 잘하기 때문에 힘이 센 것입니다. 소는 무엇이든지 잘 먹습니다. 심지어는 사람 오줌도 먹습니다.
그래서 초등학교 때 오줌마려우면 소에게로 갑니다.
소에게 주면 아주 맛있게 먹습니다. 실제로 시간만 있으면 먹어둡니다. 그리고 먹을 것만 있으면 먹어둡니다. 그래놓고는 혼자 있을 때 끄집어내어서 차근차근 다시 씹습니다. 그것을 이름하여 되새김질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소는 건강하고 힘이 센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능력 있게 살려고 하면 많이 먹어야 할 것입니다. 먹성이 좋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수용성이 있어야 합니다. 먹는 것만큼 힘이 생깁니다. 육신의 양식도 많이 먹어야 합니다.
어느 집에 초청되어 갔더니 목사님 평상시 먹는 것에 숟가락 하나 더 놨습니다 라고 말하던 데 참 맛있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식사를 잘 만듭니다. 집에서 주신 음식은 참으로 맛있게 먹어야 합니다. 그리고 한달에 한번 정도는 외식도 하는 것이 좋습니다. 성경에 외식하지 말라는 말은 이 말이 아닙니다. 외식하는 것은 밥먹는데 목적이 있지 아니합니다. 가족간의 대화와 서로에 대한 존중심의 표현입니다. 친밀감의 표현입니다. 교회에서도 각 기관별로 모여서 식사하는 시간도 많이 필요합니다. 밥을 먹으면서 서로 사랑을 확인하고 신뢰를 쌓고 두텁게 인정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지식의 밥을 먹어야 합니다.
지금은 신지식의 사회입니다. 옛날 농경사회의 생각으로 살 수 없습니다.
지금은 정보화의 시대입니다.
새로운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그리고 꼭 먹어야 할 양식은 영적인 양식입니다.
아모스가 말한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양식이 없어 기갈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입니다.
우리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시고 우리보다 우리를 더 귀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말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으로 우리에게 공급해 주시고 기도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여호와 이레 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사람은 새 힘이 솟아납니다.
시편81:10에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그랬습니다. 입을 넓게 열고 계속 채워야 합니다. 입을 넓게 열고 많이 먹은 것만큼 만복감이 생깁니다. 만복감이 생기면 자신감이 생깁니다. 확신이 생깁니다 용기가 생깁니다. 두려움이 없어지고 여유가 생기면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라고 말하면서 무슨 일이든지 자신 있게 도전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지금은 성령의 시대입니다. 성령의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이는 너희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함이니라.
말씀을 많이 먹어야 합니다.
일단 시간 있으면 먹어 두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설교 말씀도 일단 먹어 두십시오. 괜히 시험들 필요가 없습니다. 다 아멘 하고 받아 두십시오. 저는 주일날 설교는 투명합니다. 이미 문서화되어 여러분에게 공개되고 테이프도 공개하고 객관적인 말씀으로 우리교회에 맞게 설교하고 있습니다. 개인을 맞추어서 설교한일은 결코 없습니다.
“우리가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 하느니라”(.살전1:13) 아멘
고후1:19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만 있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있느니라.”
예! 예! 하고 말씀을 먹고 쉬는 시간에는 되새김질할 때 성령이 감동되어 깨달음을 줍니다. 그것을 우리는 레마의 사건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은 늘 건강하기 때문에 아무리 사람들이 상처를 건드리는 말을 해도 웃으면서 긍정적으로 말을 이어나갈수 있습니다. 우리 강변교회 성도님들은 모두 식성이 좋아서 건강한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멍에를 멘 소는 끝까지 주인을 위하여 헌신했습니다.
14절에 보면 “수레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에 이르러 선지라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소를 번제로 드리고..”
그 소가 지고 있던 수레의 나무는 장작더미가 되고 그 소는 불태워서 번제로 드리게 되었습니다.
소의 특성은 소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소는 주인을 위해 밭가는 것도농사 짖는 것도 다 주인을 위해서 합니다. 농사를 지어도 맛있는 것은 다 주인이 먹으며 소는 콩깍지나 고구마 줄기나 볏짚, 그리고 풀을 먹습니다. 그리고 오줌이나 똥은 농사에 좋은 거름으로 제공됩니다. 그리고 가죽은 가죽옷으로 뼈다귀는 사골로 고기는 좋은 음식으로 소는 아낌없이 주인을 위해서 다 줍니다. 그야 말로 소는 하나도 버리지 않고 모두 인간을 위하여 바칩니다. 그게 불쌍한 것이 아니라 소의 영광입니다.
사람이 3가지를 위해 희생할 수 있다면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1) 가정을 위해서 헌신하고 사랑을 불태울 수 있으면 행복합니다.
2) 사랑하는 일을 위해서 헌신하며 열정을 불태울 수 있으면 행복합니다.
3) 한 교회를 정하여 거기에 불태우면 온 열정을 다하여 헌신할 수 있으면 행복합니다.
이3가지가 훈련된 사람은 반드시 행복할 수 있습니다. 불꽃은 언제 제일 멋있습니까? 그을림을 내지 않고 훨훨 타오르는 횃불이 가장 멋입니다.
사람이 언제 제일 멋있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거나 사랑하는 일을 찾아서 마음껏 인생을 불태울 때 그 인생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누구보다 더 사랑 하셨습니다.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이 우리를 위해 헌신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자 없는 양처럼 방황할 때는 심한 눈물과 통곡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물 한 방울 땀 한 방울 피 한 방울 남기지 아니하고 십자가에서 다 희생해 주셨습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영으로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도와주시고 생각나게 하시고 그것도 모자라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십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 주님을 위하여 헌신한다는 것은 큰 영광입니다.
4. 하나님께 크게 영광 돌렸습니다.
1)19절에 보면 원수들 50,070을 물리쳤습니다. (19절에)
2) 이방인이 하나님께 크게 영광을 돌렸습니다.
20절 베세메스 사람들이 가로되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이방인이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것은 굉장한 사건입니다.
3) 법궤가 돌아왔습니다. 21절에 하나님의 법궤를 가져가도록 허락한 것입니다.
엄청난 축복이 한꺼번에 그들에게 임한 것입니다. 그냥 이 소는 헌신만 했는데 그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못하는 일을 이 한 마리 소가 한꺼번에 성취했습니다. 얼마나 멋있습니까?
성도 여러분! 사람 보면서 열 받지 마시고, 이 산소처럼 멋있게 사시기 바랍니다.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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