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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인구조사와 하나님의 징계 / 사무엘하 24:1-17
누구에게나 열등감과 우월감이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교만의 끼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교만하다는 것도, 일종의 정신적인 콤플렉스입니다. 누구에게나 두 가지 콤플렉스가 있는데, 하나는 자신의 부끄러움을 숨기고 싶어 하는 ‘열등 콤플렉스’입니다. 이 콤플렉스는 끊임없이 우리의 삶을 억누르는 나쁜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내가 얼마나 잘난 인간인지를 보여주고 싶어 하는 ‘우월 콤플렉스’입니다. 이는 비뚤어진 우월감으로 나타나곤 하는데, 소위 ‘갑질’이라는 게 그런 형태입니다. 이러한 열등감과 우월감은 항상 동행합니다. 열등감은 우월감의 뒷면이라고 할 수 있고, 우월감 역시 열등감의 다른 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월감은 열등감을 감추기 위한 외적인 허세입니다.
그렇다면 우월감과 열등감을 느끼게 하는 요인은 무엇일까요? EBS 방송에서 흥미로운 조사를 실시했습니다. 10대 청소년과 30대, 그리고 60대끼리 모이게 해서, 어느 때 각각 우월감과 열등감을 느끼는지 조사한 것입니다.
먼저 10대 청소년들은 ‘권력’이 있으면, 우월감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 답변했습니다. 특히 정치적 권력을 이야기했습니다. 두 번째로는 스포츠 ‘특기’ 같은 요소가 있으면, 우월감을 느낄 것이라고 답변했습니다. 세 번째로는 ‘재력 있는 부모’가 있으면, 우월감을 느낄 것이라 했고, 네 번째는 ‘학력’, 다섯 번째는 ‘외모’를 꼽았습니다.
똑같은 질문을 60대 어르신들에게도 던졌더니, 첫 번째로 ‘건강’을 꼽았습니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두 번째는 ‘화목한 집안 분위기’, 세 번째는 ‘부모님의 사랑’, 네 번째는 ‘진정한 친구’, 다섯 번째는 ‘남을 배려하는 성품’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럼 사회 활동을 가장 활발하게 하고 있는 30대는 어떻게 답변했을까요? 놀랍게도 그들은 아주 현실적이었습니다. 첫 번째가 ‘외모’입니다. 타고난 외모가 잘 생기면 더 좋고, 그렇지 못하면 성형수술이라도 해서, 외모를 가꾸겠다고 답변했습니다. 그래야 인간관계가 잘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부동산과 같은 ‘재산’을, 세 번째는 힘 있는 주변 사람들과의 ‘인맥’을, 네 번째는 ‘안정된 직업’을, 다섯 번째는 ‘단란한 집안 분위기’를 꼽았습니다. 이런 것이 뒷받침될 때 우월감을 느낀다고 답변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 때문에 열등감을 느끼고, 또 무엇을 통해 우월감을 느끼며 살아갑니까?
인간에게 있어서 욕망은, 마치 끝없이 물을 뿜어내는 분수와도 같은 것입니다. 중지됨도 없고 사그라짐도 없이, 인간이 숨을 쉬며 육체로 존재하는 한, 계속해서 발산되는 것입니다. 인간에 의해 통제되지도 않고, 조절할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욕망이 인간을 사로잡아 끌고 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욕망이란 인간으로 하여금, 만족이라는 것을 모르게 합니다. 채워짐이 없이, 항상 부족함을 느끼게 하는 것이, 욕망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인간이 욕망에 사로잡혀, 신을 찾기 때문에,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신을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상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을 위해 신을 찾는 것, 그것이 곧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처럼 욕망으로 살아가는 인간에 대해, 성경이 어떻게 평가하는가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욕망 자체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십계명에서,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고 하심으로써, 탐심이 있는 인간, 곧 욕망으로 살아가는 인간을 거부하심을 드러내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욕망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담 이후로 어느 누구도, 욕망 없는 존재는 없습니다. 결론은 하나님은 세상 모든 인간을 거부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올 자는, 아무도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도무지 이러한 현실에 대해 관심이 없기에, 자기 욕망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하나님이 자신의 정성을 보신다느니, 내 기도에 응답해 주실 것이라는 말을 하면서, 자기만의 종교 생활에 심취해 있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관심이 있어서 하나님을 찾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이 관심이 있어서 십자가를 언급하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관심은 자신에게 있습니다. 이것을 두고 욕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앞서 말한 대로 세상의 모든 인간을, 거부하신다는 것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만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욕망의 존재에 불과한 우리는, 예수님이 없이는, 하나님이 거부하시는 멸망의 자식으로 끝날 인생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통하여 자신에게 좋은 것을 얻는 것에만 관심을 둔다면, 그것은 종교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성도는 인간의 욕망에서,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욕망으로 살아가는 모습에서, 인간의 의로움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음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죄를 회개하며 그리스도께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은 바로 이런 자입니다. 자신의 죄를 알고, 독생자 예수님만이 생명 되심을 깨닫고,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그를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일컬으시는 것입니다.
1-2절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그들을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이에 왕이 그 곁에 있는 군사령관 요압에게 이르되, 너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로 다니며, 이제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인구를 조사하여 백성의 수를 내게 보고하라 하니”
이 내용을 보면 다윗이 요압에게, 이스라엘의 인구를 조사할 것을 명령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1절의 내용이 조금 이상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셔서, 그들을 치시려고 하시는데, 그 일을 위해 다윗을 감동시켜서 인구를 조사하라고 하셨다는 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다윗으로 하여금, 인구를 조사하는 범죄를 하게 했다는 의미로 들려지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을 치기 위한 구실을 만들기 위해, 다윗으로 하여금 인구를 조사하게 했다는, 곧 하나님이 다윗에게 죄를 범하게 했다는 내용으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역대상 21:1절을 보면 “사탄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는 말을 합니다. 곧 다윗이 이스라엘의 인구를 조사한 것은, 사탄이 다윗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두고, 본문에서 하나님이 다윗의 마음을 감동시킨 것으로 말하는 것은, 서로 상반된 내용이 아니라, 사탄이 다윗을 충동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막지 않고, 허용하셨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결국 다윗이 범죄 하는 것을 그냥 두고 보신 것인데, 그냥 두고 보셨으면서도, 죄를 물어서 진노하시는 것은 또 무엇 때문입니까?
25절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니, 이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매,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더라.”
이것을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고 재앙을 내리심으로써, 재앙이 무엇으로 그치는가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곧 번제와 화목제로 인해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기도를 들으시고, 재앙이 그치는 것을 이스라엘로 하여금 경험하게 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의 모든 마음을, 번제와 화목제로 끌어가고자 하신 것입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자면, 우리를 번제와 화목제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끌어가기 위해, 우리의 범죄를 그냥 두고 보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죄 속에 있는 우리의 현실을 보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다윗의 인구조사인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인구를 조사한 것을 두고, 과연 범죄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사실 인구조사 자체를 두고, 죄라고 말하기는 곤란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민 1:1-2절을 보면,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을 계수하라는 명령을 내리신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다윗은 하나님이 인구를 계수하라는 명령을 하지도 않았는데, 계수한 것이 죄일까요? 그렇다고 해도 역시 인구조사 자체를 죄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을 보면 다윗의 죄는, 인구를 조사한 목적에서 찾아야 함이 분명합니다. 다윗이 인구를 조사한 목적이 무엇일까요?
3절 “요압이 왕께 아뢰되, 이 백성이 얼마든지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백배나 더하게 하사, 내 주 왕의 눈으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런데 내 주 왕은 어찌하여 이런 일을 기뻐하시나이까 하되”
요압이 다윗에게 이렇게 말한 것을 보면, 다윗이 인구를 조사하고자 한 것은, 많은 수의 군사를 계수함으로써, 자신이 힘있는 왕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그것으로 만족을 얻고자 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결국 많은 수를 힘으로 여기는 사고방식과 연결된 인구조사였던 것입니다.
세상은 숫자에 민감합니다. 우리도 많은 것이 낫다는 생각으로 살아가지 않습니까? 그래서 무엇을 기도해도, 항상 많게 해달라는 것이 빠지지 않습니다. 교회를 찾는 사람의 수가 많아지는 것을 원하고, 재정도 많아지는 것을 원하고, 예배당도 큰 것을 원하고, 이렇게 작은 것보다는 많은 것이 좋다는 사고방식에서 교인의 수를 헤아리고, 돈을 헤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요압은 다윗에게 ‘이 백성이 얼마든지,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백배나 더하게 하사’라는 말을 합니다. 백성이 많아지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다윗이 인구를 조사하여, 수를 확인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수가 많든 적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스리신다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이스라엘의 승리는 용사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린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시면, 승리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전쟁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용사의 수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 둘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용사의 수가 아무리 많아도, 하나님이 패배하게 하신다면, 패배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이스라엘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에게 중요한 것은,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지, 용사의 많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역대상 21장에서 사탄이 다윗을 충동하였다고 한 것처럼, 사탄은 숫자의 많고 적음으로, 인간을 충동합니다. 많은 수로 인해 자신의 힘을 과시하게 하고, 적은 수로 인해서는 자신을 약하다고 여기고, 실망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탄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힘을 가지고, 인간을 충동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만이 힘이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힘을 구하라는 방식으로 충동하는 것입니다. 이런 충동에 의해서, ‘하나님, 힘을 주십시오’라는 기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범죄라는 것도 모른 채 말입니다.
다윗의 범죄는 우리로 하여금, 숫자를 바라보지 말도록 경고하는 것입니다. 수의 많고 적음으로, 하나님의 복을 가름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어리석은 일이고,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 일일 뿐임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잘되는 것을 많아지는 것으로 평가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잘됨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깊이 빠져 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8:20절을 보면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는 말씀을 합니다.
여러분, 천 사람이 모였으나, 예수님이 함께 하지 않은 것과, 두 사람이 모였으나 예수님이 함께 한 것 중, 어느 것이 더 낫습니까? 아마 어느 한쪽을 두고, 이것이 낫다는 말을 선뜻 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둘 다 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이 모이는 것과 예수님이 함께 한 것 말입니다.
그러면 천 사람의 모임에 예수님이 함께 한 것과, 두 사람의 모임이 함께 하신 것에 차이가 있습니까?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일에 있어서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성경은 동일하다고 말합니다.
동일하다면 천 사람이든 두 사람이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가 함께 하는 모임이냐?’에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수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윗의 범죄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수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항상 수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우리 속에서 욕망이 우리를 격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항상 욕망이 격동하기에, 무엇에 대해서도 만족함이 없고, 감사함이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10절 “다윗이 백성을 조사한 후에 그의 마음에 자책하고, 다윗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
다윗은 인구수를 조사한 것이, 하나님께 큰 죄를 범하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미련함을 고하면서, 죄를 사해 달라고 간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의 죄는 다윗 한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에게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무엇이, 하나님 앞에서 미련한 것인가를 보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범죄하면서도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하고, 마음에 자책하는 것도 없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어떻게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자비하심을 알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람은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입니다. 그런데 욕망에 충동당하며 살아가는, 자신의 미련함을 보지 못하고, 죄를 보지 못하면서,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인구조사를 통하여, 우리에게 있는 욕망의 실체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욕망에서 벗어날 수 없는 나를 구출하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묵상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깊이 빠져드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이 택한 백성의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말씀에 대해서도 고개를 돌리고자 한다면, 그것은 다윗을 나무라는 요압의 말을 듣지 않는 인간의 완악함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윗이 인구를 조사한 일은, 세상의 시각에서 볼 때는 전혀 잘못된 일이 아니고, 왕으로써 당연히 해야 하는 일로 여겨지는 것이, 하나님의 시각에서는 범죄한 것으로 규정된다는 것은, 다윗과 같이 하나님을 믿는 위치에 있는 성도로서, 마음에 새겨야할 것입니다.
다윗의 인구조사가 범죄로 규정되는 것은, 다윗이 이스라엘을 자신이 다스리는 자신의 나라로 바라보는 것에 있습니다. 내 나라이기에 인구를 계수함으로써, 자신의 힘이 어느 정도인가를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 범죄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고, 하나님이 책임지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사실을 망각한 것이 범죄였던 것입니다.
11절 이하는 이러한 다윗에게, 하나님이 징계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의아한 것은 하나님의 징계의 내용을, 다윗더러 선택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11-12절 “다윗이 아침에 일어날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다윗의 선견자 된 선지자 갓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가서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게 세 가지를 보이노니, 너는 그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 내가 그것을 네게 행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
하나님이 선지자 갓을 통하여 하신 말씀은, ‘세가지를 보이노니, 그 중에 하나를 택하라’는 것입니다. 그 세 가지란 첫째가 이스라엘 땅에 칠년 기근이 있는 것, 둘째는 왕이 왕의 대적에게 쫓겨, 석 달을 그 앞에서 도망하는 것, 세 번째는 이스라엘 땅에 삼일 동안 전염병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다윗이라면 무엇을 택하겠습니까? 세 가지의 징계를 보면, 어느 것 하나도 가볍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세 가지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러면 다윗은 선지자 갓의 말에 대해 어떻게 답합니까?
14절 “다윗이 갓에게 이르되, 내가 고통 중에 있도다. 청하건대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크시니,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아니하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
다윗의 답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세 개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셨는데, 어느 하나를 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아니하기를 원하노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과연 다윗은 어떤 의미에서 이렇게 말하겠습니까?
아마 다윗은 징계를 선택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셋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손에 빠지기를 원한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단순히 범죄에 대한 벌이 아닙니다. 징계가 담고 있는 의미는, 징계를 통해서 자신의 불의함을 깨닫고,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손길이 어떠한가를 알게 하는 데 있습니다. 곧 벌이 아니라 사랑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날마다, 자기 백성을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이 징계에 담긴 하나님의 이러한 마음을 알았기에, 여호와의 손에 빠지기를 원한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만약 징계를 선택하라고 했을 때, 징계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지 못한다면, ‘어떤 징계가 조금이라도 내게 유리하고 가벼운 것일까?’에 관심을 둘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셋을 두고 계산을 하면서, 조금이라도 가벼운 징계를 고르지 않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볼 때 다윗은 징계를 두고, 어느 것이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더 유리한 것인가라는 계산을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다윗은 어떤 의미로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원한다는 말을 할까요? 먼저 다윗은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크시니’라는 말을 합니다. 이점을 생각해 보면, 다윗이 말하는 여호와의 손에 빠진다는 것은, 여호와의 긍휼에 빠지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곧 다윗은 하나님의 징계가 어느 것으로 내려지든, 징계를 통하여 하나님의 긍휼에 빠지기를 원한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손에 빠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을 아는 것과 상관없이, 사람의 손에 의해서 고통을 당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다윗은 징계를 고통의 의미로 바라보기보다는, 죄 가운데 있는 자신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알고, 긍휼에 빠지게 하시는 은총의 시간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징계’라는 말을 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기 쉬운 것은 ‘벌’의 개념입니다. 벌이라는 것은 아프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징계에서 고통과 아픔만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피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든 징계를 받지 않기 위해,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야 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는 말도 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셋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다면, ‘하나님, 징계를 받지 않을 길은 없습니까? 회개하면 됩니까?’라는 식으로 반응했을지도 모릅니다.
15절 “이에 여호와께서 그 아침부터 정하신 때까지, 전염병을 이스라엘에게 내리시니,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백성의 죽은 자가 칠만 명이라,”
결국 다윗은 세 번째인 전염병의 징계를 받게 됩니다. 삼일 동안의 전염병으로 인해 백성이 칠만 명이 죽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징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 빠지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손에 빠진다는 것은, 곧 여호와의 긍휼에 빠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삼일 간 전염병이 있는 이 징계가, 다윗을 하나님의 긍휼로 끌어가는 징계였다는 의미가 됩니다. 어떻게 전염병의 징계가, 다윗을 여호와의 긍휼에 빠지게 하는 징계가 되겠습니까?
다윗의 범죄는 인구조사를 한 것이었습니다. 많은 수의 인구를 확인함으로써, 자신의 힘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런데 삼일의 전염병으로 인해, 칠만이라는 많은 수의 백성이 죽습니다. 만약 전염병이 삼십일이었다면, 일년이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윗이 힘으로 여긴 수십만의 백성이 하나님에 의해 죽지 않겠습니까?
결국 전염병의 징계를 통해,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은, 다윗이 계수한 수많은 백성들도, 여호와의 손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존재 자체가 여호와께 달린 것이고, 여호와의 긍휼이 그들을 살리고 있는 것임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징계 앞에서, 다윗이 인구를 조사한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음이 드러납니다. 아무리 이스라엘의 수가 많고 힘이 있다고 해도, 하나님의 심판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많은 수의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도 아니고, 심판을 넘어가게 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전염병의 징계를 통해서, 수에 관심을 두었던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이었는가를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의 이러한 깨달음이, 오늘 우리들의 속마음 깊이 담겨져야 할 것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교회를 바라보면서, 원하는 것은 많은 교인입니다. 많은 교인을 교회의 힘으로 여기는 것이고, 교회가 크다는 것으로써, 그 교회에 다니는 자신의 위상이 높여질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목사는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을, 교회가 크다는 것으로 넘어갈 수 없습니다. 교인 수가 많다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을 넘어가게 하는, 힘도 조건도 되지를 못합니다.
아무리 많은 수라 할지라도, 한 순간에 하나님이 흩어버릴 수도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결국 교회로 모이는 성도가 관심을 두어야 할 문제는,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17절 “다윗이 백성을 치는 천사를 보고, 곧 여호와께 아뢰어 이르되, 나는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거니와, 이 양 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하건대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을 치소서 하니라.”
다윗은 칠만 명의 백성을 친 천사를 보고, 자신이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음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모든 죄는 자신에게 있고, 백성에게 있는 것이 아니니, 자신과 자신의 아버지 집을 치기를 원합니다. 결국 다윗은 백성의 죽음을 보면서, 모든 죄가 자신에게 있음을 보게 되는 것이고, 자신은 여호와의 징계를 받음이, 마땅하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죽은 칠만 명의 백성은, 죄도 없이 애매하게 죽은 것입니까? 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향해, 이미 진노하셨음을 말합니다. 곧 이스라엘 백성이나 다윗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죄는 의지할 것이, 세상에 있는 것으로 여기는 착각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징계로 말미암아 확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와 내 집을 치소서’라는 고백을 합니다. 교회는 바로 이러한 고백을 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일컫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가 크게 되는 것을, 기뻐하신다고 말씀한 적이 없습니다. 교회 부흥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말하는 것은,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 낸, 거짓된 말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관심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베푸신 긍휼이, 그 속에 있는가를 보시고, 천국으로 이끌어 들이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징계로 인해 결국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나와 내 집을 치소서라는 고백을 하게 됨을 생각하기 바랍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다윗을 그러한 고백을 하는 자로, 만들어 가셨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람됨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사람, 그가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겠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끊임없이 징계하시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죄지었으니 벌 받아라’가 아니라, 죄를 알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할, 자기 존재성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부어지는 하나님의 긍휼이, 얼마나 보배로운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외면한 채, 자신의 욕망에 빠져서 살아간다면, 그것처럼 안타까운 일도 없습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는 것인가도 모른 채, 자기 멋대로 하나님의 뜻을 만들어 내면서, 자신이 잘되는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여기는 무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성도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과 그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징계는,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수단이고 도구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다윗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다시 한 번 다짐해야 하는 것은, 나는 교만하지 아니한가, 나는 지금 나의 숫자를 세고 있고, 남을 판단하고, 나의 열심에 스스로 감탄하고 있지는 아니한가 점검하고, 만약 그렇다면 교만하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한 번의 교만으로 우리 인생이 끝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큰 그릇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깨끗한 그릇을 사용하십니다. 크고 강하고 유능하다고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청결해야만, 하나님께서 눈여겨 보시고 사용하시는 겁니다. 혹 부족하면 훈련시키시고, 지혜가 없다면 후히 주셔서 사용하십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 앞에서 우리 부족한 것을 고백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안 된다는 절대적인 믿음을 간직하고, 변함 없는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 자신을 바라보며,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지난 삶 속에 때때로 미련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에, 많은 세월을 허송하는 어리석음이 있었으나, 깨닫게 하시고, 결단하게 하시고, 돌아오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주님, 이 귀한 시간,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은혜를 주셔서, 다시금 주님과 동행하며, 다시금 신앙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는, 믿음의 복원력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다윗을 넘어지게 하였던 악한 마귀는, 오늘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하고 있음을 기억하고, 더욱 겸손해져서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게 하옵소서.
지금 많은 곤경을 겪은 이 민족이, 사람의 손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그 긍휼의 손에 그 능력의 손에, 그 의로운 손에, 그 정의로운 손에, 그 공평한 손에 빠지게 하여 주옵소서. 진노 중에서라도 긍휼을 베푸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오늘 우리 모두에게 임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