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사울 성지>
청양다락골에서 48km를 2시간 넘게 달려와 여사울성지에 도착합니다. 곧장 오면 1시간 10분 정도 걸리지만 광시마을 한우공원에서 쉬면서 라면을 끓여먹었습니다. 광시마을은 한우로 유명한 지역이라 시골임에도 한우식당이 밀집되어 있고 기념공원도 깔끔하게 조성되어 있습니다. 한우로 체력을 보충하려고 식당에 가보니 점심부터 먹을 수 있답니다. 고기를 사서 구워먹기도 번거로워 온두막에 앉아 신라면을 끓여 먹었습니다. 취사 가능지역이고 여러 가지 편의 시설도 잘 갖추어져있습니다. 근처의 예당호는 낚시꾼들을 위한 수상가옥들이 아주 많아서 마치 동남아에 온 것 같은 느낌입니다.
벌써 햇살이 무척 뜨겁습니다. 내포의 사도라 불리는 이존창의 생가가 있는 여사울은 평야지대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탁트인 평야지대에 신앙의 못자리가 형성되었고 외국신부님들이 활동하였다는 것이 의아했지만 그 궁금증은 바로 풀렸습니다. 이존창루도비코가 태어난 여사울은 삽교댐이 건설되기 전에는 바닷물이 들어오고 갈대와 수풀이 우거져 외국의 신부님들이 은밀히 상륙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었답니다. 마치 김대건신부님 일행이 몰래 상륙한 화산의 나바위와 비슷한 지형 같습니다.
유복한 가문에서 태어난 이존창은 김범우 집에서 권일신을 만나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습니다. 그 후 가성직제도의 일원으로 충청도의 전교 책임을 지고 여사울로 내려와 자기 가족과 친지들을 천주교에 입교시켜 3백여 명의 신자공동체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존창의 전교로 김대건신부님과 최양업신부님의 조상들도 천주교 믿게 됩니다. 그러나 윤지충의 진산사건으로 이존창도 1791년 신해박해 때 투옥되었다가 모진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배교하게 됩니다. 잘못을 통회한 이존창은 배교의 상처를 간직한 채 고향을 떠나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더욱 전교에 몰두하였고 1795년에 주문모신부를 고산지역으로 모시고 와 성무를 돕다 체포되어 1801년 공주 황새바위에서 참수치명합니다.
한국 천주교회의 초기 신앙 공동체이며 내포지역 천주교회의 출발지이자 중심지인 여사울은 여러 박해를 겪으면서 성인 2분, 하느님의 종 2분 그리고 여러 명의 순교자를 탄생시키는 순교자의 못자리 역할도 하게 됩니다.
스페인풍의 성지 성당이 평화롭게 느껴집니다. 생가터 윗길을 따라 올라가니 넓은 잔디밭이 조성되어 있고 이제는 곡창지대로 변한 드넓은 평야가 눈에 들어옵니다. 성지 뒤편으로는 십자가의 길이 있으며 이 길을 따라 신리성지와 합덕성당 그리고 솔뫼성지로 이어지는 16.5km의 도보순례를 시작합니다. 나는 신리성지에서 도보순례를 시작하려고 했기 때문에 바로 신리로 이동합니다.
<조선의 카따콤바 신리 성지>
여사울성지에서 신리 성지까지는 약 6.5km 거리입니다. 조선의 카따꼼바라고도 불리우는 신리성지는 성 안토니오 다블리 주교님께서 수년간 거처하시던 곳이며 1865년 엥베르 주교님과 다블뤼 주교님, 프랑스 신부 4분이 이곳으로 입국하여 전교 활동을 했으며 1866년 병인박해로 40여 명의 순교자가 탄생했습니다. 1970년에 인근의 줄 무덤에서는 십자가 고상과 신원 미상의 목 없는 시신 32구가 발견되었습니다. 원래 손자선토마스의 집이었던 조선교회 최초의 주교관이 당시의 대들보 등을 그대로 사용하여 복되었습니다. 신리성지는 여사울 성지에서 시작하여 신리성지 합덕성당 솔뫼성지까지 도보로 하는 순례성지의 한 코스입니다. 최근에 매우 넓은 부지에 정원과 기념관을 조성하였으나 쉴 수 있는 그늘이 전혀 없습니다. 십자가의 길이나 조형물 사이사이에 나무나 화단을 조성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길을 따라 솔뫼성지까지 도보 순례로 계획하였으나 성지의 수녀님께서 햇볕이 너무 강하니 힘들다며 염려하시어 성당에서 묵상한 후 시원한 가을날에 다시 순례하기로 하고 포기했습니다. 진짜 너무 덥습니다. 성지 식당 야외테이블에 앉아 아이스박스에 넣어 둔 음료수를 꺼내어 연거푸 마셔도 갈증이 납니다. 에어컨을 빵빵하게 켜고 인근의 합덕성당으로 이동합니다.
첫댓글 ^^
나중에 도보순례하신 후기도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