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듬해, 이상적은 중국 연경(燕京)에 가는 길에 이 그림을 가지고 가서
장악진(章岳鎭), 조진조(趙振祚) 등 중국 학자 16사람에게 보여주었는데,
그들이 앞다투어 추사와 제자의 ‘후조(後凋)’를 예찬하는 글을 지었습니다.
‘이 그림은 분명 좌우명이다(尸幅分明座右箴).’ 중국 문인 오순소는
‘세한도’를 삶의 모토로 삼겠다고 했으며, 또 다른 문인 오찬은
'변하지 않는 절의를 배우고 익혀, 성인을 본받는다.’는 글을 남겼습니다.
장요손은 '중국과 조선에 새로운 우정이 맺어지고, 한 폭의 그림에 영원의
뜻 담겨, 시들지 않는 절의가 온 누리에 빛나네.’라는 촌평을 썼습니다.
추사의 그림 한 폭은 중국 학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으며
200년 전 국경을 뛰어넘는 양국 문인들의 학문 공동체를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어, ‘세한도’는 길이 15m의 두루마리 대작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뒷날 이 그림을 소장하였던 김준학(金準學)의 찬(贊)과
오세창(吳世昌), 이시영(李始榮)의 배관기 등도 함께 붙어 있습니다.
1926년 경성제대 교수로 부임해 온 일본인 후지쓰카 지카시(藤塚隣),
그는 추사의 학문과 예술에 매료되어, 1943년 '세한도'를 구입하여
일본으로 돌아갔는 데, 얼마 뒤 손재형이라는 조선의 젊은이가 찾아와
100일간 문안하며 '세한도'를 내달라고 간곡히 청했습니다. 그런데
후지쓰카는 그 귀한 작품을 조선인 젊은이에게 아무 조건없이 내주었답니다.
"그대 나라의 물건이고, 그대가 나보다 이 작품을 더 사랑하니 가져가라."
돈 한 푼 받지 않았습니다. 일본인 후지쓰카가 한국에 기증한 것입니다.
'세한도歲寒圖'(1844년), 국보 제180호. 세로 23㎝, 가로 69.2㎝. 종이 바탕에 수묵.
그림은 단색조의 수묵, 그리고 마른 붓질과 필획의 감각만으로 이루어졌고,
긴 화면에는 집 한 채와 그 좌우로 지조의 상징인 소나무와 잣나무가
두 그루씩 대칭을 이루며 지극히 간략하게 묘사되어 있을 뿐 나머지는
텅 빈 여백으로 남아 있다. 이와 같이 극도로 생략되고 절제된 요소들은
모두 문인화의 특징들로 직업화가의 인위적인 기술과 허식적인
기교주의에 반발하는 작가의 의도적인 노력의 결과라 보여집니다.
세한도에 담겨 있는 표면적인 의미는 이상적의 의리에 감동한
김정희의 마음을 형상화한 것이지만, 그를 감동시킨 그 의리와 절개는
조선 지식인의 핏속에 면면이 이어져온 조선인의 의리이자 절개였습니다.
따라서 김정희는 그것을 누구나 느낄 수 있는 보편적인 감정으로
변환시켜 '세한도'에 담아냈던 것이라 하겠습니다.
[편집자 추기]
위의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에 대한 내용은 지난 2020.9.3
"한밤의 사진편지 제2816호"로 회원들에게 발송한 바 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기증관 재개관에 따라 다시 알려드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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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linda(아름답다) - Sweet People>-
* 편집 : 西湖 李璟煥
첫댓글 몇 년 전에 보내 주섰던 阮堂 秋史 金正喜의 不朽의 傑作 '歲寒圖'를 코로나19 受難 시대에 잊고 있었는데, '長毋相忘'을 통하여 喚起시켜 주시니, 고맙고 또 감사합니다. 西湖 회장님, 늘 健康하소서. 한길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