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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와 인간의 조화를 꿈꾸는 현자의 우주론
―정동재의 시 세계
권온
정동재의 제2시집을 읽는다. 2017년 첫 번째 시집을 간행한 이후 6년의 시간이 흘렀다. 시인은 이번 시집을 엮으면서 이렇게 진술한다. “문장의 색채를 구하는 분들은 부디 읽지 않기를 권한다. 하늘은 지상에 천국을 건설하려 한다. 좌절하지 않고 열심히 사시는 분들께 이 문집을 바친다.” 필자는 이와 같은 그의 진술에서 어떤 단호함을 체감한다. 우리는 정동재의 시가 ‘문장의 색채’를 지향하는 게 아님을 알게 된다. 그는 독자들에게 ‘지상’의 소중함을 ‘천국’처럼 건축할 것임을 선언한다. 시인은 화려한 문장의 기교에 집중하는 대신 삶의 현장으로서의 지상을 뜨겁게 형상화할 것임을 암시한다. 정동재는 노력과 인내로 생(生)의 과정 자체에서 깊은 의미를 추출하는 인물이다. 시집 살리는 공부에 담긴 시 세계를 10편의 시를 중심으로 살펴볼 시간이다.
돌이켜 보면 오십 중반의 생 이어온 것은 내가 아닌 주문이었다
응애 하며 우는 그 순간부터 나의 주문은 시작된 것이다
젖 달라 씻겨 달라 재워 달라
짜장 짬뽕 나이키 아디다스 루이비통 에르메스 푸르지오 롯데캐슬 람보르기니 파가니
능력껏 주문하는 주문의 세계
더 센 주문을 외려는 사이
우주가 내미는 주문
왔으니 돌아가자는 주문
그런 주문은 너무 싱겁다는 뜻
들을 여력도 없다는 듯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영문도 모르면서
내가 내게 들이미는 주문
나를 내놓으라는 주문
―「주문」 전문
이 시에는 “주문”이 가득하다. ‘주문’은 이 작품의 제목과 본문에 도합 11회 출현한다. 시적 화자 ‘나’가 집중하는 ‘주문’은 주문(注文)이자 주문(呪文)일 수 있다. 정동재는 ‘주문’을 중심에 두고서 언어의 관현악을 연주하는 셈이다. 그가 실행하는 ‘주문’의 관현악에서 각별히 눈에 띄는 어휘 또는 진술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오십 중반의 생”, “응애 하며 우는 그 순간”, “왔으니 돌아가자는 주문”, “나를 내놓으라는 주문” 등에서 시인은 스스로의 삶 또는 생(生)을 ‘주문’의 관점에서 성찰한다. 정동재는 출생과 사망 사이에 위치한 삶의 궤적을 ‘주문’의 반복으로써 완성한다. 우리도 “루이비통”과 “에르메스”를 실은 “람보르기니”를 타고 신나게 달려볼까?
짹짹 소리 들렸다
짹짹 소리에 바람이 불고
짹짹 소리에 비가 몰려든다
짹짹 소리에 해가 뜨고
짹짹 소리에 해가 진다
짹짹 소리에 입 맞추고
짹짹 소리에 몸 맞댄다
짹짹 소리에
부러진 나뭇가지도 하늘로 날아오른다
짹짹 소리에 알이 부화되고
짹짹 소리에 푸르름도 기대고 있다
삶에 지친 자들 잠시 쉬어가라고
짹짹 경전 소리 들린다
짹짹 소리로 너를 부르고
짹짹 소리로 나를 부른다
―「짹짹 소리」 전문
정동재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시의 본질을 확인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그는 특정 어휘 또는 표현의 반복에 집중한다. 시인은 이 시에서 “짹짹 소리”의 반복을 실천한다. 정동재가 선택한 ‘짹짹 소리’는 제목에서 1회, 본문에서 12회 등 총 13회 출현한다. 독자들은 ‘짹짹 소리’의 반복을 경험하면서 시의 음악성 또는 리듬감을 열렬하게 확인한다. 이 시에 제시되는 “짹짹”은 단순한 의성어가 아니다. ‘짹짹’이라는 소리는 ‘새’가 되고 ‘자연’이 된다. 또한 ‘짹짹’이라는 소리는 ‘종교’가 되고 ‘삶’이 된다. 요컨대 우리는 정동재의 시를 읽으며 단순하고 소박하면서도 본질적인 예술로서의 시를 온전히 누릴 수 있다.
주자 선생은 우주가 태극의 이치로 가득 차 있다고 했다
소우주 인간도 양심으로 가득 차 있다고 했다
격물치지에 대동 세계가 들어있다고 했다
앉은 자리에서 천하를 얻기 좋은 설득력을 가져다준다
나는 늘 누워서 감 떨어지기 기다리는 부류이므로
나의 9할은 게으름 아닌가 생각한다
누워서 감 떨어지길 바라냐는 말씀은
대청마루에 앉아 감 한번 보고 먼 산 한번 보고
그러다 목 떨어질 것 염려된 어느 현자가
차라리 누워서 편히 때를 기다리라는 안부의 말씀으로 해석한다
모든 일 누워 편히 해결하려 했다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고 눈 막고 귀 막는 우매함으로 한가로움을 만들었다
살아져 살다 보니 아무리 뜻을 이루려 해도 안 되는 일이 많다
때가 되면 저절로 되는 일이 참으로 허다했다
그리하여
가지 위에 매달린 저 퍼런 감이 나구나 생각한다
―「퍼런 감」 전문
시적 화자 ‘나’는 스스로를 “누워서 감 떨어지기 기다리는 부류”로 진단한다. ‘나’는 자신의 “9할”을 “게으름”으로 규정한다. ‘나’에게는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고 눈 막고 귀 막는 우매함”도 있다. ‘나’는 스스로를 “가지 위에 매달린 저 퍼런 감”으로 판단한다. 독자들은 ‘나’를 게으르고 우매한 사람, 덜 익은 감을 닮은 사람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시적 화자 ‘나’는 그렇게 단순하게 폄하될 수 있는 인물은 아니다. ‘나’에게는 “우주”와 “소우주 인간”을 함께 아우를 수 있는 포용력이 있다. ‘나’는 “대동 세계”를 지향하는 “한가로움”을 안다. 시인은 삶에 “저절로 되는 일”과 “아무리 뜻을 이루려 해도 안 되는 일”이 섞여있음을 아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독자들로서는 정동재를 “설득력”을 갖춘 “현자”로서 수용할 수도 있겠다.
나의 죽음은 끈질긴 부덕함의 결과라고 K가 말했다
나의 삶은 끈질기게 부덕함을 두려워함이라고 J가 말했다. 의역했다
나의 죽이는 공부에 죽은 자들이 돌아와 끈질기게 나를 죽이고
나의 살리는 공부에 산 자들이 찾아와 끈질기게 나를 살렸다. 인과의 법칙이 성립했다
나의 살리는 공부가 나를 영생에 이르게 한다는 명제가 도출됐다
죽어도 살지 못하고 죽어도 죽지 않는 인과의 대명제 앞에서
석 달 열흘 눈물이 흘러내려
안부를 묻는다
거리를 벌려준 해와 달
거리를 좁혀준 나무와 새들
옷깃을 스치고 지나간 인연
숨 한 모금
모두
사랑합니다
―「살리는 공부」 전문
정동재는 단순한 구도를 설정하여 인생의 본질을 탐구한다. 그는 이번 시에서 “삶”과 “죽음”의 대비를 활용한다. 시인에게 ‘삶’은 “산 자들”과 “살리는 공부”로 연결되고, ‘죽음’은 “죽은 자들”과 “죽이는 공부”로 이어진다. 정동재가 ‘삶’계열을 선택했다는 사실은 독자들에게 엄청난 감동으로서 다가올 테다. 그는 “해”, “달”, “나무”, “새들” 등 자연을 소중하게 여긴다. 또한 시인은 “인연”의 가치를 높게 평가한다. 그에게는 “눈물”과 “안부”와 “숨”을 향한 공감의 마음이 열려 있다. “사랑합니다”라는 뜨거운 표현은 세상 만물을 향한 정동재의 ‘살리는 공부’가 앞으로도 “영생”을 지향하며 열렬히 지속될 것임을 암시한다.
詩(시)를 시라고 바꿔 쓰고 나면
글로 목탁 소리 낼 수 있어 좋다
글로 찬성 소리 낼 수 있어 좋다
글로 그림 그릴 수 있어 좋고
글로 영화 찍을 수 있어 좋다
수작 한 편 쓴 것 같아 다시 살펴보면
정답 없는 수학 문제를 풀다
정답을 못 찾은 것 같아서 좋다
점 하나 찍은 마침표에서
11차원 우주 물리학 이끌어내는 것 같아 좋고
행간 한 줄로 시작되는
천국의 계단 기하학 연결한 것 같아 좋다
부족한 내가 시 한 편 쓰고 나면
부족한 내가 별 하나 그리고 나면
시가 내게
안부를 묻는 것 같아 좋고
서툰 사랑에
서툴러도 된다고 고백해 주는 것 같아 좋다
시 한 편 쓰다 보면
온전히 나를 이끌어주려 하신다
―「시」 전문
이 시에서 가장 긴요하게 쓰이는 어휘는 “좋다” 또는 “좋고”이다. 시인은 ‘좋다’를 6회, ‘좋고’를 3회 사용함으로써 이 작품에서 ‘좋다(좋고)’의 시학을 전개한다. 정동재가 ‘좋다’의 시학을 연출함으로써 지향하는 바는 ‘시’ 또는 ‘글’의 본질이다. 그에 의하면 ‘시’에는 “목탁”이나 “찬송”으로서의 ‘종교’가 있고, “그림”이나 “영화”로서의 ‘예술’이 있으며, “수학”, “물리학”, “기하학”으로서의 ‘학문’도 있다. 우리는 이 시를 읽음으로써 종교, 예술, 학문의 총화로서의 시를 경험한다. 또한 시인이 추구하는 “우주” 또는 “별”로서의 시를 만난다.
병간호 중에 돌아가신 아버지
아버지의 죽음으로 찾아든 죄책감
마음
이란 게 참으로 무섭다
(…….)
1년이라 쓰고 봄여름 가을 겨울이라 읽는다
심장을 그리고 사지를 그린다
내 마음은 우주고 우주는 내 마음
양심은 춘하추동이어서 나를
농사 중이다
(…….)
―「심령술사」 부분
“심령술사”는 신비하고 불가사의한 심적 현상을 일으키는 기술을 전문적으로 가진 사람이다. 어쩌면 시인은 심령술사와 닮은 사람일 수 있다. 시적 화자 ‘나’는 “아버지”의 “병간호”를 수행하였으나 “아버지의 죽음”을 막지는 못하였다. ‘나’는 “죄책감”을 실감하면서 “마음”의 무서움을 깨닫는다. 또한 ‘나’는 “내 마음”이 “우주”임을 인식한다. ‘나’에게 마음은 ‘죄책감’에서부터 ‘우주’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영역으로서 위치한다. ‘나’는 ‘죄책감’을 “심장” 또는 “양심”과 연결하면서 “1년”이라는 시간을 “봄여름 가을 겨울” 또는 “춘하추동”으로서 변경한다. ‘1년’이라는 차가운 숫자가 ‘봄여름 가을 겨울’이나 ‘춘하추동’ 같은 따뜻한 이름으로 변화함으로써 ‘나’는 스스로의 “농사”를 진행한다. 정동재는 이 시에서 ‘심령’→‘심장’→‘마음’으로의 연쇄를 실천하고 ‘나’의 성찰과 반성을 지향한다. 이 시를 읽는 독자들도 자신의 마음을, 그것의 행로를 주목해야 할 일이다.
나의 전생은
지나치는 아지매 품에 안긴 하얀 털의 개 같다
나의 과거도
물고 물리는 개새끼의 생 그 연속이다
오늘을 개처럼 일하게 할 뜨는 태양이 개다
오늘의 기는 태양이 꼬리 내리는 역시 개다
태양은 해바라기 만드는
밥그릇이 경전 되게 하는 개 같은 견생이어서
우리는
개같이 벌어서 정승처럼 쓰자 했지만
일생 개집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쭈그리고 잠든 개새끼였다
태양 같은 주인님 앞
손 내밀어 악수도 하고 앉아 일어서기를 반복하고
기라면 기고 짖으라면 짖고
낯선 사람의 출현에 사나운 개처럼 짖어야 했다
가진 것이 적어서
낯익은 사람에게도 사납게 짖어야 하는 개처럼 살았다
별빛에 사람이 영글고
기실은 우주는 사람 말씀 놓치지 않고 귀담아듣고 계신다
적어도
태양을 멈춰 세워야 한다
―「태양을 멈춰 세워야 한다」 전문
중년(中年) 이후의 나이에 접어든 사람은 때때로 인생을 되돌아본다. 시적 화자 ‘나’ 역시 그러하다. ‘나’는 지나간 인생을 “나의 과거” 또는 “나의 전생”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잊어버리고 싶은 일들이 많은 아득한 ‘나의 과거’는 “개”, “개새끼”, “개집” 등으로 점철된 “견생”이었다. ‘나’가 스스로의 인생을 ‘개’와 관련된 일련의 어휘로 채운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불만스러운 과거의 인생을 ‘개’에 비유하고 있다. 곧 ‘나’는 ‘개새끼’가 되고, ‘나’의 집은 ‘개집’이 되며, ‘나’의 인생은 “개새끼의 생” 또는 ‘견생’이 된다. 이 시에서 ‘개’로서의 ‘나’와 대비되는 대상은 “태양”이다. ‘태양’은 ‘나’를 “개처럼 일하게” 하는 “주인님”이다. ‘태양’이 떠 있을 때, ‘나’는 “개처럼 짖어야 했”고, “개처럼 살았다” ‘태양’은 위압적인 ‘주인’이 되어 ‘나’를 ‘개’처럼 억압한다. 반면 “별빛”과 “우주”는 ‘나’를 포함한 “사람”에게 따뜻한 온기를 불어넣는다. 정동재의 제안처럼 우리는 앞으로 “태양을 멈춰 세”우고, 빛나는 ‘별빛’과 광활한 ‘우주’를 찾아야겠다.
1% 영감과 99%의 노력이라는 말은 발에 차이는 흔한 돌이다
날아와 머리통 후려친 이 돌이 내 인생의 시발점이다
정확히 1%의 영감이 그 돌이다
홍익인간 뜻 받들어 돌들을 이끌고 가 산업혁명 도화선이 되었을 돌
서양에서 다시 제집으로 찾아들었을 돌
하느님이 보우하사 정동재 만세라는 돌
지구를 말안장에 앉힌 강남스타일이라는 돌
세계를 들었다 놨다 하는 BTS 블랙핑크 기생충 오징어게임이라는 돌
한국어가 세계 공용어가 될 것이라는 돌
하늘이 내리셨다는 한글이라는 돌
김치 깍두기 비빔밥 불고기 천국의 맛이라는 돌
문화강대국이 곧 일류국가라는 김구라는 돌
더딘 세상
원수도 사랑해 준다는 명부冥府전에 복덕을 벌어줬다는
명목이라는 돌
―「돌의 세계 일주」 전문
이 시를 지배하는 어휘는 “돌”이다. “돌(들)”은 이 작품의 제목과 본문에서 15회 출현하였다. ‘돌’이 담당하는 영역은 매우 포괄적이다. ‘돌’은 “1% 영감과 99%의 노력이라는 말”이나 “홍익인간”과 같은 “세계”의 유의미한 표현을 가리키기도 한다. 눈에 띄는 바는 “한국어”, “한글”, “문화강대국” 등 ‘한국’을 향한 지향성이다. 시인이 제안하는 대상으로서의 ‘돌’은 “서양”과 ‘한국’을 아우르는 ‘세계’를 포괄한다. 필자는 이 시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으로서 6연의 어구 “하느님이 보우하사 정동재 만세라는 돌”을 꼽고 싶다. 여기에는 ‘한국’의 국가(國歌)로서의 애국가(愛國歌)가 잠재되어 있고 동시에 스스로를 향한 정동재의 감정 또는 느낌이 위치한다. 독자들은 이 표현을 읽으며 ‘자신감’, ‘자존감’, ‘자기 효능감’ 등을 확인할 수 있다. K-Pop, K-Culture 등을 넘어서는 K-Poem의 시대가 이렇게 출발한다.
쟁기질 중인 저 소는 순백의 화합물이다
등짐을 벗고 화합물에서 벗어난 시간
밤별을 외양간에서 들이고 앉아
또다시 뿔난 황소의 전진 되새김질이다
염소 질소 수소 산소도 일심동체가 되고 싶었던 게다
사실 소였던 게다
굴레 쓴 소처럼
들녘을 가로지르는 뿔난 소가 되고 싶었던 게다
미세먼지 가득한 이 도시 저 산야에서
대기를 가르며 올라 구름으로 쟁기를 끌었던 게다
하늘 이야기 눈비로 써 내리며
사람 사는 이야기 늘 같이 하고 싶었던 게다
―「들녘에 뿔난 소처럼」 전문
시인은 “소”와 관련된 다양한 어휘에 집중한다. “뿔난 소”, “저 소”, “황소”, “굴레 쓴 소” 등은 동물로서의 ‘소’를 가리키는 다채로운 사례이다. 정동재가 이 시에서 지향하는 ‘소’는 단순한 동물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가 포괄하는 ‘소’의 영역에는 “염소”, “질소”, “수소”, “산소” 등 화학과 관련된 원소들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이제 동물이자 원소로서의 ‘소’를 목도하게 된다. 우리는 시인이 이번 시에서 제시하려는 진정한 메시지를 5연과 6연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은 “도시”, “산야”, “대기”, “구름”, “하늘”, “눈비”, “사람” 등의 어휘로 구체화한다. 정동재는 이 시에서 인간과 자연의 교감 또는 소통을 ‘소’를 활용하여 성공적으로 포착하고 있다.
(…….)
시도 그렇다
특히 내가 그렇다
인위적 위력 몸이 먼저 느낀다
읽을수록 술술 목구멍 넘기지 못한 행간이 입에 걸려 뱉어진다
뱉어진 가래처럼 생떼 부리다 누군가의 시간을 갉아먹다가
폐기처분으로 어설픈 죗값 치른다
힘깨나 들어간 목에 힘 빼라 하신다
퇴고하고 또 퇴고하라
검증하고 또 검증하라 하신다
―「L-글루탐산나트륨이라고 불러줘」 부분
독자들에게 읽는 재미를 제공하는 시들이 있다. 정동재의 이번 시 역시 그러한 유형에 속한다. 이 시는 단순함을 뛰어넘는 복합성을 지향한다. 시인이 지향하는 복합성은 2개의 계열로 구획된다. 하나의 계열은 “MSG” 또는 “L-글루탐산나트륨”으로 구성된다. ‘MSG’는 “과거” 또는 ‘원래 이름’이고, ‘L-글루탐산나트륨’은 ‘현재’ 또는 “새로운 이름”이다. 정동재는 ‘과거’가 ‘현재’로 바뀌고, ‘원래 이름’이 ‘새로운 이름’으로 변하는 현상에 주목하면서 다른 하나의 계열을 생각한다. 그것은 “시”와 ‘나’로 구성되는 계열이다. ‘예술’로서의 ‘시’에도 변화가 있고, ‘인간’으로서의 ‘나’에게도 변화가 있다는 사실은 긴요하다. 이 시를 읽는 이들에게 시인이 제안하는 “퇴고하고 또 퇴고하라”, “검증하고 또 검증하라”라는 진술은 유의미할 수 있다. ‘퇴고’를 거듭하면서, 또 ‘검증’을 반복하면서 ‘새 이름’을 발견하는 일은 모든 이에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독자들이여, 이제부터는 ‘MSG’라고 부르지 말고 ‘L-글루탐산나트륨’으로 부르자!
정동재의 제2시집 살리는 공부를 10편의 시를 중심으로 점검하였다. 그의 시 세계를 이야기하기 위한 키워드에는 ‘반복’이 있을 테다. 시인은 다수의 시편에서 긴요한 어휘를 반복적으로 활용하는 경향이 있다. 정동재의 시는 ‘음악성’을 중요하게 활용하면서 단호하고 선명한 ‘메시지’를 제공한다. 그는 문장이나 표현의 다양한 색채를 세공하는데 힘을 쏟는 대신 우리가 두 발을 딛고서 살아가는 지상(地上)이 천국(天國)과 같은 완전한 공간임을 알려준다.
정동재는 「퍼런 감」이라는 시에서 “우주”와 “소우주 인간”을 아우르고 “설득력”을 구비한 “현자”를 제안한다. ‘우주’라는 시어는 「주문」, 「시」, 「심령술사」, 「태양을 멈춰 세워야 한다」 등 시인의 다른 시편에서도 자주 노출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는 ‘우주’와 관련하여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자신과 조화롭게 사는 사람은 우주와 조화롭게 산다.(He who lives in harmony with himself lives in harmony with the universe.)”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언급한 ‘자신과 조화롭게 사는 사람’은 정동재의 시에서 ‘소우주 인간’에 대응한다. 또한 철학자가 가리킨 ‘조화’는 시인의 ‘설득력’에 해당한다. 정동재가 이번 시집에서 형상화하는 시 세계는 독자들에게 ‘우주’와 ‘인간’의 조화를 설득력 있게 제공한다. 필자는 리듬감을 중요시하는 현자의 우주론(宇宙論)이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꽃필 수 있기를 희망한다.
필자 : 권 온(문학평론가, 문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