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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장의 위임 예식
29: 1-25
1. 너는 그들에게 나를 섬길 제사장 직분을 위임하여 그들로 거룩하게 할 일이 이러하니 곧 젊은 수소 하나와 흠 없는 수양 둘을 취하고
2. 무교병과 기름 섞인 무교 과자와 기름 바른 무교 전병을 모두 고운 밀가루로 만들고
3. 그것들을 한 광주리에 담고 그것을 광주리에 담은채 그 송아지와 두 양과 함께 가져 오고
4. 너는 아론과 그 아들들을 회막 문으로 데려다가 물로 씻기고
5. 의복을 가져다가 아론에게 속옷과 에봇 받침 겉옷과 에봇을 입히고 흉패를 달고 에봇에 공교히 짠 띠를 띠우고
6. 그 머리에 관을 씌우고 그 위에 성패를 더하고
7. 관유를 가져다가 그 머리에 부어 바르고
8. 그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들에게 속옷을 입히고
9.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띠를 띠우며 관을 씌워서 제사장의 직분을 그들에게 맡겨 영원한 규례가 되게 하라 너는 이같이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위임하여 거룩하게 할찌니라
10. 너는 수송아지를 회막 앞으로 끌어 오고 아론과 그 아들들은 그 송아지 머리에 안수할찌며
11. 너는 회막문 여호와 앞에서 그 송아지를 잡고
12. 그 피를 네 손가락으로 단 뿔들에 바르고 그 피 전부를 단 밑에 쏟을찌며
13. 내장에 덮인 모든 기름과 간 위에 있는 꺼풀과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을 취하여 단 위에 불사르고
14. 그 수소의 고기와 가죽과 똥을 진 밖에서 불사르라 이는 속죄제니라
15. 너는 또 수양 하나를 취하고 아론과 그 아들들은 그 수양의 머리 위에 안수할찌며
16. 너는 그 수양을 잡고 그 피를 취하여 단 위의 주위에 뿌리고
17. 그 수양의 각을 뜨고 그 장부와 다리는 씻어 각 뜬 고기와 그 머리와 함께 두고
18. 그 수양의 전부를 단 위에 불사르라 이는 여호와께 드리는 번제요 이는 향기로운 냄새니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니라
19. 너는 다른 수양을 취하고 아론과 그 아들들은 그 수양의 머리 위에 안수할찌며
20. 너는 그 수양을 잡고 그 피를 취하여 아론의 오른 귓부리와 그 아들들의 오른 귓부리에 바르고 그 오른손 엄지와 오른발 엄지에 바르고 그 피를 단 주위에 뿌리고
21. 단 위의 피와 관유를 취하여 아론과 그 옷과 그 아들들과 그 아들들의 옷에 뿌리라 그와 그 옷과 그 아들들과 그 아들들의 옷이 거룩하리라
22. 또 너는 그 수양의 기름과 기름진 꼬리와 그 내장에 덮인 기름과 간 위의 꺼풀과 두 콩팥과 그것들 위의 기름과 우편 넓적다리를 취하라 이는 위임식의 수양이며
23. 또 여호와 앞에 있는 무교병 광주리에서 떡 한 덩이와 기름 바른 과자 하나와 전병 하나를 취하고
24. 그 전부를 아론의 손과 그 아들들의 손에 주고 그것을 흔들어 여호와 앞에 요제를 삼을찌며
25. 너는 그것을 그들의 손에서 취하여 단 위에서 번제물을 더하여 불사르라 이는 여호와 앞에 향기로운 냄새니 곧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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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나 가수 같은 연예인들에게는 ‘인기’가 생명처럼 중요합니다. 만약, 연예인이 마약을 하다가 걸리면 그 후에는 방송에서 잘 써주지도 않고 광고 요청도 없어서 하루아침에 별 볼일 없는 사람으로 전락합니다. TV 드라마에서 중요한 것은 시청률입니다. 어떤 드라마가 시청률이 40%가 넘는다고 하면 모든 광고신청이 그리로 몰리기 때문에 큰돈을 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드라마의 시청률이 떨어지면 그 드라마는 주인공이 죽으면서 조용히 끝납니다. 우리나라 대통령 선거 때 후보들이 생명처럼 생각하는 것은 여론의 지지율입니다. 일단 지지율이 떨어지면 그 후엔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 선거에서 패배하고 맙니다. 이런 인기, 시청률, 지지율은 조사를 통해서 훤히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겪는 어려움 중에 하나는 하나님이 눈에 안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를 드리면서도 때로 엉뚱한 생각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신학생들이 신학을 공부하면서 배우는 말 중에 ‘코람 데오’ 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것을 모두 하나님이 보고 계시며 알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에게 이것처럼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만일 불교나 천주교처럼 예수님 상이 예배당에 모셔져 있다면, 예배당에 와서 그 신상 앞에 있을 때에만 하나님 앞에 있다는 의식을 가지면 되겠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엄명까지 하셨으니 모양을 만들어 세울 수도 없습니다. 내 눈에는 하나님이 안 보이는데 하나님은 어디서나 내 모든 행동을 다 보고 계신다니 이것처럼 무서운 것이 없고, 그런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안 보이는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신다는 것을 인식하고 사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요즈음은 범죄예방을 위하여 곳곳에 감시카메라를 달았습니다. 고속도로, 길거리, 출입문, 엘리베이터, 주차장 할 것 없이 카메라 없는 곳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루를 시내에 가서 일을 본다면 수 백 번 감시카메라에 찍힌다고 합니다. 더구나 우리나라 국정원에서는 원하기만 하면 내가 언제 어디에 갔고 무엇을 했고 무엇을 샀고 하는 것을 모두 손금 들여다보듯이 다 볼 수 있답니다. 그래서 이제 모든 국민이 통치자의 손바닥위에서 살아가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사면이 유리로 된 집에서 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죠지 오웰이 썼던 ‘1984년’ 이라는 소설에 등장하는 빅브라더 시대가 온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아무리 감시가 심하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속으로 생각하는 것까지는 감시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속의 생각까지 아시고 감찰하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더 무섭습니다.
시 139:1-4에 보면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 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라고 하였고,
7-10절에는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피하여 나름대로의 프라이버시를 만들 수 있는 영역은 전혀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진짜로 신앙생활을 하고자 한다면 우리가 언제나 하나님 앞에 있고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 노출되어 있어서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생활이 다른 종교의 신앙생활과 다른 점입니다.
이방 종교는 자기는 신에게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살다가 신의 도움이 필요할 때에만 신상 앞에 찾아와서 자기의 약점은 감춘 채 도움을 받고자 하는 문제만 신에게 구하여 도움을 받고 가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자기의 신을 신전에 고정시켜 두거나 벽에 그림으로 그려두었기 때문에, 신전을 떠나면 얼마든지 자기 마음대로 생활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이 세상에 안 계신 곳이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기본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기독교인 중에 이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신자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와서는 신자처럼 행동하지만 교회에서 나가면 하나님이 못 보시는 줄 알고 자기 마음대로 생활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위선자라는 비난을 세상 사람에게 듣습니다.
그런 문제 때문에 하나님은 제사장들에게는 마음을 다른데 쏟을 수 없는 장치들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제사장이 착용하는 복식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28장 에서는 제사장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반드시 입어야 하는 옷에 대하여 말씀하셨고, 오늘 읽은 제사장의 위임예식에도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제사장의 옷을 입는 것이 위임예식의 중요한 순서입니다.
제사장은 왜 특별한 옷을 입어야 했을까요? 그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또한 왕 같은 제사장들인 오늘의 신자들이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 지를 보여주는 계시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들은 가는 하늘색 실로 짠 긴 옷을 입었습니다. 끝이 발을 덮었습니다. 주님의 공로가 우리의 죄를 완전히 감싸주실 것을 말씀합니다. 그 에봇 가장자리에 석류열매를 수놓았습니다. 신자들의 삶에서 아름다운 열매가 맺혀야 할 것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 석류 사이사이에 금으로 만든 방울을 달게 하셨습니다. 움직일 때 마다 구원의 소식, 복음의 아름다운 소리가 들리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는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갑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제사하면서 딴 생각이나 다른 행동을 하면 하나님은 그들을 즉시 죽이셨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갈 때에는 허리에 끈을 묶어 밖에서부터 늘어뜨리고 들어갔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행여나 딴 생각을 하거나 부정한 행동을 하면 즉시 죽어서 금방울 소리가 들리지 않으며, 그때에는 줄을 당겨서 죽은 제사장의 시체를 끌어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은 하나님 앞에 들어갈 때 마다 이번에 들어갔다가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을 가지고 들어갔습니다. 제사장들이 딴 생각을 아예 하지 못하게 하신 장치입니다.
또한 제사장은 머리에 관을 써야 했는데, 거기에 “여호와께 성결” 이라는 글자를 새긴 패를 붙여야 했습니다. 이것은 제사장의 정신상태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전에 있는 제사장은 그 정신이 온전히 깨끗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잡념에 사로잡혀 있거나 근심 걱정에 빠져있거나, 어제 마신 술이 덜 깨어 몽롱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정신 똑바로 차리고 하나님 앞에서 깨끗한 마음으로만 경배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패를 붙었다고 해서 정말 제사장이 딴 생각을 전혀 안했을까요?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제사장도 인간인데,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완전할 수 있겠습니까? 제사장의 이마에 이 패를 붙였다고 해서 즉시 머리가 맑아지거나 생각이 깨끗해 졌을까요? 사실 어떤 인간도 하나님 앞에서 완전할 수가 없습니다. 이 시대의 제사장인 우리들을 생각해 봅시다. 마음은 늘 그렇게 되기를 원하지만 육신이 약해서 자꾸 엉뚱한 생각을 하고 엉뚱한 짓거리를 합니다. 그럴 때 마다 우리는 하나님께 새 마음을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제사장의 이마에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패를 붙이라고 하신 것은, 내가 지금 하나님의 존전에 있는데도 생각이 허망할 수 있고, 몸은 예배하고 있으면서도 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표시요 그래서 하나님께 자비를 구하는 표시였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할 때마다 나는 행실과 생각이 추한 죄인임을 고백하면서 자비를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생각을 정결케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마음을 더럽히고 있는 근원을 찾아서 하나님 앞에 고백해야 합니다. 마음에 근심이 있고 생각이 갈라질 때, 그 원인이 무엇인가를 찾아서 자기 이마에 붙여야 합니다. ‘하나님 저는 이것 때문에 늘 생각이 혼미하고 영혼이 지저분합니다. 이것을 치료해 주세요.’ 하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은 그의 삶을 온전한 제사로 받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를 보면 앞장서서 멋지게 이끌어 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뒤를 받쳐주는 어려운 일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정치인들은 자동차의 엔진과 같이 사회를 이끌어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그런 일은 전혀 못하고 있어서 걱정입니다. 그런가하면 교수들은 대학에서 새로운 학문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을 합니다. 기업가들은 회사를 잘 경영해서 부를 창출하고 국민들에게 일자리를 주는 역할을 합니다. 반면에 사회의 구성원 중에는 맨 뒤에서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함으로서 뒤치다꺼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중에 환경미화원이 있습니다. 이들은 사람들이 살아가며 만들어 내는 엄청난 쓰레기를 치워줍니다. 만일 이분들이 일을 하지 않는다면 금세 냄새가 나서 살 수가 없을 것입니다. 또 경찰도 어려운 직업입니다. 경찰은 죄지은 사람을 쫓아다니는데 밤낮이 없습니다. 오히려 밤에 범죄가 더 많이 일어나기 때문에 이분들은 밤이 더 바쁩니다. 그런가 하면 겉으로는 아주 멋지게 보이지만 정말로 어려운 일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바로 의사들입니다. 의사는 하얀 가운을 입고 선생님 소리를 들으면서 환자들을 치료하기 때문에 멋지고 존경스럽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항상 피와 고름을 만져야 하고 응급실이나 중환자실에는 언제나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기때문에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도 그런 직분이 있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멋진 옷을 입고 면류관을 쓰고 존경을 받았기에 대단한 사람들 같았지만, 실제로는 거의 백정과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제사장들이었습니다.
제사장들은 세상에서 가장 고상한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누구든지 사람이 하나님의 사죄와 축복을 받으려고 한다면 제사장을 거쳐야만 했습니다. 제사장이 속죄의 제사를 드려주어야 사죄를 받았고 제사장이 축복해 주어야 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실제로 하는 일이 무엇인가 하면 소나 양을 잡고 다리를 잘라내고 내장과 분비물을 치우고 고기를 불로 태우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의 손은 언제나 피와 오물이 묻어있었습니다. 참으로 고달픈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하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고상한 일이었습니다. 제사장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우리의 더러운 행실의 분비물을 치우고 죄를 제거해주실 우리주님 그리스도에 대한 예고입니다.
온 세상 사람들의 죄짐을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으실 그리스도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제사장을 미리 뽑으셨다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되고 싶다고 해서 될 수 있는 길도 없었고 하기 싫다고 해서 포기할 수 있는 길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론과 그 후손은 대대로 제사장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에는 인간적으로 그들보다 더 훌륭하고 뛰어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제사장으로 당신이 직접 지정해 주셨을까요?
사람에게는 신을 찾아서 자신의 정성을 표시하고 싶은 종교성이 있습니다. 인도 사람에게는 인도사람 방식의 신앙이 있고, 일본사람들도 그들 방식의 신앙이 있어서 세상에는 다양한 종교들이 존재합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자기 나름대로 생각해 낸 종교는 자기 나름대로의 공로로 신의 인정을 받겠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합니다. 자기의 고행이나 선행으로 구원을 받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인위적인 신앙을 일체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이 창조주를 찾는 방식은 하나님이 일러주신 대로 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먼저 부르지 않았는데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 없고 믿음을 주시지 않아도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요6:44에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로 올 수 없느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신앙은 언제나 하나님이 먼저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용서를 약속하시고, 용서받을 방법을 말씀해 주시고, 예수를 믿으라고 하시기에 그 말씀에 대한 반응으로 순종해서 믿는 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이처럼 제사장도 하나님께서 직접 선택하여 주신 것입니다. 구원에 있어서 언제나 하나님이 주도권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종교적인 열심만 가지고는 구원이 불가능합니다. 오직 주님이 베푸신 은혜를 감사하며 믿음으로 그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만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자기에게 오려거든 먼저 죄를 사해주는 일을 맡은 제사장에게 가라고 하셨고, 대제사장은 장차 우리의 죄를 사해주실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던 것입니다.
제사장을 세울 때 하는 두 가지 예식이 있는데, 하나는 제사장에게 옷을 입히는 것이고, 또 하나는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위임식의 첫 부분은 아론과 그 아들들이 몸을 깨끗이 씻고 멋진 제사장의 옷을 입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제사장에게는 옷이 가장 중요합니다. 제사장은 그 옷을 입음으로 제사드릴 준비가 되는 것이고, 제사장의 일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옷을 입히기 전에 물로 먼저 씻는 것은, 그가 제사장의 역할을 수행할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물로 씻는다고 죄가 씻겨 지겠습니까? 그보다 중요한 것은 ‘나는 씻음 받아야 할 죄인입니다.’ 라는 사실을 기억하게 하고 고백 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제사장의 옷을 입습니다. 그 옷은 제사장의 인간적인 수치를 가릴 속옷을 입은 다음에, 땅에 끌리는 하늘색 긴 옷을 입고, 견대에 보석을 물리고 가슴에 열두 보석을 단 흉패를 붙인 에봇을 입습니다. 특별한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 부름 받은 사람이라는 표시입니다. 그리고 이미 배운 대로 어깨와 가슴의 보석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이름이 있습니다. 그 이름을 어깨에 메고 하나님께로 나아갑니다. 우리를 당신의 어깨에 짊어지고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실 주님의 모습을 계시하는 의미가 제사장의 옷에 있었습니다.
옷을 입힌 다음에는 세 가지 제사를 드리게 했습니다.
☛첫 번째는 송아지로 드리는 속죄 제사였습니다.
속죄제란 모든 제사의 기본인데, 죄를 진 사람이 그 책임을 제물에게 떠넘기므로 자기의 죄가 사해지는 것이었습니다. 제사장을 위임하기 위해서 드리는 속죄제사는 아주 세밀하게 언급되었는데, 먼저 송아지를 잡아서 그 송아지의피를 네 손가락에 찍어서 제단 뿔에 바르고, 나머지 피는 제단 아래에 다 쏟습니다. 그리고 나서 죽은 송아지를 바로 제단에서 불사르는 것이 아니라 간과 콩팥과 거기에 붙은 기름만 제단위에서 사르고 고기와 가죽과 똥은 진 밖으로 가지고 가서 불사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수양을 잡아서 각을 뜨고 그 전체를 제단 위에서 불태웁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다른 수양 하나를 더 잡아서 그 피를 제사장의 귓부리와 엄지손가락과 발가락에 바르고 그 피를 제사장의 옷에 뿌리고 또 누룩 없는 떡과 함께 불사르고 그 일부는 제사장의 몫으로 주어 그가 먹게 하였습니다.
이 제사들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우선 수송아지 제사는 근본적으로 그리스도가 당하실 일을 예고합니다. 제사장이 앞으로 백성들의 죄를 사해주는 일을 할 텐데, 그는 자기 자격으로는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줄 자격이 없습니다. 그는 제물의 공로로 백성의 죄를 사해주어야 할 텐데, 그 제물은 송아지가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였습니다. 그 송아지 제물이 그리스도를 예표 한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송아지의 피는 제단에 바르고 간과 콩팥과 기름은 단에서 태우지만 그 몸은 진 밖으로 가지고 가서 태운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예루살렘에서 온갖 고초를 당하신 후에 그 몸이 예루살렘 성 밖으로 끌려 나가서 골고다 언덕에서 못 박혀 죽으실 것을 예고하는 것이고, 제사장이 백성들의 죄를 사하는 것은 바로 성 밖에 끌려가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분의 공로를 근거로 죄 사함을 선포할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제사장에게는 자기 마음대로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모든 죄를 전가시키는 제사를 드릴 뿐입니다. 그러면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이 모든 죄를 짊어지고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 송아지의 피는 제사장이 손가락으로 찍어 제단 뿔에 바르게 하셨고, 나머지 피를 제단 밑에 쏟게 하습니다. 제단은 오직 제물 드리는 용도로만 쓰이는 것이라는 구별입니다. 교회는 바로 사람들의 죄를 치료하기 위한 곳이며, 그것을 위한 시설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특히 제사장들에게 제물의 피를 귓부리와 엄지손가락에 바르게 하셨습니다. 피는 죽음의 흔적입니다. 피를 바른다는 것은 죽었다는 의미입니다. 피를 귓부리에 바른다는 것은 세상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제사장이 세상의 소문에 민감하고 사람들의 말에 흔들리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귀에 피를 발라, 하나님의 말씀만 듣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의 엄지손가락에 피를 바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손가락은 물건을 집는 것입니다. 그가 엄지손가락에 피를 바르지 않으면 인간적인 욕심으로 일을 하게 됩니다. 제사장은 손이 깨끗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사장들의 생활을 책임지기 위해서 열 한지파가 내는 십일조를 받게 하심으로, 십일조를 바치는 지파들 보다는 넉넉하게 해 주셨으며, 십일조 외에도 제물들의 대부분은 제사장의 몫이었기 때문에 제사장들은 재물이 넉넉하였습니다. 필요한 물질은 하나님이 책임지시고 공급해 주시기 때문에 남들보다 넉넉하게 살 수 있었지만, 부자가 되려는 욕심은 포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광야의 이스라엘에게 양식을 날마다 넉넉히 주신 하나님이 오늘 우리들에게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시대의 제사장인 성도는 물질보다 먼저 하나님의 의를 구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재물이 눈앞에 쌓여 있어도 그것을 물질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은행원들은 항상 남의 돈을 만지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많은 돈이 눈앞에 왔다 갔다 해도 그 돈을 돈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돈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부정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제사장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제물을 돈으로 생각하면 그때부터 그 제사는 타락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장에게는 물질을 넉넉히 주셨고, 그래도 시험에 들 우려가 있어서 엄지손가락에 피를 바르라고 하신 것입니다.
제사장의 엄지발가락에도 피를 바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그의 발걸음이 가는 방향도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발걸음은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 방향으로 가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제사장의 발은 자기에게 유익한 쪽이 아니라 죄가 많은 곳으로, 도움이 필요한 곳으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부자동네로 이사 가려고 할 것이 아니라 죄 많고 고통이 많고 내가 도울 일이 있는 동네에서 살면서 주님을 증거 하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이지만 하나님이 특별히 지명하여 불러내신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이 시대의 왕 같은 제사장들입니다. 구약의 제사장들이 그리스도의 모형으로서 그리스도를 계시하며 사람들을 도왔던 것처럼 이 시대의 제사장인 우리도 주님을 더욱 확실히 믿고 따르며, 새 시대의 제사장으로 합당하게 살아가는 성도들이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