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찬길 목사 : 신앙생활의 규정속도
여러분이 기도해 주셔서 한국에서의 부흥회를 은혜롭게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이번 부흥회는 어느 때보다도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일어났습니다. 이번 한국 방문에서는 하나님께서 부흥회를 통한 은혜도 베풀어주셨지만 다른 은혜도 베풀어주셨습니다. 부흥회 기간에 어느 목사님의 소개로 극동방송에 출연하여 우리 좋은교회를 소개하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중점적으로 하고 있는 사역을 소개했는데, 지난 금요일에 방송국에 가서 녹음을 했습니다. 2월 16일 오전 8시에 방송이 나간다고 하니까 시간 되시는 분들은 한국에 가셔서 청취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안타까워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극동방송이 미국에는 전파를 타지 않기 때문에, 우리교회의 홈페이지를 통해서 들으실 수 있을 겁니다. 방송이 되면 올려놓겠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가면서 항공사에서 제공해주는 화면을 통하여 평소에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생각했습니다. 여러분도 보셨겠지만 비행기 좌석 앞에는 조그마한 화면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영화나 드라마를 볼 수가 있고, 각종 정보를 안내 받을 수가 있습니다. 출발지와 목적지의 시간, 남은 시간, 외부 온도, 비행 고도, 비행 경로, 비행 속도 등이 계속해서 나옵니다.
한국으로 갈 때와 이곳 샌프란시스코로 올 때에 걸리는 비행시간이 기압골에 따라서 차이가 나지만, 올 때에 보니까 1,100 킬로의 속도, 600마일의 속도로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동차가 고속도로에서 달리는 속도가 65마일이니까 9배가 넘는 빠른 속도였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새삼스럽게 두 가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사용하는 교통수단에는 규정 속도가 있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피부로 느끼는 속도가 각각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보면 규정 속도가 있지요. 학교 주변이나 주택가에서는 25마일, 로컬 길에서는 35마일, 고속도로에서는 65마일의 속도로 달리게 되어 있습니다. 도로마다 이렇게 규정 속도를 달리 표시하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제가 전문가가 아니라서 정확히는 모르지만 제 나름대로 몇 가지를 생각했습니다.
첫째,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는 Speed Limit 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안전속도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속도대로 운전하면 안전하다는 뜻입니다. 여러분도 경험하셨겠지만 고속도로를 달릴 때에 표시해 놓은 규정 속도대로 운전하면 안전합니다. 통계에도 나와 있지만 교통사고의 많은 원인은 과속입니다. 규정 속도보다도 훨씬 빠르게 운전하면 사고가 날 확률이 높습니다.
둘째, 경제적이기 때문입니다.
종종 LA를 갈 때에 피부로 느끼는 것이지만 5번 고속도로를 타고 규정 속도대로 운전하면 중간에서 개스를 넣지 않아도 됩니다. 여기에서 LA까지가 400마일인데 70마일로 달리면 개스 값이 덜 들어갑니다. 그런데 규정 속도를 넘어서 달리면 개스가 생각보다 많이 들어갑니다. 중간에 반드시 한번 더 넣어야 합니다. 달리는 속도가 빠르면 빠를수록 개스는 그만큼 더 많이 소비됩니다.
셋째, 피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규정 속도대로 운전하면 피곤하지 않습니다. 장거리를 운전하는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규정 속도대로 운전하면 주위를 둘러 볼 수 있는 여유도 있습니다. 그러나 규정 속도보다 빨리 달리면 피곤합니다. 그럴 수 밖에 없지요. 빠르게 달리다 보니 여기 저기 신경을 써야 합니다. 폴리스가 있나 없나? 다른 차가 갑자기 오지는 않나 등을 신경 씁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교통 수단마다 느끼는 속도감은 다르지요. 오토바이를 타고 30마일로 달리는 것과 자동차를 타고 65마일로 달리는 것과 비행기를 타고 600마일로 달리는 느낌은 천지차이입니다. 한국에서 오는데 비행기가 600마일의 속도로 오는데 비행기 안에서 느끼는 속도감은 600마일의 속도와는 걸맞지가 않았습니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구름은 너무나 천천히 움직였습니다. 아니 속도를 느끼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비행을 해서 언제 샌프란시스코에 가나 싶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9시간 반 정도 지나니까 이곳에 도착하였습니다. 저는 그 비행기를 타고 오늘 아침10시에 도착하였습니다.
오토바이는 30마일로 달리는데 600마일의 속도로 달리는 느낌이 듭니다. 비행기는 600마일의 속도로 비행하는 데도 30마일로 달리는 느낌이 듭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오토바이는 작고 비행기는 크기 때문입니다. 오토바이는 외부로 느끼고 비행기는 내부로 느끼기 때문입니다. 차제가 작은 물체에 자신의 몸을 의지하면 천천히 가도 빠르게 느껴지는 것이고, 커다란 물체에 자신의 몸을 의지하면 빠르게 가도 천천히 느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에서도 이러한 것이 그대로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에서도 하나님의 규정 속도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안전하게 보호하시기 위하여 신앙생활의 규정 속도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경제적으로 풍요롭게 살아가기 하도록 하시기 위하여 신앙생활의 규정 속도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피곤하지 않고 능력있게 살아가도록 하기 위하여 신앙생활의 규정 속도를 만들어 주시고 그대로 나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신앙 생활하면서 피부로 느끼는 속도감이 다를 수 있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규정 속도대로 이끄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한국을 다녀오면서 비행기 안에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도로에서의 규정 속도와 신앙생활에서의 규정 속도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첫째는 주변 환경에 따라서 규정 속도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학교 주변에서는 25마일의 속도로 달리고, 로컬에서는 35마일로 달리고, 고속도로에서는 65마일의 속도로 달리지요. 하나의 도로이지만 주변 환경에 따라서 각각 다릅니다. 제가 가보지는 않았지만 독일에는 아우토반이라는 고속도로가 있는데, 일부 구간에서는 규정속도가 없답니다. 무제한으로 달린답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때에는 25마일의 속도로 달릴 때가 있고, 어떤 때에는 35마일의 속도로 달릴 때도 있고, 어떤 때는 65마일, 어떤 때에는 비행기와 같이 600마일의 속도로 신앙 생활할 때가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시시 때때로 우리를 다른 속도로 인도하신다는 겁니다.
둘째는 규정 속도는 전문가가 정한다는 겁니다.
규정 속도는 운전하는 사람이 정하는 것이 아니지요. 도로의 규정 속도는 도로를 설계하거나 관련이 있는 전문가가 정합니다. 신앙생활에서는 누가 속도를 정할까요? 사람을 만든 전문가가 정하십니다. 사람을 만든 전문가가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신앙생활의 규정 속도는 우리 인생의 전문가이신 하나님이 정해주시는 것이고, 하나님이 정해주셔야 우리의 삶은 안전한 겁니다.
셋째는 종류별로 다르다는 겁니다.
오토바이가 달리는 속도가 다르고 자동차가 달리는 속도가 다르고 비행기가 달리는 속도가 다릅니다. 오토바이가 아무리 성능이 좋다고 해도 비행기와 같이 달릴 수는 없는 것이고, 자동차가 아무리 터보 엔진을 달았다고 해도 비행기처럼 달릴 수는 없는 겁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보면 사람마다 하나님이 이끄시는 속도가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25마일의 속도로 이끄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65마일의 속도로 이끄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600마일의 속도로 이끄신다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는 믿는 사람들인데, 어떻게 하면 신앙생활을 잘할 수가 있을까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 신앙생활은 어떻게 하면 될까요? 하나님이 설계하신 신앙생활의 속도대로 따라가면 됩니다.
간혹 신앙의 속도를 자신이 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는 이 정도 수준이니까 나는 이 정도 속도로 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내 신앙의 속도는 하나님이 정하는 겁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성령의 역사 하심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나아가는 것이 예수 믿는 사람들의 삶의 자세입니다. 성령을 의지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설계해서 내가 가고 싶은 속도대로 나아가면 신앙의 성장이 없게 되는 겁니다. 신앙생활의 성장은 성령을 의지하고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나아갈 때에 가능한 겁니다. 그 속도가 25마일이든, 그 속도가 35마일이든, 그 속도가 65마일이든, 그 속도가 600마일이든 상관없이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나아가면 반드시 형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의 속도를 굳이 우리가 정한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가능한 내 실력보다 높이 정하면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출세하고 돈 벌고 유명해지는 것은 언제나 높이 정합니다. 자신의 실력은 65마일 밖에 되지 않는데 600마일로 잡아요. 그런데 신앙생활에서는 언제나 낮게 정한다는 겁니다. 65마일의 속력으로 가는데도 그것이 힘들다고 45마일, 35마일로 낮춰서 잡는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고는 신앙의 성장을 기대한다는 거예요. 옳지 못한 일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의 속도를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나아가면 더욱 좋지만 그렇지 못할 때에는 내 실력보다도 더 높은 곳으로 잡고 하나님께 전진해 나아가면 여러분의 신앙은 여러분의 실력보다도 더욱 성장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한국에서 있으면서 참으로 힘들고 피곤한 일정이었습니다. 그 동안 여러 번 부흥회를 인도하였지만 이번처럼 힘든 일정은 처음이었습니다. 잠을 잔 시간보다 설교한 시간이 더 많을 정도였습니다. 하루에 다섯 시간 이상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갈 때나 올 때나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 잠을 잘 시간이 없었습니다. 출발하기 전에는 교회 사역과 연합회 사역으로..., 여기에 올 때에는 주일 설교 준비로..., 너무나 분주했습니다.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다음날부터 부흥회를 인도했습니다. 시차를 생각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삼일간의 집회를 인도하고 마지막 날이 되었는데, 임원들로부터 임원세미나를 했으면 좋겠다는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토요일 밤인데도 하자는 거예요. 그래 모든 집회를 마치고 주일새벽 12시 15분까지 임원들을 대상으로 세미나를 했습니다. 집회를 마치고 인천으로 이동했습니다. 도착해보니 새벽 2시 30분이었습니다. 그 교회에서 주일 낮 예배 설교와 오후 예배 설교를 하고 덕적도로 이동을 해서 주일저녁부터 부흥회를 했습니다.
4일 동안의 부흥회를 마치고 오려고 하는데, 파도가 일어서 배가 들어오지를 않는 겁니다. 하는 수 없이 하루를 더 묵기로 했습니다. 그날이 마침 수요일이어서 꼼짝없이 부흥회를 하루 더 연장했습니다. 일정에 없던 겁니다. 갑자기 결정된 것이기 때문에 말씀을 준비해야만 했습니다. 열 번의 집회를 했습니다. 아주 은혜로운 시간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지만 저는 전문 부흥사가 아닙니다. 부흥회 설교를 잘하지도 못합니다. 제가 이민 목회하는 것을 친구 목사들이 보고선 이민목회가 힘들다는 이야기를 들었나봐요. 저는 힘들지 않은데 말입니다. 그 친구들이 저를 불쌍히 여겨서 불러 준겁니다. 교제도 하고 쉬었다가 가라는 차원에서 부른 겁니다. 그런데 쉴 틈이 없었어요. 여기에서보다도 몇 배 더 빡빡한 일정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감기 하나 걸리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멀쩡하지 않습니까? 피곤해서 목이 좀 쉬었을 뿐이지요. 그야말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 것 같습니다.
어제도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 예전에 우리 교회에 다니던 분의 옆자리에 앉게 됐어요. 함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오늘 설교도 비행기 안에서 준비했습니다. 그런 연유로 해서 오늘 설교는 어느 때보다도(?) 은혜가 있을 겁니다. 1만 미터 상공에서... 하나님과 가까운 곳에서 설교 준비를 했거든요. 하여튼 이번 집회는 너무나 은혜롭고 성령 충만했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 아세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이번 집회는 저의 실력이 아니었습니다. 아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저는 부흥회에 초청을 받으면 원고 없이는 설교를 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주일에도 원고를 작성합니다. "하였습니다." 하고 점을 찍어야 마음이 편안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까지 작성해야 마음이 편안합니다. 그 원고 가지고 와서 없는 것처럼, 안 보는 것처럼 설교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번 부흥회는 '.'(점)을 못 찍었어요. 여기의 일이 너무나 바빠서 생각처럼 많은 준비를 하지 못했습니다. 지난 9월부터 제자훈련, 성탄연합예배, 수련회, 신년기도회, 신년부흥회 등으로 쉴 틈이 없었습니다. 그래 이번에는 아예 노트북에 자료를 넣어서 갔어요. 노트북을 가지고 간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 노트북을 가지고 가서 시간 시간마다 기도하고 준비하고 프린트 아웃 해 가지고 말씀을 증거 했습니다. 어느 때보다도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 부흥회를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기도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이 너무너무 역사하셨습니다. 성령의 강력한 역사를 체험했습니다. 말씀을 듣는 성도들도 은혜가 되었지만 말씀을 전하는 저에게도 더욱 은혜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일이 많으면 피곤해 합니다. 지칩니다. 때로는 기력이 상하고 젊은이라고 해도 피곤해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능력있게 살아갈 수가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지치지 않고 힘 얻어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을까요? 오늘 성경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직 주님을 소망하는 사람은 새 힘을 얻으리니"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힘과 능력은 다른 곳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소망할 때에, 하나님을 앙망할 때에, 하나님을 의지할 때에 얻게 되는 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철저하게 의지하고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으면 말씀을 증거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준비한 것이라고 해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하는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을 굳게 믿고 의지하고 나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매 시간 시간마다 놀랍게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집회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들은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능력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겁니다. 성도는 세상의 것으로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것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으로 세상의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힘과 능력을 공급받아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누구나 할 것 없이 하나님을 앙망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을 옷 입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모하고 하나님을 앙망하면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능력을 주셔서 승리하게 하시는 분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은 새 힘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뛰어도 지치지 않는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걸어가도 피곤하지 않는다고 약속하셨습니다. 2008년 금년 한해 동안 여러분은 어떠한 자세를 가지고 살아가시렵니까? 어떠한 힘을 가지고 살아가시렵니까? 어떠한 신앙생활의 규정속도를 가지고 살아가시렵니까? 하나님을 의지하시고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25마일로 이끄시면 25마일로 가시고, 65마일로 이끄시면 65마일의 속도로 가시고, 600마일로 이끄시면 600마일의 속도로 가 시면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 큰 꿈을 가지고 계시지요? 혹 600마일의 속도로 가는 것과 같은 비전을 갖고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저와 여러분의 힘으로는 600마일이 아니라 65마일의 속도로도 갈 수가 없습니다. 죄송하지만 저와 여러분은 그렇게 능력있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하나님이 이끄시는 신앙생활의 규정속도 대로 나아가시면 65마일의 속도라고 해도 나중에는 600마일의 속도로 달리게 되는 믿음의 사람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신앙생활의 규정속도를 만드시고 이끄시는 의도를 깨달으셔서 하나님이 주시는 힘과 능력으로 세상을 승리하며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신앙생활의 규정속도를 만드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이끄시는 것을 믿습니다. 저희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옷 입고 나아가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힘을 소망합니다. 주님, 저희들을 붙잡아주시고 이끌어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속도대로 이끌어주셔서 결국은 승리하는 모든 교우들이 되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홍도 목사 : 여호와를 앙망하라.
오늘은 "여호와를 앙망하라"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그럼 먼저 이 제목을 생각하기 전에 첫째로 앙망하라(waitupon)는 뜻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앙망하라고 하는 뜻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기다린다, 혹은 바라본다, 사모한다, 의지한다 하는 그런 뜻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한 가지 뜻만 선택한다면 사모한다 또는 갈망한다 하는 말을 들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드리려고 하는 말씀은 "하나님을 사모하라, 혹은 갈망하라"하는 뜻인 것입니다. 그럼 왜 하나님을 사모하라고 이렇게 간곡히 말씀하셨겠습니까? 여러분, 예를 들어서 우리가 돈이나 애인을 사모한다고 하면 그것은 왜 사모하게 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사랑하기 때문이요,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귀중히 여기기 때문이요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믿기 때문에 그 돈이나 그 애인을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① 하나님을 사모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뜻이요 귀중히 여긴다는 뜻이요 의지한다는 뜻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사모하는 것은 마땅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몹시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기뻐하고 귀중히 여기고 의지하고 믿어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 성도들로 하여금 세상의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앙망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참으로 예수님을 믿고 사랑한다면 그 마음 속 깊이 하나님을 사모하고 갈망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정상적인 신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남편이 먼 나라에 갔는데 집에 있는 부인이 남편을 기다리고 사모하는 마음이 없다면 필시 그 부부 사이는 금이 갔거나 어딘가 잘못된 것이 분명합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을 남편과 아내로 비유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신랑이요 성도들은 그 신부들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된 우리 성도들은 주님을 간절히 사모하고 갈망하는 것이 정상적이요 그 사모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요 그리스도와 정상적인 관계가 맺어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② 갈급히 사모해야 될 이유가 무엇일까요?
부부간에도 기다리고 사모하는 마음이 없다면 금이 가는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 곧, 예수님의 신부들이 하나님을 사모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기뻐하시지 않고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말라기 1장에 보면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를 찾아 보면 야곱은 하나님과 그 은혜를 간절히 사모한 사람이었고 에서는 그 사모하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도리어 형만 못하고 도덕적으로 보면 아주 약삭 빠르고 간사하고 아버지와 형을 속일 때도 있었지만 하나님과 그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고 갈망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형의 장자권도 빼앗고 양의 가죽을 뒤집어 쓰고 아버지한테 축복기도도 받고 환도뼈가 부러지기까지 하나님에게 기도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 앙망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에서는 퍽 대범하고 너그러워 보이고 남성적이었으나 동생 야곱과 같이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고 의지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재산 상속권이요 가정의 표요 축복의 열쇠가 되는 장자권마저도 팥죽 한 그릇에 팔아 버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야곱을 사랑하시고 에서는 미워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인간적으로 도덕적으로 선해 보이고 신사적이라고 해서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은 아닙니다. 야곱과 같이 그런 갈급한 마음이 있을 때에 그 사람을 기뻐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야고보서 4장 4절에 보면 "간음하는 여인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간음하는 여자들이라고 하는 것은 육체적인 간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도들인 그리스도의 신부들이 주님을 사랑하지 아니하고 세상과 벗이 되면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16절에 보면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뜨거운 사랑을 가지고 갈급히 사모하는 마음을 가진 자를 기뻐하십니다.
사무엘상 2장 30절 하반절에 보면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존중히 여기십니다.
시편 42편 1절에 보면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목마른 사슴이 뜨거운 여름에 목이 말라 시냇물을 먹고 싶어서 찾는 것처럼 그런 사람이 생명수를 마시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생수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갈급히 사모하는 마음이 없는 자는 만날 수가 없습니다.
예레미야 2장 13절에 보면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저축치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으로 우리에게 만족을 주시고 축복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신데, 하나님 안에서 살아야 할 백성임에도 하나님을 떠나서 터진 웅덩이를 파는 분은 없습니까?
요한복음 7장 37절에 보면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목마른 마음이 있고 갈급한 마음이 있어야 하나님이 주시는 생수를 마실 수 있는 것이지 그런 목마름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주님이 주시는 성령의 생수를 마실 수가 없습니다.
팔복중에도 첫째가는 복은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했습니다. 심령의 배고픔과 갈급함을 느끼는 것이 무엇보다도 첫째가는 복인 것입니다.
수가성의 여인은 남편을 다섯번이나 갈아 살았지만 만족이 없고 컬컬함을 느꼈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서 생수를 마셨던 것입니다. 세리장 삭개오는 돈은 많았지만 그 심령이 답답하고 갈급함이 있었으므로 뽕나무 위에까지 올라가서 예수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여러분, 사모하는 마음을 주시는 것도 은혜입니다. 기도하고 싶은 마음, 혹은 철야기도하고 싶은 마음, 금식기도 하고 싶은 마음, 이것이 다 은혜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예수는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포도나무 가지는 포도나무에서 1미리만 떨어져 있어도 열매를 맺지 못하고 꽃도 피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모하여 항상 주님께 연결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③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모하게 하는 방법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아니하고 의지하고 않고 멀리 떠나는 것을 끌어 당겨서 억지로라도 당신을 앙망케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 우리에게 무능함과 부족함을 깨닫게 하십니다.
우리에게 무능함과 약함을 깨닫게 해주셔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서는 살 수 없다고 하는 마음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고 사모하게 하십니다.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다른 사람의 병은 손만 얹어도 낫고, 손수건만 대어도 죽은 자가 살아나기도 했는데 자기 몸속에 있는 병은 낫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세 번이나 기도했을 때 응답이 오기를 '나의 약함으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해 주신다'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12장 10절에 보면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난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가장 부족하고 약하고 무능하다는 것을 깨달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은 제일 강하게 임하는 것입니다.
둘째, 환난과 고통을 통하여 사모하게 합니다.
우리가 편안할 때는 하나님을 찾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 힘으로 견딜 수 없는 시련과 고통과 환난을 당하게 되면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게 됩니다. 출애굽기에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땅에서 종 노릇하면서도 하나님을 찾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악한 왕을 만나서 핍박을 받고 사내아이가 모두 죽임을 당하고 벽돌을 굽게 하고 매를 맞게 되니까 그제서야 그 곤욕으로 하나님을 찾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2장 23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 하나님이 그 고통소리를 들으시고…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고 했습니다.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게 한 다음에 그 기도가 상달해서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환난과 고통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께 부르짖고 하나님을 앙망하라고 하는 신호인 것을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셋째, 낭패와 실망을 통하여 하나님을 앙망하고 사모하게 합니다.
사람이 실망을 당합니다. 사업에 실패를 합니다. 사랑에 실패를 합니다. 세상의 모든 믿었던 것이 무너지게 될 때 어쩔 수 없이 손들고 하나님께 돌아오고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게 됩니다.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고 사모하고 귀중히 여겼던 것을 하나 하나 그 기둥들을 뽑아 버린 뒤에 실망과 낭패를 당하게 하시고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게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기도의 응답마저 없어 보이고 하나님마저 나를 버렸다고 느낄 정도로 완전히 절망을 느끼게 합니다. 그러나 그럴 때일수록 하나님은 가장 가까이 내 곁에 계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절망은 하나님의 기회입니다. 인간의 끝은 하나님의 새로운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시편 118편 8절에 보면 "여호와께 피함이 사람을 신뢰함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함이 방백들을 신뢰함보다 낫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 8절에 보면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 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하였습니다.
낭패와 실망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을 앙망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하는 하나님의 뜻인 것을 깨달 아야 되겠습니다. 자신에 대해서는 절망을 느끼는 사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내 지혜나 재산이나 사업의 아무 것도 믿을 것이 없다는 것을 의식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지하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는 나와 가장 가까이 계시는 것입니다.
④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에게 주시는 복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첫째, 새 힘을 주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없어지고 곤비하고 피곤하여 넘어져도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에게는 독수리처럼 올라가는 새 힘을 주십니다. 마릴린·몬로같은 돈많은 세계적인 여배우가 왜 자살을 했습니까? 헤밍웨이같은 유명한 사람은 왜 자살을 했습니까? 세상 것은 사모하고 사랑하면 할수록 나중에는 더 큰 낭패와 실망을 가져오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모하고 주님을 사모하는 자는 점점 더 새 힘을 얻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을 만나는 축복을 받습니다.
예레미야 29장 12절에 보면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하나님을 만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야곱은 형 에서가 4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쫓아온다고 할 때 아무리 해도 해결이 안 되었는데, 환도뼈가 부러지도록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여 하나님의 얼굴을 뵙고나니까 형과 사랑으로 만나는 문제해결을 보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만나면 모든 문제가 해걸되는 것입니다.
셋째, 구원을 얻습니다.
이사야 45장 22절을 보면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모해서 나오는 자를 절대로 내어 쫓지 아니 하십니다.
넷째,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해 주십니다.
시편 25편 3절에 보면 "주를 바라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하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수치를 당하는 것처럼 큰 징계가 없습니다. 앙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 때에 수치를 당하지 않도록 해 주신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모릅니다.
다섯째, 회복시켜 주십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건강을 잃어버리고 물질을 잃어버리고 수치를 당하고 낭패를 당했을지라도 하나님을 앙망하고 돌아오게 되면 하나님은 회복시켜 주십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를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시고 하나님을 만나게 해 주시고 구원해 주시고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해 주시고 회복시켜 주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앙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십시요. 항상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