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천 년 전, 이 땅의 조상 ‘신석기인’들과의 대화
발간일 2021.08.25 (수) 14:04
⑪ 내가·하점·양사면
한반도 역사의 축소판. 강화도는 선사 시대 이래 우리나라 역사의 아이콘을 모두 품은 ‘보물섬’입니다. 고인돌, 고려궁지, 외규장각, 광성보, 천주교성지에 이르기까지 강화도엔 지금 반만년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뚜껑 없는 박물관, 역사의 보고. 강화도를 얘기할 때면 언제나처럼 거창한 수식어가 붙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죠. 봄맞이 개편과 함께 i-View가 새 연재를 시작하는 ‘길 위의 강화도’는 5000년 강화도의 역사와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에피소드(episode) 중심으로 전개해 나갈 강화도의 신비로운 유적과 유물의 속삭임에 귀 기울여보시기 바랍니다. |
너른 평야 위, 거대한 돌 하나가 초가을 푸른 하늘을 이고 있다. 두 개의 받침돌과 그 위에 얹혀진 돌은 ‘ㅠ’자형 모양을 하고 있다. 덮개돌의 무게만 53t. 2개의 받침돌까지 합하면 75t이나 되는 저 거석들을, 3000년 전 사람들은 어떻게 이런 무덤을 만든 것일까.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 317번지 ‘강화지석묘’는 우리 조상들의 뛰어난 건축술을 보여주는 유적이다. 선사시대 사람들의 협동심과 정신세계를 반영한 유물이기도 하다.
▲ 강화지석묘는 고인돌공원 한 가운데 자리 잡은 대표적인 고인돌이다. 덮개돌의 무게만 53t이며 2개의 받침돌을 합하면 75t에 이른다. 길이 6.4m, 폭 5.2m, 두께 1.1m의 거석으로 높이는 2.5m이다. 강화지석묘를 찾은 사람들이 고인돌 앞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다.
‘고인돌’은 계급분화가 시작된 청동기시대 부족을 다스리는 지배층의 무덤으로, 당시 권력의 크기는 돌의 크기와 비례했다. 강화지석묘는 따라서 상당한 권력을 가진 지도자의 무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고인돌을 만드는 과정은 이렇다. 족장과 같은 부족의 우두머리가 사망하면 부족장이 모여 회의를 개최한다. 여기서 고인돌을 축조할 일시와 장소, 위치, 방법, 장례절차를 결정하고 하늘에 제를 올린다. 이어 장소와 무덤에 쓸 돌을 찾다가 쓸 만 한 바위를 발견하면 돌 틈에 작은 구멍을 내고 나무쐐기를 박은 뒤 나무에 물을 계속 주어 바위를 분리시킨다. 떨어진 바위는 동아줄로 묶고 지렛대를 이용해 무덤의 위치까지 이동하는데 돌을 통나무에 얹은 뒤 여러 사람이 밀면서 무덤까지 이동시켰다.
거석이 무덤위치에 도착하면 운구한 시신을 매장한 뒤 고인돌을 축조하기 시작한다. 땅을 파서 굄돌의 아랫부분을 묻고 그 위로 둥글게 흙을 쌓은 뒤 흙 표면을 따라 덮개돌을 끌어올려 굄돌위에 얹은 뒤 흙을 제거하면 ㅠ자형 강화지석묘와 같은 모양의 고인돌이 완성된다.
▲ 강화지석묘는 축조 때 1000명 정도가 동원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이다.
무덤 한 기를 만들 때 적게는 수백 명, 많게는 수천 명의 인원이 동원됐다.
고인돌은 선사시대 제사장의 무덤, 권력의 클수록 돌의 크기도 커
강화읍, 송해면, 하점면, 양사면, 내가면 등 강화도 고려산 일대에선 1980년대 말~1990년대 초 100여기의 고인돌이 발견됐다. 이후 지속적으로 나타나 지금까지 무려 157기의 고인돌을 찾아냈다. 이 과정에서 화살촉, 반달돌칼, 팽이형토기편도 출토됐다.
강화지석묘를 비롯해 삼거리, 오상리, 대산리, 부근리, 고천리, 교산리, 부근리 점골 등지엔 여러 형태의 고인돌이 분포돼 있다. 탁자식 고인돌은 중국대륙 동북부에서 기원한 것으로 한반도의 서북부를 경유해 중서부의 강화도로 내려온 것으로 추정된다. 강화고인돌은 남한과 북한 고인돌의 맥을 잇는 중요한 매개체다. 강화지석묘와 같이 탁자식 고인돌이 가장 많으며, 바둑판식 고인돌, 개석식 고인돌도 있다. 고인돌의 재료는 흑운모편마암과 화강편마암이 대부분이다.
▲ 부근리 고인돌군은 고려산 북쪽 봉우리인 시루메봉 끝자락을 중심으로 반경 600m 이내에 위치한다. 사진은 117호.
고인돌은 우리나라 초기 국가 형성의 비밀을 파헤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다. 한 지역에 150여기의 고인돌이 몰려 있는 곳은 세계적으로도 그 유래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는 강화도가 선사시대 우리나라의 중심지역 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우리나라 시조인 단군왕검이 쌓은 참성단이 마니산에 있는 것으로 미뤄 이 같은 추정은 더욱 설득력을 얻는다. 단군은 한반도에 사는 종족을 이끄는 최고 지위의 제사장이었으며 그를 중심으로 강화도에 많은 부족이 살고 있었다는 추정이 가능한 것이다. 강화도는 한강 임진강 예성강 등 3대 하천이 모이는 요지였다.
고인돌은 자연석이나 가공한 돌을 숭배의 대상이나 무덤으로 이용한 거석문화(巨石文化)의 흔적이기도 하다. 선돌(立石), 열석(列石), 환상열석(環狀列石), 석상(石像), 돌널무덤(石棺墓)과 함께 큰 돌을 이용해 축조한 선사기념물 문화를 가리킨다. 고인돌은 아시아는 물론 유럽, 아프리카에 널리 분포해 있는데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건 우리나라 고인돌이 유일하다.
▲ 부근리 고인돌군의 고인돌.
고대국가 비밀 풀 수 있는 열쇠, 강화도 고인돌 등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고인돌에 대해 자세히 공부하고 싶다면 공원 옆 강화역사박물관과 강화자연사박물관을 찾으면 된다. 강화역사박물관에선 강화의 선사시대와 고인돌출토유물에서부터 근현대까지 강화도의 출토유물과 역사, 문화유산을 전시, 보존하고 있다.
▲ 강화자연사박물관은 인류의 진화, 생물의 이동, 강화갯벌 등 9가지 주제별 전시실을 갖추고 있다. 세계 각국에서 수집한 희귀광물, 화석, 동식물, 곤충 등 1000여 점의 실물 표본을 볼 수 있다.
▲ 강화역사박물관에선 강화의 선사시대와 고인돌출토유물에서부터 근현대까지 강화도의 출토유물과 역사, 문화유산을 전시, 보존하고 있다.
얼마 전엔 조미전쟁(신미양요, 1871년) 때 조선군이 들고 싸운 어재연 장군 수자기를 전시하기도 했다. 강화자연사박물관은 인류의 진화, 생물의 이동, 강화갯벌 등 9가지 주제별 전시실을 갖추고 있다. 세계 각국에서 수집한 희귀광물, 화석, 동식물, 곤충 등 1000여 점의 실물 표본을 볼 수 있다.
글·사진 김진국 본지 총괄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