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궁극이
47편 4절-9절: 우리를 위하여 기업을 택하시나니 곧 사랑하신 야곱의 영화로다(셀라) 하나님이 즐거이 부르는 중에 올라가심이여 여호와께서 나팔소리 중에 올라 가시도다 찬양하라 하나님을 찬양하라 찬양하라 우리 왕을 찬양하라 하나님은 온 땅에 왕이심이라 지혜의 시로 찬양할찌어다 하나님이 열방을 치리하시며 하나님이 그 거룩한 보좌에 앉으셨도다 열방의 방백들이 모임이여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다 세상의 모든 방패는 여호와의 것임이여 저는 지존하시도다.
4절: ‘우리를 위하여 기업을 택하시나니 곧 사랑하신 야곱의 영화로다(셀라).’ 야곱의 영화가 무엇이냐?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주기로 약속하시고 광야교회 생활을 하는 동안에 신앙실력이 된 것만큼 그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했다. 이것은 영적 이스라엘도 광야 같은 이 세상에서 영능의 실력을 닦은 대로 신령천국을 영광중에 누리게 된다는 것을 말해주는 거다. 그러니까 본문의 말씀이 단순히 천국에 들어가서 행복하게 산다는 것만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는 다 천국을 주기는 주는데 그 천국을 누리는 면에서 이 땅에 사는 동안에 하나님을 향해서 부지런하고 실력이 있고 충실한 자에게 천국을 더 많이 누리게 해 주신다는 거다.
‘우리를 위하여 기업을 택하시나니.’ ‘기업’이라고 하는 말은 단순히 천국에 들어가는 것만을 말함이 아니라 이 단어에 들어있는 내용이 영능의 실력으로 다스리고 통치하고 키워나가는 것이 담겨있다. 세상에서 부모가 자식에게 기업을 물려주려면 멍청한 자식이 아니라 똑똑하고 능력이 있는 자식에게 물려주듯이 이룰구원 차원에서 영능의 실력만큼 천국을 다스리고 누리는 것까지 포함이 된 말이다.
기독교 일반적으로 예수 믿어서 천국에 가는 것은 예수를 믿는 사람 모두에게 해당이 되는 기본적인 구원의 개념이다. 그런데 ‘우리를 위하여 기업을 택하시나니’ 라고 했으니까 택한다는 것은 일반이 아니라 ‘보다 차원 높은, 고르고 고른’이라는 의미가 들어있는 거다. 즉 예수 믿는 사람이 이 땅에 사는 동안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열심을 내고 부지런하고 순종하면서 영능의 실력을 닦은 자에게 천국의 영광스러운 보상이 들어간다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 믿고 그냥 열심히 교회에 다닌다는 의미에서 더 들어가서 지혜롭게 깨닫고, 사람이 바꿔지고, 영능의 실력을 쌓고 하는 것까지 포함이 되는 거다.
5절: ‘하나님이 즐거이 부르는 중에 올라가심이여, 여호와께서 나팔소리 중에 올라가시도다.’ 우리 인간은 어떤 분에게 은혜를 받으면 그 분을 높이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 ‘즐거이 부른다’ 함은 영적 감화 감동을 받고 이것이 마음 속에서 감격이 되어서 기뻐서 우러나오는 큰 환호성이다.
‘하나님이 즐거이 부르실 때 올라가신다’ 함은 성령의 감화 감동에서 온 힘을 다해 큰 환호성을 할 때 올라간다는 말이다. 즉 성도가 이런 신앙정신 사상으로 살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말이다. 테레비에 유명한 가수나 배우가 나오면 막 환호성을 친다. 그러면 그 쪽에서는 영광스럽다고 하는데, 이렇게 환호성하는 것은 ‘당신이 최고요’ 라고 하면서 받들어 올려주는 행동이다.
이 말이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높여야 만이 하나님이 올라가고, 우리가 내리면 내려온다는 말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어떤 자들로 통해서 올라가심이라야 기뻐하시겠느냐?’ 그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이 당신을 높여야 기뻐하시겠느냐? 영광을 받으시겠느냐? 영능의 큰 외침이라야, 성령의 감화 감동이라야 하나님은 영광스럽게 높이 오르신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당신만 올라가는 것으로 만족해하시느냐? 기독교 신앙은 ‘네가 날 이렇게 높이느냐? 그래, 나만 올라갈 수 있느냐? 너도 같이 올라가자’ 이렇게 되는 거다.
우리가 하나님을 높이 올리고자 할 때 땅에 속한 요소를 가지고는 하나님이 높이 오르시지 않는다. 즉 땅의 요소를 가지고는 하나님께 영광이 안 된다는 말이다. 우리가 땅의 것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표하는 것은 은혜를 받은 것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지 인간이 물질적인 것을 드린다고 해서 하나님이 올라가는 게 아니다. 그런데 교인들이 자기가 물질적인 것으로 뭘 어떻게 함으로써 하나님이 올라가는 것으로 자꾸 생각을 한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은 것에 감사를 하면 하나님께서는 또 다른 은혜를 주신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내 것을 받았으니까 그 보답으로 다른 은혜를 더 주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것을 다 준비를 하셨으니 우리는 이것으로 먹고 마시고 쓰면서 사건 환경에서 구원을 이루며 신앙 믿음을 키워나갈 수 있는 지혜를 주신다는 말이다.
‘여호와께서 나팔소리 중에 올라가시도다.’ 여호와께서 무슨 소리 중에 올라가신다? 나팔소리 중에. 나팔소리는 사람의 음성보다 더 크다. 우리가 그 분으로부터 은혜를 받은 것이 한 두 가지냐? 자기가 예수 믿고 존재되어 있는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니 다른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는 거다. 자기가 이런 은혜를 받고 있다면 다른 모든 것은 다 감사가 되는 거다.
우리의 기본구원의 은혜가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들어있었고, 성화구원의 은혜가 지금도 계속 되고 있고, 영적으로 탁월한 자가 되어서 영광중에 영화를 누릴 신령세계를 기업으로 받을 것이니 우리가 마지막 그 날에 주님이 오실 때 외칠 환호성은 물론이거니와 그 날에 일어날 그 감격성을 현재적으로 가지고 와서 그것이 기쁘고 즐거워서 지금 현재도 몸과 목숨과 힘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그 분을 높이 올리는 거다. 우리의 신앙은 가만히 있다가 그 날에 가서 ‘와’ 그게 아니라 현재적으로도 연속이다. 이런 은혜를 받은 우리가 누구를 올리는 환호성을 지르겠느냐? 주님이다. 그런데 세상 속화된 교인들은 세상과 세상 것을 환호하고 높이 올리고 있더라.
6절: ‘찬양하라. 하나님을 찬양하라. 찬양하라. 우리 왕을 찬양하라.’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할 만한 것이 하나님께 있느냐?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왕이라고 할 만한 자격이 하나님에게 있느냐? 우리에게 있어서 그 분이 우리의 왕이 될 만한 그 분의 흔적이 우리 몸에 있느냐? 우리의 왕이 될 만한 그 분의 흔적이 나에게 있어야 찬양이 나오는 거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 되심이 증거 된 일이 많다.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아니시면 못하는 것이 많다. 각기 각종 인류와 동식물, 우주의 법칙과 보존, 사건의 진행성, 세상 끝과 새로운 세계가 도래하는 것 등 무에서 유로 창조하신 이런 것은 하나님이라야만 하시는 거다. 그러니까 세상적으로만 봤을 때도 하나님은 충분히 우리의 왕이 될 만하다. 또한 죄와 사망을 이기고 우리를 죄에서 풀어서 해방시키고 당신의 백성이 되게 한 것, 우리를 진리로 통치하여 하나님을 닮게 하는 것 등등 하나님이 우리의 왕이 될 만한 것들이 많다.
하나님으로부터 큰 은혜를 받고 이것을 아는 자가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힘 있게 나오는 거다. 은혜를 받고도 모르면 힘 있는 찬양이 되지 않고, 은혜를 받지 못하면 찬양이 안 되는 거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큰 은혜를 받은 것이 얼마나 많은지 일일이 다 말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감사합니다’ 라고 할 것 밖에 없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감사합니다’ 라고 하는 것이 이것도 저것도 받은 것이 없이 그냥 의례히 하는 말이 아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우리로부터 ‘감사합니다’ 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일을 충분히 해 놨기 때문에 우리는 이에 감사 감격해서 ‘감사합니다’ 라고 하는 건데, 이 감사가 ‘하나님이니까 응당 하실 수 있으니까 해 주신 거지’ 이게 아니라 그렇게 해 주심이 우리의 영원한 행복과 직접 관계가 되기 때문에 감사를 드리는 거다. 같은 감사라도 각 사람이 느끼는 느낌에 따라 감사의 마음이 다른 거다.
자기가 죄를 지었을 때 ‘내가 몰라서 그랬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이러는 사람이 있고, ‘앞으로 내가 많이 깨달아서 하나님 앞에 바로 살겠습니다’ 하는 사람이 있을 때 두 사람의 마음이 같으냐? 오다가다 남의 발을 밟았을 때 ‘아이고, 죄송합니다. 내가 못 봤습니다’ 라고 하면 그 마음이 얼마나 흐뭇하냐? 많은 사람 속에서 발이 밟히고 부딪히는 것은 의례히 있는 일인데 자기 발이 밟혔다고 해서 ‘너는 눈이 없느냐?’ 라고 하며 화부터 낸다면 서로가 마음이 좋을 게 뭐가 있겠느냐? 부딪히거나 밟히는 게 그렇게 싫다면 많은 사람이 있는 곳에 나오지를 말고 집에 가만히 있으면 될 게 아니냐?
7절: ‘하나님은 온 땅에 왕이심이라. 지혜의 시로 찬양할찌어다.’ 하나님이 왜 온 땅의 왕이시라고 하는 거냐? 첫째는 하나님은 신령계와 물질계의 왕이시다. 모든 존재는 그 분으로부터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그 분이 만드신 법칙 하에 섭리 진행이 되고, 번성이 되어나가고 있다. 이 외에도 진리성도를 위해서 이적과 기사를 동원해서라도 무엇이든지 하고자 하시는 대로 다 하신다. 둘째는 어느 지역에 살던 영적 이스라엘은 다 하나님의 진리통치 생명통치를 받는다. 세 번째는 ‘너는 어느 지역, 어느 환경, 어느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의사성을 받들고 있느냐?’ 하는 물음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왕이 아닌 썩어질 세상을 자기 왕으로 삼은 자가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지혜의 시로 찬양할지어다.’ 여기의 지혜는 진리지식에서 나온 거다. 인간창조의 원인 동기 목적과, 우리의 영원 궁극적 최종적 목적적 결과적인 구원을 놓고 찬양하라 함이다. 이 면을 알고 찬양하는 것이 지혜의 시다. 그러니까 여기서의 지혜라 함은 미래의 영원 궁극적인 세계에 적응이 되는 걸 말한다. 그 결과를 알고 현실에서 그 나라를 위해 살아가는 게 지혜다. 미래 없는 지혜가 어디 있느냐? 진리지식과 감화성으로 늘 젖어있는 성도는 지혜의 시로 늘 찬양이 되고 있는 거다. 그런데 세상 속화된 기독자는 세상의 사랑을 받아서 누려보겠다고 아양을 떠는 노래를 한다. 이런 노래는 세상이 불탈 때 슬픔으로 바뀌는 노래요 시들이다.
오늘날 하나님을 찬양을 하면서 마음이 하나님께 향하지 않고 그냥 그 노래에 도취가 되어서 부르는 찬양이 많다. 깨달아진 게 없이 찬양만 한다면 오는 고통 오는 사건을 어떻게 이겨내겠느냐? 세상 어느 부모가 맨날 징징 짜고 우는 자식을 좋아하겠느냐? 깨달아진 것도 없이 입으로만 찬양을 하면 자기의 속은 시원하겠지만 사람은 안 만들어진다. 그러니 이건 은혜가 아니라 자기 감정일 뿐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의 마음이 시원한 것을 어디서 찾으려고 하는가 하니 이성적 감성에서 찾으려고 한다. 이거 못쓴다. 마귀가 이런 짓을 하는 거다. 이게 다 자기를 잘 봐 달라고 주님께 아양 떠는 거다.
8절: ‘하나님이 열방을 치리하시며 하나님이 그 거룩한 보좌에 앉으셨도다.’ 하나님의 그 거룩한 보좌는 신령성이 아니면 가까이 하지 못한다. 이 보좌는 구별되고 분별되고 심판하시고 판단하시는 거룩한 보좌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거룩한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게 하기 위해서 지금도 교훈적으로 판단하고 분별케 하여 영적이며 거룩하고 신령적인 것을 취하도록 하신다.
교회의 인도자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보좌에 가까이 갈 수 있도록, 거룩성의 사람으로 되어 들어가도록 인도를 해야 한다. 그리고 성도들은 하나님의 거룩이 아닌 세상 육적 이질성은 다 버려야 한다. 믿는 우리가 이걸 신앙목적으로 가질 수 없는 거다. 세상 육적인 모든 것은 우리의 구원에 이용 활용 사용물이지 목적으로 되면 안 된다. 거룩하신 그 분 앞에서는 세상성과 이질성과 산 것과 죽은 것이 다 분별이 된다. 따라서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가지고 미리 미리 분별을 해야 하고, 이질적 신앙은 버리고 본질을 가져야 한다.
9절: ‘열방의 방백들이 모임이여,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다. 세상의 모든 방패는 여호와의 것임이여, 저는 지존하시도다.’ 열방의 방백들이 아브라함의 백성이요 또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하는 것은 교훈적인 측면에서 듣고 깨달아서 아브라함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지존하신 신앙 믿음 안으로 들어온다는 말이다.
‘열방의 방백들’이란 표면적으로 볼 때는 세상의 지도자들을 말하는 거지만 영적 이면적으로는 영적 이스라엘을 말한다. 그러니까 영적 이스라엘이 아무 것도 몰랐을 때는 그냥 열방으로 살았지만 진리말씀의 교훈을 듣고 깨달아서 믿음 안으로 들어와서 아브라함의 신앙을 이어받아 따른다는 말이다.
아브라함의 신앙 믿음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서 진리통치를 받는 것이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났다는 것이 고향에서 이사하는 것을 말하는 거냐? 영적인 차원으로 보면 육신의 아버지는 세상에 없을지라도 예수를 믿으면서도 세상이라고 하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마음 속에 그대로 가지고 있는 기독자들이 많다. 이 사람은 육적 이스라엘이다. 고향에서 부모를 모시고 살지라도 세상적인 정신과 사상을 버리고 하나님의 것을 잡고 산다면 이 사람은 영적 이스라엘이다.
‘세상의 모든 방패는 여호와의 것임이여.’ 여호와가 쓰시는 방패는 적의 공격을 막는 일을 하고, 세상 유혹과 미혹을 막는 일을 하고, 비진리 세상 육적 정신 사상을 막는 일을 하고, 악한 영들의 공격을 막는 일을 하고, 죄와 사망적인 것을 막는 일을 한다. 여호와의 방패라야 이런 것을 다 막을 수 있다. 이것이 아니면 못 막는다. 세상에 있는 아무리 유명한 통치자라 할지라도 방금 말한 다섯 가지를 하나라도 이길 수 없다. 그러니까 방패가 없다는 거다. 그러나 믿는 우리는 방패가 있다.
‘여호와의 방패’란 진리지식이고, 그 다음에 그 진리지식을 가진 성도들이다. 영능의 실력을 가진 성도들은 약한 성도들의 이룰구원을 위해 쓰시는 방패이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세상 마지막 주님의 재림 때까지 영적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서 이방세상의 법들을 열방의 방패로 쓰시기도 한다. 만일 세상의 법이 없다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세상 폭도들로 인해서 살아남지 못할 거다. 그래서 세상 일반법으로 성도들이 신앙 믿음을 지킬 수 있도록 악한 자들을 견제한다는 면에서 세상 법이 하나님께서 쓰시는 방패이기도 한다. 우리는 성경을 깨닫고 다각적인 면으로 이룰구원에 합당하게 생각을 해야 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