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7.연중 제3주간 목요일 2사무7,18-19.24-29 마르4,21-28
선택의 은총과 훈련
- 정주 예찬 -
오늘 복음은 등불의 비유로 하느님의 나라 비유 넷 중 하나입니다. 나머지는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입니다. 등불의 비유가 참 깊고 유익합니다. 참으로 우리 믿는 이들은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
등경위에 놓아 주변을 환히 밝히는 말씀과 하나된 등불같은 존재가 믿는 이들이요 바로 이런 현실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오늘 복음 환호송의 말씀 같은 존재가 참된 정주의 사람입니다.
“주님 말씀은 제 발에 등불, 저의 길을 비추는 빛이옵니다.”
참으로 우리가 정주의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살 때 우리는 주변을 환히 밝히는 하느님 나라의 실현이 됩니다. 정주의 은총에 정주를 선택하여 사는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입니다. 타고난 것도 많지만 하루하루 선택할 일도 무궁무진합니다. 선택의 은총이요 정주의 선택, 빛의 선택은 참 좋은 축복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좌우명 자작시 첫연은 정주의 빛나는 하느님 나라 삶의 묘사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하늘 향한 나무처럼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덥든 춥든,
봄, 여름, 가을, 겨울
늘 하느님 불러 주신 이 자리에서
하느님만 찾고 바라보며
정주의 나무가 되어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살다보니
작은 나무가 이제는 울창한 아름드리
하느님의 나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2009년에 심었던 작은 묘목들이 13년만에 거목들 된 수도원 하늘길 메타세콰이어 가로수들을 바라볼 때 마다 실감하는 내용의 시입니다. 그대로 우리의 내적성장을 상징하는 거목의 나무들입니다. 과연 내적으로, 영적으로 나날이 성장하는 하느님 나라의 나무같은 정주의 삶인지 묻게 됩니다. 어제 읽은 의미심장한 예화를 소개합니다.
“부인 유여사가 정성들여 차린 식탁 앞에는 당시 겨우 초등학교를 다니던 두 자녀도 자리를 같이했다. 그때 장로 이한빈 대사는 ‘일상다반사’인 것처럼 ”오늘은 원식이가 기도하렴.” 하자, 열 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앳된 어린이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물흐르듯 거침없이 기도를 드리는 것이었다.
나는 거기서 살아 있는 ‘초월’의 일상적인 실천을 목격했다. 여느 어린아이 같으면 식탁 위의 맛있는 음식 접시에 먼저 눈이 가고 금세 손이 가는 것이 당연했겠지만, 어린 원식이는 눈을 감고 그날 밤 식탁의 회식이 갖는 뜻을 새기고 그러한 만남과 모임을 마련해 준 은혜를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있었다.
기도드리는 아이는 밥상 위의 어느 한 부분을 보지 않고 밥상이 놓인 방 전체를 그리고 그 의미를 부감하는 것만 같았다. ‘그리스도는 세계를 세계에서 해방시켰다(Christus mundum de mundo liveravit)’고 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은 읽기에 따라 난삽한 말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나에게는 웬지 금방 실감이 가는 말처럼 울리게 된 것은 베른의 이 대사 댁 식탁에서 ‘원식이 현상’을 체험한 이후부터이다.”(인물의 그림자를 그리다;최정호 328-329쪽)
이 책 첫째로 소개된 인물은 가톨릭의 거목이셨던 ‘권력을 초월한 권위’라는 제목의 김수환 추기경에 관한 글입니다. 참 빛나는 정주를 보여 주는 상징적 장면입니다. 참된 정주는 “그리스도는 세계를 세계에서 해방시켰다”는 진리가 실현된 하느님 나라임을 깨닫습니다. 어떻게 오늘 지금 여기에서 빛나는 초월의 정주를 살 수 있을까요.
첫째, 경청입니다. 경청의 정주, 정주의 경청입니다. 정주의 선택에 이어 경청의 선택이요 경청의 훈련입니다. 결국은 경청을 위한 침묵이요, 겸손한 경청의 열매가 지혜와 순종입니다. 참으로 마음의 귀를 기울여 듣는 경청傾聽이요 공경하는 마음으로 듣는 경청敬聽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마음의 귀를 기울여 듣는 경청입니다. 베네딕도 규칙 맨 처음 말마디도 “들어라, 아들아!”입니다. 오늘 등불의 비유 역시 들음을 강조합니다.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거든 들어라. 너희는 새겨 들어라.”
둘째, “숨겨진 것도 드러나게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마련이다.”
참 귀한 잠언성 속담입니다. 이런 믿음이 있어야 참된 정주영성을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정주의 충만이요 행복입니다.
그러니 누가 보아주든 말든, 알아주는 말든, 일희일비하지 않고 한결같이 투명한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 안에서 환히 드러난 정주의 삶을 삽니다. 모두를 알고 모두를 보시는 하느님만으로 행복하고 자유롭고 부요하고 만족한 정주의 삶입니다.
셋째,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여 받을 것이다.”
역시 잠언성 속담입니다. 참으로 참된 정주의 삶을 사는 이들은 즉시 깨닫는 진리입니다. 피동적, 소극적, 정체적 정주가 아닌 그 반대로 수동적, 적극적, 동태적 정중동靜中動의 하느님 나라의 정주입니다.
밖으로는 산같은 정주이지만 안으로는 끊임없이 하느님 향해 흐르는 강같은 정주입니다. 밖으로는 고요한 천국의 정주처럼 보여도 안에서는 영적 전투 치열한 최전방 수도원의 정주입니다. 줄 때 받고 섬길 때 섬김을 받습니다. 나눔과 섬김 역시 영성훈련입니다. 끊임없이 나눔과 섬김 중에 더욱 내적으로 풍요로워지는 정주의 삶입니다. 그리하여 정주의 수도공동체를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 훈련장이라 정의합니다.
넷째,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져 빼앗길 것이다.”
역시 잠언성 속담으로 참된 정주의 삶을 사는 이들이 실감하는 진리입니다. 영적현실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부익부 빈익빈의 진리입니다. 죽는 그날까지 내적으로 욕심을 비워가면서 날로 하느님 은총을 축적해가는 참으로 역설적인 내적 부요의 정주의 삶입니다. 말그대로 텅 빈 충만의 기쁨이, 행복이 참된 정주 의 삶이요 그대로 하느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다섯째, 감사입니다.
정주의 감사입니다. 감사의 축복입니다. 감사 역시 겸손처럼 참된 영성의 빛나는 표지입니다. 눈만 열리면 온통 감사로 가득한 세상일 때 비로소 행복한 정주입니다. 이런 감사 역시 정주생활의 은총입니다. 한결같은 정주의 삶의 빛나는 열매가 감사입니다.
새삼 감사도 훈련임을 깨닫습니다. 자꾸 감사해야 감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 사무엘 하권의 주인공 다윗 임금은 감사의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다윗의 긴 감사기도(2사무7,18-29)가 심금을 울리는 감동입니다.
“주 하느님, 제가 누구이기에, 또 제 집안이 무엇이기에, 저를 여기까지 데려오셨습니까? 이제 주 하느님, 당신은 하느님이시며 당신의 말씀은 참되십니다. 주 하느님, 당신께서 말씀하셨으니, 당신 종의 집안은 영원히 복을 받을 것입니다.”
다윗의 감사기도중 일부만 인용했습니다만, 다윗이하느님 사랑을 왜 그토록 독점적으로 받았는지 알겠습니다. 끊임없이 하느님께 감사했기에 끊임없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았고, 하느님을 사랑할수록 더욱 하느님께 감사하게 됨을 깨닫습니다. 감사의 대가요 달인이 바오로 사도의 말씀입니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5,18).
감사의 눈이 열릴 때, 삶은 온통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제 행복기도중 한연을 소개합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죽음도 선물이겠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느님 나라, 천국이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신 안에서 정주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마음의 귀를, 마음의 눈을 활짝 열어주시어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며 살게 하십니다.
“주님께 나아가면 빛을 받으리라. 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시편34,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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