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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조춘숙
말 씀 전도서 4장 1-6절
제 목 위로자[7]
사람들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갖가지 사건을 통해서 고난을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합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천사와 사탄들 앞에서 욥의 믿음을 자랑하셨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사탄은 하나님께서 욥을 칭찬하시자 그가 믿음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께 복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그것을 빼앗길까 봐 두려워서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이 틀렸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고, 또 욥의 믿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사탄에게 욥의 소유를 빼앗아도 좋다는 허락을 하셨습니다.
욥을 얼마나 믿고 계시면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있는지 부럽기만 합니다.
사탄을 통해 고난을 받더라도 욥이 믿음을 버리지 않고, 진실한 믿음을 지켜줄 것을 믿었기 때문에 사탄의 요구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욥은 세상의 소유를 모두 빼앗겨도 오직 영원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믿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그리고 도엑처럼 세상의 출세를 위해서 사울왕에게 제사장 아히멜렉이 다윗을 돕고 있다고 고자질해서 아히멜렉을 비롯해 제사장 팔십오명을 비참하게 죽게 하므로 하나님께 영원히 버림을 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제사장 아히멜렉은 다윗을 돕다가 고난을 당한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복음을 위해서 세상의 편안한 삶과 권세를 모두 버리고 스스로 십자가를 지는 심정으로 핍박을 받으며 영혼구원을 위해서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애굽으로 내려갔던 이스라엘이 번성하자 그들이 강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바로는 사내아이들을 죽이는 엄청난 고통을 주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사백년 동안 애굽의 노예가 되었고, 해방되는 날까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당했던 것입니다.
세상에는 참으로 여러 가지의 고난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도엑처럼 인간의 욕심을 버리지 못해서 당하는 고난은 자기가 스스로 만든 고난입니다.
기름부음 받은 제사장 팔십오명을 죽였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께 용서를 받을 수 없고, 심판으로 인해 흘리는 눈물을 닦아줄 위로 자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욥과 사도바울과 모든 선지자들이 당하는 고난은 위로자를 통하여 큰 위로를 받을 것이며, 이런 고난은 하늘의 상급과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에 영생이 주어지는 고난입니다.
세상에서 받는 고난은 어떤 이유이든 고통스럽고 아프고 괴로운 것은 사실입니다.
이스라엘백성은 자기들이 노예로 살아가는 것보다 자녀들이 당할 고난의 세월이 끝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은 물론 자녀들까지 노예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우리는 그 슬픔을 짐작할 수도 없습니다.
욥은 재산은 물론 가족과 건강을 잃은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자기를 해산하지만 않았다면 이런 고난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고난을 감당하기 힘들었던 것입니다.
그는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고, 처음부터 태어나지 않았다면 이런 고통은 당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푸념을 늘어놓았습니다.
고난을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녀를 성장시키는 방법으로 고난을 사용하십니다.
뿌리깊은 나무는 나뭇가지를 흔들고 지나가는 바람을 두려워하거나 불평하지 않습니다.
세상 어디에서든 바람은 그저 지나가는 것이며, 바람이 강하고 약할 뿐 세상 어디에서든 바람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고난의 바람이 귀찮다고 불평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난은 그저 지나가는 바람과 같기 때문입니다.
지나가는 바람의 뒷모습을 보면서 불평하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지나가는 고난의 뒷모습을 보면서 불평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바람이 있어야만 나무가 성장하는데 필요한 비가 오는 것처럼, 아무리 하나님의 자녀라 할지라도 고난의 바람이 있어야만 성숙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만나고 있는 고난은 믿음의 자녀로 성장시키기 위해서 주어진 고난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솔로몬은 백성들에게 큰 고통을 준 장본인입니다.
그가 얼마나 잘못 살아왔는지 살펴보기 위해서는 그의 아들 르호보암과 백성들의 대화를 들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 12장 4절에 보면 여로보암이 솔로몬을 피하여 애굽으로 도망을 갔다가 온 이스라엘이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을 왕으로 세운다는 소식을 듣고 세겜으로 올라왔습니다.
여로보암은 르호보암에게 당신의 아버지인 솔로몬이 우리의 멍에를 너무 무겁게 한 것을 알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멍에는 성을 건축하는 것이었는데 솔로몬이 부귀영화를 누릴수록 백성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심한 고통을 받았던 것입니다.
천명이나 되는 아내가 거할 성을 건축해야 했고 솔로몬이 열방들과 교류할수록 백성들은 노역에 강제로 동원되었습니다.
여로보암은 르호보암에게 당신의 아버지는 그렇게 백성들을 힘들게 했지만 당신은 우리가 지고 있는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해 주기만 하면 왕으로 잘 섬기겠다고 하였습니다.
이 정도로 백성들이 고통을 호소하면 르호보암은 당연히 그들의 마음을 살피고 그들의 부탁을 들어주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르호보암은 아버지보다 내가 더 크게 사역을 일으킬 것이므로 너희들의 말은 들어줄 수 없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이런 어리석은 대답이 백성들을 자기의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치고 만 것입니다.
만약 르호보암이 지혜로운 사람이었다면 솔로몬 때문에 지친 백성들에게 위로자가 되어 주었을 것입니다.
그 동안 아버지 때문에 받은 고통이 얼마나 심했으면 나에게 그런 말을 하느냐고 하면서 백성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면, 통일왕국은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며 그는 권세를 가진 왕으로 영원히 남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권력이라는 것은 쉽게 포기할 수도 나눌 수도 없는 욕심을 갖게 합니다.
여로보암은 성을 건축하는데 총 책임자였습니다.
솔로몬의 무리한 외세확장과 무리한 세금과 강제노역에 대한 부역 때문에 백성들의 불만을 대신하여 솔로몬과 대립한 사람이었습니다.
여로보암은 초대 북왕조를 여는 왕이 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분명 여로보암은 백성들의 고통을 알고 있었고 하나님안에서 백성들을 사랑하지 못하는 솔로몬과 르호보암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역시 권력을 잡게 되자 솔로몬과 동일한 길을 걷고 말았습니다.
권세자의 자리에 앉게 되면 욕심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다윗처럼 백성을 다스리기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인생은 끝이 있기 때문에 권력을 가진 사람이든 고난을 당하는 사람이든 하나님께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솔로몬은 하나님께 직접 응답을 받고 많은 축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외세를 확장하기 위해 혼인정책을 사용했습니다.
이로 인해 이교도인 비빈들과 그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이 이스라엘로 가져온 그들의 우상을 숭배하므로 이스라엘이 점점 타락한 것입니다.
솔로몬은 영원할 것 같았던 젊음이 지나가고, 소망도 희망도 사라지고, 젊었을 때 했던 모든 일들이 후회스럽고 헛되다는 것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영이 없는 짐승처럼 더 높아지고,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힘없고 약한 백성들을 학대했던 자신이 너무 한심스러웠습니다.
강제 노역장에서 학대를 받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워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며 도망치는 백성들을 모질게 학대하는 감독자들에게 도리어 너희들이 옳다고 판결했던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난 일이 되고 만 것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았는가 묻는 것은 당신이 어떤 자아를 가졌느냐고 묻는 말과 동일한 것입니다.
하루의 삶을 섬기고 나누며 밝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의 인생 전체가 희고 밝게 빛이 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내 것으로 삼고, 다른 사람들의 아픔을 무시하고 학대하는 하루의 삶을 살았다면 그의 인생은 위로자가 없는 어둠일 것이므로 암울할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후회하는 솔로몬을 보면서 깨닫는 것은 하나님은 솔로몬처럼 젊은 날에 자신의 원욕을 채우기 위해서 잘못된 세월을 보낸 사람에게 반드시 그 세월을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회개는 자신의 인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에 힘겹겠지만 자기의 죄를 회개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는 증거가 되며 구원받은 백성이라는 표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권세 자에게 고통을 당하는 백성들에게 위로자가 없다면 참으로 슬플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세상의 권세 자에게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세상 자체가 바로 고난이고, 인간의 삶을 주장하는 물질 또한 고난을 주는 왕이기 때문에 육신을 가지고 산다는 것 자체가 고난인 것입니다.
이런 험한 세상에서 보호자가 없다면 절대로 살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의 위로 자로, 보호자로 솔로몬을 세우셨지만 그는 백성들의 위로자가 되어 주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지금 험한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을 위로해주고 보호해주는 위로 자는 누구입니까?
요한복음 14장 16절에 보면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뿐만이 아니라 영원토록 함께 계시는 보혜사는 성령님입니다.
그 분은 위로 자, 돕는 자, 진리의 영이십니다.
세상의 권세자가 아무리 큰 고난을 준다고 해도 성도들이 이겨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권세자는 성도에게 위로자가 없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를 자기의 노예로 삼고 학대하며 어둠으로 끌고 가고 있지만 성도에게는 어둠 가운데서 빛이 되어 주시고 위로 자가 되어 주시는 성령님이 계십니다.
성령님은 창세기 1장 1절 이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일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신다고 하셨고 우리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들자고 말씀하신 우리속에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비둘기와 같이 머리에 임하신 분도 성령님이고, 십자가에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실 때 힘껏 도우신 분도 바로 성령입니다.
그 분이 지금 여러분에게 위로자로, 보호자로 거하고 계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 13절에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탄을 아비로 삼고 이 땅에 태어났지만 성령님이 여러분을 진리의 길로 인도하시고 영원한 나라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울타리가 되어 주신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인간이 위로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나를 낳아준 부모도 내 맘 깊은 곳까지 이해하고 위로해 주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령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위로자가 되어 주십니다.
이 험한 세상에서 내 편이 되어 주시는 위로자가 계신다는 것은 정말 큰 축복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성령님이 오실 것과 그 분의 사역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려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나라에 소망을 갖게 하고, 믿음안에서 안식을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먼저 세상과 사망을 이기셨고, 예수그리스도의 역사를 믿는 자녀를 보호하시기 위해서 성령께서 오셨기 때문에 성도들은 세상을 두려워할 것도 피할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언제나 힘이 되어 주시는 위로자가 계신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4절에 사람이 모든 수고와 여러 가지 교묘한 일로 인해서 이웃에게 시기를 받는다는 말씀중에서 교묘한 일이라는 뜻은 성취 혹은 성공을 의미합니다.
솔로몬은 사람이 성공하고 어떤 일을 성취하는 것은 결국 그 누군가를 시기하는 마음과, 경쟁하는 마음과, 성공하고 싶은 욕심에서 나온 것이므로 그 역시 헛되다고 하였습니다.
성공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난 세상의 성공은 하나님께 인정 받지 못하는 것이므로 헛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경험이 있겠지만 강한 승부욕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조건 이겼을 때 기쁨은 잠시이고 허탈감이 더 클 수 있습니다.
그래서 허탈감을 채우기 위해서 더 큰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나라를 강대국으로 만들겠다는 생각만으로 달려왔는데 돌아보니 결국 자기가 이루어 놓은 일들은 인간의 욕심이 바탕이 되어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가진 재물과 권세와 성취까지도 죽음앞에서 모두 헛되다는 것을 알게 되자 자신이 왜 좀 더 말씀대로 지혜롭게 살지 못했는지 후회한 것입니다.
자신의 권세를 이용해서 성공을 노리는 신하들을 보면서도 솔로몬은 자기 또한 그들의 힘이 필요했기 때문에 신하들의 악한 행동을 막지 않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들이 죄를 짓도록 동조한 것입니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울부짖는 백성들에게 자신은 물론 신하들이 못된 짓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이미 지난 일이 되어 버렸으므로 아무리 후회해도 소용이 없게 된 것입니다.
지도자는 곁에서 보필하는 사람들이 정직하고 지혜로워야 합니다.
왕을 보필하는 사람들이 자기의 욕심을 채우고자 굽은 판결을 하게 되면 그것은 결국 왕이 판결한 것이므로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고, 하나님께서 책망하실 것입니다.
솔로몬은 뒤늦게 깨닫고는 우매 자처럼 살아온 자신이 얼마나 한심한지 뉘우쳐 보지만 이미 소용이 없었습니다.
6절에 두 손에 가득하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는 것보다 한 손에만 가득하고 평온함이 더 낫다고 한 것은 두 손으로 세상을 잡고 평안하지 못한 것보다는, 한 손만 세상을 잡고 심령이 늘 평온한 사람이 더 지혜로운 인생을 산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성취하고 유명한 이름을 가졌다고 해도 마음에 평온함이 없는 사람의 인생은 헛된 것입니다.
물론 성도들이 세상에서 높임을 받고 유명하다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데 도움이 되겠지만 그것보다는 하나님의 뜻대로 올바르게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솔로몬은 자기의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지 않고 살았음을 후회했습니다.
과연 이런 후회가 솔로몬만의 것일까 생각해 봅니다.
하루하루를 악착같이 살고 있는 우리들의 삶이 훗날 하나님이 원하시던 삶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에는 돌이킬 기회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다른 사람들의 믿음을 판단하실 때가 아닙니다.
정말 내가 하나님께 정직한 삶을 살고 있는지, 내 의를 모두 버린 삶을 살고 있는지 돌아볼 때입니다.
두 손에 가득 세상 것을 쥐고 있는 사람이 부러울 수도 있겠지만, 여러분이 하나님안에서 한 손이 비어있는 여유로운 자로 살아간다면 솔로몬이 부러워했던 사람들처럼 세상이 부러워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해 내세울 것 없고 자랑할 것 없지만 위로자가 계시는 그것만으로 자신 있고 당당하게 살아가시면 됩니다.
그런 삶을 살게 되면 훗날 솔로몬과 같이 자기의 살을 먹는 것처럼 고통스럽다는 말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죽음을 앞에 두고,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인생길을 바라보면서 후회하지 않도록 오늘을 믿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는 보호자가 되시는 성령께서 계시며, 고난이 힘겨워도 믿음으로 살기 위해서 애쓰는 여러분을 위로하시는 위로자가 계신다는 것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
언제나 하나님안에서 위로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그리스도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014,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