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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진도초등학교 총동문회 원문보기 글쓴이: 56이세진
1. 청계산 가는 길, 안개 속 풍경
靑溪斜對立蒼顔 비스듬히 마주한 청계산(靑溪山)의 푸른 얼굴
一種新奇杳邈間 신기(新奇)한 모습으로 아스라이 서 있네
深峯故是饒雲霧 깊은 산에 잔뜩 낀 구름과 안개로
天外時時失半山 산의 절반 때때로 하늘 저편 사라지네
―― 무명자 윤기(無名子 尹愭, 1741~1826), 「탁영정 20경(濯纓亭二十景)」 중 「청계산의 운무(靑溪雲霧)」
▶ 산행일시 : 2023년 2월 19일(일), 오전에는 진눈깨비 내리고 흐리다 오후에 갬
▶ 산행코스 : 청계산입구역,원터골,옥녀봉,매봉,망경대,석기봉,이수봉,국사봉,하오고개,영심봉,우담산,바라산,
백운산,광교산,비로봉,형제봉,광교(경기대)역
▶ 산행거리 : 도상 24.9km
▶ 산행시간 : 9시간 27분
▶ 교 통 편 : 신분당선 전철 타고, 가고 옴
▶ 구간별 시간
06 : 30 - 청계산입구역, 산행시작
07 : 00 - 진달래능선
07 : 27 - ┳자 갈림길, 오른쪽은 옥녀봉 0.4km, 왼쪽은 매봉 1.7km
07 : 33 - 옥녀봉(376.0m)
08 : 05 - △494.9m봉, 헬기장
08 : 19 - 매봉(582.8m)
08 : 33 - 혈읍재(血泣-)
08 : 39 - 망경대(望京臺, 616.3m)
08 : 56 - 석기봉(石基峰, 583m)
09 : 21 - 이수봉(二壽峰, 545m)
10 : 09 - 국사봉(國思峰, 542.0m)
10 : 40 - 하오고개(학현), 등산육교
10 : 55 - 367.2m봉
11 : 04 - △367.1m봉(영심봉)
11 : 23 - 우담산(발화산, 424.2m)
11 : 44 - 바라재
12 : 06 - 바라산(427.5m), 점심( ~ 12 : 25)
12 : 34 - 고분재
13 : 12 - 백운산(△562.5m)
13 : 51 - 광교산(光敎山, △581.2m)
14 : 21 - 비로봉(종루봉, 490.8m)
14 : 51 - 형제봉(448.1m)
15 : 39 - ┫자 갈림길, 왼쪽이 광교(경기대)역 1.5km, 직진은 광교공원 0.62km
15 : 57 - 광교(경기대)역, 산행종료
2. 청계산 산길
▶ 옥녀봉(376.0m), 매봉(582.8m)
서울에 아침이 어떻게 오는가, 청계산에서도 보고 싶었다. 아울러 오랜만에 청계산에서 광교산까지 가고도 싶었
다. 그러자면 대개 청계산의 들머리를 화물터미널로 잡는데 거기로 가기는 교통이 불편하다. 청계산의 첫 봉우리
인 옥녀봉을 화물터미널이 아닌 교통이 편한 원터골에서 올라도 거리상으로 그리 차이가 나지 않을 것이라, 명일
역에서 첫 전철 타고 환승하고 또 환승하여 청계산입구역으로 갔다. 1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새벽이다.
청계산입구역을 나서니 어둠속에 진눈깨비가 날린다. 중무장한 배낭 메고 청계산을 가는 산꾼은 나 혼자다. 우산
받치기에는 어중간한 날씨다. 보도를 한참 걸어간 원터(院基)마을 입구 굴다리에서 배낭 커버 씌우는 등 우장을
갖춘다. 원터마을 길 건너는 청룡마을이다. 청계산의 옛 이름인 청룡산에서 따왔으리라. 예전에도 이랬던가. 곧장
대로(차도) 따라 오르는 길 오른쪽에도 너른 길이 났다. 먹자동네길이다.
옥녀봉을 오르려면 가급적 오른쪽 길로 가는 편이 낫겠다 싶어 냉큼 따른다. 원터마을 노거수인 두 그루 갈참나무
를 보지 못하는 게 조금은 아쉽다. 먹자동네 지나자 가로등 불빛이 끝나고 계류 건너서는 아주 캄캄하다. 날이 흐
린 탓이다. 헤드램프 켠다. 헤드램프 불빛 비춰보는 계류가 빙하다. 다시 갈림길이 나온다. 오른쪽 돌계단 길이 산
속으로 들어간다. 돌계단 길 오른다. 진눈깨비는 싸락눈으로 변했다. 수북이 쌓인 갈잎 낙엽에 빗발소리 내며 쏟
아진다.
진달래능선이다. 능선 0.7km가 진달래 꽃길이라고 한다. 비록 꽃은 없지만 원로를 간다. 새벽에 산길 신설을 밟는
것도 정취다. 조망이 우수하다는 명소를 우연히 얼추 일출시각인 07시 18분에 때맞춰 올랐는데 날이 흐려 무망이
다. 청계산 주릉이다. ┳자 갈림길 오른쪽은 옥녀봉 0.4km다. 당초 예상은 옛 기억을 되살려 원터마을에서 곧바로
직진하여 주릉 안부를 오르고, 거기서 옥녀봉을 갔다 오려고 했다. 그래서는 옥녀봉까지 0.81km다.
날이 점점 밝아오고 뒤돌아보면 매봉(?)이 희끄무레하다. 옥녀봉에 올라서 보면 어떤 모습일까 궁금하여 잰걸음
한다. 그러나 날이 맑아지기는커녕 안개가 덮치기 시작하였다. 옥녀봉. 정상은 너른 하얀 공터다. 송백후조(松柏
後彫)인 노송이 반겨 맞아준다. 영객송(迎客松)이다. 중국 황산이 자랑하는 영객송보다 더 공손하다. 옥녀봉 정상
에 서면 바라보는 관악산이 드문 가경인데 오늘은 안개로 캄캄하게 가렸다.
옥녀봉 안내판의 내용이다.
“청계산은 일명 청룡산이라 하여 아주 먼 옛날에 푸른 용이 산허리를 뚫고 나와 승천했다는 전설에 기인했다고
하나 그보다는 관악산을 백호산이라 부른 데 반하여 청계산이 좌청룡에 해당한다는 풍수설에 연유하지 않았나
한다. 여기에 옥녀봉은 봉우리가 예쁜 여성처럼 보여 이 이름이 붙었다 한다.”
매봉 가는 주릉 길. 예전에는 진창길이었는데 지금은 야자매트 깔거나 목재계단을 놓아 비단길이다. 잘난 갈림길
이 나오면 이정표 방향표시를 재삼 확인하고 간다. 왼쪽으로 원터골을 오가는 ┫자 갈림길 안부에서부터 매봉까
지 가파른 데는 긴 계단을 놓았고 다섯 계단마다 번호를 매겨놓았다. 계단 수를 세어보는 수고를 덜었다. 가파름
이 수그러든 등로 옆에는 청계산에 대한 여러 안내판을 설치하였다.
청계산의 유래가 옥녀봉에서 소개한 내용과 다르다.
“과천의 진산을 관악산으로 보고 이를 기준으로 하여 볼 때 청계산은 좌청룡(左靑龍)이라 청룡산(靑龍山)이요,
수리산은 우백호(右白虎)의 백호산(白虎山)이라 하였다. 높이 618m 주봉인 망경대를 비롯하여 매봉, 옥녀봉 등의
여러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으며, 서쪽에 관악산 632m, 남쪽에 국사봉 540m가 솟아 있으며, 이들 연봉과 더불어
서울의 남쪽 방벽을 이룬다.”
그리고 청계산과 연관된 시조라고 목은 이색의 다음 글을 소개한다.
청룡산 아래 옛절
얼음과 눈이 끊어진 언덕이
들과 계곡에 잇닿았구나
단정히 남쪽 창에 앉아
주역을 읽노라니
종소리 처음 울리고
닭이 깃들려 하네
목은 이색(牧隱 李穡, 1328~1396)의 위 글은 청계사를 읊은 칠언절구 한시인데, 그 한시의 번역도 좀 어색하다.
한시 전문과 다른 번역을 소개한다.
靑龍山下古招提 청룡산 아래 오래된 절
氷雪斷崖臨野谿 빙설이 쌓인 벼랑이 들과 계곡에 임하였네
端坐南窓讀周易 단정히 남창에 앉아 주역을 읽노라니
鍾聲初動欲鷄棲 종소리 한 번 울리니 해저무려 하네
옛골 갈림길 지나자마자 헬기장인 △494.9m봉이다. 삼각점은 안내문에 ‘수원 404’이다. 자욱한 안개 속을 간다.
불과 몇 미터 앞만 볼 수 있는 안개다. 주변의 경치가 농담의 수묵화다. 수묵화 감상하는 재미가 짭짤하다. 망치
들면 다 못대가리로 보인다고, 카메라 드니 다 경치로 보인다. 돌문바위는 그 안으로 돌면 청계산의 정기를 받아
몸에 좋다고 한다. 두 번 돌고 간다. 돌문바위 주변의 노송이 한 폭 그림으로 아름답다.
청계산 매바위는 청계산의 최고 경점인데 오늘은 만천만지한 안개에 가려 지척도 캄캄하다. 매바위 지나 환상적
인 소나무 숲길을 100m 더 가면 매봉 정상이다. 매봉이 등산객들에게는 청계산 주봉 역할을 한다. 청계산의 주봉
인 망경대는 군부대가 차지하고 있어 등산객들은 접근하기 어렵다. 매봉 정상에서도 영객송이 정상 표지석과
함께 나 홀로 등산객을 반가이 맞이한다.
4. 옥녀봉 가는 진달래능선
능선 길 0.7km가 진달래 꽃길이라고 한다.
5. 옥녀봉 정상, 소나무가 영객송(迎客松)이다.
6. 옥녀봉에서 매봉 가는 길
7. 매봉 가는 길, 안개가 끼기 시작했다
▶ 망경대(望京臺, 616.3m), 석기봉(石基峰, 583m), 이수봉(二壽峰, 545m)
매봉에서 혈읍재를 가는 길을 잘못 들 뻔했다. 소나무 숲 두른 너른 바윗길을 무턱대고 내렸더니만 인적이 끊기고
주변이 소연하다. 내가 순간 경솔했음을 깨닫고 뒤돌아 올라 주변을 자세히 살피자 데크계단 내림 길이 있다.
혈읍재(0.7km) 가는 길 주변도 발걸음을 더디게 하는 가경이다. 그래도 혹시 두고 가는 경치가 있을까 수시로
지나온 길을 뒤돌아본다. 혈읍재는 ╋자 갈림길 안부다. 혈음재(血泣-)에 대해 안내판에서 소개하는 내용이다.
“조선조 영남 사림의 거유(巨儒)인 일두 정여창(一蠹 鄭汝昌, 1450~1504) 선생이 성리학적 이상 국가의 실현이
좌절되자 은거지인 금정수터를 가려고 이 고개를 넘나들면서 통분하여 울었는데 그 피울음 소리가 산 멀리까지
들렸다 하여 후학인 정구(鄭逑)가 혈읍재라 명명(命名)하였다. 정여창 선생은 청계산 金井水(망경대 아래 석기봉
옆)에서 은거하다 결국 연산군의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스승 김종직과 벗 김굉필과 함께 유배 후 사사되었다. 그
후 갑자사화 때 종성 땅에서 부관참시 당했다.”
혈읍재에서 망경대 오르는 길은 가팔랐는데 데크계단으로 덮어버렸다. 데크계단이 끝나고 ┳자 갈림길이 나오면
왼쪽이 망경대를 돌아 이수봉으로 가는 잘난 주등로이고 오른쪽은 출입통제로 막았다. 눈길이 조용하다. 간다.
오늘 산행의 하이라이트가 시작된다. 바위 슬랩을 한 피치 오르면 망경대 정상 바로 아래 바위다. 망경대는 군부
대 철조망이 엄중하게 둘러 있어 접근할 수 없다. 그 아래 바위도 조망이 썩 좋은데 오늘은 안개가 자욱하여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여기는 만경대(萬景臺)가 아니라 망경대(望京臺)다. 이와 관련하여 연려실 이긍익(燃藜室 李肯翊, 1736~1806)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따르면, ‘고려에 절개를 지킨 여러 신하(高麗守節諸臣附)’ 편에서 조견(趙狷,
1351~1425)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조견은 초명(初名)은 윤(胤)이고, 본관은 평양(平壤)이다. 조준(趙浚)의 동생으로 고려조에서는 벼슬이 지신안렴
사(知申按廉使)였고, 조선에서는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 개국공신(開國功臣) 평간공(平簡公)이었다. 이름을
고쳐 조견(趙狷)이라 하니, 이것은 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견(狷)’ 자(字)의 뜻을 취한 것이다.
고려가 망하니, 공은 통곡하고 두류산(頭流山)에 들어갔다. 이어 이름을 견이라 바꾸고 자를 종견(從犬)이라 하였
으니, 이것은 나라가 망했는데 죽지 않음은 개와 같고, 개는 그 주인을 연모한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두류산에서
청계산(淸溪山)으로 옮겨가 날마다 제일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서 송도(松都)를 바라보고 통곡하였다. 사람들은
이 봉우리를 가리켜 ‘망경봉(望京峯)’이라 하였다.”
청계산은 여러 문인이 다투어 그 경치를 시로 읊었다. 동주 이민구(東州 李敏求, 1589~1670)의 「수명루십이영
(水明樓十二詠)」 중 「청계산의 저녁 눈(靑溪暮雪)」도 그중 하나다. 오늘의 청계산을 읊은 것 같다.
夜雪渾山暗 밤에 눈 내려 온 산이 어둡더니
朝寒特地添 아침 한기가 유난히 더하네
白疑群壑滿 뭇 골짜기마다 흰빛으로 가득한 듯
靑失一峯尖 뾰족한 봉우리에는 푸른빛 사라졌네
爽氣侵排闥 상쾌한 바람이 열린 문으로 스며들고
晴光入捲簾 맑은 햇빛 걷어 놓은 발로 들어오네
西厓千丈石 서쪽 벼랑 천 장 바위
刻畫哂無鹽 곱게 단장하고 무염을 비웃네
망경대 내리는 길이 험악하다. 가파른 반침니 내리막이다. 스틱 먼저 내려 보내고, 카메라 벗어 배낭에 넣고 행동
의 자유를 확보한 다음 손맛 다시고 덤빈다. 암벽을 마주보도록 몸을 돌려서 바위 모서리 움켜쥐고 한 발 한 발 내린다.
날은 잔뜩 흐려 어둑하고 바위는 눈이 살짝 덮여 있어 미끄럽다. 걸음걸음이 조심스럽다. 중간 쯤 내려 직벽
이다. 길이 1m 정도의 굵은 밧줄이 참나무에 매여져 있다. 곧 끊어질 듯 닳았다. 밧줄 잡기가 까다롭다. 참나무를
두 팔로 부등켜안고 돌아서 밧줄을 잡아야 한다.
그러고도 몇 번 더 짜릿한 손맛 보며 내린다. 바위를 다 내린 다음 뒤돌아서 고개 꺾고 바라보니 그 꼭대기는 안개
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스틱 짚어 두근거리는 가슴 진정하고 석기봉을 향한다. 군부대 철조망을 따라 오른다.
석기봉 가는 길도 암릉이다. 낭떠러지 사면을 트래버스 하여 가느다란 밧줄 잡고 슬랩을 오르기도 한다. 석기봉도
조망이 썩 좋은 경점인데 사방 캄캄하여 아쉽다. 석기봉을 넘으면 등로는 탄탄대로다. 수묵화 전시장이 이어진다.
10. 혈읍재 가는 길
13. 혈읍재
▶ 국사봉(國思峰, 542.0m)
찬바람이 일기 시작한다. 눈발이 날리는 설한풍이다. 잰걸음 한다. 어쩌면 청계산은 이런 궂은날에 와야 한다.
그래야 한갓진 산길을 마음껏 걸을 수 있고, 주변 풍광도 자세히 살필 수 있다. 바람막이 둘러친 좌판은 아직 출근
하지 않았다. 오른쪽으로 청계사(1.0km) 가는 ┳자 갈림길 지나고 완만한 오르막이 이어진다. 그 끝이 이수봉이
다. 널찍한 소나무 숲속 정상표지석이 우람하다. 표지석에 이수봉(二壽峰)의 유래도 새겼다.
“조선 연산군 때의 유학자인 정여창 선생이 스승 김종직과 벗 김굉필이 연루된 무오사화의 변고를 예견하고 한때
이 산에 은거하며 생명의 위기를 두 번이나 넘겼다 하여 후학인 정구 선생이 이수봉이라 명명하였다.”
짙은 안개 속이라 보이지 않지만 사람들 수런거리는 소리가 반갑다. 드물게 등산객들과 마주친다. 반갑게 수인사
나눈다. 국사봉을 향한다. 이정표가 친절하다. 이수봉 32m, 국사봉 1,958m. 소나무 숲길은 끝나고 참나무 숲길이
다. 수묵화의 작가가 다르다. 찬바람이 불어서도 그렇지만 벌거벗은 참나무가 후조인 소나무와는 다르게 춥게 보
인다. 의왕대간 길을 간다. 석기봉 내려서부터 ‘의왕대간’이다. 의왕시에서 둘레산길(둘레길이 아니다)을 만들었
다. 한편 ‘성남 누비길’이기도 하다.
이 의왕시(義王市)의 탄생이 기구하다. 무슨 왕의 이름이 아니다. 조선시대 광주군 의곡면(義谷面)과 왕륜면(王倫
面)이었는데, 1914년에 이 두 면을 합치면서 그 첫 글자를 딴 의왕면으로 수원군에 병합되고, 1949년에 화성군
에, 1963년에 시흥군에 속했다가, 1989년에 의왕시로 승격하였다.
국사봉 오르기 직전 등로 옆의 큰 바위가 바람막이다. 그에 기대어 배낭 벗어놓고 첫 휴식한다. 목 축일 겸 탁주
독작한다. 주변에 상고대 서리꽃이 움트는 걸 보니 내 이가 시리다. 국사봉. 역시 안개로 사방이 캄캄하다. 의왕시
에서 정상표지석을 세웠다. 아울러 국사봉의 유래도 새겼다. 조윤은 망경대에서 언급한 조견의 초명이다.
“國思峰(540m).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세워지자 청계산에 은거하던 고려의 충신 조윤(趙胤)이 멸망한 나라를
생각하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충신’은 당 태종 때의 위징(魏徵, 580~643)의 말을 빌리면 결코 달갑지 않은 호칭이다. 위징은 태종에게 자신으로
하여금 양신(良臣)이 되게 하고, 충신(忠臣)이 아니기를 바라시라며, 그 둘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양신은 아름다운 이름을 얻을 수 있고, 군주는 드러나는 이름을 얻어 자손들에 대대로 전해져 복록을 무한히
누릴 수 있지만, 충신은 주륙을 받으며, 군주는 커다란 악에 빠져 집과 나라를 모두 잃게 되는데, 홀로 그 이름만
있으니, 이로써 말한다면, 양신과 충신의 거리가 멉니다.”
(良臣使身獲美名 君受顯號 子孫傳世 福祿無疆, 忠臣身受誅夷 君陷大惡 家國並喪 獨有其名 以此而言 相去遠矣)
국사봉에서 하오고개 가는 길에서도 잠시 헷갈린다. 그 길을 머릿속에 그렸으면서도 디테일에는 약하다. 직감이
나침반 역할한다. 남진하다가 느낌이 이상하여 지도 보니 서진할 것을 잘못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마 나만 그
런 것이 아닌가 보다. 뒤돌아 오르다 왼쪽 사면을 길게 돌아가는 길 또한 아주 잘났다. 가파른 내리막은 390.6m봉
에서 잠시 주춤하고 나서 다시 길게 쏟아지다가 공동묘지 구역에 들어서 평탄하다.
15. 망경대와 석기봉 내리는 길
19. 이수봉
▶ 우담산(발화산, 424.2m), 바라산(427.5m), 백운산(△562.5m)
안개가 걷히기 시작한다. 시계가 트이지만 카메라 눈으로는 오히려 볼 것이 없다. 계단 잠깐 내려 하오고개(학현)
등산육교다. 생태교가 아니다. 예전에는 이 하오고개를 넘는 게 과제였다. 차량들이 쌩쌩 달리는 57번 국도 중앙
분리대를 넘거나, 미리 오른쪽 사면을 내려 공동묘지를 지나고 그 관리소 쪽으로 내려가서 굴다리를 지나 하오고
개의 높은 절개지 낙석방지용 철조망이 끝나는 데에서 올랐다. 이 육교로 인해 많은 수고와 위험을 덜고 거리와
시간을 절약하게 되었다.
육교 건너 사면 비스듬히 난 계단을 오르고, 잠시 숲속 길을 가다가 가파른 오르막을 긴 데크계단으로 오른다.
367.5m봉을 단숨에 오르려니 이도 숨이 차는 준봉이다. KBS 방송 중계소 시설 옆에 성남누비길 안내판이 있다.
하오고개는 의왕시에서는 학고개 또는 학현이라 부르고, 운중동에서는 하오개 ․ 하오고개 ․ 화의고개 등으로
불린다고 한다. 학현은 이 고개가 풍수지리상 학이 거동하는 형국이라는 데서 유래한다.
매봉에서 함께 온 성남 누비길은 여기서 남진하여 응달산, 태봉산 혹은 안산으로 가고, 의왕대간은 우담산을 향하
여 서진한다. 예전에 몰랐던 산이 새로 생겼다. △367.1m봉(삼각점은 ‘315 재설, 76.9 건설부’이다)을 영심봉이라
고도 한다. 안개는 걷혔지만 미세먼지가 심하여 시계가 자욱한 안개보다 더 답답하다. 의왕대간은 영심봉에서
직각방향 틀어 남진한다. 부드러운 산길이다. 느긋하게 내렸다가 그렇게 오른 424.2m봉을 지금은 우담산(발화
산)이라고 한다. 물론 국토지리정보원의 지형도에는 표기되지 않은 노브랜드인 산이다.
왜 ‘우담산’이라고 했을까? 이명인 발화산은 이 산 아래 석운동(石雲洞) ‘발화산리’라는 동네가 있기에 그에 따라
산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우담산은 이 다음에 오르게 될 바라산을 염두에 두고 불가에서 신성한 꽃으로 여기는
‘우담바라’를 연상케 하려는 것이 아닐까? 우담산을 한참을 쏟아져 내린다. 바닥 친 안부는 ╋자 갈림길인 바라재
다. 바라산이 높다란 장벽으로 보인다. 그 중턱의 가파른 오르막에 이르면 ‘바라 365 희망계단’이 시작된다.
‘바라 365 희망계단’은 1년 365일을 15일 간격의 24절기를 소재로 하여 설치하였다고 한다. 각 절기의 의미와
내용을 적은 화판이 15개 계단마다 걸려 있다. 눈 돌려 일일이 들여다보기도 힘들다. 희망계단을 다 오르고 60m
를 더 가면 바라산 정상이다. 바라산의 데크전망대는 온 길을 감상할 수 있는 경점인데 오늘은 미세먼지가 심하여
흐릿하다. 바라산의 안내판에 그 이름의 유래를 적어 놓았다. 우담바라(優曇婆羅)와는 무관하다. “바라산은 의왕
의일 주민들이 정월 대보름날 달을 바라보는 산으로, 발아산(鉢兒山) 또는 망산(望山)이라고도 불리었으며, 망산
의 뜻인 ‘바라본다’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바라산 정상 아래 바위벽을 바람막이 삼아 휴식 겸해 점심밥 먹는다. 허기는 지고 입맛은 없고, 탁주 안주 삼아 밥
을 먹는다. 바라산을 긴 한 피치로 내린 안부는 고분재다. 백운산 품에 든다. 백운산까지 황량하고 넙데데한 오르
막 1.5km이다. 손맛 볼 데나 볼거리가 없으니 무척 지루하다. 약간 가파르다고 하여 데크계단을 놓았다. 계단수와
그 계단으로 오르게 될 높이와 도상거리를 안내하고 있다. 높이 20m, 도상거리 37m를 107개 계단으로 오른다.
계단거리는 40m인 셈이고, 경사도는 사인 값을 계산하면 28도 정도 된다.
백운산. 삼각점은 ‘수원 451, 1983 재설’이다. 백운산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전망이 훤히 트인다. 모락산(385m)과
그 너머 수리산(475m)연봉이 가깝다. 의왕대간은 백운산에서 남서릉으로 방향 튼다. 섭섭하다. 백운산에서 광교
산까지 2.0km는 평지나 다름없다. 봉봉을 점령하고 있는 군부대와 통신대를 사면으로 길게 돌아 넘는다. 봉봉
안부인 억새밭과 노루목이 썰렁하여 그 이름과는 무관하게 보인다. 광교산 정상에 임박하여 데크계단을 오른다.
계단 수 145, 높이 21m, 도상거리 59m. 계단거리 62m를 경사도 19.5도로 오르는 셈이다.
21. 국사봉 가는 길
26. (바라산에서 바라본) 앞은 우담산, 뒤는 청계산
27. 백운산 정상
28. 백운산에서 바라본 모락산
▶ 광교산(光敎山, △581.2m), 비로봉(종루봉, 490.8m), 형제봉(448.1m)
광교산 정상 직전에 공모전 당선작이라는 장세영의 ‘광교산’ 시를 게시한 시판이 있어 일람한다. 그 시구 중 “김준
용 장군의 용맹스러움도/효성 지극한 최루백 마음도/골골이 피어나는 안개 속에 담아/씩씩한 마음 착한 마음 심어
주는/안개 속에 광교산은”이 특히 눈길을 끈다.
김준용(金俊龍, 1586~1641) 장군은 병자호란 때 광교산에서 청 태종의 매부인 적장 백양(白羊, 양고리라고도 함,
1572~1637)을 죽이는 등 청나라를 군대를 크게 무찔렀다. 『연려실기술』은 ‘여러 장수의 사적(事蹟)’에서 김준용
장군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전라 병사 김준룡(金俊龍)이 날래고 용맹스러운 군사를 뽑아서 네모난 진을 만들어 사면이 모두 밖을 향하게
하고 양식은 진 가운데에 두어 적을 만나면 장차 싸울 계책으로 삼았다. 그렇게 하여 광교산(光敎山)에 나아가
자리잡은 진터는 남한산성까지 한숨에 갈 수 있을 정도의 가까운 거리였다. 여기서 적병과 여러 차례 접전(接戰)
하여 여러 차례 이겼으며, 밤마다 횃불을 들고 포를 쏘아 남한산성에 들리게 하였다. 적병이 날마다 침범하여 왔
으므로 살상자가 대단히 많았고 적장 백양(白羊)이 또한 죽었다.”
효성이 지극한 최루백에 대하여는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의 『고봉전서(高峰全書)』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최누백(崔婁伯)은 수원(水原) 사람입니다. 나이 15세 때 그의 아버지가 사냥을 하다가 호랑이에게 물려 죽자 누백
은 그 호랑이를 잡으려 하였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만류하자 누백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는 즉시 도끼를 메고서 호랑이를 추적하였습니다.
호랑이는 이미 사람을 잡아먹고 배가 불러 드러누워 있었습니다. 누백이 그 앞으로 다가가서 호랑이를 꾸짖어
“네가 우리 아버지를 잡아먹었으니 내가 의당 너를 잡아먹어야겠다.” 하니, 호랑이가 꼬리를 흔들며 엎드렸습니
다. 누백은 대뜸 도끼로 호랑이를 찍어 죽이고는 배를 갈라 자기 아버지의 뼈와 살을 찾아내고, 호랑이고기는 항
아리에 담아 시내 가운데 묻어 두었습니다. 누백은 아버지를 장사 지내고 시묘살이를 하였으며, 삼년상을 마치고
나서는 그 호랑이고기를 가져다가 다 먹었습니다. 그는 뒤에 과거에 급제하여 기거사인(起居舍人)이 되었습니다.
광교산. 전에는 울퉁불퉁한 돌바닥이었는데 데크 전망대로 다듬었다. 삼각점은 ‘수원 23’이다. 북쪽으로 조망이
트인다. 청계산에서 광교산에 이르는 산릉이 한눈에 보이지만 미세먼지로 흐릿하다. 차츰 날이 맑아지고 많은
사람들이 오간다. 광교산에서 한 피치 길게 내린 안부는 ╋자 갈림길인 토끼재다. 비로봉은 여기서 0.2km로 계단
과 바윗길을 번갈아 오른다. 그 길도 멀고 험하다 하여 계단 오르면 왼쪽 사면을 돌아 넘는 길이 잘났다.
비로봉을 종루봉이라고도 한다. 이곳 망해정 정자에 오르면 서해가 보인다고 하는데 흐릿하여 분간하지 못하겠
다. 망해정의 유래를 적은 안내판 내용이다. “최치원(857~ ?)이 관직을 버리고 전국 곳곳을 돌던 중 광교산 문암
골에 머물며, 종루봉(이곳을 찾았을 때 종과 종루를 보고 ‘종대봉’이라 한 것에서 유래) 부근 이곳에서 서해를
바라보며 종은 있지만 울릴 사람이 없으니 종과 자신의 신세가 같다고 한탄하며, 이곳을 망해정(望海亭) 이라
하였다.”
비로봉에서 다시 한 피치 길게 내리면 양지재다. 광교산의 마지막 봉우리인 형제봉을 오른다. 0.5km. 데크계단
267개 섞인 가파른 오르막이다. 수렴에 가렸지만 계단마다 온 길을 내려다보는 경점이다. 형제봉. 광교산 최고의
경점이다. 모락산과 그 너머 수리산 연봉이 반갑다. 또한 서해 쪽을 바라보면 산 구릉이 첩첩 산으로 보인다. 골골
마다 빼곡한 아파트를 운해가 가렸다면 기관(奇觀)일 것이 분명하다.
형제봉을 내리면 더 오를 데 없다. 바윗길 잠시 내리다 데크계단 438개를 내리면 신작로나 다름없는 부드러운
산길이다. 야트막한 안부 근처에는 약수터가 있다. 백년수에 이어 천년수를 지난다. 걷고 있어도 걷고 싶은 하늘
가린 숲길이다. 아껴 걷는다. ┫자 갈림길. 직진은 광교공원 620m, 왼쪽은 광교(경기대)역 1,500m이다. 광교역이
생기기 전에는 직진하여 광교공원 쪽으로 갔다. 오늘은 왼쪽 광교역으로 간다. 산행거리가 1km 정도 늘었다.
광교역 가는 길도 잘났다. 갈림길이 나오면 잘못 가지 않도록 이정표가 안내한다. 덕분에 한 걸음도 착오 없이
내린다. 광교산 남릉이 목민교에서 맥을 놓을 때까지 간다. 광교역사 앞 쉼터에서 산행을 마무리하고 역사로 들어
간다. 날머리 광교역에서 들머리인 청계산입구역까지 신분당 전철은 30분이 걸린다. 나는 9시간 27분 걸렸다.
29. 광교산 쪽 산자락
30. 비로봉 망해정에 걸린 서각
31. (형제봉에서 바라본) 왼쪽은 비로봉, 오른쪽은 광교산
32. 광교산
33. 형제봉에서 조망
34. 뒤는 수리산 연봉, 그 앞은 모락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