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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스크랩 무하마드 알리
실천747 추천 0 조회 241 12.11.08 01:0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캐시어스 클레이(무하마드 알리)가 어릴때 살던집 - 미국 켄터키주 루이스 빌

 

 

 

12살 소년 시절의 캐시어스 클레이(무하마드 알리) - 1954년

 

 

 

 

 

18세의 나이에 로마 올림픽대회에 미국 헤비급 복싱 대표선수로 참가하여  

 

금메달을 획득한 캐시어스 클레이(무하마드 알리) - 1960년

 

캐시어스 클레이(무하마드 알리)가

오하이오 강에 던진 로마 올림픽의 금메달에 대한 이야기다.
선천적으로 뛰어난 자질을 타고난 알리는 18세가 될 무렵

이미 아마추어 경기만 108경기를 치렀고

6번의 켄터키주 타이틀에 2번의 내셔널 타이틀로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는 경력을 자랑하게 됐다.

이윽고 60년 로마 올림픽에 미국의 라이트 헤비급 대표로 출전해

폴란드의 지브기뉴 피에트르지코스키를 판정으로 누르고 정상에 올랐다.

클레이는 왼손잡이 피에트르지코스키의 낯선 스타일에 1라운드는 고전했지만

2,3라운드에서 여유있게 점수를 벌어 꿈에 그리던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당시 로마 올림픽에서 소아마비를 딛고 여자 육상 단거리 여왕이 된

윌마 루돌프는 “그는 금메달을 목에 걸고 밥을 먹었고 목에 걸고 잠을 잤다.

결코 메달을 목에서 빼려 하지 않았다"고 올림픽에서의 클레이를 회상했다.

금메달은 당시 클레이의 전부였다.

애국심의 상징이기도 했다.

클레이는 미국으로 돌아온 뒤 공항에서 치러진 인터뷰에서

 “미국을 가장 위대하게 만드는 것이 내 목표였고,

그래서 나는 러시아와 폴란드 선수를 이겼고

미국을 위해 나는 금메달을 따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금메달은 그 순간에도 그의 목에 걸려 있었다.

그럼 여기서 시간을 36년후인 96년 애틀랜타 올림픽 개막식으로 가보자.

지구촌은 화려한개막식에서 파킨슨씨 병에 걸린 알리가

성화대에서 몸을 떨며 어렵게 점화하는 감동적인 장면을 지켜보았다.

이후 알리에 대한 감동적인 뉴스가 거듭 세계의 시선을 끌었다.

사마란치 올림픽 위원장이 알리에게 36년 전 잃어버린 올림픽 메달을 대신할

새로운 올림픽 금메달을 다시 제작해 수여했다는 소식이었다.

언론에는 알리가 금메달을 다시 목에 걸고 사마란치 위원장과 함께 찍은 사진도 소개됐다.

그렇게 애지중지 하던 메달은 어디다 두고

알리는 36년이 지나서 다시 금메달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됐을까.

알려지기로는 고향으로 돌아온 클레이가 스스로 버린 것으로 돼 있다.

금메달을 획득한 뒤 그 메달을 걸고 백인전용 레스토랑에 들어갔다가

입장을 거부당하자 시비 끝에 백인 청년들과 싸움을 한 뒤

결국 오하이오 강에 스스로 던져버렸다는 것이다.

국가를 위해 금메달을 따냈지만 그 금메달 역시 자신의 피부색을 바꿀 수 없었다는 사실에

금메달의 덧없는 가치를 깨달은 클레이의 분노와 좌절이 전해지는 대목이다.

여기까지가 당시 언론에도 소개된 알리가 36년 만에 다시 금메달을 받게 된 사연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낭만적이고 감동적인 ‘동화’가 사실은 아니라는 설도 있다.

70년대 초반 알리가 귀의한 ‘네이션 오브 이슬람(Nation of Islam)’은

알리의 자서전 출판 계획을 세우고 한 출판사에 저작권을 25만달러에 넘겼다.

책 제목은 ‘더 그레이티스트(The Greatest)’. 알리의 자서전이었지만

 글은 ‘네이션 오브 이슬람’의 기관지 에디터인 리차드 더램이 쓰기로 했다.

자연히 내용에 그 종교 단체의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 책에 바로 클레이가 자신의 금메달을 스스로 오하이오강에 던진 것으로 돼 있다.

‘네이션 오브 이슬람’은 클레이가 세계 챔피언이 되기로 결심하는데

강력한 동기가 필요했다.

백인의 대한 반감과 인종차별에 대한 좌절감이 표출된다면

홍보에 더욱 극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어 좋았을 것이다.

결국 조지 워싱턴 대통령의 ‘도끼사건’처럼 잃어버린

금메달과 백인 레스토랑에서 입장을 거부당한 상황을 모티브로

새롭게 ‘전설’을 창조한 것이 결국은 ‘오하이오 강에 던진 금메달 이야기’가

됐다는 주장이 나름대로 설득력을 얻고 있다.

알리가 마음만 먹었다면 그 논쟁은 금방 마침표를 찍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같은 각색은 알리가 신의 아들로 떠 받든 ‘

네이션 오브 이슬람’의 지도자 엘리자 무하마드의 지시에 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알리가 나서 왈가왈부 하기에는 난처한 상황이 돼 버린 것이다.

지금이라도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신은 한때 주먹만큼 빠르고 강했던 그의 입을 봉해 놓았다.

파킨스씨 병에 걸린 그는 말도 자연스럽게 하지 못한다.

기자들은 그런 알리에게 사실 확인을 하기가 어려웠을 수 밖에 없다.

알리는 자신이 파킨슨씨 병에 걸린 것을 신의 뜻이라고 하며 치료도 거부했다.

덕분에 ‘클레이의 잃어버린 금메달’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미 오랜 전설이 돼버리고 말았다

 

 

캐딜락에 탑승한 캐시어스 클레이와 그의 어머니 오데사 그래디 클레이(Odessa gredy clay) - 1963년 4월 4일 루이스빌의 집

 

 

 

뉴욕에서 만난 미국의 흑인 인권 운동가였던 말콤 엑스와 캐시어스 클레이(무하마드 알리)

 

 

 

아치 무어 선수와 경기전 익살스러운 캐시어스 클레이(무하마드 알리)의 모습 - 1962년 11월 15일

1970년대 말, 무하마드 알리의 모습이 교황이나 미국의 대통령보다 더 유명했던 시절이 있었다.

무하마드 알리가 사상 최고의 권투선수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전체적인 관점에서 볼 때, 스포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운동선수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두번째 세계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한(1978년 2월 15일, 레온 스핑크스에

판정패해 타이틀을 상실했으나 같은 해 9월 15일에 되찾았다)

30세 때부터 스포츠 세계뿐 아니라,

켄터키 출신의 챔피언인 그의 삶을 되짚어보는 것만으로도 그 사실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무하마드 알리의 트레이닝 캠프를 방문한 영국의 비틀즈 - 1964년 2월 플로리다 마이애미

 

 

 

엘비스 프레슬리와 캐시어스 클레이(무하마드 알리)

 

 

 

이름을 캐시어스 클레이에서 무하마드 알리로 개명한후 그의 첫부인 손지(Sonji)와 같이 찍은 사진

 

 

 

25세의 생일을 맞은 캐시어스 클레이(무하마드 알리) - 1967년 1월 17일 휴스턴

 

   

 

소니 리스톤과 캐시어스 클레이(무하마드 알리)의 세계 헤비급 타이틀전 - 1965년 5월 25일

 

녹 아웃된 소니 리스톤에게 어서 일어나라고 야유하는 클레이

 

 


소니 리스튼과의 경기에 승리하여

 

세계 헤비급 복싱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한 캐시어스 클레이(무하마드 알리) 

 

 

 

복싱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복서 무하마드 알리

올림픽 금메달을 거머쥐고도 인종차별을 비판하며 금메달을 강에 던져버린 무하마드 알리.

복싱 외에 종교 단체활동 인종 차별금지 운동을 비롯해 여러가지 활동을 하며

강펀치의 소유자 소니 리스튼을 누르고 세계 헤비급 챔피언 자리에 오른다.

이후 베트남전의 징병거부로 몇년간 선수생활자격을 박탈 당한후 

나이가 든 몸으로 재기하여 다시한번 세계 타이틀을 탈환하여 성공적으로 재기를 한다.

무하마드 알리 그의 복싱 센스와 반사신경은 그야말로 경이로웠다.

라이벌 조프레이저와 조지 포먼에게 패배를 안겨주고

그는 당시 인기가 없었던 아웃복싱을 창시해 최고의 아웃 복싱을 보여준 복서 였다.

 

 

  

 

조 프레이저에게 세계 헤비급 챔피언 타이틀을 잃은 캐시어스 클레이(무하마드 알리)

 

- 1971년 4월 8일 미국 뉴욕 메디슨 스퀘어 가든  

 

 라운드 초반에는 아웃 복싱의 알리가 포인트를 쌓았지만

   라운드 중반부터 알리는 움직임이 둔해진 반면 프레이저는 강한 모습을 유지했다.

   11라운드에서 프레이저의 왼손훅이 알리의 얼굴에 적중했고,

   프레이저는 최초로 알리에게 다운을 안겼다.

   결국 15라운드까지 가는 승부 끝에 조 프레이저가 판정승을 거두었다.

   세기의 대결을 펼친 직후 알리는 엑스레이 촬영을 위해 병원으로 후송됐고,

   프레이저도 몇 달 동안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1976년 은퇴한 프레이저는 1981년 복귀를 시도했지만

   한 경기만을 치렀고 이후 복싱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상태였다.

알리의 영원한 라이벌이자 스모킹 조로 불리던 전 헤비급 챔피언

조 프레이저는 2011년 11월 8일 67세의 나이에 간암으로 별세 했다.

.

 

조 프레이저와 무하마드 알리의 세계 헤비급 챔피언전 - 1975년 10월 1일 필리핀 마닐라 

 

 

1975년 10월1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세기의 대결' 경기는 첫 번째 맞대결보다 더 처절했다.
15라운드에서 프레이저의 한쪽 눈이 안 보일 정도로 부어 오르자 트레이너가 수건을 던져 경기를 포기할 정도였다.
알리 역시 당시 경기가 끝난 뒤 그가 상상할 수 있는 죽음에 가장 근접한 경기였다고 술회했다.
자존심과 야망으로 점철된 '세기의 대결'에서

두 선수는 15라운드까지 난타전을 벌이며 죽음 직전까지 이를 정도로 처절한 승부를 펼쳤다.
결국 알리는 프레이저와의 마지막 맞대결 이후 남은 인생 대부분을 파킨슨병으로 고통받아야 했다.

 

프레이저 역시 분노 속에서 남은 인생을 살았고 열패감을 극복하지 못했다.
결국 프레이저는 1976년 조지 포먼에게 두 번째로 패배하고 나서 일찍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프레이저는 역사상 최고의 헤비급 복서 가운데 열 손가락 안에 꼽힌다.
전매특허인 레프트 훅은 복싱 역사상 가장 파괴력이 높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프레이저는 통산 37전32승4패(27KO)를 거뒀다.

알리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의 전적은 더 화려했을 것이고

헤비급 챔피언 왕자 자리에 더 오래 머물렀을 것이다.
알리가 없었다면 흑인의 영웅은 알리가 아니라 프레이저 였을지도 모른다.
아울러 무의미한 추정일지는 몰라도

프레이저가 알리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수명을 더 연장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알리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프레이저도 없었을 것이다.
프레이저와 알리의 맞대결은 사생결단의 승부를 일컫는 대명사가 되었다.

프레이저는 알리를 통해 전설이 되었다. 
 

   

 

 

조지 포먼과 무하마드 알리의 세계 헤비급 챔피언전 - 1974년 10월 29일 아프리카 킨샤샤 자이레

 

 

  무하마드 알리는 전 세계에 이름을 날린 미국의 유명한 복서였다.

1942년 1월 17일에 미국 켄터키주 루이빌에서 출생한

그의 본명은 캐시어스 마셀러스 클레이이다.

1960년 로마 올림픽 라이트 헤비급에서 금메달을 수상 하며 세상에 널리 알려진 선수이다.

18살의 어린 나이에 로마올림픽에 참가한 알리는

예선전에서 4전 4승의 성적으로 순조롭게 결승진출에 성공했고,

 이어 결승전에서 유럽 챔피언을 격파하며 금메달을 따냈다.

무하마드 알리는 헤비급 사상 처음으로 타이틀 획득 3회의 위업을 실현한 선수로 되고 있으며

로마올림픽 라이트 헤비급에서 금메달을 수상한 이후 프로로의 전향을 실현하여

1964년 2월 25일 리스턴을 전승하고 세계 헤비급 챔피언이 됐다.

1965년부터 시작해 9년동안 무하마드 알리는 아홉차례나 타이틀 우승에 성공했다.

베트남 전쟁기간, 미국군의 병역을 거부한 이유로 우승 타이틀을 박탈당했으며

그 뒤로 3년동안 경기금지처분을 받았다.

1974년 다시 복싱종목에 도전한 무하마드 알리는 십여차례나 타이틀우승에 성공하며

1981년 56승 5패의 성적으로 선수생애 21년을 마감하고 은퇴를 선언했다.

흑인 이슬람교도로 "흑인해방운동"에 노력했던 선수이며

80년대부터 심한 후유증으로 생긴 파킨슨병으로 고통받았던 적이 있다.

 

 

 

무하마드 알리는 1996년 미국 애틀랜타 올림픽 개막식에서 성화대에 점화하는 역할을 맡았다.

 알리가 입은 흰색 체육복은 검은 밤하늘을 배경으로 대조를 이루었다.

횃불 든 손을 뻗어 점화할 때 그의 손이 파킨슨병으로 떨리는 모습이 확연히 보였다.

알리가 파킨슨병 확진을 받고 10년이 지난 때였다.

일찍이 알리는 ‘백인전용’ 식당의 인종차별에 격분해

올림픽 금메달을 오하이오 강물에 던져버리고, 흑인의 정체성을 위해 온몸을 던져 ‘알리의 1인 전쟁’을 벌였다.

그런데 냉전체제 속에서 반쪽짜리 올림픽 행사를 주관하게 된

미국 정부는 이슬람교도인 무하마드 알리에게 올림픽 금메달의 모사품을 만들어 증정하며 유화책을 편다.

미국 주류 언론은 알리가 스포츠 세계에 얼마나 공헌했는지,

사람들이 알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준다고 찬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런 사연으로 알리가 성화대에 점화하는 장면은 역설적이었다.

흑인의 정체성을 찾아서 그토록 치열하게 싸워온 알리가

이제는 미국의 정치와 자본을 장악하고 있는 기득권 주류세력과 타협하고

 인도적인 사업에 눈을 돌리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1996년 미국 애틀란타 올림픽에서 

개막을 알리는 마지막 성화가 한 남자의 손에 쥐어졌을 때 세계는 숨죽였다.

어둠 속에서 드러난 무하마드 알리는 초점 잃은 눈으로 성화를 잡고 세계에 감동을 안겼다.

미국인이지만 흑인이고 이슬람 교도이기도 한 그가 '파킨슨병'을 안고 걸어가는 모습에서

 '세계는 하나'라는 올림픽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길 수 있었다.

이는 올림픽 기간 내내 196억 명이 TV를 시청한 이유이기도 했다.

 

 

 

 

2002 년 미국 솔트레이크 시티 동계 올림픽에서 토치 랠리에

전달할 성화봉에 불을 붙이는 무하마드 알리 - 2001년 12월

 

그는 1998년에 유엔개발계획의 친선대사로 낙점되었다.

 

 

 

한때 세계 헤비급 복싱 챔피언이었던 후배 복서 마이크 타이슨과 무하마드 알리 - 1995년

 

 

 

영국 출신의 세계 헤비급 복싱 챔피언이었던 후배 복서 레녹스 루이스와 무하마드 알리

 

 

 

이웃 국가로 피난 해온 라이베리아 난민 캠프를 방문한 무하마드 알리 - 1997년 8월 20일 아프리카 서부 아이보리 코스트 산 페드로

 

 

 

영화 알리에서 알리역을 맡았던 헐리우드 배우 윌 스미스와 무하마드 알리

 

 

 

 세계 수퍼 미들급 통합 복싱 챔피언이었던 무하마드 알리의 딸  라일라 알리

 

 

 

스위스 다보스 호텔 로비의 무하마드 알리 - 2006년 1월 16일

 

 

 

올해로 70세 생일를 맞이하여 고향인 켄터키주 루이스 빌의

 

무하마드 알리 센터를 찾은 그의 부인 로니(Lonnie)와 무하마드 알리 - 2012년 1월 17일

알리의 네 번째 부인인 로니 알리는 파킨슨병 환자와 보호자 두 사람이 좋은 삶을 살자면

질병이 주는 스트레스를 인내하는 길뿐이라고 말한다.

 21년 전 알리가 막 파킨슨병 진단을 받았을 때 두 사람은 결혼했다.

그녀는 지체 없이 알리를 간병하는 일에 뛰어들었다.

파킨슨병은 행동을 제어하는 두뇌세포가 기능을 정지하는 진행성 중추신경계의 질환이다.

이 병은 떨림·근육 경직·동작 퇴행·자세 불안정·보행 곤란 등의 증세를 보인다.

처음에 무하마드 알리는 그의 몸이 자신을 파멸시킨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조 페리(락 그룹 에로스미스의 기타리스트)

 

 

 

신디 크로포드

 

 

 

로버트 다비(배우)

 

 

 

데이빗 카퍼필드

 

 

 

켄 노턴 (헤비급 복서,배우) 영화 : 만딩고 출연

 

 

 

크리스 아이작(가수)

 

 

 

크리스 크리스토퍼슨(가수,배우)

 

 

2012년 1월 17일 무하마드 알리의 70 세 생일을

 

축하해주기 위해 참석한 스타들

 

 

 

 

 

 

 

 

 

1996년 미국 애틀란타 올림픽 당시 농구경기를 관전하던중 사마란치 IOC 위원장으로 부터

1960년 로마올림픽 이후 잃어버렸던 금메달을 대신하여

올림픽 위원회에서 마련한 새로운 금메달을 수상한 무하마드 알리

 

 

 

무하마드 알리는1996년 미국 애틀란타 올림픽에 이어 1999년에도 

로마 올림픽 금메달을 선물받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1960년 로마 올림픽 당시 수상했다가

본인에 의해 잃어버린 올림픽 경기의 금메달을

생애 3번씩 받는다는것은 보통 영광스러운 일이 아니다.

 

 

당시 아프리카의 분쟁국이었던 브룬디의 평화회담을 위해 중재에 나선 알리는

1999년 12월 8일 로마에서 마시모 달레마 이탈리아 총리와 회담이 끝난 뒤

 지안니 페트루치 이탈리아올림픽위원회(CONI) 위원장으로부터

60년 로마 올림픽의 모조 금메달을 전달받았었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에 파킨슨씨 병을 앓고 있는 알리는 눈물을 흘렸고

 대변인이자 부인인 로니도 너무 감격적이라며 말을 잇지 못했었다.

알리는 평소 60년 로마올림픽 복싱 헤비급 우승이

자신의 생애중 `가장 위대한 일'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해 왔지만 정작 금메달은 갖고 있지 않았었다.

그는 39년전 18세의 어린 나이에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한 뒤

루이빌의 식당에서 일하라고 강요한 백인 깡패와 싸우고는

분한 마음에 오하이오강에 금메달을 버렸다고 훗날 고백하여 화제를 낳았다.

알리가 받은 모조 금메달에는 `전쟁의 신' 마르스의 아들로

늑대에 의해 길러져 로마를 세운 `쌍둥이 형제' 로물러스와 리머스의 조각이 새겨져 있었다.

알리는 96년 애틀랜타올림픽에서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국제올림픽위원회(IOC)위원장으로부터

받은 명예 금메달도 있지만

그날 받았던 금메달이 더욱 마음에 든 듯 몇번이고 매만졌었다.

 

 

 

림픽 금메달은 감히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

 올림픽 금메달은 문화적 가치라는 차원에서 보호되고 기록되기 때문이다.

올림픽 금메달은 그 분야에서 50억 인구 가운데 최고임을 증명하는 일종의 마패이다

 

금은 다른 금속과는 달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결코 녹이 슬지 않는다.

그래서 금은 그 불변의 가치로 인하여 유사이래 이제까지 인류를 지배해 오고 있다.

 

올림픽 금메달은 직경 6cm, 두께 3mm 이상이어야 한다.

적어도 순도 1000분의 925 이상의 은으로 만들어야 하고 순금이 6g이상 들어가야 한다.

 

알리가 오하이오강에 던져버린 그 금메달 또한 이제까지 올림픽 위원회에서 수여한

금메달과 같이 메달 전체가 순수한 100%의 금으로 제작 되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금과 다른 금속인 은에 금 도금으로 제작했다 해도

그 메달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러한 메달이 강물에 빠졌을시 유속이 빠른 강물에서 하류로 떠내려 갔거나

아니면 메달의 무게로 인하여 강밑의 뻘층에 가라앉아 버렸다든지

아니면 강속의 자갈 사이에 묻혀 있다가

홍수시 하류로 떠내려 가버렸을수가 있는 여러가지 형태로 가정해볼수 있다.

몇 억년의 세월이 지나도 뻘속에서 제대로 자리를 잡으면

공룡 또한 온전한 화석으로 발견이 되어 진다. 

 

캐시어스 클레이가 오하이오 강으로 던져버렸던

인종 차별에 따른 한 미국인의 항의 표시이기도 하였던

 그 금메달은 과연 발견 될수가 있을까 ?

그것은 한국의 속담에도 있듯이

한강 백사장에서 잃어버린 바늘 찾기와 같을 것이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 언젠가 다시 발견될 수도 있을것이다. 

 

 

1960년 로마 올림픽대회에서 무하마드 알리가 헤비급 복싱경기의 우승으로 수여받았던 금메달

 

 

 

 

 

알리가 금메달을 내던진 루이스빌의 오하이오 강

 

 

 

 

 

1974년 자이르공화국의 킨샤사

     자이르공화국: 현 콩고민주공화국

 

스물네 살의 헤비급 챔피언 조지 포먼

세계를 평정한 강펀치의 소유자

 

조지 포먼의 도전자

서른두 살의 노장 복서

 

킨샤사의 빅 매치

모두가 젊은 챔피언 조지 포먼의

승리를 점쳤다.

단 한사람만 빼고

 

나는 빠르다

나는 강하다

나는 복싱보다 위대하다

 

나는 챔피언이다

 

1960

로마올림픽 복싱 라이트헤비급

금메달리스트

캐시어스 클레이

 

그러나

링 아래의 현실은

 

금메달리스트 캐시어스 클레이는

흑인이라는 이유로 식당에서 쫓겨나고

 

나는 금메달을 강가에 던져버렸다.

인간으로서 존중받지 못하는 한

영광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

 

1964

WBC 헤비급 챔피언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

최고의 아웃복서 캐시어스 클레이

 

나는 내가 원하는 챔피언이 되겠다.”

그래서

나는 캐시어스 클레이를 버렸다

 

, 저는 이제 무하메드 알리입니다.

나는 캐시어스 클레이가 아니다

 

클레이는 백인 주인의 성

노예의 이름을 거부하고

스스로 선택한 이름

선택한 삶

 

링 위에서보다

링 아래서 더 많이 얻어 맞았던

 

나는

무하마드 알리다

 

1967

베트남 전 징집 명령 거부

 

왜 내가 나와 내 민족을 공격하지 않는

아들을 공격해야만 하는가

 

1967년 베트남 전 징집 거부로

3년 출전 금지

챔피언 타이틀 박탈

권투선수 자격 박탈

 

나는 당신들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챔피언이 되겠다.”

 

베트콩들은 우리를

검둥이라고 욕하지 않았다

 

베트콩과 싸우느니

흑인을 억압하는 세상과 싸우겠다

 

링 밖에서 빼앗긴

챔피언 벨트를 되찾기 위해

링 위에 오른 서른두 살의 무하마드 알리

 

조지 포먼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펀치를 날릴 것이다

나는 챔피언이다

나는 이긴다

 

8회까지 조지 포먼의 펀치에 맥을 못추던

무하마드 알리는 순식간에 조지 포먼을 KO시켰다

그리고 베트남 전 징집 명령 거부로 빼앗겼던

챔피언 벨트를 되찾았다

 

 

챔피언이란 체육관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챔피언은 자신들의 내면 깊숙이에 있는

소망, , 이상에 의해

만들어진다

  

- 무하마드 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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