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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6. 7. 소책자
행복한 가정
건강한 교회
섬기는 일터
1. 묵상은 이야기다 (권일한)
2. 묵상은 식의주(食衣住)다 (김주련)
출처 : 『묵상을 다시 생각한다』 성서유니온 2026년
1. 묵상은 이야기다
권일한은 초등교사로 30년간 아이들을 가르쳤다.
1) 이야기로 다가온 아이들
교사가 된 첫해, 3학년 아이가 '콧구멍'이란 글을 써왔다. 콧구멍 굴속에 기차가 다닌다는 내용이었다. 깜짝 놀랐다. “우와!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 아이를 가르치려고 교사가 되었는데 내가 모르는 세상을 만났다. 그때 난 아이를 몰랐다. 아이를 만날 날을 기대하며 예상한 아이와 실제로 만난 아이가 달랐다. 그 차이가 호기심을 일으켰다. '아이 마음에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궁금해졌다. “다른 아이 마음에도 글이 있겠지? 어떤 글이 있을까?” 아이 마음에 비친 세상이 보고 싶었다.
글쓰기를 가르쳤다. 일기에 댓글을 써 주었다. 다달이 문집을 만들었다. 1학년 34명을 가르칠 때도, 우리 반 학생이 2명일 때도, 전교생이 5명이던 산골에서도 문집을 만들었다. 아이들 글은 내게 선물이었다. 글 선물을 받을수록 아이 마음에 있는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이야기를 들으려 하자, 아이는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이야기, 몰래 숨겨둔 이야기까지 들려주었다. 어떤 아이는 마음 깊이 감춰둔 이야기를 쓰면서 울었다. 그래서 나는 아이를 글로 기억하는 사람이 되었다.
아이들과 글을 쓰면서 이야기를 만났다. 바닷가 상처 많은 아이들 이야기, 산과 닮은 사람들이 넉넉히 품어 줘서 상처를 아프게 느끼지 않던 산골 아이들 이야기, 감정 표현이 강한 도시 아이들 이야기, 강원도 시골에 온 베트남 엄마가 울면서 지낸 이야기, 그 엄마의 슬픔과 고통을 물려받아 폭발하던 아이가 글을 쓰며 자신을 찾아 간 이야기, 아이 글을 읽어 주면 울컥하던 어른들 모습, 아이 글을 보낸 대회에서 심사위원 소설가가 어떻게 가르쳤기에 이런 글이 나오냐며 연락했던 이야기 … . 아이들 덕분에 이야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다.
2) 이야기에 빠져들면서 희미해지는 규칙
처음에는 성경이 규칙 모음으로 다가왔다. 성경을 읽으면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이 보였다. 아침에 묵상하면서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을 정했다. 하루를 마무리할 때마다 하지 못한 일을 생각했다. 이 과정을 되풀이했다. 그런데 성경에서 이야기를 발견하면서 조금씩 달라졌다. 성경의 인물들이 살아간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완벽하던 사람들이 다르게 보였다. 아브라함은 우유부단했고, 이삭은 소심했다. 야곱은 소심한 아버지를 절대로 닮지 않겠다고 결심한 듯 제힘으로 움켜쥐려 했다. 우유부단하든, 소심하든, 움켜쥐려 하든 계획대로 이루지 못했다. 다윗은 한때 하나님 마음에 합했지만(행 13:22), 왕들의 기록(열왕기)에서는 무능한 모습을 보인다. 그들의 이야기에서 내 모습, 부모의 모습, 이웃의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알게 되었다.
묵상할 때마다 성경은 다채로운 이야기를 보여 주었다. 창세기에 나오는 형제들은 계속 다툰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다. 이스마엘이 이삭을 괴롭힌다. 야곱은 에서와 주도권 다툼을 벌인다. 요셉은 형들에게 미움을 받는다. 이런 모습은 모세와 아론이 나올 때까지 이어진다. 이집트를 떠난 뒤에도 다툼은 계속된다. 다윗과 요나단을 만날 때까지 사람과 사람이, 지파끼리, 민족끼리 계속 다툰다. 히브리 공동체 이야기(구약)는 다툼과 분열의 이야기로 이어졌다. 규칙으로 읽을 때와 다른 이야기다.
'하라', '하지 마라' 하는 규정으로 받아들였을 때는 성경의 인물들이 계속 부딪쳤다. 아브라함이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모습을 변호해야 했고, 다윗이 밧세바를 강제로 취한 뒤에 '내가 주께만 범죄했다'(시 51:4) 하는 내용을 좋게 받아들이려고 끙끙댔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다윗을 변호하려는 마음을 버리고 다윗의 마음을 들으려 했다. 욥은 옳은 사람, 욥의 친구들은 옳지 않은 사람이라고 결론짓지 않았더니 욥의 친구들 말이 더 옳게 보였다. 오히려 욥이 잘난 척하는 속 좁은 사람으로 보였다. 그러다가 욥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게 되었다. 딸에게도 이름을 지어 주는 아버지를 이야기 주인공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아이가 자라면서 단순한 규칙 준수에서 벗어나듯 성경을 이야기로 읽으면서 다채로운 빛깔을 얻었다.
3) 묵상할수록 다른 이야기로 들리는 말씀
성경은 묵상의 빛을 비추면 색이 계속 달라지는 이야기다. 같은 구절이라도 읽는 이의 마음에 따라 내용이 달라진다. 같은 마음으로 읽어도 나이가 들면 이야기가 바뀐다. 같은 나이에 읽어도 함께 읽는 사람에 따라 내용이 새로워진다. 필자의 이야기, 수신자의 이야기, 화자의 이야기, 청자의 이야기가 다르다. 성경을 묵상하면서 들은 이야기가 다른 이야기를 만든다. 그들 사이에 계신 하나님이 각자에게 맞는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들으려고 다가가면 성경은 우리를 이야기로 새롭게 한다.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색깔인 줄 알았던 무지개가 실제로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여러 빛깔이라는 걸 느끼는 순간처럼.
어릴 때 창세기는 하나님이 세상을 만든 이야기였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이 '나처럼 살아라. 그러면 잘된다' 하는 이야기였다. 읽고 묵상하며 다시 읽을 때마다 창세기 빛깔이 달라졌다. 아브라함은 라반을 떠났다. 야곱은 라반에게 돌아갔다. “라반에게 가야 할까, 가지 말아야 할까?” 하며 단순하게 결정하기 어렵다. 아브라함은 자의로 이집트에 갔지만, 가지 말아야 했다. 요셉은 타의에 의해 이집트에 가야 했다. 모세는 파라오에 맞서더라도 이집트를 떠나야 했다. “이집트를 떠나야 할까, 이집트에 가야 할까?”를 넘어서야 했다. 요셉이 이집트 문화에 동화되었기 때문에 가족을 살릴 수 있었던 반면, 이집트 문화에 동화되어 이집트를 그리워하는 백성에게 모세는 하나님의 기준을 알려줘야 했다. “이집트에 동화해야 할까, 배척해야 할까?”를 토론할 수 있지만, 이걸로 한 사람의 삶을 규정지을 수 없었다. 하나님 뜻을 알려면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아야 한다. 그래서 그들의 배경을 그리며 이야기를 들으려 했다.
4) 묵상의 시작, 배경 채우기
묵상을 시작할 때는 내용을 간단하게 한두 줄 요약하고, 오늘 어떻게 살아야 할지 적었다. '글 다섯 편 읽기'나 ‘글 세 편에 댓글 써 주기' 같은 내용이었다. 이야기는 없고 해야 할 목록만 있었다. 그래도 날마다 묵상했다. 말씀을 묵상하지 않으면 아침을 먹지 않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그렇게 10년이 지났다. 16장까지 있어서 16일 동안 묵상하던 마가복음의 묵상 기간이 한 달, 두 달로 길어지다가 일 년이 되기도 했다. 이야기의 배경을 채웠기 때문이다.
“저물어 해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더라”(막 1:32-33). 2000년 전 갈릴리에는 가로등이 없다. 해가 저물면 깜깜하다. 드문드문 희미한 불빛이 집의 위치를 알려 준다. 이 불빛마저도 8시경이면 꺼졌을 것이다. 기름을 넉넉하게 살 정도로 부유한 사람이 적었다. 등불이 없으면 달빛과 별빛만 남는다. 환자를 데리고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깜깜해진다. 이때 사람들이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데리고 베드로 집을 찾아간다. 이천 년 전 갈릴리 마을 풍경을 배경으로 채워 넣으니 말씀이 이야기로 살아났다. 아픔과 고통을 멈춰줄 사람(예수님)이 가까이 있는데도 안식일이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보였다. 발을 동동거리며 안식일이 끝나기를(해가 지기를 기다렸다가 저물어 해질 때 “이젠 됐다. 환자를 이송해도 괜찮겠지!” 하며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이끌고 갔던 현실이 보였다. 더 어두워지면 가지 못할 테니 해가 지려 할 때, 아직 어스름이 남은 때, 안식일이 끝났다고 봐도 되겠다고 생각할 만한 시간에 얼른 환자를 데리고 예수님을 찾아갔다. 예수님은 안식일을 끝내고 진짜 안식을 주셨다.
성경을 다 아는 이야기로 봤을 때는 휘리릭 넘어갔다. 배경이 텅 비어 늘 똑같은 사람을 똑같은 무대에 올렸다. 마가복음 묵상이 16일 만에 끝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아는 것 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당시 사람들이 썼던 생활 도구, 비슷한 시대의 역사적 정황, 성경 이외의 자료에 담긴 당시 모습을 알면서 이야기가 구체화되었다. 산과 들이 보였고, 집과 광장이 만들어졌고, 거리를 지나가고 언덕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에게 옷이 입혀졌다. 갑자기 비가 내려 길이 진창이 되어 버리자, 바퀴가 빠져 움직이기 어려운 아합의 수레를 앞질러 달려가는 엘리야가 나타났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깊은 골짜기 한쪽에 강도 만난 사람이 쓰러진 모습이 보였다. 동화나 소설을 읽으며 인물을 이모저모로 따져본 것도 도움이 되었다.
5) 묵상이 기대를, 기대가 다시 묵상을
<아빠가 오셨습니다> - 이정영 (도계초등학교 1학년)
병원에 갔던 아빠가 오셨습니다. / 아빠 손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습니다. /
하지만 아빠가 오셔서 즐겁습니다. / 한쪽 팔로 저를 안아 주셨습니다. /
빨리 나으세요. / 아빠 사랑해요!
이 글이 어떻게 느껴질까? 사람마다 느낌이 다르겠지만, 나는 '아빠가 오셨습니다'를 '진-하게' 느낀다. 나는 글을 쓴 정영이를 안다. 얼굴, 말투, 표정이 떠오른다. 엄마가 정영이를 데리러 오는 모습이 생각난다. 근무하던 곳도 안다. 정영이가 쓴 다른 글도 안다. 정영이를 알기 때문에 '아빠가 오셨습니다'가 다채롭게 보인다. 성경을 묵상할 때도 비슷했다. 알면 알수록 다채로워졌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보냈다. 복음서는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다. 1학년 아이가 아빠를 기다리다 쓴 글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안아 주신다. 팔을 다쳐 붕대를 감았지만, 한쪽 팔만으로도 아이를 번쩍 안아 올리는 아빠처럼. 아이가 보여 준 글 덕분에 계속 기대하게 되었다. 아이가 쓴 글이 새로운 글을 기다리는 마음을 주었다. 말씀을 묵상하며 이야기가 생길수록 앞으로 만날 이야기에 대한 기대가 커졌다. 묵상이 묵상을 밀고 간다. 30년 동안 계속 묵상한 건, 하나님이 말씀으로 나를 계속 안아 주셨기 때문이다. 십자가 흔적이 남은 손과 발로 말이다. 흔적이 희미해져서 묵상하는 기쁨을 느끼지 못할 때도 있었지만, 다시 이야기가 들릴 거라는 기대는 사라지지 않았다.
6) 삶에 스며든 묵상이 이야기를 바꾸다
묵상하면서 처음 10년 동안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에 관한 책을 몇 권 읽었다. 성경 본문을 설화체(이야기), 강화체(설교), 운문체로 나눈다고 배웠다. 교차대구(대구를 구조적으로 활용한 히브리 표현 방법)를 배웠다. 바울의 편지를 받은 지역의 상황과 주요 역사를 알았다. 이어지는 10년 동안 묵상이 깊어졌다. 이때부터 성경 말씀이 이야기로 다가왔다. 옳고 그름보다 사람이 보였다. 묵상하면서 사람의 마음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리고 묵상이 내 삶의 이야기를 바꾸기 시작했다.
2012년 7월 15일, 강원도 삼척시 소달 마을 은총교회에서 가스가 폭발했다. 사모님이 돌아가시고 아이 9명이 중화상을 입었다. 때마침 나는 2013년 동해시에서 삼척으로 학교를 옮겨 신동초등학교로 발령이 났다. 그런데 장학사가 소달초등학교로 옮겨 달라고 했다. 고생해야 하는 자리여서 아무도 가지 않으려 했다. “교회에서 가스가 폭발해서 목사 사모님이 죽었다면, 사람들이 교회를 어떻게 생각할까? 미신을 믿는 산골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1초도 안 되는 짧은 순간에 이런 생각이 들면서 내가 가야 할 곳이라고 생각했다. “권일한이 착해서 학교를 옮겼다고 대답한다면 가지 않겠습니다. 장학사님 입으로 권일한이 예수님 때문에 갔다고 말해 주세요. 그럼 소달초등학교로 갈게요” 하고 대답했다.
말씀을 꾸준히 묵상하지 않았다면 이런 생각이 들지 않았을 것 같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학교가 교회라고 생각했다. 아이들을 섬기는 게 예배라고 생각했다. 상처 입은 아이를 위로하고, 가난한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고, 경쟁에 지친 아이에게 쉴 틈을 주고, 아이와 함께 놀고, 웃고, 글을 쓰면서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게 예배라고 생각했다. 이런 예배를 드리면서 아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학교를 교회라 생각하는 시선은 하나님이 내게 들려주신 이야기의 결과였다. 그 시선은 보이는 상처인 화상보다 보이지 않는 더 큰 상처를 보게 했다. 그래서 많이 힘들었고, 나도 많이 아팠다. 예상하지 못한 고통을 만났다. '내가 아파야만 아이들이 낫는구나' 하는 깨달음 속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조금은 알게 되었다.
7) 삶이 된 이야기
내겐 이야기가 있다. 아이들이 손으로 쓴 이야기, 하나님이 묵상으로 들려주신 이야기, 시간이 지나면서 힘든 기억도 아름다운 이야기로 바뀌었다. 묵상을 나누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듣던 이야기와 달라서 좋다고, 생각하게 된다고 했다. 교회에서, 교사 모임에서, 기독교사 대회에서, 여러 곳에서 묵상을 나누었다. 내 이야기를 들은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새롭게 보고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길 바랐다. 앞으로도 계속 나눌 수 있을지 모르겠다. 꼭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꼭 들려주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커졌다. 여유로워졌는지, 희미해졌는지 알 수 없다.
묵상은 사람마다 다르다. 하나님은 인격이시고, 우리 인격에 반응하신다. 내겐 이야기를 들려주신 하나님이 다른 사람에겐 다른 방식으로 말씀하신다. 누구에겐 규칙으로, 누구에겐 느낌으로, 누구에겐 불처럼 말씀하셨을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은 사막에서 묵상하는 수도자가 되어야 했고, 다른 사람은 무리 속에서 사역자가 되어야 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었고, 바울은 돌에 맞고도 살았다(행 7:54-60; 14:19-20). 스데반과 바울은 하나님 이야기의 한 부분이 되었다. 나도 그렇고 여러분도 그렇다.
2. 묵상은 식 의 주(食 衣 住)다
김주련은 성서유니온에서 매일성경 책임편집과 출판국장, 대표를 역임했다.
1) 들어가며
의식주(衣食住)는 인간생활의 기본 요소라고 부를 만큼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수적이다. 아무리 인류 문명이 발전하고 우리 삶이 놀라운 변화를 이루어도 이 요소들 없이는 살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主)로 믿어 새롭게 태어난 그리스도인에게도 이와 같이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있다. 그리스도인의 의식주,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를 믿어 이전보다 좀 더 나은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질적으로 완전히 달라진 새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다. 옛 것(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은 지나갔고, 이제 새로운 정체성을 지닌 새로운 존재로 살게 되었다(고후 5:17). 새 사람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나면서 새로운 영적 기관이 열리고, 새로운 영적 감각이 주어져서 새롭게 보고, 새롭게 듣고, 새롭게 깨닫게 되었다. 이는 저절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야 가능해지는 일이다. 갓 태어난 아기의 생존과 건강한 삶을 위해 부모의 절대적인 손길이 필요한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난 그리스도인도 하나님의 양육을 받아야만 살 수 있다.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자녀를) 양육하라”(엡 6:4)는 바울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의 자녀를 향한 하나님의 양육은 날마다 허락하시는 말씀을 통해 이뤄진다. 말씀이 곧 그리스도인의 양육에 필요한, 먹어야 할 음식이요, 입어야 할 옷이며, 머물러 살아야 할 집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의 식(食)의(衣)주(住)를 생각해 보려고 한다.
2) 묵상, 말씀을 먹다 (食)
나이가 지긋하신 어른들은 자녀에게 전화를 하거나 아랫사람들에게 인사할 때 자주 “밥은 먹었니?”라고 묻는다. 이는 하루 세끼 밥을 먹기 힘들던 시절에 일상을 잘 살아가고 있는지 확인하는 질문이면서 지금이라도 밥을 챙겨 먹고 힘내라는 격려의 말이기도 하다. 한국성서유니온도 설립 초기인 1970년대에 “아침을 잡수셨읍니까?”라는 표어와 함께 작은 배지를 만들어 성경묵상을 홍보했다. 여기엔 중의적인 의미가 있다. 아침식사도 하지 못하고 출근부터 서둘러야 했던 시기에 아침을 챙기라는 따뜻한 인사이자, 당시 부흥회와 기도로 크게 성장한 한국 교회의 성도들에게 매일 아침 개인적인 성경읽기와 기도를 통해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을 갖자는 제안이었다.
아침식사에 대해 언어철학자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그의 책 「일방통행로」에서 이렇게 말했다. “하루와 마주치기를 꺼려하는 사람은, 사람에 대한 두려움에서든 아니면 내면의 집중을 위해서든 식욕을 느끼지 못한다. 따라서 그는 아침식사를 물리친다. 그만큼 그는 밤의 세계와 낮의 세계 사이의 단절을 회피한다. … 아무것도 먹지 않은 사람은 마치 잠꼬대하듯이 꿈을 이야기한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 아침을 먹지 않은 사람들은 하루 종일 제대로 걷지 못하고 잠꼬대하듯 환상 속에서 살아간다. 이것을 차용하여 그리스도인에게 적용한다면 매일 아침, 성경을 먹지 않고 하루를 산다는 것은 낮에 속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밤의 세계에 머물러 있음과 다름없다. 좀 더 심하게 말하면 살아 있다고 하지만 실상은 생명이 없는 좀비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 그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쓰러지리라”(암 8:11-13)고 말한 아모스의 예언처럼, 지금 우리 시대는 말씀의 기근, 계시의 굶주림으로 저마다 목이 마르고 허기져서 좀비처럼 비틀거리고 있다. 몸으로는 살아 있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영으로는 죽은 시체처럼 생명의 말씀을 듣지도 못하고 선한 일을 행할 의지도 없어서 죄의 노예처럼 부림을 당하고 있다. 죽은 자들이 살아나는 일은 생명의 말씀을 들을 때 가능하다.
우리 주님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 5:25)고 말씀하시고 이어서 오병이어로 굶주린 사람들을 흡족히 먹이셨다. 성경 곳곳에는 말씀으로 죽은 자를 살리고 이어서 음식을 먹게 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고 소녀에게 먹을 것부터 주라고 하신 주님처럼, 유두고라는 청년을 살리고 함께 음식을 먹은 바울 사도처럼, 그리스도인인 우리 역시 비틀거리는 이 시대에 생명의 말씀과 함께 먹을 것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 먼저 실의와 낙담에 빠진 제자들을 향해 떡과 생선을 구워 놓으시고 “와서 조반을 먹으라”(요 21:12) 초청하신 주님의 식탁에 즐거이 참여하고, 이제 그 식탁의 은혜를 맛본 자로서 우리도 이 세상의 아침을 알뜰히 챙길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소리는 ‘내 새끼 목구멍에 밥 넘어가는 소리’라는 말이 있다. 가난하던 시절에 자녀들이 둘러앉아 밥 먹는 소리야말로 부모의 귀에 가장 달콤하고 아름답고 행복한 소리였다. 이는 가난한 시절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요즘 부모도 자녀의 입에 음식이 들어가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본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상 모든 부모의 마음이 같을 것이다. 그런데 만일 내 새끼에게 먹일 음식이 없거나 음식이 있어도 먹을 수 있는 처지가 안 되어 음식을 먹지 못하는 경우라면 부모는 마음이 아프다 못해 창자가 끊어질 듯한 고통을 겪을 것이다.
복음서에서 마태와 마가는 각각 예수님이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일을 기록하면서 빈들에서 먹지 못하고 굶주린 사람들을 바라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며 먹을 것을 마련하셨다고 했다. 여기서 ‘불쌍히 여기셨다’는 말은 예수님의 창자가 아리고 아프다는 뜻으로, 사랑하는 자녀를 향한 부모의 애끓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사랑하는 자녀가 제때 먹을 것을 먹지 못하고 있는 모습은 부모에게 창자가 끊어질 만큼 아프고 쓰린 고통이다. 하나님도 우리가 제때 먹어야 할 영적인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잘 챙겨 먹기를, 그래서 제 나이에 걸맞게 성장하기를, 마침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기 (엡 4:13)를 애끓는 마음으로 바라보신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 목구멍에 때마다 말씀이 넘어가는 소리가 하나님의 귀에도 가장 듣기 좋은 소리가 아닐까.
성경을 묵상한다는 것은 우리가 음식을 먹을 때 오감을 사용하는 것처럼 적극적인 섭식활동이다. 성 빅토로의 후고(Hugonis de Sancto Victore)를 해설한 책 『텍스트의 포도밭』에서 이반 일리치(Ivan Illich)는 “대학 이전의 수도원은 중얼거리고 우걱거리는 사람들이 사는 것으로 묘사되었다”고 하면서 이 시기에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수사는 새김질하는 소에 비유되었다고 했다. 또한 눈으로만 읽으면서, 입으로 읽는 읽기가 모든 감각에 영향을 줄 때 생겨나는 경험을 잃어버렸고 맛과 냄새를 표현하는 어휘도 시들고 움츠러들었다고 했다.
성경 읽기를 음식을 먹는 행위에 비유한 것은 음식을 입에 넣고 씹는 것처럼 단지 성경을 입으로 중얼거리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을 것이다. 음식이 몸 안에 들어가 소화되면서 얼굴이 환해지든지 배를 앓든지 어떤 신체 활동을 일으키듯이, 입으로 소리 내어 읽은 말씀이 우리 삶에 분명한 변혁을 일으키는 것을 의미했다. 이반 일리치는 같은 책에서 “배움의 시작이 읽기에 있지만, 그 절정은 묵상에 있다”고 한 후고의 가르침을 설명하면서 신체 활동으로서의 전인적인 성경 읽기를 언급했다. 즉 우리가 성경을 읽고 묵상한다는 것이 단순히 눈으로 텍스트를 따라 읽어 가는 것에서 그칠 수 없는 일임을 분명하게 깨닫게 하는 기록들이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일은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연결되어서 말씀과 상호 작용한 결과로 삶의 변혁을 이뤄 내고야 만다.
먹는 것으로서의 성경 묵상은 성경 읽기가 피상적일 수 없고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이뤄져야 할 인격적인 일임을 드러낸다. 이는 우리가 아직 어릴 때는 젖과 같은 음식으로 흡족했지만 점점 자라면서 이유식도 하고 단단한 음식을 먹는 것처럼, 영적으로 성장할수록 입에는 꿀같이 달지만 먹은 후에 배에서는 쓰디쓴 하나님의 말씀도 받아먹어야 함을 의미한다. 국제성서유니온의 성경 읽기 코디네이터였던 폴린 호가스(Pauline Hoggarth)가 『세상 속으로 들어온 말씀』에서 클라우디오 에틀(Claudio Ettl)의 요한계시록 10:8-11 주석을 인용한 내용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가능한 모든 감성을 동원하여 삼키고 받아 들기를 원한다. 그러나 또한 말씀은 결코 쉽게 소화되는 음식도, 미리 조리된 인스턴트식품도 아니다. 꼭꼭 씹어서 소화시켜야 하며 열심히 소모시켜 체화시켜야 한다. 처음에는 이해할 수 있는 것 같고 쉽게 이해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최종적으로 그것을 삼키면, 격렬한 복통을 유발하고 우리 내면의 평화를 뒤흔들고 파괴해 버릴지도 모른다. 말씀은 우리가 무관심한 상태로 머물러 있도록 놔두지 않는다. 우리를 점령하여 반응하게 만든다. 불편한 질문을 제기하고 행동하게끔 도발할 수도 있다.】
밧모섬의 요한과 마찬가지로 그발 강가의 에스겔도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라는 지시에 따라 두루마리 책을 받아먹었는데, 그 책의 안팎에는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어 있었다(겔 2:8-10). 아담과 하와가 먹었던 에덴동산의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에스겔은 입에서 달지만 배에서는 쓴 말씀을 삼키고 자기 백성에게 가서 두려움 없이 그 말씀을 전했다. 사도 베드로가 권면한 말씀처럼 우리가 날마다 “갓난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여 우리의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는 것(벧전 2:2)과 함께, 믿음의 연수에 따라 히브리서 기자의 권면처럼 단단한 음식을 섭취함으로써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로 성숙해 가야 한다(히 5:14). 프랑스의 철학자 루소는 『에밀』에서, 사람이 두 번 태어나는데 처음은 생존하기 위해서 태어나고 그 다음은 생활하기 위해 태어난다고 했다. 생존에서 생활로 넘어가는 것을 성숙이라고 본다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도 말씀 묵상이 깊어질수록 생존 차원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선한 생활의 수준을 이루는 삶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생존에서 생활로 넘어가는 성숙에는 개인적으로 말씀을 먹는 것과 함께 공동체와 더불어 먹는 식사가 필요하다. 식구(食口)의 사전적 의미인 ‘한 집에서 함께 살면서 끼니를 같이하는 사람’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같이 먹는 영적인 식구들 가운데 둘러싸여 있어야 한다. 예수님이 누가복음에서 친히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눅 8:21)이라고 하신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같이 먹고 사는 식구가 필요하다. 가족이란 핏줄과 함께 입맛을 나누는 사이다. 오랜만에 가족을 만나면 서로 어릴 적 입맛을 공유하고 있음에 반가워하며 그 음식을 지금은 어디서 구할 수 있는지 정보를 나누곤 한다. 우리 묵상 나눔이 이처럼 끈끈한 말씀의 입맛을 서로 공유하며 함께 울고 웃을 수 있는 하나님 자녀들의 친밀하고도 풍성한 모임이기를 소원해 본다. 누구보다 부활하신 우리 주님이 오늘도 우리와 더불어 먹으며 이 나눔을 친히 이끌어 주실 것이다.
3) 묵상, 말씀을 입다(衣)
먹는 것과 더불어 새로 태어난 생명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옷이다. 옷은 단지 몸을 가릴 뿐 아니라 외부의 여러 환경으로부터 몸을 보호한다. 또 필요에 따라 자신의 매력을 표현하거나 신분을 나타내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성경 묵상이 매일 옷을 입는 것처럼 말씀을 입는 일임을 성경 속에서 발견한다. 먼저 성경은 “그리스도와 합하여 새로 태어난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말한다(갈 3:27).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는 표현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성품으로 덧입는다는 말이다. 또한 사도 바울의 설명처럼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는 것이다”(고전 15:53). 아침에 일어나서 일상적으로 행하는 일인 옷 입기처럼 그리스도로 옷을 입고 죽지 아니함을 입는 일이 우리 삶에서 어떻게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이뤄질 수 있을까? 매일 아침 성경 묵상을 통해 우리는 죄와 사망에 노출되지 않고 생명의 보호를 받는 은혜를 경험할 수 있다. 다윗의 생명이 하나님과 함께 생명 싸개 속에 싸였을 거라는 아비가일의 고백(삼상 25:29)처럼, 그리스도인은 묵상과 함께 하나님의 생명의 옷에 둘러싸여 원수들의 공격에도 안전하다.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에 반역함으로써 자신들의 벗은 몸을 발견하고 상실감과 부족감에 몸을 떨었다. 그리고 벗은 몸을 가리기 위해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 무화과나무 잎으로 옷을 해 입었다. 하지만 그 수고롭게 해 입은 옷은 아담과 하와의 죄를 가릴 수 없기에 그들은 오히려 부끄러움과 두려움으로 숨고 말았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기까지 말이다.
성경 묵상은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몸을 내어 주시고 우리 부끄러움을 완벽하게 덮어 주신 그리스도로 옷 입는 시간이다. 묵상을 통해 그동안 육체의 정욕을 채우려고 했던 생각을 멈추는 훈련을 하며(롬 13:14), 텍스트 속에서 우리가 어떤 신분에 걸맞은 옷을 입고 있는지 발견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확인한다. 매일 아침 거울을 보고 우리 겉모습과 옷매무새를 정돈하는 것처럼 말씀 묵상을 통해 우리 속사람과 그리스도인다움의 존재미를 더욱 빛나게 다듬는다.
옷은 신분과 함께 삶의 방식을 보여 주는 방편이기도 하다. 바울 서신에서 “빛의 갑옷을 입자”(롬 13:12), “그리스도로 옷 입고”(롬 13:14),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엡 4:24),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엡 6:11),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골 3:9, 10)와 같은 그림 언어는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 삶의 방식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것을 강조하여 보여 준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매일 성경을 묵상한다는 것은 하나님 집안의 양식을 따라 만든 옷을 입는 것이다. “장미는 스스로 그 향기를 광고하지 않는다”는 말처럼, 말씀을 묵상하면서 새로운 존재로 빚어진 오늘 우리 생활 방식이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 줄 것이다. 묵상을 통해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이라는 옷을 입었으니 우리의 말이나 행실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매력이 드러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침내 그리스도의 신부로 단장한 흰 옷을 입고 주님을 맞이할 때까지, 매일 묵상을 통해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의 옷을 입는 연습을 한다. 또한 우리를 삼키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악한 세력을 향해 하나님의 전신갑주라는 말씀의 옷으로 단단히 무장하는 일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매일 묵상은 이처럼 세찬 바람 앞에 우리가 알몸으로 나가지 않고 단단히 옷을 갖춰 입고 나가는 의식이다. 우리가 완벽하게 갖춰 입은 전투복만 보고도 적들은 일곱 길로 도망칠 것이다.
4) 묵상, 말씀에 거하다(住)
새끼를 밴 암컷에게서 볼 수 있는 '둥지본능'(nesting instinct)이라는 현상이 있다. 새로 태어날 새끼를 위해 새들은 나뭇가지를 가져다가 둥지를 틀고, 강아지들은 새끼를 눕힐 바닥을 평평하게 만들고, 고양이들은 부드러운 천 조각 등을 모아 둔다. 모든 생명 있는 존재들이 자손의 번식과 생존, 안전을 위해 피난처의 중요성을 본능적으로 알고 미리 준비한다. 하나님은 택하신 자기 백성을 황무지에서 호위하고 보호하며 지키기 위해 마치 독수리가 자기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업는 것같이 인도하셨다(신 32:10, 11). 그리고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 주셨다(골 1:13). 이제 아들의 나라가 우리 거주지다. 그 나라는 그리스도 말씀의 통치로 이뤄지는 곳이기에 매일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순종하는 것이 그 나라 백성이 살아가야 할 자연스러운 둥지본능이다.
성경 묵상은 그 말씀에 거하는 것이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6, 17)고 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하는 삶은 말씀을 묵상하는 삶이며, 그 말씀을 궁금해하고 곰곰이 생각하고 되새기는 일을 한동안 계속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삶에 틈입하여 우리 생각과 행동을 간섭하고 영향을 주면서 기어
코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다.
5) 지나가며
몇 년 전에 한국성서유니온선교회의 초대 총무이신 윤종하 장로의 전기를 쓰기 위해 적잖은 분들을 만나 인터뷰를 했다. 대화 중에 가슴을 크게 울렸던 것은 성서유니온의 묵상운동을 설명하는 “신앙생활에서 생활신앙으로”라는 표현이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 성도의 신앙이 교회라는 공간, 주일이라는 시간 안에서만 일어나는 특정 종교행위가 되지 않고, 일상생활의 모든 터전, 모든 시간에서 역동적으로 발현되기를 소망한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먹고 자고 놀고 일하는 생활의 모든 영역이 하나님 말씀의 다스림을 받는 것이 곧 묵상 운동의 핵심이다.
“복되어라. 매일 아침 성경을 열어 간밤에 차려 주신 이슬처럼 맺힌 말씀을 음미하며 빛의 옷을 입고 온종일 말씀 안에 거하는 삶이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