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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국경과 접하는 고 철주는 혼하와 경계인 봉집현
봉집현은 현재 봉집보로 남아있습니다. 고대사에 등장하는 지명들이 그 위치가 많이 바뀌는 관계로 확신
하기는 어렵지만 이 정도의 흔적이 남아있다는것이 다행입니다.
사서의 기록에는 현 철령의 은주에서 동남이라고 하였었는데 실재로 찾고보니 서남방입니다.
요양의 동북이고 심양의 서남쪽 방향입니다. 주변에는 특히 탑산들이 있고 석묘(石廟)등이 보입니다.
동단국의 능묘들이 있어 봉집(奉集)이란 지명이 붙었을까요. 봉집은 능묘를 뜻합니다.
개원에 철령위를 세우기전 철령위의 1차 위치는 다음에 보는바와 같이 그 연혁을 대충 알 수 있습니다.
鐵嶺衞 【 今縣治】 原志 洪武二十一年三月以古鐵嶺城置 二十六年四月遷於古嚚州之地 即今治也南距都司
二百四十里
철령위 지금 현에서 다스린다. 원 지 홍무 2십 1년 3월 옜철령성을 두었던 곳으로부터 2십6년 4월에 옮겨
왔는데, 예전의 嚚州(은주)로 지금의 치소이다 남으로 都司(도사)와 2백4십리 떨어져 있다.
--- 盛京疆域考卷六
그러면, 옮겨오기전의 철령성은 어디에 있었나!!!!
《鐵嶺縣志》
按遼東舊志古鐵嶺城在今治東南五百里地接高麗界明洪武二十一年即彼地為衞二十六年移衞於此即古銀州地
也在遼河東挹婁北
遼東舊志(요동구지)를 살펴보면, 옛 철령성은 지금 치소의 동남 5백리로 고려계에 접하며 명 홍무 2십1
년의 그(저) 땅이다.
2십6년에 衞(위)를 옮겼는데.즉 옛 銀州(은주)로 요하 동편 읍루(挹婁縣) 북쪽에 위치한다.
*사실 알고싶은건 명나라가 1차로 설치했던 철령성의 지명인데 막상 지명은 안나오네요.
알고싶은 이유가 당시 고려의 국경선을 확인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거란지리지도> 명나라가 초기 철령위를 설치했던 위치는 동경도사(요양)의 남쪽에 있던 은주와 철주로
요양에서 약 240리 거리에 있는것으로 보입니다.
이곳을 <요동구지=遼東舊志>에서 고려국의 경계에 접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곳은 옮겨간 개원(요양북쪽 240리)의 고은주(古銀州)에서 약 500라고 한것입니다.
옮겨간 철령위 은주는 요하의 동쪽이고 읍루의 북쪽이라고 하였습니다.
요양에서 해주까지 120리, 해주에서 개주까지 120리입니다.이 지도에서 지명이 공백으로 남아있는
부분이 당시 고려 영토였고, 이 고려영토는 점차 거란에 밀려 남하합니다.
원으로 표시된곳이 <서북피아양계도>의 선춘령 위치입니다.
세종조에 이곳에 설치되었던 4군6진을 패하자 여진이 개원과 철령지방을 공략하고 남침을 시작합니다.
이들이 명군과 접전을 벌린곳이 북옥저가 있던 무순의 북쪽 살이호였습니다.
명군은 이 전투에서 패하여 요동반도의 서쪽인 개주.복주.금주등을 통하여 철군합니다.
명나라는 천산산맥의 서쪽을 먼저 확보하였으나 동쪽에 있던 봉황성등은 미쳐 확보를 못하여 양승지가
상소를 올릴무렵 봉황성 위를 설치하겠다고 통보한것입니다.
요동반도를 영위하던 고려나 조선의 자료들이 모두 말살되고 왜곡되어 정사의 기록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고려사47~55권=우왕편)
이 지도의 금주.복주.개주 명나라의 위가 먼저 설치되었던 곳입니다.
요동반도의 남쪽으로 장전과 관전이란곳이 남옥저의 위치인 대고산입니다. 이곳은 고려영으로 추정합니다.
17~8세기 작성된 《서북피아교계도(西北彼我交界圖)》을 통해서 본 만족의 굴기
1. 글 머리에
어떤 분께서 17~8세기에 작성된 한 장의 빛바랜 《서북피아교계도(西北彼我交界圖)》를 공개를 한 것을
화면을 확대하여 살펴 보니 필자가 이미 《만주원류고》를 통해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는 만주족의 굴기와
관련된 인명 · 지명 · 관명 등이 나올 뿐만 아니라 거기에 적힌 내용이 시시때때로 격변하던 명말 청초의
만주 일대의 정황을 그림과 같이 소상하게 설명해 주고 있어 이 자료는 만주족이 처음 일어났을 때 우리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던 이들은 어떤 함의를 가지고 있는지 일단 깨알같은 원문을 판독하여 우리말로 자세
하게 해석을 하여 이 자료는 어떤 의의와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를 순차 논급하려 한다.
2. 지도상에 기록된 주된 원문판독 및 소개
寧古塔, 卽肅愼氏遺墟也。 漢 · 唐以前, 東北無强國, 遼東西太半, 爲我疆土, 而白山內外諸種落, 多服屬於我。
自女眞滿滿起於鏡泊, 代宋而主中夏是爲金人. 及夫, 被元人之驅逐東歸, 則餘黨散處於豆萬 · 鴨綠二江之西
·北, 或稱野人, 或稱番胡。 北則尼蕩介, 西則李滿住。 其大者. 女眞, 有熟女眞 · 生女眞之別。 至皇明萬歷,
生女眞董山一派, 始於建州衛, 統屬毛麟衛左衛 · 右衛等種落。 而我國之廢四郡, 密通之故, 騙受其弊。 所以
廢也, 洪他失北上, 而自開原定瀋陽, 東下而拔遼陽稱盛京, 建州稱興京, 遼陽稱東京, 寧塔以西, 幷據而有之,
百戰於大 · 小凌河之間。
崇貞末, 入主中夏, 而建州陵墓所在, 老城宗族所居, 故其所制置興盛京無異云。 遼野以東列置三將軍, 其一
鎭守奉天等地方而坐瀋陽,, 其一鎭守寧古塔等地方坐船廠, 其鎭守黑龍江等地方而坐艾滸城, 秩皆一。 各統滿
州固山大四員。 康熙末年, 置憂黑龍江以北蒙古故可設白度納大將一員。 白度納城在宋花江之西烏喇之北。
遼瀋, 古揖婁國, 唐置瀋州, 遼改爲興遼軍. 大明洪武始置, 天啓爲淸入所有, 改衛奉天府, 亦曰盛京, 置五部衙
門而獨不置吏部。 又置將軍一員, 昇天府尹一員, 昇德府知縣云。
奴兒哈赤攻遼東, 久不下, 及其拔也,。列立鐵騎, 毁其城甎, 馬上遞傳, 一夜之間, 移築新城於水北, 故號曰馬
上城云。
(영고탑은 곧 숙신씨의 유허다. 한 · 당 이전에 동북 지역에는 강국이 없어 요동 · 요서의 태반이 우리의
강역이었으며, 백두산 안팎의 여러 부락이 우리에게 속한 것이 많았다.
요나라 사람들이 늘쌍 말하기를 여진족이 1만명이 차면 어느 누구도 대적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그 군사가
1만 명에 이른 때로부터 경박호(鏡泊湖)에서 흥기하여 송(宋)나라를 대신해서 중원의 주인이 된 것은
금나라 사람이다.
그러나 원나라 사람들에게 쫓겨나 동쪽으로 돌아와서 그 여당들이 두만 · 압록강 이 두 강의 서쪽과 북쪽
에 흩어져 살게 되었는 바, 혹은 야인(野人), 혹은 번호(番胡)로 일컬어졌다.
북쪽은 이탕개(尼蕩介)가 서쪽은 이만주(李滿住)가 그 가운데 강자였다.
여직(女直: 요나라 때 흥종의 이름이 耶律宗眞이므로 이름 자를 피해 '女眞'을 '女直'으로 고쳐 썼다)에는
생여진(生女眞)과 숙여진(熟女眞)의 구별이 있었다.
명나라 만력(萬曆)에 이르러 생여진의 동산(董山) 일파가 건주위(建州衛)에서 처음으로 모린(毛麟) 좌위 ·
우위 등의 부락을 통솔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사군(四郡)을 없애고 나서 은밀하게 통하려고 한 까닭에 고스란히 그 폐해를 당하게
된 것이다.
사군을 폐했기 때문에 홍타시(洪打失: 청태종을 말함)가 북으로 올라가 개원(開元)으로부터 심양(瀋陽)을
평정하고, 동쪽으로 내려가 요양(遼陽)을 탈취해서 성경(盛京)이라 하였으며, 건주(建州)를 흥경(興京)
이라고 하였다.
요양은 동경(東京)으로 일컫던 곳으로 영고탑(寧古塔) 이서는 모두 이들의 차지가 되었다.
대 · 소능하(大小凌河) 사이에서의 크고 작은 수많은 전투를 통해 숭정(崇貞) 말에 중원으로 쳐 들어가
주인이 되었다.
허나 건주(建州)에는 청실 선대들의 능묘들이 소재하고 있거니와 노성(老城)에는 종친들이 살고 있어
그곳에 둔 제도는 성경(盛京)과 다름이 없다고 한다.
요동의 들판 동쪽으로 장군 세 사람을 두었는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은 심양(瀋陽)에 치소를 두고 봉천
등지를 진수하며,
또 다른 한 사람은 선창(船廠: 길림에 선박건조소가 있어 선창으로 불렸음)에 치소를 두고 영고탑 등지를
진수하며, 또 다른 한 사람은 애호성(艾滸城)에 치소를 두고 흑룡강 등지를 진수했는데 이들의 직품은
모두 1품(品)으로 만주(滿州) 고산대(固山大) 4명씩을 통솔했다.
강희(康熙) 말년에 흑룡강 이북의 몽고가 가장 염려되었기 때문에 백도납(白度納) 한 사람을 더 두었다.
백도납성(白度納城)은 송화강 서쪽, 오라(烏喇)의 북쪽에 있었다.
요심(遼瀋)은 옛 읍루국으로서, 당나라 때에는 심주(瀋州)를 두었고, 요나라 때에는 고쳐서 흥료군(興遼軍)
이라고 하였다.
대명 홍무 때 처음으로 요심(遼瀋)을 두었으며, 천계(天啓: 명 희종, 재위 1621~1627년) 년간에 청나라
소유로 편입되자 위(衛)를 고쳐 봉천부(奉天府)라 하고, 다른 이름으로 성경(盛京)이라고 하였다.
여기에 5부 아문을 두었는데 유독 이부(吏部)는 두지 않았고, 또 장군 1명, 승천부윤(承德府尹) 1명, 승덕
부지현(承德府知縣) 1명을 두었다고 한다.
누르하치(奴兒哈赤)가 요동을 공격하여 오랜 동안 함락시키지 못하다가 그곳이 함락되자 철기병을 늘어
세워 그 성의 전돌을 허물고 말 위에 져다 날라 하룻밤 사이에 수북(水北)에 새로운 성을 옮겨 쌓았다고
하며, 그래서 마상성(馬上城)이라고 한다는 말이 있다.
3. 이해하기 어려운 말 풀이
여기에 나오는 지명이나 인명은 청사고나 중국 인명 사전을 찾아보면 알아 낼 수 있으나 처음 접한 말이
있는데 바로 고산대(固山大)라는 말이다.
《청사만어사전(淸史滿語史典)》에 의하면, "고산대(固山大)는 고산달(固山達)로도 쓰며 만주글자로는
gusa i da 이다. gusa(固山)은 만주 팔기 가운데의 하나를 이르는 말이요, i는 소유격 조사인 '의'와 같은
말이며, da(大)는 두목 · 수령 · 뿌리 · 근본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중국어로는 기(旗)의 두목이란 뜻이며, 중국 명칭으로는 협령(協領)이라는 관명이라고 할 수 있다.
청나라가 입관한 뒤에 각지의 주방군대를 정식으로 장군 · 부도통 등으로 편제 하였는 바, 고산대는 한자
로 협령이라는 관제를 정하였으니 곧 주방협령(駐防協領)이요, 정사품이었다."
(상홍규외, 《청사만어사전(淸史滿語辭典)》, 상해고적출판사, 99쪽 참조)
4. 이 지도의 의의 및 가치
이 지도에는 청나라가 굴기 할 때의 전 과정은 아니지만 그 일부의 연원과 발전을 언급하면서 청나라가
그곳에서 일어난 것은 우리가 사군을 폐했던 것에서 먼 원인을 찾고 있다는 사실이다.
잘 아시다 시피 세종 때 4군 6진을 개척하여 여진족들을 효과적으로 대처해 오다가 이를 지탱하기 위한
부담이 너무 커서 사군을 폐한 일은 우리가 다 알고 있었다.
오늘날의 심양지역이 옛날 읍루의 지역임을 말하고 있으며 읍루는 바로 만주족의 선대라고 하는 족칭이다.
《환단고기》에서 위서 논란에 휩싸인 영고탑(寧古塔)과 관련하여 이곳은 숙신씨(肅愼氏)의 유허라고
말하여 이는 우리 고대사와는 전혀 관계 없는 것으로 보여진다.
우리가 흔히 민족의 영산이라고 하는 백두산을 백산(白山)이라고 부르며 그 안팎은 우리나라에게 복속된
곳이 많다고 하는 점에 대해서는 이해가 가지만 한 · 당 이전에 요동 · 요서는 힘센 놈이 별로 없어 우리의
강역이었다고 한 점에 대해서는 꼭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으로 우리에게 매우 고무적인 부분으로
생각된다.
청태종의 이름이 사패륵(四貝勒) 또는 황태극(皇太極) · 홍태시(洪台時, 박지원의 《열하일기》) 등으로
알려졌을 뿐인데 홍타실(洪他失)이라는 이름이 여기에 등장하고 있어 학계에 알릴 만하다.
누르하치(奴兒哈赤)의 표현에 관해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노추(奴酋) · 노을가적(奴乙可赤) 등으로
써왔는데 여기서는 정확한 명칭을 써주고 있다는 데 있다.
이 글의 전체적인 내용은 글 맨나중에 운(云)이라고 하여 당시에 담당 관리가 수집한 정보나 첩보에 근거
한 것으로 보이는데 조선시대 변경지대에 근무하는 관리 등의 정확한 정보파악능력이라든가 그렇게 파악
된 정보를 유사시에 이용할 수 있도록 자세한 지도를 상세히 만들어 둔 것은 유비무환의 정신을 일깨운
것으로 높이 살 만하다고 하겠다.
명나라 때 쓰여진 《요동지(遼東志)》라는 방지는 《요해총서(遼海叢書)》라는 방대한 요동관련 자료
가운데 들어 있다고 하는데 거기에는 북경(北京)에서 산해관(山海關)까지가 670리, 산해관(山海關)에서
심양(瀋陽)까지가 810리로 기록되었다고 한다.(리지린, 《고조선연구》, 백산자료원, 17쪽 참조) 이 지도
에도 산해관이란 곳이 그려져 있고 거기에는 "북경까지 675리(至燕京六百七十五里)"라고 《요동지》의
기록과 거의 비슷한 거리가 적혀 있다.
그리고 이 지도에는 압록강을 넘어서 중국으로 가는 길을 두 노선이 그려져 있는데 그 중에 하나는 심양을
거치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또 이 지도상에는 유조변(柳條變)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다. 유조변이란 청나라가 동북에 설치한 변장
(邊墻)이었다. 흙더미를 쌓아 높이와 너비는 각각 3척 정도의 흙으로 쌓은 제방으로 그 위에 매 5척 간격
으로 버드나무 3그루를 심고 그 중간에는 밧줄로 연결하여 만든 버드나무 울타리였는데 울타리 바깥에는
해자를 깊게 판 것이 유조변이었다.
동북은 만청(滿淸) 왕조가 발상했던 곳이요, 또 인삼 · 녹용 · 초피(담비가죽) · 진주 등 진귀한 물건이
나므로 한인(漢人)들이 이곳으로 와서 채취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순치년간에 유조변을 수축하였다
(나중에 구변이라고 했다).
위원보를 중심으로 동 · 서 두 끝으로 나누어 동단은 위원보에서 시작하여 동남쪽으로 봉황성 남쪽 대동구
(大東溝)까지, 서단은 위원보에서 서쪽으로 가다가 바로 산해관 부근에서 장성과 서로 연결되어 전장
1,950리로 흥경(興京) · 봉황성(鳳凰城) · 법고(法庫) · 이수구(梨樹溝) 등 16개의 변문을 설치하였는데
이것은 성경관할구역을 둘러싸고 있으므로 성경변경(盛京邊京)이라고 했다.
강희 초년에 이르러 또 유조변 신변(신변)을 축조했는데 위원보로부터 북쪽으로 향해 일직선으로 송화강변
길림(吉林) · 오랄(烏剌) 하류의 법특하(法特河)라는 곳까지 이르는 전장 690리로 4개의 변문을 두었다.
신 · 구 변의 전장은 2,500리로서 사람인자 형태의 변장이었다.
각 변문마다 문위파수(門衛把守)가 있어 출입하는 사람들을 조사했다.
(화림보, 《삽도중국지명사화(揷圖中國地名使話)》, 제로서사, 59~60쪽 참조)
5. 맺는 말
오랜 고지도가 발견됨을 계기로 그와 관련된 몇 가지 소회를 밝혔으나 깊은 연구 없이 생각나는 대로 써서
무슨 도움이 될른지 모르겠다.
(봉오선생)
원사(元史)·지리지(地理志)
1. 글 머리에
필자가 《만주원류고》를 번역하면서 권 12 강역 5 금(金)의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 관내 내원주(來遠州)
박색부(博索府)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혀 있었다. (< >에 적혀 있는 글은 원래 할주로 처리된 것인데
여기서는 그냥 < >로 처리했다.)
《원사(元史)》 : 동녕로(東寧路)는 원래 고구려 평양성으로서, 고려의 왕건(王建)이 서경으로 삼았다.
원(元)의 지원(至元) 6년(1269)에 이연령(李延齡) 등이 부주(府州)·현진(縣鎭) 60성을 들어 내귀하였다.
8년(1271)에 서경을 고쳐 동녕로(東寧路) 하였고, 정주(靜州)·의주(義州)·인주(麟州)·위원진(威遠鎭)을
떼어내어 박색부(博索府)에 예속시켰다.
<이에 따르면 고려의 평안도 의주는 압록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에 있고 이곳은 평양으로부터 서북으로
420리 되는 지점이다.> "라고 하였다.
후술하는 바와 같이 "파사부(婆娑府)"가 "박색부(博索府)"로 바뀐 것 외에는 기본적으로 같은 내용임을 알
수 있다.
《만주원류고》의 원문에 의하면 박색에 대한 주석에서, 박색은 만주말로 산그늘, 즉 산의 뒷면이란 뜻
으로 예전에 "婆娑"로 썼던 것을 이번에 "博索"으로 고쳤다면서 그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이 자료는 《사고전서(四庫全書)·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에서 캡쳐하였다]
이 대목을 본 필자는 《원사(元史)》에서 해당 원문을 확인하기 위해 《원사》를 검색해 보았더니 이
자료는 《원사(元史)·지리지(地理志)》 요양성 동녕로 조에 들어 있었다.
그 출전은 아래와 같은 원문에서 발췌한 것으로 보였다.
東寧路,本高句驪平壤城,亦曰長安城。漢滅朝鮮,置樂浪、玄菟郡,此樂浪地也。晉義熙後,其王高璉始
居平壤城。唐征高麗,拔平壤,其國東徙,在鴨綠水之東南千餘里,非平壤之舊。至王建,以平壤為西京。
元至元六年,李延齡、崔垣、玄元烈等以府州縣鎮六十城來歸。八年,改西京為東寧府。十三年,升東甯路
總管府,設錄事司,割靜州、義州、麟州、威遠鎮隸婆娑府。本路領司一,餘城堙廢,不設司存,今姑存舊名。
2. 《원사(元史)·지리지(地理志)》에서 발견된 희한한 기록
처음에 이 글의 내용을 대충 읽어 보고 매우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날의 평양이 아닌 다른 곳에 다른 평양이 있었다는 사실이 필자로 하여금 한껏 고무시키고도 남을 만한
것이었다.
그리고 《원사(元史)》에서 말하는 동녕로(東寧路)는 만주 일대에 설치되었던 행정구역명쯤으로 알고
역사지도를 확인한 필자는 곧 실망하기에 이르렀다.
고려 때 원나라가 고려에 정동행성(征東行省)을 설치하여 고려와 함께 일본 정벌을 꾀했다는 정도의
상식은 있었지만 동녕로가 바로 오늘날 평양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보니 그 허전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필자가 당시 확인해 본 원나라 때 동녕로(東寧路)의 관할지역은 다음과 같다.
자비령(慈悲嶺)과 철령(鐵嶺) 이북이 원나라의 동녕로(東寧路) 관할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3. 《원사(元史)·지리지(地理志)》의 카오스
중국의 역사가들은 전통적으로 고구려(高句麗)를 고려(高麗) 혹은 고려(高驪)라 쓰고 있는데다 또한
고구려를 왕건(王建)이 세운 소위 왕씨고려(王氏高麗)와 혼동하여 이를 하나로 인식하여 같은 나라로
보는 경향이 허다하다.
이 점은 구분해 내지 않으면 고구려와 고려의 강역에 관하여 커다란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인터넷에 보면 가끔 고려(高麗)의 영토가 요하(遼河)까지 미친 강대한 나라였다는 주장을 하고 있음은
바로 이러한 것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상술한 두 지도에서 보았듯이 왕건이 세운 고려는 자비령(慈悲嶺)과 철령(鐵嶺) 이북을 계선으로 그
이북은 우리의 차지가 아니었는데 어떻게 요하(遼河)까지 고려의 강역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는 주어진 사료를 전후문맥을 주밀하게 살펴 정확하게 해석하지 않고 몇 군데 그럴싸한 구절만 단장
취의(斷章取義)하여 아전인수식 해석을 하다보니 이런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원사(元史)·고려열전(高麗列傳)》의 다음과 같은 기록이다.
"고려(高麗)는 본래 기자(箕子)가 봉해졌던 땅이다. 또 부여(扶餘)에서 갈라져 나온 종족이 일찍부터
살았던 땅이기도 하다.
그 땅은 동쪽으로는 신라(新羅)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백제(百濟)에 이르는데 모두 큰 바다에 걸쳐 있다.
서북으로는 요수(遼水)를 지나 영주(營州)에 인접하고 말갈이 그 북쪽에 있다.
그 나라의 국도는 평양성(平壤城)으로 곧 한의 낙랑군(樂浪郡)이다.
말갈(靺鞨)이 백산(白山)에서 시원하는 강을 압록강(鴨綠江)이라 부르는데 평양(平壤)은 그 동남부에
위치하여 이를 믿고 의지하면서 요해지로 삼았다.
뒤에 땅을 더욱 넓혀 옛 신라(新羅)·백제(百濟)·고구려(高句麗)의 세 나라를 통합하여 한 나라를 만들었다.
그 임금의 성은 고씨(高氏)로 처음 나라를 세워 당나라 건봉(乾封) 초년에 이르러 나라가 망하였다.
수공(垂拱) 이후 자손들이 다시 그 땅에 봉작(封爵)되어 차츰 자립하였다.
오대(五代)에 이르러 대신 그 나라의 임금이 되어 수도를 송악(松岳)으로 옮긴 사람의 성은 왕씨(王氏)
이며 이름은 건(建)이다.
(高麗本箕子所封之地,又扶餘別種嘗居之。其地東至新羅,南至百濟,皆跨大海,西北度遼水接營州,而靺
鞨在其北。其國都曰平壤城,即漢樂浪郡。水有出靺鞨之白山者,號鴨淥江,而平壤在其東南,因恃以爲險。
後闢地益廣,並古新羅、百濟、高句麗三國而為一。其主姓高氏,自初立國至唐乾封初而國亡。垂拱以來,
子孫復封其地,後稍能自立。至五代時,代主其國遷都松岳者,姓王氏,名建。)"
위 문장의 도입부에서 말하는 "高麗"는 문맥상으로 고구려를 말하는 것이 분명하고, 중간에 신라· 백제·
고구려 삼국을 통일한 것은 소위 "王氏高麗"를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국내 학계에서는 왕씨고려라고 따로 통용된 말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중국 학자들이 고구려와 고려를
구분하는 말로 짤 쓰기 때문에 원용하는 것인데 나쁘지 않게 여겨진다.)
개국 군주에 관해서 보건대, 그 임금의 성이 고씨(高氏)라고 하였으니 그 임금이란 고구려 임금인 주몽
(高朱蒙)을 말하는 것이니 별 문제될 것이 없고, 오대(五代)에 이르러 대신 들어선 임금의 성이 "王"이요
이름이 "建"이라 하였으니 왕씨고려 왕건(王建)을 지칭하는 것이니 또한 별 문제가 없다.
다음에 평양의 위치에 관해서 보겠다. 여기서는 분명히 압록강에서 동남쪽에 위치해 있다고 하였으니
별 문제될 것이 없고, 왕씨고려는 송악(松岳)을 도읍지로 하였더니 또 문제될 것이 없다.
그 다음으로 문제되는 것이 송나라 때 서긍(徐兢)(1091~1153)에 의해 쓰여졌다는 《선화봉사고려도경
(宣化奉史高麗圖經)》(이하 《고려도경(高麗圖經)》이라 부른다)이다.
이 책에서도 고구려와 고려를 혼동였으니 이들을 잘 구분해 내지 않으면 큰 낭패를 당하게 된다.
혹자는 《고려도경(高麗圖經)》의 기록을 근거로 고려는 한반도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애당초부터 요동에
있었던 큰 나라였다느니 하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 자료에 들어 있는 고려(高麗)의 강역은 처음부터 고구려(高句麗)의 그것과 혼효되어 있어
이를 잘 구분해 내기 힘들며, 자칫 잘못하면 이들을 혼동하기 썩 좋게 되어 있는 데서 기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문맥을 잘 가다듬어 보면, 결국 고려의 "구 봉경(封境: 강역)은 동서 2천 리, 남북 1천 5백 리
였는데, 이제 신라(新羅)와 후백제(後百濟)를 병탄하고 나서, 동북이 좀 넓어지고 서북은 거란(契丹)과
연접해 있다(舊封境東西二千里, 南北一千五百餘里, 今旣竝新羅、百濟, 東北稍廣, 西北與契丹接連。)"
라고 하여 역사적 사실과 정확히 일치함을 알 수 있다.
행여 고려의 강역이 고구려만큼 큰 나라인 줄 오해하는 분이 있다면 서긍(徐兢)이 쓴 다음 글을 정확히
읽고 해석해 볼 것을 권한다.
서긍은 어떤 때는 고구려를 어떤 고려를 섞갈리게 진술하여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한참 고려 이야기를 하는 듯하다가 또 화제를 바꾸어 고구려 이야기가 나오는 등 속된 말로 진술의 일관
성이 없이 왔다리갔다리 한다는 말이다.
《고려도경(高麗圖經)》의 기술 내용에 대한 학자들의 비판도 만만치 않다.
다음은 필자가 읽은 비판 가운데 하나이다.
"반드시 지적해야 할 것으로는 이 책에도 일부 착오가 있다. 작자는 고려(高麗)와 고구려(高句麗)를 헛갈
리기 시작하여 고려(高麗)를 고구려(高句麗)인 것으로 여겼는데 이는 옳지 않다.
고구려(高句麗)는 기원전 37년에 건국하여 기원 668년에 멸망하였고, 고려(高麗)는 기원 918년에 건국
하여 1392년에 멸망하였다.
이는 작자가 조선 역사상의 고대 삼국(三國)의 정립(鼎立), 신라의 삼국통일, 후삼국(後三國) 등 《고려사
(高麗史)》에 앞서는 역사지식에 결핍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제1권의 《건국(建國)》과 제2권 《세차(世次)》에서 작자는 고려국의 건국(建國)과 전세(傳世) 개황을
서술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역사지식의 결핍으로 서술 중에 사실과 부합하지 않은 않는데다 심지어는 사실을
왜곡 한 곳까지 나타났다."라고 하였다.(박경휘,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전언 참조)
4. 《원사(元史)·지리지(地理志)》에서 말하는 동녕로(東寧路)에 대한 정확한 인식
이제 《원사(元史)》에 어떤 내용이 쓰여 있는지 해당 원문을 우리말로 정확하게 옮겨 보겠다.
"동녕로(東寧路)는 원래 고구려 평양성(平壤城)인데 장안성(長安城)이라고도 한다.
한나라가 조선을 멸하고 낙랑(樂浪)·현도군(玄菟郡)을 두었는데 이 낙랑지역이었다.
동진 의희(義熙)(안재의 연호, 재위 405년~418년) 뒤에 고구려 왕 고련(高璉: 장수왕)이 비로소 평양
성에 거주하게 되었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정복하고 평양을 함락시키자 그 나라는 동쪽으로 옮겨가서 압록강(鴨綠江)으로부터
동남쪽으로 1천여 리에 있었는데 옛날 평양 지역이 아니다.
왕건(王建)에 이르러 평양(平壤)을 서경(西京)이라 하였다. 원나라 지원 6년에 이르러 이연령(李延齡)·
최원(崔垣)·현원열(玄元烈) 등이 부·주·현·진(府州縣鎭) 60성을 가지고 원나라에 귀부하였다.
지원 8년에 서경(西京)을 동녕부(東寧府)라 하였다.
13년에 동녕부총관부(東寧府總管府)로 승격시켜 녹사사(錄事司)를 두고 정주(靜州)·의주(義州)·인주
(麟州)·위원진(威遠鎭)을 갈라 파사부(婆娑府)에 예속시켰다.
본 동녕로는 사(司)가 하나요, 나머지 성은 인폐(湮廢)되어 사(司)를 존치시키지 않았으니 지금은 당분간
옛 이름을 그대로 두었다.
(東寧路,本高句驪平壤城,亦曰長安城。漢滅朝鮮,置樂浪、玄菟郡,此樂浪地也。晉義熙後,其王高璉始
居平壤城。唐征高麗,拔平壤,其國東徙,在鴨綠水之東南千餘里,非平壤之舊。元至元六年,李延齡、崔垣、
玄元烈等以府州縣鎮六十城來歸。八年,改西京爲東寧府。十三年,升東寧路總管府,設錄事司,割靜州、
義州、麟州、威遠鎮隸婆娑府。本路領司一,餘城堙廢,不設司存,今姑存舊名。)"라고 하였다.
이 사료의
문장을
글자
그대로
문리해석을
해보자면,
동녕로는
원래 고구려의
평양성(平壤城)이요
다른
말로 장안성(長安城)이라고 부르는 곳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고 보는데 이에 의문을 가지는 분들은
"동녕로(東寧路)"를 과연 어디쯤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지 되묻고 싶다.
바로 그런 대전제 하에 그곳은 한나라의 낙랑·현도군이 있었던 곳이라고 선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고련(高璉)은 고구려의 장수왕(長壽王)의 휘이다.
따라서 고구려 장수왕 15년에 오늘날의 평양으로 천도한 것을 전제로 하는 것도 역사적 사실과 부합한다.
강학상 고구려의 평양천도는 서기 427년이라고 한다.
그 때는 동진 의희(義熙), 즉 안제연간의 뒤였음은 의희(義熙)의 재위연도의 역수상 부합한다.
문제는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키자 고구려의 평양이 동쪽으로 옮겨갔다는 역사적 사실이 과연 존재
하느냐이다. 오늘날의 평양에 있다가 망했는데 무슨 동쪽으로 옮겨갔다는 말인가.
《삼국사기(三國史記)》나 신·구 《당서(唐書)》를 아무리 보아도 이런 기록은 없다.
다만 《명사(明史)·조선열전(朝鮮列傳)》의 도입부에 적혀 있는 다음과 같은 기록은 매우 주목할 만한다.
"조선(朝鮮)은 기자(箕子)에게 봉하여 준 나라이다. 한(漢)나라 이전에는 조선(朝鮮)이라 하였다.
일찍이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에게 점거되어 있었으나, 한무제(漢武帝)가 이를 평정하고 진번(眞番)·
임둔(臨屯)·낙랑(樂浪)·현도(玄菟)의 4군을 설치하였다.
한말(漢末)에 부여 사람 고씨(高氏)가 그 땅을 차지하여 국호를 고려(高麗)로 고쳤다. 고구려(高句麗)라
고도 하는데, 평양(平壤)에 자리잡고 있었으니 곧 낙랑(樂浪)의 땅이었다.
그 뒤 당(唐)나라에 격파되어 동쪽으로 옮겨 갔다.
후당(後唐) 때 왕건(王建)이 고씨(高氏)의 대를 이어 신라(新羅: 통일신라)·백제(百濟: 후백제)의 땅을
겸병하고, 송악(松岳)으로 옮겨 동경(東京)이라 부르고, 평양(平壤)은 서경(西京)이라 하였다.
그 나라는 북으로 거란(契丹)과 인접하였고, 서쪽은 여직(女直: 여진), 남쪽에는 일본(日本)이 있었다.
원(元) 지원 연간에 서경(西京) 일대가 내속(內屬)해 오므로 동녕로총관부(東寧路總管府)를 설치하고
자령(慈嶺: 자비령) 끝으로 경계를 삼았다.
(朝鮮,箕子所封國也。漢以前曰朝鮮。始爲燕人衛滿所據,漢武帝平之,置眞番、臨屯、樂浪、玄菟四郡。
漢末,有扶餘人高氏據其地,改國號曰高麗,又曰高句麗,居平壤,即樂浪也。已,爲唐所破,東徙。後唐
時,王建代高氏,兼倂新羅、百濟地,徙居松岳,曰東京,而以平壤爲西京。其國北鄰契丹,西則女直,
南曰日本,元至元中,西京內屬,置東甯路總管府,盡慈嶺為界。)"라고 하였다.
우리는 이 사료를 통해서 《명사(明史)》의 찬자들도 《원사(元史)》의 찬자들과 마찬가지로 고구려가
당나라에 의해 멸망당하자 평양이 동쪽으로 옮겨갔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도대체 이 부분을 어떻게 해석한다는 말인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펴낸 《국역중국정사조선전》의 해당 부분에는 이렇게 주석하고 있다.
즉, 고구려 유장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한 사실을 말한다고 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 편, 《국역중국정사조선전》, 380쪽 참조)
이런 정도라도 해석이 있으니 다행이다. 그러나 무엇인가 석연치 않은 해석이다.
대조영이 세운 나라가 발해라고 불리운 나라인데 평양에서 동북쪽이면 몰라도 동쪽이라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또 옮겨간 지역이 옛 평양에서 동남쪽으로 1천여 리 떨어졌다고 부연설명하고 있는데 평양이 오늘의
평양임을 대전제로 하고 거기서 동남쪽으로 1천여 리는 도대체 어디란 말인가.
주지하다시피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당한 햇수는 서기 668년이다.
망할 당시 동남쪽으로 천여 리 방향이라면 옛날 백제 혹은 통일신라의 강역이 아니겠는가.
백제는 660년에 망했으니 평상 통일신라의 강역이다.
생각건대, 이는 왕씨고려가 오늘날의 개성인 송악에 수도를 정한 사실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렇지 않고서 이 부분을 합리적으로 해석할 방법이 없게 된다.
정확한 릿수를 따져 보지는 않았지만 《만주원류고》의 주석가들의 주장처럼 평양이 압록강에서 420리
떨어져 있었다고 하였으니 평양에서 개성까지는 1천여 리 떨어졌다고 보아도 될 듯하다.
서긍의 《고려도경(고려도경(高麗圖經)·성읍편(城邑篇)》 국성(國城) 조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는데
시사하는 바가 많을 줄 안다.
"고려(高麗: 고구려)은 당나라 이전부터 평양성에 거주하였는데 원래 한무제가 설치했던 낙랑군이었으나
당고종이 도호부를 설치한 곳이었다.
《당지(唐志)》로써 이를 조사해 보았더니, 평양성은 바로 압록강의 동남쪽에 있었는데, 당말에 고려(高麗)
의 군장(君長)이 여러 대에 걸친 전쟁의 어려움을 경계하여 차츰 동쪽으로 옮겨 가게 되었다.
지금의 왕성(王城: 수도)은 압록강으로부터 동남쪽으로 1천여 리 떨어저 있으며 옛날 평양이 아니다.
(高麗, 自唐以前, 蓋居平壤, 本漢武帝所置樂浪郡, 而唐高宗所建都護府也。以《唐志》考之: 平壤城乃在鴨
綠水東南。唐末高麗君長懲累世兵革之難, 稍徙而東。今王城在鴨綠水之東南千餘里, 非平壤之舊。)"라고
하였다.(서긍 원저·박경휘 표술, 《선화봉사고려도경(宣華奉史高麗圖經)》, 요녕대학출판사, 6~7쪽 참조)
여기서 우리가 주의깊게 보아야 할 것은 원래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은 압록강의 동남쪽에 있었던 것이
당말의 고려 군장이 여러 대에 걸친 전쟁의 어려움을 경계하여 차츰 동쪽으로 옮겨 갔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평양이 동쪽으로 옮겨가게 된 시점은 "唐末"이라는 데 주목해야 한다는 말이다.
주지하다시피 당나라는 618년에 건국되어 907년까지 존속한 왕조였다.
고구려가 당나라에 망한 것은 660년이니 이는 당초일 수는 있어도 결코 당말이라고 할 수는 없다.
옮겨간 주체도 군장(君長)이라고 하였다.
삼한시대면 혹시 "君長"이나 "渠首"이라는 표현은 적절할 지 모르지만 일개 국가의 통치자를 군장으로
비하시켰다. 그 의미를 곱씹어 보어야 할 것이다.
어떻거나 그 군장은 누구를 말하는가. 필자는 후고구려로 자칭했던 애꾸눈 궁예(弓裔)의 활약상과 무관
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가 활동한 지점이 철원이니 평양을 기준으로 동남쪽에 해당한다 할 수 있다.
또 《삼국사기(三國史記)·궁예전(弓裔傳)》에 의하면 당소종 대순 2년(891)에 궁예가 죽주의 적괴
기훤(箕萱)에 몸을 의탁했다는 기록이 나온다.(以眞聖王卽位五年大順二年辛亥, 投竹州賊魁箕萱。) 의
기록이 확인되기 때문에 정확하게 당말과 결부시킬 수 있다.
5. 평양(平壤)은 과연 어디인가
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평양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국도라는 보통명사였다.
왜냐하면 단군의 도읍도 평양이었고 기자의 도읍도 평양이었고, 고구려의 도읍도 평양으로 적혀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위당 정인보 지음·박수성 편역, 《정인보의 조선사연구》, 서원, 32쪽 참조)
우리나라 역사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김부식의 《삼국사기(三國史記)·잡지(雜志)》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한서(漢書)》에 의하면 낙랑군에 속한 현으로 불이현(不而縣)이 있고 총장 2년에 영국공 이적(李勣)이
칙명에 의하여 고구려의 모든 성에 도독부와 주현을 설치하였으며 《목록(目錄)》에는 이르기를 압록강
이북에서 이미 항복한 성이 열 하나인데 그 중 하나가 국내성(國內城)이며 평양으로부터 여기까지 17개
소의 역이 있었고 이 성도 역시 북조(北朝)(《삼국사기》에서 발해를 북조로 표현한 유일한 구절이다,
필자주) 경내에 있었으나 다만 어느 곳인지를 알 수 없을 뿐이다.
국내성(國內城)에 도읍한지 425년을 지나서 장수왕(長壽王) 15년에 평양(平壤)으로 서울을 옮겼으며,
평양에서 156년을 지나 평원왕(平原王) 28년에 장안성(長安城)으로 서울을 옮겼으며, 장안성에서 83년
을 지나 보장왕(寶藏王) 27년에 멸망하였다.
평양성은 지금의 서경(西京)이요, 패수(浿水)는 대동강(大東江)인 듯하다.
무엇으로써 이것을 알 수 있는가? 《당서(唐書)》에 이르기를 '평양성은 한 나라의 낙랑군으로서 산굽이
를 따라 성을 둘러 쌓았고 남으로 패수가 놓였다.'고 하였으며 또 《한지(漢志)》에 이르기를 '등주(登州)
에서 동북쪽 바다길로 나서서 남쪽으로 해변을 끼고 패강 어귀에 있는 초도(椒島)를 지나면 신라의 서북
지방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였으며, 또한 수양제의 동방 정벌 조서에 '창해방면 군사는 선박이 천 리에
떨쳤는데 높직한 돛들은 번개같이 달리고 커다른 전함들은 구름같이 날아서 패강을 횡단하여 멀리 평양에
다달았다.'는 말이 있으니 이렇다고 하면 지금 대동강을 패수라고 한 것이 명백하며 바로 서경이 평양이
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서(唐書)》에 이르기를 '평양성도 장안성이라고 일렀다'하였는데 《고기(古記)》에는 '평양으로부터
장안으로 옮겼다'고 하였으니 두 성의 같고 다른 것과 멀고 가까운 것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고구려는 처음에는 중국 북부 지역에 살다가 얼마 후에 차츰 동방 패수 옆으로 옮겨 갔다."라고 적혀 있다.
위 사료를 검토하여 보더라도 고구려의 수도가 오늘날의 한중 국경선인 압록강과 두만강 건너 편에
있다가 장수왕 때 현재의 평양으로 천도를 한 사실만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평양성을 다른 말로 장안성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김부식조차 그것이 어디에 있었는지 동이(同異)
와 원근(遠近)을 알 수 없다고 하였으니 우리도 헛갈린다.
그뿐만 아니라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고구려의 첫도읍지인 흘승골(紇升骨)과 졸본(卒本)에 관한
다음과 같은 기록도 있다.
"주몽이 도읍을 정한 곳이라고 하는 흘승골과 졸본이란 것이 아마 한나라 현도군의 경내이며 대요국
동경의 서쪽인 듯하다.(所謂朱蒙所都紇升骨城、卒本者, 蓋漢玄도郡之界, 大遼國東京之西。)"라는 구절이
있다.
이 부분은 《요사(遼史)·지리지(地理志)》에 나오는 홀한주에 옛 평양성이었다는 기록과 함께 앞으로
검토해야 할 대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미 북쪽에 있던 평양이 남쪽으로 천도한 이상 그 지역에서
동남쪽으로 옮겨갔다는 가정 자체도 성립할 수 없게 된다.
(봉오선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