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추린 북간도 용정촌 약사 (1914년 ~ 1916년)
1914년, 3월 초, 원세개는 황제로 등극하기 위하여 전국에 포고령을 내려 각 성의 지방자치령을 폐지하고 각종 자치단체의 활동을 금지할 것을 명하였다. 그는 5월에 중화민국 임시약법까지 폐지하고 대총통이 되었다. 그 동안❰간민회❱와 ❰농무계❱의 갈등문제로 고심하던 도빈은 3월 12일 훈령 제 77호를 반포하여 간민회와 농무계의 설립을 취소한다고 선포하였고 4월 2일 자 ❰포고❱를 통하여 해산을 명하였다.
❰간민회❱는 1913년 4월에 건립되어 1914년 3월에 해체되었으나 북간도 간민사회의 발전과 민족의식 고양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후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식으로 농무계와 간민회의 인사들이 자신들의 배타성과 독선, 중국인 관리에게 동족의 치부를 드러낸 일을 반성하고 힘과 뜻을 모아 장업회를 조직하였다. 장업회는 자치가 인정되지 않는 시대적 상황을 인지하고 간민들의 산업을 장려하며 생활 개선에 초점을 맞추어 활동하였다. 장업회는 진보와 보수, 구학과 신학, 유교와 개신교가 간민사회를 위하여 일치하여 결성하였다는데 큰 의미가 있었다.
❰창의소❱가 훈춘현 대별남구에 본부를 두고 설립되었으며 회장은 송익준, 부회장은 강사연 이었다. 이 단체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전쟁이 이어날 것으로 판단하고 러시아와 중국의 급진파들과 항일공동전선을 결성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함으로 일본의 침략 세력을 몰아내고 민족이 독립할 것을 주장하였다.
❰친목회❱가 연길현 의란구에 본부를 두고 설립되고 회장은 황성현, 부회장은 로우선, 총무장은 남기흥 회원 수는 130여 명이었다. 이 단체는 일제의 통감정치를 결사적으로 반대하며 조선의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서로 협력할 것을 주장하며 회원을 모집하였다.
❰철혈광복단❱은 1914년에 설립되었는데 비밀결사단체여서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단원은 남공선, 장기영, 김하석, 오영선, 윤준희, 임국정, 최봉설 등으로 알려졌다.
용정의❰청년친목회❱는❰청년월보❱를 발간하여 청년들의 민주, 민족의식을 향상시키고자 하였다.
국자가의❰대동협신회❱는 소영자 길동학원을 중심으로 하여 조선인사립학교의 교과서를 편찬하였고❰대진월보❱를 발행하였다.
캐나다장로회 연합선교위원회가 프레이저 목사 부부, 윌리엄 스코트목사 부부, 에드나 크뤽샌크 양, 모드 맥키넌 양, 맥도날드 여사를 용정선교스테이션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동부 소속인 푸트 선교사가 원산에서 용정 선교부로 이주하였다.
국자가에서 50여개 사립학교 연합운동대회가 열렸다. 대회에서 “광복가”, “응원가”, “운동가”를 불렀다. 이 대회는 독립정신과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운동회가 되었다.
1914년에 설립된 학교는 왕청현에❰라자구 사관학교❱,❰신흥학교 ❱,❰동림학교❱와 화룡현❰양진학교 ❱,연길현❰명성학교 ❱ 이다.
1914년에 설립된 교회는❰설리교회❱,❰하래성남교회❱,❰광암교회❱,❰ 희망봉교회 ❱,❰창강교회❱,❰영생동교회❱,❰두도구교회❱,❰남별리교회❱,춘화향❰사도구교회❱,훈춘현성의❰서문밖 교회❱,❰훈춘중앙교회❱등이다.
1915년,❰만몽조약❱으로 동북삼성이 술렁거렸다.
1월 일본은 황제가 되고자하는 원세개에게 중국 내 이권에 대한 광범위한 요구사항을 담은 대중국 21개조 요구안을 제시하였다. 이 요구안은 5호 21개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제 2호 만몽조약의 토지상조권의 적용범위와 적용대상의 문제가 만주 조선인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어 조선인들의 법적 지위는 중일상조권분쟁의 첨예한 대립으로 위기와 혼란에 빠졌다.
일본은❰간도협약❱의 무효를 주장하며 토지상조권이 일본인들과 조선인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주장함과 동시에 조선 지권(공동 토지소유권)을 저당으로 잡는 대부업으로 비귀화 조선인들이 전민제 형식으로 구입한 땅을 대량으로 점유하였다. 중국 측은 일본의 토지 침탈을 막기 위하여 간도협약의 유효함을 주장하며 조선인들의 이중국적문제와 전민제 소유 토지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였다.
당시 북간도 토지의 40% 를 조선간민들이 소유하였고 북간도 인구의 75%이상의 인구가 조선인이었으므로 일본 측의 주장대로 귀화 조선인이나 비귀화 조선인이 고스란히 일본인이 되는 것이 중국의 입장에서 볼 때 북간도가 실제로 일본에 점유된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에 중국정부는 조선인 이주민들을 입적시키기 위하여 입적하면 토지소유권 및 참정권 일체의 공권을 부여하고 일본관헌의 체포도 면할 수 있다고 선전하며 귀화입적 절차도 간소화시켰다. 또한 공동의 명의로 구입한 땅에 대하여 실제 주인의 이름으로 등록하도록 엄격히 단속하였다.
당시 조선인들은 변발하고 청나라 옷을 입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가족 또는 마을 대표 한 사람만 귀화입적을 시키고 그 사람의 이름으로 땅을 구입하여 농사를 지었다. 이런 전민제로 땅을 구입한 사람들이 일제에게 돈을 대부받으면서 많은 문제를 야기한 것이다.
1915년 18여만 명의 북간도 조선인들은 만몽조약에 의해 조선인들을 서로 자기 세력권에 두려고 하는 일본과 중국의 줄다리기에 혼란과 불안, 자괴감과 무력감에 시달려야 했다.
연길도윤 도빈이❰획일간민교육판법❱을 제정하여 조선인사립학교에 적용케 하였다. 한어로 된 교과서를 사용해야 하며 중국인 교사를 채용해야 하며 주 십여 시간을 한어 공부를 하게 하는 등 사실상 조선어로 교육이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조선인 사립학교는❰간민교육연구회❱를 통하여 법을 절충하였다.
일본 남만대흥회사가 매판상인들과 결탁하여 천보산은광을 매수하였다.
가을 왕청 라자구무관학교의 교원들과 학생들이 일본의 간첩을 타살하였고 화룡동 명암촌의 보진학교에서도 일본 경찰 2명과 친일파를 구타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1915년에 설립된 학교는 화룡현의 ❰광종학교❱, ❰해성학교❱와 연길현의 ❰영창학교❱와 ❰진명학교❱4곳과 ❰용정촌보통학교 연길분교(조선총독부)❱,훈춘의 김려수와 촌 주민들이 세운❰훈서학교❱가 있다.
지금까지 청나라(중국) 관청, 조선총독부, 조선거류민회가 세운 학교와 구식 서당은 제외하였다. 그러나 앞으로는 신식 사립학교가 아니더라도 의미가 있는 배움터는 기록할 것이다. 조선이 유학에 기초된 나라였기 때문에 조선 간민들은 어디를 가든지 마을을 이루면 서당을 세웠다. 1914년 연변지역의 연길현에 만해도 조선인 서당이 116개였으며 이중에 근대식 서당이 34개였다.
현규환의 ⌜한국유이민사 상권⌟ 530~ 534쪽에 의하면 1915년에 ❰충신장교회❱가 설립되었다.
1916년, 일본은 제 1차 세계대전에 연합국으로 참전하여 중국 내 독일의 조계지와 모든 권리를 계승한 일본의 21개조 요구에 사인을 하고 황제에 오른 원세개는 황제 지위를 취소하고 3월 23일 중화민국 대총통의 자리로 복귀하였다. 그러나 남경회의에서 하야를 요청하는 각 성(城)의 대표들의 요구에 따라 이원홍에게 총통자리를 물려주고 6월 6일에 급서하였다. 그의 죽음으로 중국은 격렬한 내전에 휩쓸려 국민당과 국민혁명군이 북벌을 통해 중국을 통일할 때 까지 지역마다 군벌이 난무하였다. 만주는 1916년부터 봉천성 군벌 장작림의 지배하에 놓였다.
일본의 자본으로 세워진 길회선 철도가 개통되고 용정에서 회령까지 육로가 개설되었다.
만몽조약으로 시작된 간도 조선인의 귀화입적 운동과 전민제 강화를 방해하는 일본의 공작으로 많은 조선인들이 일본이 베푸는 구제와 부조라는 미끼에 물려서 토지를 빼앗겼으며 중국인들에게는 일제의 앞잡이라는 의심을 사며 배척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2월 북간도 거민 정안립 등 462명의 귀화간민 대표들은 중국 외교총장에게 청원서를 제출하여 일제의 영사재판권을 철폐해줄 것을 호소하였다. 귀화조선인이 중화민국 국민임을 강조하면서 중국 당국이 일본으로부터 보다 적극적으로 보호해줄 것을 촉구하였다.
일본이 용정에❰조선은행지점❱을 개설하였다.
❰훈춘조선인민회❱가 훈춘분관 산하에 세워졌다.
1916년 용정시교회(용정중앙교회)는 김내범 목사의 지도 아래 천여 명을 수용할 만한 예배당을 중건하였다.
민산해(Stanley H. Martin)의사 부부가 용정에 와서 박걸과 함께 제창병원을 설립하였다. 제창병원은 영국조계지역 안에 있어 일본 경찰이나 중국 관헌이 드나들 수 없어 조선인들의 비밀 회합 장소로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3.13만세 시위와 간도국민회, 철혈광복단의 비밀 모임 장소였으며 북간도의 소식을 세계 교회에 알리는 창구가 되었다.
명동교회 여신도회원들을 비롯하여 여신도 회원들이 함께 부인전도회를 조직하여 용정에 사무실을 두고 임뵈뵈, 정신태, 김철나 등이 번갈아 시무하며 다양한 활동으로 교회를 섬기며 교회 개척에 일조하였다.
1916년에 세워진 학교는 화룡현의 ❰덕성학교❱, 천도교의❰화성학교❱,❰양성학교❱,❰용신학교❱,❰송동학교❱,❰광동학교❱도문의 오창권이 설립한❰영성학교❱,❰원동학교❱, 양무정자의❰제3초등학교❱, 간장암의❰흥동학교❱와 왕청현의❰의흥학교❱,❰삼성학교❱,❰배영학교❱가 있다.
캐나다장로교회는 신앙지도와 교육과 의료봉사로 용정과 북간도 사회에 뿌리를 내렸다.
1916년에 세워진 교회는❰태양동교회❱,❰응조암교회❱,❰동불사교회❱,❰압막동교회❱,❰상통납자교회(연통라자교회)❱,❰관지구교회❱,❰포은동교회❱,❰전선촌교회❱,❰칠도구연수동교회❱, ❰훈춘 오도구교회❱로 총 10개 교회다. 이외에도 현규환의 ⌜한국유이민사 상권⌟ 530~ 534쪽에 보면❰ 연길중앙교회❱도 설립되었다.
5부로 계속
2026년 3월 3일 화요일 인시
우담초라하니 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