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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강의5
제5강 고난의 예수(제2장 5절 — 제3장 1절)
5.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가 말하는 장차 오는 세계를 천사들에게는 복종케 하시지를 않았다.
6. 그보다 누가 어디 증거하여 말하기를
“사람이 무엇이관데 저를 생각하옵시며 사람의 아들은 무엇이관데 저를 돌아보시옵니까.
7. 당신이 저를 잠깐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었사오며,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시어, 당신 손으로 지으신 것 위에 저를 세우시었고,
8. 만물을 저의 발아래 복종케 하시었사옵니다” 하였다. 그래,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케 하시었다면 복종치 않게 남겨두신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만물이 저에게 복종하는 것을 아직 보지 못하고,
9. 다만 천사보다 잠깐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예수가 죽음의 고난으로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씌우심을 입은 것을 본다. 그리하심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모든 인간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시기 위하신 것이다.
10. 그것은, 그를 위하여 만물이 있고 그로 말미암아 만물이 있는 그이에게는, 뭇 아들을 영광으로 이끌어 들어가게 하실 때에, 그들의 구원의 주장(主掌)을 고난으로써 완전케 하시는 것이 합당하신 일이기 때문이다.
11. 그는, 거룩케 하시는 자나 거룩케 함을 입는 자들이나 다 하나에서 나왔다. 그런 고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12. 말씀하시기를
“내가 당신의 이름을 내 형제 중에서 전파하고 모임 가운데서 내가 당신을 찬미하오리다.” 하였고
13. 또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였으며 또다시
“보라, 나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자녀들”이라 하셨다.
14. 그리고 자녀들은 같이 혈육을 가진 자들인 고로 그도 또한 한가지로 같은 모양을 취하여, 그리하여 죽음으로써 죽음의 권세 가진 자 곧 악마를 멸하시고
15. 또 죽음을 두려워하므로 일생을 매여 종노릇하는 자들을 놓아주시려 하셨다.
16. 이는 실로 저가 천사를 붙들어주시지 않고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주시기 때문이다. 17. 그러기 때문에 그가 모든 점에 있어 형제들과 같이 되신 것은 백성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일에 관한 자비하고 충신(忠信)한 대제사장이 되는 데 있어 마땅한 일이었다.
18. 그는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시험받는 자를 능히 도울 수 있다.
3장 1. 그러면 같이 하늘에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의 사도시고 대 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브리서, 제2장 5절~제3장 1절)
아들이 천사보다 더 위대하신 이란 말은 율법을 하나님의 계시로 믿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알아듣기 어려운 말이 아니다. 천사 숭배를 하는 유대 사람들도 장차 모든 문제를 해결할 자로서의 약속된 메시아를 열망하기는 하였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든지 이상에 속한 일이요, 즉 영원한 천계에 계시는 아들의 일이요, 실지 역사상의 일은 그와 다르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아들이 오신다는 것은 믿는다마는 나사렛 예수가 그 아들이라는 것은 알 수 없다. 사람들은 메시아를 날개 돋은 천사의 열중에서 찾으려 할 뿐이요, 세리와 죄인 속에 있으리라고 생각하려하지 않았다. 거칠 돌이 여기 있었다 역사적 예수의 성격, 즉 인간 예수, 인간 중에서도 그 맨 밑바닥에 나신 고난의 예수. 그렇기 때문에 제1단에서 율법에 대한 존신(尊信)이 있는 수신자들에게 성경을 인용하여 천사보다 위대하신 아들이 약속되어 있는 것을 먼저 이해시켜놓고, 다음 본단에서 강도의 틈에 끼여 십자가에 달리는 고난의 예수야말로 그 아들임을 말한다. 영광의 보좌 앞에서부터 급전직하 인간의 세계로 내려온다.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인간계에 나타났는 고로 저를 부정하고 의심하고 독신자(濱神者)로 배척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인간에 가깝기보다 될수록 멀기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저자의 신앙은 그리스도의 고난이야말로, 인간성이야말로 그 근본 성격이요, 그것 때문에 바로 우리 구원의 대제사장이 된다고 한다.
1. 장차 오는 세계
5절은 우리 공정(公定) 번역에서는 위와 아무 연락이 없이 “우리가 말하는 바……” 하는 말로 시작이 되어서, 제1단과 제2단은 의미상 아무 맥락 없는 전연 별립(別立)한 것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는 번역상 중요한 단어를 략(畧)했기 때문에 일어난 잘못이요, 본래는 그렇지 않다. 원문에 5절은 ‘가르’(gar)라는 접속사로 시작이 된다. 이것은 이미 말한 것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려 할 때, 혹은 어떤 말의 의미를 강하게 하려 할 때에 쓰이는 말로서, 번역한다면 ‘그것은’이라, 혹은 ‘왜 그런고 하니’라, 또 혹은 ‘실로’라 할 수 있다. 그런 내 어법의 구조상 이것을 일일이 그대로 직역하면 너무 과한 때가 많아서 우리말에서는 대개 략(畧)되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원문 고유의 맛을 잃는 것인데 더구나 이 절의 경우에는 그렇다. 여기서는 분명히 위에 말한 것의 이유 설명을 끄집어내는 것으로 볼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제1단에서 영원하신 아들을 말하고 제2단에서 수육 고난의 아들을 말하는데, 양자는 아무 관련 없는 고립한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렇다면 저자의 말은 지리멸렬이다.
또 이것을 위의 상문(上文)에 연락시키는 데 있어서도 그 견해는 반드시 하나가 아니다. 혹 하나님이 같이 증거하셨다는데 붙이기도 하고, 혹 이같이 큰 구원이라는 데 붙이기도 하고, 또 혹 들은 바에 긴절한 주의를 가하란 말에 붙이기도 할 수 있다. 그 어느 것으로도 의미가 통치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가장 온당(穩當)한 것은 제 1장 말(末)절에 연결하는 것이다. 그 장 4 절 이하에서 구약을 끌어 아들이 천사보다 높다는 것을 증명한 저자는 이 절에서 사람의 뜻 밖에 벗어나는 놀라운 말로 결말을 맺었다. 즉, 천사는 구원을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는 자라는 것이다. 섬기는 것은 물론 주님을 섬기는 것이지만 구원 얻을 후사란 인간인데 천사가 인간을 위해서 섬긴다는 것은 알기 어려운 말이다. 이것은 반드시 설명이 있어야 할 말이다. 위에서 말하기를 제1단에서 제2단에 들어 갈 때 저자는 천상계에서 인간계로 급전직하했다 했지만 그 급전의 일 보가 곧 이 구원 얻을 후사라는 말이다. 여기서 이미 고난의 예수를 말할 준비를 했다. 그러기 때문에 제2장 5절의 “그것은”은 이 구원 얻을 후사를 위해 천사가 주님을 섬기는 것은 이다. 그렇게 볼 때 제1단의 영원하신 아들과 제2단 고난의 예수와는 한 개 산통일 속에 있다. 그리고 그 연락을 시키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장차 오는 세계라는 것이다. 장차 오는 세계라는 관념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이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다. 혹은 거꾸로 말하면 장차 오는 세계에 들어가는 것은 고난의 예수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고로 저자가 여기서 장차 오는 세계라는 말을 한 것은 결코 돌연(突然)히 한 것이 아니다. 외양으로 하면 그러하다. 그러나 저자의 가슴 속을 더듬는다면 그렇지 않다. 그는 처음부터 나중까지 심중(心中)에 대립되는 두 세계를 바라보면서 말한다. “하나님 이 옛날에는 여러 부분으로 또 여러 모양으로 예언자들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시었더니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우리게 아들로 말씀하시었는데” 할 때부터 심중의 목표는 늘 장차 오는 세계에 있었다. 이를 알지 못하면, 본서를 바로 알 수 없다.
장차 온다는 것은 시간적으로 미래라는 뜻만이 아니다. 현존하는 질서에 대한 새로운 질서라는 말이다. 그는 반드시 후에 오는 것이 아니요 도리어 깊은 의미로 하면, 이 질서의 세계보다 먼저 있는 질서의 세계라 할 수 있다. 아들이 있는 곳에 그 세계는 있기 때문이다. 마치 예수가 다윗의 후손이면서도 자기가 다윗보다 먼저 계셨노라 하시고, 요한이 그보다 먼저 왔어도 그는 자기보다 먼저 계시다 한 것과 같다. 역사적으로 하면 이것은 예수의 오신 것으로써 시작되었다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예수의 전에 그 세계가 없었던 것도 아니요, 예수 후에 낡은 세계가 없는 것도 아니다. 예수는 이 세계를 인간의 역사 안에 이루기 위해 오시었다. 이는 자연물과 같이 시간에 속하는 세계가 아니요 정신에, 양심에 속하는 세계다. “이에 있다 저에 있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요, 어느 때에 올지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 대신 어디서도 가능 하고 어느 때도 가능하다. 예레미야가 70년 후에 보았고 다니엘이 수 백 년 후에 보았던 것을 예수는 바로 눈앞에 보셨고 “때가 장차 오려니와 지금도 그때”라고 하셨다. 그것은 그것이 자기에게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 세계는 사람의 예수에 대한 마음 여하에 달린 세계다. 그에 향하여 마음의 ‘스위치’를 틀면 지금도 있는 세계요 틀지 않으면 영원히 먼 세계다. 고로 복음의 기자가 세례 요한과 예수의 전도를 일언으로 요약하여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우니라” 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장차 오는 세계는 이른바 세상의 사상가들이 막연하게 그리는 것 같은 단순한 일개 가능성이 아니요 확실한 실재다. 다만 그것을 인정하느냐 아니하느냐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거기 사용 된 단어의 뜻이 그것을 잘 표시한다. 그 세계라는 자(字)는 일반으로 우주라 세계라 하는 뜻의 것이 아니요 “사람 사는 땅”이라는 말이다. 저자에게는 이 장차 오는 세계는 현존하는 눈에 뵈는 세계보다 못하지 않게 그보다도 더 확실한 것이었다. 이 세계는 한개 그림자에 지나지 않으나 그것은 실체였다. 그리고 이는 저자만 아니라 진정한 기독신자의 누구나 가지는 신앙이다. 기독교란 예수의 선포한 새 나라를 승인하고 스스로 그 나라의 백성임을 고백하고 거기 대하여 충성을 표하는 일이다.
“우리가 말하는”이라는 말은 그런 의미에서 해석할 것이다. 이것은 저자가 써 보내는 이 편지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요 기독자의 하는 전도전체, 생활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라 함이 마땅하다. 고로 우리가 말한다기보다 의미로 하면 차라리 “우리가 관심하는” 혹은 “우리가 일이 있는”이라고 할 말이다. 기독자는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행했든지 그 결국의 의미는 장차 오는 세계에 있다는 말이다. 이 의미에서 기독자는 근본적으로 세상 사람과 합할 수 없다. 서로 바라는 목적이 다르기 때문이다. 기독교를 가지고 이 질서의 세계에 공헌을 할 수도 없고, 이 세상의 발달에 의하여 기독의 나라를 발전시킬 수도 없다.
장차 오는 세계를 바라는 것은 이 시대에 있어서는 매우 공막(空漠)한 사상을 가지는 것으로, 혹은 인생과 사회에 대하여 아무 적극적(積極的) 의지를 가지지 않는 은둔적(隱遁的) 인생관을 가지는 것으로 해석이 된다. 기독자가 거기만 전심하고 이 사회의 일에 간섭하지 않는 한, 세상은 저를 무해한 물건으로 용인(容認)하려 두려 한다. 그러나 본래 의미는 그렇지 않았다. 초대 기독신도에게 이는 전투 표어였다. 당시의 세상은 이것 때문에 저들을 “염병 같은 놈”이라 배척했고 저들은 이것 때문에 욕(辱)을 먹고 피를 흘렸다. 그때에는 기독을 믿는 자나 반대하는 자 둘에 대하여 다 같이 이 말은 생명 있는 말이었다. 믿는 자는 그 세계가 확실히 올 것을 확신하고 전파했고, 핍박(逼迫)하는 자도 그 세계가 오면 아니되겠다고 생각해서 반대했다. 지금은 양자에게 다 이것은 사어(死語)에 지나지 않는다. 일찌기 싸움에 쓰던 무사의 칼이 지금은 그 모형만이 길어서 장식품으로 되었다. 지금 “장차 오는 세계”는 기독교도의 무해를 증명하는 한 문장(紋章)에 지나지 않는다. 그 증거는 그들이 만일 그 바란다는 장차 오는 세계를, 해외에서 난 이민의 자식이 그 조국을 생각하는 것만치라도 확실성을 믿었다면, 그들의 살림이 그러했을 수는 없고 세상도 이대로는 있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 것은 양자에 대하여 다 불행이었다. 실된 것을 실없는 것처럼 취급(取扱)하는 데서 저들은 인생을 유희(遊戱)하고 모욕(侮辱)하고 허위(虛僞)로 살았기 때문이다. ‘장차 오는 세계’는 결코 일편의 공상이 아니다. 사상으로 만도 인류가 가지는 최고의 사상이다. 기독교의 입장을 떠나서 생각한다 하더라도 인류의 역사에서 공적을 끼쳤다는 사람은 다 장차 오는 것을 바라고 그 때문에 노력한 사람이었다. 우리는 현금주의(現金主義) 당(黨)안에 인류의 은인 있음을 듣지 못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어떤 한 세계에 인간을 이끌어가려고 힘을 썼고 그 때문에 미친 자라는 말을 들었다. 그런 고로 이 실된 세계를 부인한 현대는 공중에 권세 잡은 자의 손에 빠졌다. 오늘날의 세상은 이 큰 잘못의 결과로 온 것이다. 열강의 정치책임자로서 만일 얼마쯤이라도 이 장차 오는 세계에 대한 성의가 있다면 세계의 일은 훨씬 나아질 수 있다고 믿는다.
“너희는 보물을 하늘에 쌓으라.”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2. 인간의 이상
그런데 저자는 이 장차 오는 세계에 관하여 놀라운 말을 한다. 하나님이 그 세계를 천사들에게는 복종케 하시지 않고 우리 인간에게 복종케 하시었다고 한다. 이 장차 오는 세계란 예수가 전파하신 ‘하나님의 나라’인데 그것을 이 인간에게 복종케 하신다는 것은 얼른 보기에는 알 수 없는 말이다. 그러나 이는 결코 저자의 사의(私意)에서 나온 것이 아니요 사실을 보고 하는 말이다.「시편」제8편의 작자가 노래한 것처럼 이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대자연의 굉대(宏大)에 비하면 실로 묘막(砂漠)한 존재여서, 냉정한 자연법칙의 위압 밑에 내버려둔다면 인류는 벌써 이 땅 위에서 자취를 잃었을 것이 마땅한 일인데 오늘날까지 사람은 번성하고, 그 성질로 보면 짐승 중의 어느 짐승보다도 더 독하고 더 더러운 것이 있으니 사람의 역사가 만일 그 가는 대로 방임하여둔 것이었다면 자연의 폭위(暴威)를 기다릴 것 없이 인류사회 스스로가 자부자멸(自腐自滅)의 길을 밟고 말았을 것은 분명한 일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지금까지 계속하여 온다. 그런 고로 이 기이한 사실로써 본다면 이 인류의 역사 위에는 어떤 특별한 보호의 손이 있어왔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그와 한가지로 “사람이 무엇이관데 저를 생각하옵시며, 사람의 아들은 무엇이관데 저를 돌아보시옵니까” 하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그보다도 그중에 존재하는 고귀한 혼들의 일을 생각하면 더욱 그 사실을 승인할 수밖에 없다. 역사를 살펴보면 일반의 그 추악(醜惡)한 것과는 반대로 어니(淤泥)속에서 피는 연꽃 같은 맑고 향기로운 생명들이 전주(電柱)처럼 서 있어 진정한 왕적(王的)인 것을 드러내며, 그러면서도 그들은 하나같이 참혹한 운명을 당하는 것을 본다. 이 사실 앞에서 우리는, 마치 난공불락의 포대의 공격에서 거꾸러지고 거꾸러지고하는 육탄에 뒤이어 용감한 군사가 오히려 계속하는 것을 보고 그 함락(陷落)이 종내 오고야 말 것을 믿는 것같이, 인간이 마침내 영광과 존귀의 왕관을 쓰는 날이 있을 것을 믿을 수밖에 없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의 가장 기초적인 진리를 보고 있다. 기독교의 모든 복음적 진리는 이 사실, 하나님이 그 장차 오는 세계를 인간에게 복종케 하신다는 이 사실을 토대로 하고 서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고 예수의 생애도 그 사업도 이해할 수 없고, 속죄의 교리도 예언도 알 수 없다. 성경의 모든 말씀의 뿌리는 다 이 한 점으로 모인다. 저자가 기독교의 중심 진리인 예수의 고난을 설명하려 하여 먼저 이 사실을 들어 말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천사가 아들을 섬기는 것은 그의 인간 구원사업을 위해서요, 그가 십자가에 달려서까지 인간을 구하는 것은 저들은 오는 세계를 유업으로 얻을 후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희생으로 삼아서까지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것은 이러한 중대한 일을 위해서 하시는 것이라고 해서만 알 일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그 일을 하시나. 왜 오는 세계를 꼭 인간에게 복종시켜 만물을 그 발아래 두신다고 하나. 그것을 알기 위하여 우리는 인간의 특질은 무엇인가 하는데서부터 생각하여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만일 장차 오는 세계를 위하여 인간을 빼셨다면, 그는 바로 그들이 만물에서 구별되는 인간으로서의 특질, 그것 까닭이 아니면 아니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의 사람 된 특질이 어디 있느냐 하면 그 영성(靈性)에 있고 그 도덕에 있다. 그 물질적 방면에 있어서 다른 만물과 다를 것 없는 한 피조물로서 그 모든 것들과 비할 수 없이 다르다는 것은 그 까닭이 오직 여기 있다. 고로 하나님이 인간을 빼어 만물의 왕자로 세우시는 것은 그 영성 때문이요 그 도덕적인 것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하나님은 이 세계를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완성하신다는 말이다. 여기가 문제의 핵심이다. 장차 오는 세계는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완성된 세계다. 단(單)히 생물학적으로 진보된 세계가 아니다. 기술적으로 기능적으로 발달한 세계가 아니다. 장차 오는 세계 가 있다 할 때, 이 세계는 결함을 가지는 잘못된 세계라는 의미가 포함 되어 있는데 그 결함 그 잘못은 혼에 있고 양심에 있다. “하나님은 영이신 고로 신령과 진리로 예배할 것이라.” 하나님의 나라는 그의 영이 충만하는 곳이요 그의 의(義)가 다스리는 곳이다. 그리고 영이요 의요 진리이기 때문에 그는 어디까지든지 자유와 자각에 의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인간을 만물의 대표자로 택하신 이유요, 십자가의 길이라는 어려운 길을 취하신 뜻이다. 만일 세계를 물질적 기술적으로 완성하신다면 그의 허다한 천사의 무리에 명하여 일기(一氣)에 만들어놓으시면 그만이다. 그러나 그는 완전한 기계를 원하시는 것 아니요 온순한 짐승과 교묘(巧妙)한 본능을 목적하시지는 않는다. 물질이 아니라 자기의 형상 같은 영을 요구하시는 것이요 기능이 아니라 생활하는 인격을 바라시는 것이다. 고로 그 새 세계를 위하여 영성적이고 도덕적인 인간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요 그 인간은 자유에까지 반드시 향상되지 않으면 안된다.
인간의 역사에는 기이한 두 사상이 있다. 사람이 알 수 없는 어떤 새 세계를 바라는 사상과 자기네는 만물의 영장이로라는 생각이다. 고대인의 심정을 반영하는 신화 전설을 보면 어느 민족의 것에나 거기 이 사상이 무슨 형식으로든 들어 있지 않는 데 없고, 이것이 항상 동기가 되고 자극(刺戟)이 되어 역사의 바퀴를 굴려온 것을 본다. 그러면 사람이란 본래 생물의 하나로, 현실의 세계에서 일보를 내놓을 수없이 생긴 것인데 알지도 못하는 새 세계를 희구(希求)하는 생각은 어찌하여 났으며, 잔혹한 자연 법칙의 폭위 하(下)에 전전긍긍(戰戰兢兢) 존재를 지켜왔다면 제가 만물의 영장이로라는 기상(奇想)은 어느 때 어찌하여 일어났을까. 이것이 이성과 학문의 경계선을 벌써 훨씬 벗어난 것은 물론이다. 조물주의 섭리다. 사실은 의미의 표시다. 오는 세계를 바라고 만물의 장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실이 있으면, 이는 그렇게 만드시는 신의 뜻이다. 사람을 미혹(迷惑)하라고 하여서가 아니라, 거기에 가야 하겠는 고로 그 세계를 희구하는 맘을 주시었고, 교만하라고가 아니라 만물을 위하여 책임을 져야 하겠는 고로 그 생각을 일으키신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장차 오는 세계를 바라는 사상은 반드시 기독교 독유(獨(有)의 것이라 할 수 없다. 도리어 기독교는 역사적 유산을 상속하였다 함이 마땅하다. 그러나 상속과 공(共)히 그 내용에는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다른 민족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이스라엘인의 구약시대에 있어서도 이 장차 오는 세계는 물질적인 성질을 벗지 못하였다.「말라기」이후 예수의 오시는 때까지의 4세기간에 이 사상은 점점 발달했고 그들의 정치적 파산의 사실이 이것을 더욱 자극(刺戟)하여 사람들은 그 새 나라를 가져올 ‘메시야’를 일야(日夜)로 갈망(渴望)하였으나 그 역(亦)이 세계의 연장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기에 역사적으로 하면 기독교는 이 분위기(雰圍氣) 속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으나, 그러나 나온 것은 그 분위기와는 다른 팔면 영롱(玲瓏)한 결정체다. 예수의 “하나님의 나라” “하늘나라”가 어떻게 독특한 것임은 복음서를 읽는 사람은 안다. 그는 순영적이요 순양심적이다. 인간이 유구(悠久)한 세월을 두고 찾되 찾지 못한 것을 저가 말하였다. 모든 예언자들이 듣기를 원하되 듣지 못하던 것을 사람들은 듣게 되었다. 그것이 복음이다.
그 나라의 내용이 어떠한 것임을 저자는 말하려 하지 않는다. 신앙에 들어온 지 연구(年久)하여 교사가 될 만한 경력을 가진 수신자들은, 거기 대하여는 충분한 지식이 있다. 고로 다만 한 가지 경성(警醒)만을 준다. 그 새나라는 우리 책임에 있다는 것이다. 만물을 인간에게 복종케 하신 것은 저로 하여금 만물을 대표하게 하신 것이다. 고로 그 나라가 오고 아니 오는 것은 전혀 인간에 달렸다. 오랫동안 사람들이 공중에서 찾던 문제가 인간 자신의 가슴 속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만일 인간에게 만물을 이끌고 신 앞에 설 만한 자격이 있으면 그
나라는 오는 것이요, 사람의 가슴 속에 그것이 없으면 올 수 없다. 그러기에 바울은 만물이 탄식하면서 하나님의 뭇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고 하였다.
세계의 완성이 천사에게 있지 않고 인간에게 있다 한다. 초자연적 신통력으로 올 게 아니요 진실한 양심으로 온다 한다. 하늘나라는 이에 있다 저에 있다 할 것 아니요 너의 속에 있느니라.” 이것이 기독교의 인간 이상이다. 우리는 이에서 더 깊은 진리를 보지 못한다. 이에서 더 높은 이상을, 사람을 만물의 왕자로 세우는 이것보다 더 고상한 이상을 듣지 못한다.
3. 인간의 대표 예수
그러나 한번 현실에 눈을 뜰 때 그 고상한 이상은 여지없이 부서지고 만다. 시인은 영광과 존귀로 인간에 관을 씌우시고 만물을 그 발아래 두시어 복종케 하셨다고 하였지만 현실의 인간에서 우리는 그런 것을 보지 못한다. 그들의 얼굴에는 카인의 자손이라는 낙인이 영원히 찍혀 있는 듯하다. 그러나 여기 한 가지 놀랄 만한 사실이 있다. 한 사람의 인간이 우리의 대표가 되어 이미 영광의 왕관을 썼다는 일이다. 나사렛 예수 그 사람이다. 그는 우리와 다름이 없는 한 인간이의 인간에서 그에게서 우리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죄의 낙인이 찍힌 것을 볼 수 없다. 그의 혼에 접할 때 우리는 그야말로 본래 천사보다도 높으신 하나님의 외아들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영광을 가진 것을 본다. 그런데 그런 그가 까닭 없이 강도의 틈에 끼여 십자가에 달렸다. 그리고 우리가 그 십자가에 달린 그를 바라볼 때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어떤 지극한 영광과 존귀함이 거기 있는 것을 본다. 그뿐 아니라 그는 거기에서 다시 살아나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시는 것을 본다. 그야말로 참 왕이 되셨다. 이 기이하고 놀라운 사실을 볼 때, 그는 우리를 영광의 나라로 부르시려는 하나님이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은혜로써 우리를 위하여 길을 열어 인도자가 되게 하려고 짐짓 보내시었던 영원하신 아들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는 과연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죽음이 없는 이로되 죽는 인간의 대표가 되기 위하여 죽음을 맛보았다. 고로 우리 일은 그를 믿는 데 있다.
인간 중의 한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에 들어갔다! 이런 일이 역사상에 있었던가. 저는 맏아들이요 첫 이삭이요 주장이다. 한 사람의 용사가 육탄으로 적의 성책(城柵)에 길을 열어놓은 것은 전국(戰局)을 일변시킨다. 세상을 이미 이긴 저로 인하여 장차 오는 세계는 우리 것이 되었다.
4. 고난의 의미
그러나 많은 사람이 이것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무엇 때문인가. 사(死)다. 고난이다. 이 죽음의 고난 때문에 저를 의심하려하고 쓸어버린다. 저가 만일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면 왜 십자가에서 자기를 구원하지 못했나. 왜 자기를 핍박하는 악한 자들을 이기지 못하고 그 손에 죽었나. 그는 실패자가 아닌가. 그를 믿어서 일신을 세울 수 있을까. 조국을 건지고 사회를 도울 수 있을까. 이렇게 세상 사람만 아니라 저를 믿던 사람도 의심하고 물러선다. 과연 하나님의 아들로서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이 그른 듯도 하다. 그러나 도리어 하나님의 아들인 고로 그 고난의 길을 밟으셨다. 하나님은 만물의 근원이요 만물의 목적이요 능치 못하신 것이 없다. 그 하나님으로서 피하시려면 얼마든지 하실 수 있는 일이나 이 어려운 길을 취하신 것은 그것이 그의 뭇아들인 이 인간을 구하시는 데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 길을 취해서만 구원사업은 완성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무슨 연유인가.
제1은 약한 인간의 완전한 동정자가 되기 위하여서다. 그리스도는 눈같이 희고 어린 양같이 착하고, 인간은 피와 같이 붉고 독사같이 악하나 본래는 다 같이 아버지에게서 나온 형제다. 다만 저는 영광을 잃지 않았고 우리는 우리 죄로 파산하여 영광을 잃고 더러움에 떨어졌을 뿐이다. 그러기에 그는 우리를 형제라고 하신다. 인간의 생각으로 하면 부끄러울 일이건만 지극한 사랑이 이를 이기신다. 그리하여
“내가 당신의 이름을 내 형제 중에서 전파하고 모임 가운데서 내가 당신을 찬미 하오리다”
하고 예언자의 입을 빌어 말씀하시었고, 또 자기에게 그럴 필요가 아무것도 없건만 마치 약한 우리 인간인 것처럼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기도 하고,
“보라, 나와 하나님이 내게 주신자녀들”
이라 하시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 자녀들이란 다 같이 약한 혈육의 장막 속에 있어 인생고에 부대끼는 자들이다. 그래서 그도 그 인생의 아프고 간지러운 데를 완전히 알아 동정하시기 위하여 고난의 인생 속에 들어와 인생으로서 맛볼 수 있는 최심최혹(最深最酷)의 고통을 맛보시었다.
제2는 죽음을 이기기 위하여서다. 사람이 만물의 왕자일 운명을 가지면서도 되지 못하는 것은 원인이 밖에 있는 것 아니오 안에 있다. 스스로 왕자의 혼을 가지지 못하고 노예의 습관을 지키기 때문이다. 세계의 결함은 자연법칙의 불완전에 있는 것 아니며 인간의 불행은 물질의 부족이나 기술의 불완전에 있는 것 아니다. 인류의 양심에 있다. 양심이 세계의 질서를 어지럽게 하는 악마의 손에 노예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악마의 주문(呪文)이 곧 죽음이다. 그는 이 죽음의 공포로써 인간의 영혼을 영원히 노예로 매어둠에 의하여 하나님의 창조사업을 방해하려 한다. 그러나 그에게 사망의 실권이 있는 것은 아니요, 다만 하나님으로 부터 육체의 사망의 권(權)을 위탁(委託)받은 것뿐이다. 그런데 그는 본래 사기한(詐欺漢)인 고로 그 맡은 육체의 사(死)의 권을 휘둘러 마치 인간의 혼을 참 죽일 수 있는 듯이 위협하여 그들을 자기 멍에 아래 둔다. 생물학자는 사를 어떻게 설명하며 심리학자는 사의 관념이 어떻게 생긴다 하는지 모르나, 인간이 이날껏 사(死)에 대하여 그릇된 관념을 가진 것은 사실이다. 유심(有心)해 그러는지 무심(無心)해 그러는지 부모가 자식을 무릎에 놓고 선생이 제자를 교장(敎場)에 놓고 하는 말이 “너 그렇게 하면 죽는다” “죽을 테냐” “죽일 자식!” 이리하여 죽음은 덮어놓고 무서운 것, 죽음은 무슨 방법으로든지 피해야 하는 것, 죽으면 인생은 다라는 생각 이 머리에만 아니라 심장에까지 골수에까지 사무치게 하였다. 그리하여 인간은 만물 중에 죽음의 공포를 가지는 유일의 동물이 되었다. 물론 이렇게 되는 데는 하나님의 뜻이 없지 않다. 그가 죄를 범하고 나가는 인간에게 육체의 죽음을 주신 것은 저를 미워서보다는 교육적인 의미로 하신 것이다. 육체 그것이 일개 표징인 것같이 육체의 사(死)도 일개 표징에 지나지 않는다. 참 사(死)를 상징하는 이 육체의 사(死)를 도망하는 인간의 앞에 던져 그로 하여금 스스로 깨닫는 것이 있게 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성의 오용에 의하여 진리에 대한 눈이 어두운 인간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사기한(詐欺漢)의 밑에 일생을 노예로 자감(自甘)하는 생활을 취하게 되었다. 고로 혹 가다가 영감을 얻은 교사들이 그 악한 주인에게 항거하기를 가르치는 자가 있어도 이 사(死)의 공포 때문에 감히 손을 내밀려 하지 않았다. 고로 이제 유일의 길은 실력을 가지는 자가 그 죽음이 아무것도 아님을 실지로 실험하여 보여주는 것밖에 없다. 이것을 한 것이 예수다. 저는 사망으로써 사망의 권세를 깨뜨렸다. 저가 십자가에 달릴 때 무덤이 열리고 성인이 나왔다는 것은 이것이다. 사망이 십자가 이후로는 인간의 영혼 을 잡아가둘 실력을 잃어버렸다. 무덤은 열릴 것이다. 자유의 제1일이다.
제3은 인간을 생명적으로 완성하기 위하여서다. 고난이란 무엇인가. 영이 물질에 대하여, 양심이 욕에 대하여, 생명이 사망에 대하여 항쟁하는 일이다. 생명이 그 반대물을 완전히 극복하는 때까지 고난은 없을 수 없다. 고난이란 살았다는 말이요 생명이 자란다는 말이다. 도덕적으로 진리적으로 자란다는 말이다. 고난 없이 혼의 완성은 있을 수 없다. 죄 때문에 이는 필요하다. 인간이 만일 죄의 인간이 아니라면 그런 일은 필요치 않다마는 죄가 있는 고로 불가피(不可避)다. 인간은 천사의 조력을 빌어서 장차 오는 세계에 갈 수는 없다. 진리의 나라에 조력이나 대신은 없다. 스스로 거기까지 자랄 수밖에 없다. 고로 고난은 필요하다.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하여 인간은 무수하게 넘어지면서 보행(步行)의 실력을 얻어야만 한다. 그리스도는 이것 때문에 몸소 고난을 걸으신 것이다. 개척자의 발자취를 후인은 걷는다. 인류가 그 길을 걸어서야만 생명의 왕자가 되겠는 고로 그리스도는 고난의 인간이 되신 것이다.
이리하여 고난의 예수는 인간 구원에 필요한 모든 자격을 가지게 되었다. 저는 다른 교사와 같이 말로만 하는 자 아니요 몸소 시험을 받는 고난의 인생이 되어 그들의 어려운 곳을 남김없이 경험하였다. 인류는 그 유일의 완전한 동정자 인도자를 예수에서 발견한다.
5. 깊이 생각하라
그리하여 그는 우리를, 도시의 뒷거리 빈민굴(貧民窟)의 더러운 골목에 방황 하는 거러지 같은, 도야지의 먹는 팥껍질로 배를 채우는 버리고 나간 자식 같은, 사슬에 매이는 노예 같은 우리를 하늘나라에 불렀다. 하늘나라의 영광에 대하여 공포를 느끼고 증오까지를 품으리만큼 타락하여 아버지의 아들의 풍골(風骨)을 거의 다 잃고, 더러워진 동생을 구하기 위하여 맏아들인 저 자신이 영광을 일시 버려 그와 한 모양을 취하여가지고 와서, 저를 위로하고 저를 가르치고 아버지에게 가서 사죄할 것을 대신 다 맡으마 하고 손목을 이끌었다. 그리하여 작일(昨日)의 사탄의 노예는 금일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거룩한 가족이 되었다. 그런 고로 우리는 새 결심을 할 필요가 있다.
제3장 1절의 “그러면”은 제2장 1절에 이은 제2단의 권면의 말의 시작이다. 그리고 그 권면에도 일단의 올라감이 있는 것을 본다. 제 1단에서는 예수는 하나님의 사신 말씀이었다. 고로 거기서는 “들은 바에 긴절한 주의를 하라” 하였다. 여기서는 예수는 구원을 위하여 몸소 고난의 짐을 지신이다. 고로 그는 한편으로는 아버지의 부르시는 뜻을 전달하는 자요 또 한편으로는 아버지와 버린 자식 사이에 서서 동생을 위하여 대언(代言)하는 자다. 그러기 때문에 사도요 대제사장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를 깊이 생각하라고 한다. 깊이 생각하라는 것은 심적 노력을 명하는 말이다. 복음은 들을 것이나, 듣는 것만으로 신앙은 일어나지 않는다. 인생은 심적 노력을 요한다. 식물(食物)을 씹듯이 진리는 씹지 않으면 안된다. 고로 예수를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깊이 생각할수록 그리스도는 점점 더 우리 영혼을 정복하시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