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보다 무거운 조언 / 이임순
생면부지의 그분이 고맙다. 사태를 파악했을 때는 엎질러진 물이었다. 최대한 신속하고 안전하게 그곳을 벗어나야 했다. 그런데 반대편에서 차들이 꼬리를 문다. 점심시간이고 식당가 주변이라 혼잡하다. 지리를 잘 모른 객지에서 일방통행의 길로 접어들었다. 침착하게 위기를 넘겨야 하는데 가슴이 마구 뛴다. 심호홉으로 숨을 고르며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반대편 차선의 운전자에게 머리를 주억거린다. 차의 흐름이 잠시 멈춘 틈을 타 바로 옆 건물의 주차장으로 들어가 차를 돌린다. 되돌아 나오면서 보니 일방통행 표시가 그제서야 보인다. 무사히 빠져나온 안도의 숨을 쉰다. 불안했던 마음이 제자리로 돌아온다. 평정을 찾으니 몇 분의 흐름이 몇 년을 산 것처럼 느껴진다.
지인이 입원했다는 전갈을 받았다. 평소 신세 지는 것을 꺼리는 분이라 소식을 전해주면서도 염려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며칠 전에 만났을 때 건강이 예전 같지 않다고 하신 말씀이 자꾸 생각났다. 지청구를 듣더라도 뵙고 싶었다.
꾸지람을 각오하고 병실 문을 두드렸다. 평소의 인자한 모습 그대로 침대에 앉아 계신다. 적적하지 않느냐고 물으니 손녀가 갈아입을 속옷을 가지러 갔다면서 혼자 있는 시간이 가끔은 필요하다고 한다. 그럼 내가 방해꾼이냐고 했더니 괜히 바쁜 사람이 당신 때문에 시간을 축내서 미안하다 하면서도 싫지 않은 표정이다.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참 곱다. 그 모습 속에 어진 성품이 오롯이 담겨있다. 저런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내공이 쌓인 사람의 자연스런 표정이다.
소탈하고 깔끔한 성격이라 평소에도 조심스런 분이었다. 가끔 내게서 당신 젊은 날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고 했다. 단손에 아이 넷을 키우면서 농사짓고 시부모 봉양하며 틈틈이 문학활동도 했다. 낮으로는 책 읽을 시간이 없어 밤에 펼치면 잠이 쏟아지면서 도둑이 가로채 가듯이 책이 손에서 벗어났다. 그런 뒷날이면 몸이 가뿐하고 집중력이 있어 일의 능률이 오르고 글감도 생각났다고 한다.
책은 오늘 못 읽으면 다음 날 봐도 되는데, 잠은 그날그날 자야 건강을 지킬 수 있다고 한다. 어쩌다 한두 번은 보충이 되었는데 계속 잠을 아끼다 혼난 적이 있다고 한다. 차분히 만나면 꼭 이 말을 해주고 싶었다며 내 두 손을 꼬옥 잡는데 가슴이 훈훈해지면서 따뜻한 물이 흐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진정 어린 충고의 말씀이다. 요즈음 이상한 징후가 몸 여기저기서 있었다고 한다. 원인을 되짚어 보니 연거퍼 잠을 자지 않은 날 몸에 쌓였던 힘이 빠져나가면서 자국을 남긴 것 같다며 쓴웃음을 짓는다. 그 모습이 늦가을날 황량한 길을 축 처진 어깨로 걷는 것처럼 보여 마음이 아리다.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조용히 타이른다. “내 말 명심했으면 좋겠다.” 하는 지긋한 눈빛에 그분의 온 마음이 담겨있다. 자리에서 일어나 환자복 위에 옷을 걸치더니 나가자고 한다. 내게 맛있는 점심 먹여 보내고 싶다는 것이다. 흰쌀밥을 먹으면 혈당 수치가 올라 지인들 모임이 있는 날에도 현미밥 도시락을 준비해 가서 먹는 분이다. 그런데 나를 위해 식당 밥을 먹겠다는 한다. 이 정도의 당신 건강도 현미밥을 철저하게 고집한 결과라고 하신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어떻게 따라나설 수 있겠는가. 겨우 설득하여 혼자 병실 문을 나섰는데 뒤따라 오실까 봐 마음이 조급했다.
주차장에서 나와 굽은 길에서 이리저리 주차된 차들로 더 이상 직진할 수가 없어 멈추어 서 있는데 반대편 차선의 운전자가 창문을 내리고 신호를 보낸다. 나도 자동차 문의 유리를 내렸다. 젊은 여자가 “여기 일방통행입니다. 사고가 나면 다 아주머니 책임이에요.” 한다. 순간 놀라 당황해하니 상냥한 목소리로 조심히 가라는 말을 남기고 천천히 빠져나간다. 아차 싶었다. 이런 경우 나처럼 모르고 그 길로 진입하는 차가 더러 있다. 지혜로운 분을 만나 낯뜨거운 꼴을 당하지 않았는데 다른 운전자가 핏대를 올려 인상을 쓰고 힐긋거리며 간다. 지은 죄가 있어 아무 대꾸도 할 수가 없다. 욕도 하지 않고 웃는 낯으로 조심히 가라고 염려까지 해준 그가 고맙기 그지없다. 내가 상대편 운전자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이런 일이 없으면 좋겠지만 혹여 있으면 긴장하지 말고 차분히 운전하라고 일러 주련다.
인격은 난처한 상황일 때 나타난다고 한다. 그 여성 운전자는 어떤 사람일까? 보통사람처럼 소리를 지르거나 욕을 하고 지나갔다면 그때 기분은 더러웠겠으나 지금쯤은 기억도 하기 싫을 것이다. 순한 눈빛의 그 여자분이 자꾸만 떠오른다. 욕보다 더 무거운 충고를 해주었는데 고맙다는 인사 한마디 하지 못했다. 앞으로도 두고두고 생각날 것 같다.
‘
’천 냥 빚도 말 한마디로 갚는다’ 는 말을 되짚어 본다.
이래저래 느낀 바가 많은 하루다. 지인의 미소와 여성 운전자의 웃음 띤 모습이 닮은 데가 있다. 나도 그런 미소를 지을 수 있을까?
첫댓글 지인 분이 선생님을 각별히 사랑하는 게 느껴집니다. 명심하셨으면 좋겠어요. 하하.
글에 나오는 두 분처럼 따뜻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잠을 충분히 자려고 하는데 여전히 그한테는 깍쟁이 입니다.
운전하면서 욕을 많이 하는데 그 여성 운전자는 천사네요. 나도 그럴 때는 눈이라도 흘기는데 말입니다.
그러게요. 두고두고 생각하는 분입니다.
아플 때 진심으로 걱정해 주고 병문안 가는 관계는 그동안의 정들이 차곡차곡 쌓여서이겠지요. 선생님을 아껴주시는 분이 치료가 잘 되셔서 병원 밖에서 함께 좋은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지금은 건강을 회복해서 가끔 만나 수다를 떨고 어리광도 부리며 삶의 지혜를 얻습니다.
저도 일방통행길에 들어가 난감한 일을 겪은 경험이 있어요.
욕 먹을 각오하지만 굉장히 떨리지요.
내가 겪으면 실수하는 상대방에게 욕하지 않을 겁니다.
지리도 잘 모르는 객지에서 일방통행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무척 당황했습니다.
천사 같은 분을 만나 훈훈한 마음을 여지껏 간작하고 있습니다.
이런 좋은 분들이 세상을 따뜻하게 하지요. 좋은 사람 옆에 좋은 사람이 있다고도 합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따뜻한 세상도 만들고요.